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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8권
5. 사법품 ③
[4업]{2}
만일 손해가 있고[有損害] 손해가 없는[無損害]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으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만,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지 않으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아 더욱 자라게 하지 않는다.
만일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아 더욱 자라게 하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自體)를 느껴 얻지만,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아 더욱 자라게 하지 않으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는다.
만일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으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만,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 못하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 않는다.
만일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나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만,
만일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 않으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 않는다.
만일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하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느낌을 느끼지만,
만일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 않으면, 곧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느낌을 느끼지 않게 되나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라고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바로 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이라 한다 함은, 이른바 이 업은 착하고 또한 착하지 않은 것이어서 사랑할 만하기도 하고 또한 사랑스럽지 않기도 한 이숙을 받기 때문이다.
[문] 어떤 것이 불흑불백무이숙업(不黑不白無異熟業) 능진제업(能盡諸業)인가?
[답] 세존께서 구지(俱胝)의 우계(牛戒)를 지닌 보라나(補剌拏)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원만(圓滿)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의 조작(造作)을 다하고 백백이숙업(百百異熟業)의 조작을 다하여 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의 조작을 다하면 이것은 검지도 않고[不黑] 희지도 않아서[不白] 이숙업이 없으며[無異熟業] 모든 업을 능히 다한 것[能盡諸業]이라고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불흑(不黑)이란, 이 업은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이니 뜻에 맞지 않으며 검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검다[黑]고 하는 것과는 같지 않으므로 검지 않다고 한다.
불백(不白)이란, 이 업은 유루(有漏)의 착한 업[善業]이니 뜻에 맞으며 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희다[白]고 하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희지 않다고 한다.
무이숙(無異熟)이란, 이 업은 앞의 세 가지 업에서와 같이 이숙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숙업이 없다고 한다.
능진제업(能盡諸業)이란, 이 업은 바로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조작[思]이니 줄이는[損滅] 데로 나아갈 수가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는 이가 조작하는 것이라서 줄이는 데에 나아가 앞의 세 가지 업을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며[等盡], 두루 다하고[遍盡] 영원히 다할 수[永盡] 있기 때문이니,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업으로 모든 업을 다하게 할 수[業能盡諸業]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불흑불백무이숙업 능진제업이라 한다.
[4법수]
4법수(法受)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법수(法受)가 있되 현재는 즐겁지만 나중에는 괴로운 이숙(異熟)을 받게 된다.
둘째는 법수가 있되 현재는 괴롭지만 나중에는 즐거운 이숙을 받게 된다.
셋째는 법수가 있되 현재도 괴롭고 나중에도 괴로운 이숙을 받게 된다.
넷째는 법수가 있되 현재도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이숙을 받게 된다.
[문] 어떤 것이 법수가 있되 현재는 즐겁지만 나중에는 괴로운 이숙을 받는다는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補特伽羅)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을 함께하면서 생명을 살해하고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하는 말을 하고 추악한 말을 하고 잡스럽고 더러운 말을 하며 탐욕과 성냄과 삿된 소견이 있다.
그는 생명을 살해하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삿된 소견을 반연으로 삼아 기쁨을 얻고 즐거움을 얻나니, 이와 같은 종류의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즐거움은 곧 착하지 않은 것이어서 착하지 않은 종류[不善類]에 끝내는 섭수(攝受)되어 신통과 지혜[通慧]를 장애하고 등각(等覺)을 장애하며 열반을 장애하게 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법수가 있되 현재는 즐겁지만 나중에는 괴로운 이숙을 받는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이 법수가 있되 현재에는 괴롭지만 나중에는 즐거운 이숙을 받는다는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근심과 고통을 함께하면서,
생명을 살해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으며,
음욕의 삿된 행을 여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고, 추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잡스럽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탐냄이 없으며,
성냄이 없고 바른 소견을 지니고 있다.
