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진에서는 오대五代(907 - 960)부터 현재까지 도자기의 생산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개혁개방이후, 특히 1990년대에 경덕진의 자기제작에 커다란 혁신이 일어났다. 적지 않은 국가에서 경영하는 중대형의 도자기공장이 생산품의 노화로 말미암아 시장의 변화와 수요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기술설비가 낙후되어 원가가 높아지고 체계가 순조롭지 못하여 관리가 엉망이었다. 인재가 빠져나가고 부채가 누적되었으며……격렬한 시장경쟁 속에서 문을 닫기도 하였다.
그러나 향진기업鄕鎭企業과 사설공방은 도리어 점차로 증가하여 대형 공장의 판로를 잠식하였으며, 시장의 부족량을 보충하였다. 이들은 수공업手工業 공방이므로 사회의 요구에 따라 신속하게 요구되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회상에 골동과 수집풍이 유행하게 되자, 경덕진 거리마다 수공업공방에서 고대자기古代瓷器의 모방품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러한 제품이 급속히 확산되어 전국각지 골동상점의 진열대에 놓여지고, 애호가나 수장가의 집안으로 진입해 들어가게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제품에 즐거워 하기도 하고 후회하며 땅을 치기도 하였다.
경덕진에서 고대자기의 모방품의 생산은 8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당시에는 정상적인 규범과 질서가 존재하여, 경덕진 도자생산의 개발항목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생산품도 일정한 사회적인 효용을 지니고 경제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경덕진예술자창景德鎭藝術瓷廠(직공이 1,000명 이상인 오래된 공장)에서 생산한 260여건의 청대淸代 동치同治황제가 결혼식에 사용한 혼례자기의 모방품은, 본래는 황색 바탕의 분채자기로서 해수海水와 오조五爪의 용봉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좋은 안료로 정밀하게 제작된, 동치시기同治時期의 관요자기官窯瓷器였다. 당시에 공장측에서는 이 사업을 중요하게 간주하여 고궁故宮으로 기술자를 파견해서 진품 자기의 형태와 색채를 정확하게 모사하였으며, 자료를 가지고 경덕진으로 돌아와 시험제작을 하였다. 이 후 갖은 난관을 돌파하고 마침내 제작에 성공하였다. 이 제품은 전시회와 수출판매전에서 인기를 얻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예술자창을 제외하고 경덕진의 기타 여러 자기공장에서 적지 않은 우수한 품질의 고대자기 모방품을 생산하였으며, 국내외의 도자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90년대에 들어와, 경덕진의 국영도자공장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지탱하기가 곤란해졌으며, 개체호個體戶(개인 자영업자)가 무수히 나타나게 되었다. 수 많은 개체호는 가족을 기초로 하였으며, 업주는 보통 애초에 도자기제작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으며, 고대자기에 대해서는 더욱 더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모방품의 제작근거가 없었으며, 단지 저임금으로 고용한 성형成型과 채회彩繪 기술자에 의지하여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제품을 만들면 바로 이러저러한 제품이라고 주장하게 되어, 순식간에 경덕진의 자기시장에는 도처마다 모두 '선덕년제宣德年制', '성화년제成化年制', '가정년제嘉靖年制', '만력년제萬曆年制', '강희년제康熙年制', '건륭년제乾隆年制' 심지어 '지정모모년제至正某某年制' 등의 관지가 있는 각종자기가 출현하여 황당하기가 끝이 없는 지경이 되었다.
더 심한 것으로는(후에는 발전하여 보편적으로 사용된 현상), 일부에서는 풀과 진흙을 혼합하여 모방품의 표면에 칠해서 출토품으로 위장하기도 하였다 : 일부 제품은 불화수소산, 초산草酸, 과망간산칼륨, 엔진오일, 역청(瀝靑-아스팔트) 등을 조합해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자기의 표면을 부식시켜 신제품의 광택을 제거하여 고대자기로 둔갑시켜 고객을 유혹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경덕진에서 생산하는 고대자기의 모방품은 이러한 대로화(大路貨 - 길거리에 늘어 놓고 파는 제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방의 근거도 없이 날조하고 추악하게 위장하여 보기만 해도 역겹다. 이러한 '모방품'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지 않으므로, 이러한 자기를 둘러메고 전국각지로 가서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어, 좌판을 벌여 놓고 고객에게 넘겨 돈을 벌고는 손을 털어버린다. 이들은 늘 경덕진으로 되돌아와 다시 제품을 구입하여, 이러한 모방품의 판매를 촉진하는 '상비군'이 된다. 그러므로 제작의 근거도 없이 괴이한 이러한 모방품의 판매 경로는 계속 번성하고 있다.
