THE SUTTA-NIPÂTA 1-12 (離瞋恚)
12. He who did not go too fast forward, nor was left behind, being free from hatred, (seeing) that all this is false, that Bhikkhu leaves this and the further shore, as a snake (quits its) old worn out skin.
一二
精進勿逾分 無遲亦無怠
比丘離瞋恚 一切皆虛妄
共捨彼此岸 如蛇蛻舊皮
12.
정진하되 제 분수를 넘지 않고 굼뜨거나 게으름도 없이
세상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아 미움을 벗어난 자는
피안과 차안을 함께 버리나니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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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영어와 법정본은 ‘미움’으로 되어있지만 한역본은 진애瞋恚로 되어있네요. 진애는 탐(貪), 진(瞋), 치(癡) 三毒 중 하나로 화, 분노를 일컫는 말인데, 앞에서 이미 나왔으니 이번에는 hatred(미움)으로 하지요. 어차피 ‘미움’은 ‘분노’로 미끄러질 테니까요.
따뜻한 구들짝에 등 깔고 누워 영화 ‘고지전’을 보고 있노라면, 백마고지전투처럼 끊임없이 고지 쟁탈전을 벌이는 그 사투의 무모함이란 우리의 상식의 훨씬 저 편이지요. 그들이 한 발짝 나서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 앳된 청춘들이 시체로 덮인, 총알이 빗발치는 고지의 산등성이로 자신을 내던지는 그 꽃 같은 정열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참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 왜 안 무섭겠어요? 왜 그 시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정말 나라사랑 구국의 일념 그것 하나였을까요? 자신의 목숨 앞에 그런 명분 하나로 자신을 던질 수 있었다고요?
‘분노’입니다. 무엇보다 증오로 촉발된 분노의 힘은 셉니다. 극한의 두려움에 몇 겹으로 얼어붙은 자기애가 바로 옆 전우의 죽음을 목도하는 순간 순식간에 녹아 오히려 이제는 그것이 끓어올라 온몸을 불처럼 데워 놓는 것이지요. 그 분노에 명분을 실으면 천하무적이지요. 대한독립의 명분에 분노를 실으면 목숨마저 초개와 같이 내놓는 구국의 선현들이 있었습니다. 히틀러나 처칠처럼 전투를 이끄는 지휘관이나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쓰는 상투적인 수법이기도 하지요. 최근에 몰락한 트럼프미국대통령은 ‘분노’를 지휘봉으로 썼던 비상한 전략가였지요.
‘증오는 내 삶의 원동력!’이 온통 난무하는 세상이지요? 요즈음 우리 주변은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매체들, 즉 상업방송, 유튜브 외에 심지어 종교마저 끊임없이 증오의 독을 내뿜으며 분노를 생산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소위 논객이라는 사람들도 국민들의 분노선을 끊임없이 자극해댑니다.
광화문 집회에 나가보면 태극기를 앞세운 그 분들의 명분은 죄다 나라사랑이고 구국의 일념들입니다. 그들의 일차적 증오에 그럴듯한 명분을 얹었으니 무서울 것들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점은 어쩌면 독립투사는 명분이 앞서고 분노가 뒤따르는 반면 광화문의 그네들은 증오 먼저 그리고 구국의 명분을 생산해낸 정도가 아닐까싶습니다.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자신이 진짜 구국의 영웅이나 필사즉생을 부르짖는 투사로 자기화하게 되어 집회만 있으면 지방에서 새벽차로 올라와 서울 광화문이나 시청 앞 광장에 검은 나이방(색안경)에 특전사 전투복을 입고 광을 낸 워커발로 버티고 서있게 되는 거지요. 부럽지 않아요? 그 열정이! 내 초등동창 이야기입니다.
이런 증오의 시대에 우리는 다행이 총기소지가 불법인 것이 어쩌면 다행이겠지요?
이렇듯 ‘증오’에도 순기능과 역기능이 서로 얽혀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순이든 역이든 모두 버리랍니다. 또 다시 묻습니다. ‘떠나는 것’, ‘버린다는 것’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마음속에 미움이나 분노가 일지 않는 사람이 인간일 수 있을까요?
새벽의 빗소리가 명랑합니다....
벅찬 감격으로 오월을 맞습니다.
2021. 5. 1. 샘내(泉川) 변수석
첫댓글 명랑한 글 잘 읽었습니다.
친구 잘 둔 덕분에 불경 공부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