그는 생명을 살해하지 않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바른 소견을 반연으로 삼아 근심을 얻고 괴로움을 얻나니, 이와 같은 종류의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괴로움은 바로 착한 것이어서 착한 종류에 끝내는 섭수되어 신통과 지혜를 끌어오고 등각을 증득하며 열반을 얻게 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법수가 있되 현재에는 괴롭지만 나중에는 즐거운 이숙을 받는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이 법수가 있되 현재에도 괴롭고 나중에도 괴로운 이숙을 받는다는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근심과 고통을 함께하면서 생명을 살해하고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며,
음욕의 삿된 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이간질하는 말을 하고 추악한 말을 하며,
잡스럽고 더러운 말을 하고 탐욕을 내며,
성을 내고 삿된 소견을 지니는 이가 있다.
그는 생명을 살해하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삿된 소견을 반연으로 삼아 근심을 얻고 괴로움을 얻나니,
이와 같은 종류의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괴로움은 곧 착하지 않은 것이어서 착하지 않은 종류에 끝내는 섭수되어 신통과 지혜를 장애하고 등각을 장애하며 열반을 장애하게 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법수가 있되 현재에도 괴롭고 나중에도 괴로운 이숙을 받는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법수가 있되 현재에도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이숙을 받는다고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하면서,
생명을 살해하지 않고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으며,
음욕의 삿된 행을 여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고 추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잡스럽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탐을 냄이 없으며,
성을 냄이 없고 바른 소견을 지니고 있다.
그는 생명을 살해하지 않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바른 소견을 반연으로 삼아 기쁨을 얻고 즐거움을 얻나니,
이러한 종류의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즐거움은 곧 착한 것이어서 착한 종류에 끝내는 섭수되어 신통과 지혜를 끌어오고 등각을 증득하며 열반을 얻게 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법수가 있되 현재에도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이숙을 받는다고 한다.
[4액]
4액(軛)이란,
첫째는 욕액(欲軛)이요, 둘째는 유액(有軛)이며,
셋째는 견액(見軛)이요, 넷째는 무명액(無明軛)이다.
[문] 어떤 것을 욕액(欲軛)이라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어리석은 범부나 견문이 없는[無聞] 이생(離生)들은 욕(欲)의 발생[集]과 없어짐[沒]과 맛[味]과 허물[患]과 벗어남[出離]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탐욕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탐욕[欲] 속에 있는 욕탐(欲貪)ㆍ욕욕(欲欲)ㆍ욕친(欲親)ㆍ욕애(欲愛)ㆍ욕락(欲樂)ㆍ욕민(欲悶)ㆍ욕탐(欲耽)ㆍ욕기(欲嗜)ㆍ욕희(欲憙)ㆍ욕장(欲藏)ㆍ욕수(欲隨)ㆍ욕착(欲著)이 마음을 얽어매고 억누르고 있나니, 이 욕의 멍에[欲軛]를 바로 욕액이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을 유액(有軛)이라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어리석은 범부나 견문이 없는 이생들이 유(有)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유의 쌓임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유(有) 속에 있는 유탐(有貪)ㆍ유욕(有欲)ㆍ유친(有親)ㆍ유애(有愛)ㆍ유락(有樂)ㆍ유탐(有耽)ㆍ유기(有嗜)ㆍ유희(有憙)ㆍ유장(有藏)ㆍ유수(有隨)ㆍ유착(有著)이 마음을 얽어매고 억누르고 있나니, 이 유의 멍에[有軛]를 유액이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어떤 것을 견액(見軛)이라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어리석은 범부나 견문이 없는 이생들이 견(見)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을 사실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견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견(見) 속에 있는 견탐(見貪)ㆍ견욕(見欲)ㆍ견친(見親)ㆍ견애(見愛)ㆍ견락(見樂)ㆍ견민(見悶)ㆍ견탐(見耽)ㆍ견기(見嗜)ㆍ견희(見憙)ㆍ견장(見藏)ㆍ견수(見隨)ㆍ견착(見著)이 마음을 얽어매고 억누르고 있나니, 이 견의 멍에[見軛]를 견액이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을 무명액(無明軛)이라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어리석은 범부나 견문이 없는 이생들이 여섯 가지 접촉하는 곳[六觸處]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여섯 가지 접촉하는 곳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 접촉하는 곳에 있는 집착(執着)과 무명(無明)과 무지(無智)와 수면(隨眠)과 수증(隨增)이 있으니, 이 무명의 멍에[無明軛]를 무명액이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유정들은 욕액(欲軛)과
유액(有軛)과 견액(見軛)과 상응해서
어리석음이 우두머리가 되어
나고 죽는 데 흐르고 머문다.