이러한 대로화의 생산자보다 한 두 단계 높은 수준의 다른 업주가 있다. 이들은 일정한 자금과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상당한 수준의 자기제작기술과 골동감상능력을 구비하고 있어서, 모방하려는 제품의 시대와 특징에 주의를 기울여 생산품이 비교적 우수하였으며, 지속적으로 도자기의 제작수준을 개선하였다.
다만 원가를 절감하기 위하여,구매자가 상상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였다. 예를 들면, 민국시기民國時期 '거인당居仁堂' 관지의 분채인물병을 모방할 때, 이들 업주는 높은 임금으로 고급화가를 초빙하여 주요인물의 얼굴을 그리게 하고, 옷자락과 배경 등은 일반화가에게 그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낸 제품은 언뜻 보기에 고수의 작품 같으며, 게다가 골동처럼 보이도록 위조처리를 하여 외관상으로는 민국시기의 제품 같아 보인다. 고미술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약점을 충분히 간파할 수가 있으나, 일반 애호가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또 다른 한 종류로, 일부 골동상은 제품의 공급원이 고갈되자, 창고 속에서 청말과 민국시기의 파손된 고급자기를 골라내어, 경덕진의 자기공장이나 공방으로 가지고 가서 원형에 근거하여 복원하였다. 전문가의 지도아래 제한된 수량만을 생산하였으며(보통 한 기물에 10-20건의 모방품을 생산), 공방에서 함부로 외부로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모방품은 태토, 유약, 채색안료, 도안, 조형 등에 최대한으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였다. 또한 판매할 때에도 새로 모방한 제품이라고 설명하고,위조처리를 하지 않고 속이려는 행위가 없이 정당하게 사고 팔면서 터무니 없는 가격을 원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모방품은 품질이 비교적 우수하고 판로도 양호하여 적지 않은 수장가가 구매하고자 하였다.
가장 첨단의 제품은 일부 개인이 경영하거나 합작하여 경영하는 공방의 제품이다. 이들은 풍부한 자금을 이용하여 높은 임금으로 전문인재를 초빙하여 비밀리에 명청明淸의 관요官窯를 전문적으로 모조하였다. 즉 태토, 유약, 성형, 채회, 원료, 불의 조절 등에 대하여 하나하나 연구하였으며, 심지어 경덕진 주산珠山 용주각龍主閣에서 출토된 명청明淸 관요官窯의 실물파편과 대비시험을 거쳐서 재생을 시도하여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도록 만들어, 진정으로 '진짜 같은 가짜'의 수준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완성된 제품도 엄격한 심사를 통하여 열에 하나 혹은 몇 십 개 가운데에서 하나를 고르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낙선된 제품도 결코 타인에게 보여주거나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선택된 제품은 다시 인공적이고 화학적이며 기계적인 위조과정을 거쳤으며, 그 수법은 당연히 앞에서 설명한 위조수법보다 발전되고 과학적이었으며, 그 비밀은 엄수되었다.
일부 제품은 또 주둥이와 굽에 상처를 내는 위조처리를 하여 세월이 오래된 기물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모든 공정이 완료된 뒤에 비로소 '규방문閨房門(비밀 작업장)'을 살그머니 나와 몰래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원가가 높으므로 판매가격은 생각만해도 알 만하다. 최고급 모방제품은 한 점에 RMB200,000원이라고 한다.
더욱 사람을 웃기는 일은 이처럼 잘 위조된 자기는 외지인을 통해 비밀리에 유출시켜, 몇 단계를 거쳐 모모인사의 소장품으로 탈바꿈하고, 다시 경매회사로 굴러들어가 경매품으로 변신되어 여러 차례 고가로 경매된다. 이처럼 원가를 생각하지 않고 '체계적인 공정'을 통하여 제작한 모조품은 감정의 난이도가 일반제품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말로 '도道가 한 자 높아지면,마魔는 열 자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는 꼴이다.
경덕진에서 생산한 여러 종류의 도자기는 일용자기나 진열용자기나 현대자기나 모방품이거나를 불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일종의 예술품이며, 도자문화의 한 줄기이다. 당연히 전통적인 도자문화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으며, 생산량의 다과나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그들만의 특성과 맛과 문화적인 의미와 예술적인 풍격이 구비되어 있으며, 제작자의 장인정신과 재능과 수준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경덕진의 자기(모방품 포함)가 비로소 사랑을 받고 오랜 동안 유전되는 것이다. 예술품의 제작에 불량한 의도가 뒤섞이고, 상도商道를 무시하며, 가짜를 진품으로 대체하여 타인을 해치는 행위는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이렇게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줄곧 애호 받아 온 경덕진자기는 앞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