[4리계]
4리계(離繫)란,
첫째는 욕액(欲軛)의 매임을 여의고[離繫],
둘째는 유액(有軛)의 매임을 여의며,
셋째는 견액(見軛)의 매임을 여의고,
넷째는 무명액(無明軛)의 매임을 여읜다.
[문] 어떤 것이 욕액의 매임을 여읜다는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견문이 많은[多聞] 성스러운 제자들은 욕(欲)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안다.
그들은 욕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욕(欲) 속에 있는 욕탐ㆍ욕욕ㆍ욕친ㆍ욕애ㆍ욕락ㆍ욕민ㆍ욕탐ㆍ욕기ㆍ욕희ㆍ욕장ㆍ욕수ㆍ욕착이 마음을 얽어매거나 억누르지 않나니, 이것을 곧 욕액의 매임을 여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이 유액의 매임을 여읜다는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유(有)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안다.
그들은 유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유(有) 속에 있는 유탐ㆍ유욕ㆍ유친ㆍ유애ㆍ유락ㆍ유민ㆍ유탐ㆍ유기ㆍ유희ㆍ유장ㆍ유수ㆍ유착이 마음을 얽어매거나 억누르지 않나니, 이것을 유액의 매임을 여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이 견액의 매임을 여읜다는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견(見)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안다.
그들은 견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견 속에 있는 견탐ㆍ견욕ㆍ견친ㆍ견애ㆍ견락ㆍ견민ㆍ견탐ㆍ견기ㆍ견희ㆍ견장ㆍ견수ㆍ견착이 마음을 얽어매거나 억누르지 않나니, 이것을 견액의 매임을 여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이 무명액의 매임을 여읜다는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여섯 가지 접촉하는 곳[六觸處]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안다.
그들은 여섯 가지 접촉하는 곳의 발생과 없어짐과 맛과 근심과 벗어남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의 접촉하는 곳에 있는 집착과 무명과 무지가 마음을 얽어매거나 억누르지 않나니, 이것을 무명액의 매임의 여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욕액과 유액을 끊고
그리고 견액을 초월하며
무명액을 멀리 여의게 되면
곧 안온한 즐거움을 얻는다.
그는 현재의 법 가운데서
영원한 적멸(寂滅)을 증득하게 되고
온갖 멍에[軛]를 멀리 여의면
반드시 후유(後有)에 머무르지 않는다.
[4폭류]
4폭류(瀑流)란,
첫째는 욕폭류(欲瀑流)요, 둘째는 유폭류(有瀑流)며,
셋째는 견폭류(見瀑流)요, 넷째는 무명폭류(無明瀑流)이다.
[문] 어떤 것이 욕폭류(欲瀑流)인가?
[답] 욕계에 매인[欲界繫] 모든 소견[見]과 무명(無明)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욕계에 매인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을 욕폭류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이 유폭류(有瀑流)인가?
[답] 색계(色界)와 무색계에 매인[無色界繫] 모든 소견과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ㆍ전을 유폭류라 한다.
[문] 어떤 것이 견폭류(見瀑流)인가?
[답] 이른바 5견(見)이다.
첫째는 유신견(有身見)이요, 둘째는 변집견(邊執見)이며, 셋째는 사견(邪見)이요, 넷째는 견취(見取)며, 다섯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니,
이와 같은 5견을 견폭류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무명폭류(無明瀑流)인가?
[답] 삼계(三界)의 무지(無智)를 무명폭류라 한다.
[4취]
4취(取)란,
첫째는 욕취(欲取)요, 둘째는 견취(見取)며,
셋째 계금취(戒禁取)요,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
[문] 어떤 것이 욕취(欲取)인가?
[답] 욕계에 매인 모든 소견[見]과 계금취(戒禁取)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욕계에 매인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을 욕취라 한다.
[문] 어떤 것이 견취(見取)인가?
[답] 4견(見)이니,
첫째는 몸이 있다는 소견[有身見]이요, 둘째는 치우친 고집의 소견[邊執見]이며, 셋째는 삿된 소견[邪見]이요, 넷째는 소견에 대한 고집[見取]이니,
이와 같은 4견을 합하여 견취라 한다.
[문] 어떤 것이 계금취(戒禁取)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계율[戒]에 대하여 고집하면서,
“이 계율을 가지면 청정해지고 해탈하게 되며 벗어나게 되고 괴로움과 즐거움에서 벗어나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초월한 최상의 경지에 이른다”라고 한다.
혹은 금지[禁]에 대하여 고집하면서,
“이 금지를 가지면 청정해지고 해탈하게 되며 벗어나게 되고 괴로움과 즐거움에서 벗어나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초월한 최상의 경지에 이른다”라고 한다.
혹은 계율[戒]과 금지{禁]에 대하여 함께 고집하면서,
“이 계율과 금지를 함께 가지면 청정해지고 해탈하게 되며 벗어나게 되고 괴로움과 즐거움에서 벗어나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초월한 맨 끝에 이른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계금취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아어취(我語取)인가?
[답]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모든 소견과 계금취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ㆍ전이니, 이것을 아어취라 한다.
[4신계]
4신계(身繫)란,
첫째는 탐신계(貪身繫)요, 둘째는 진신계(瞋身繫)며,
셋째는 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요, 넷째는 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이다.
[문] 어떤 것이 탐신계(貪身繫)인가?
[답] 탐(貪)이란, 욕심[欲]의 경계에서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等貪]하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더 나아가 탐하는 종류와 탐으로 생기는 것들을 탐이라 한다.
신계(身繫)란,
이 탐애를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면, 저 여러 유정들은 저들의 몸과 저들의 무더기[聚]와 저들이 얻는 것에 대하여, 자체(自體)를 인(因)으로 하고 연(緣)으로 하여, 매이고[繫] 같이 매이며[等繫] 저마다 따로 매이고 서로가 연달아 이어지면서, 비로소 오래도록 머무르게 된다.
마치 꽃다발을 만드는 스승이나 혹은 그 제자가 꽃을 모아서 앞에다 놓고 긴 실로써 매듭을 짓고 갖가지 꽃다발을 만들게 되는데,
이 꽃은 실이 인이 되고 연이 되어 맺고 같이 맺으며 저마다 따라 맺고 서로 연달아 이어지면서 비로소 꽃다발이 되는 것처럼,
이 탐에도 그러하여서 아직 끊지 못하고 두루 알지 못하면, 저 여러 유정들은 저들의 몸과 저들의 무더기와 저들이 얻는 것에 대하여, 자체를 인으로 하고 연으로 하여 매이고 같이 매이며, 저마다 따로 매이고 서로 연달아 이어지면서, 이에 오래 머무르게 되는 것이니, 이 몸의 매임[身繫]을 신계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진신계(瞋身繫)인가?
[답] 진(瞋)이란, 유정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려 하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현재 과환(過患)을 끼치는 것이니, 이 성을 내는 것[瞋]을 진이라 한다.
신계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이 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인가?
[답] 계금취와 신계에 대하여는 모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이 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인가?
[답] 차실집취란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고집을 세우면서,
“나[我]와 세간은 항상 있는 것[常]이다. 이것[比]만이 진실[實]이요 나머지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나와 세간은 무상한 것[無常]이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나와 세간은 항상 있기도 하고 또한 무상하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나와 세간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다[有邊].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없다[無邊].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또한 끝이 없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요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목숨[命]이 곧 몸이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목숨은 몸과는 다르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여래는 죽은 뒤에도 계신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여래는 돌아가신 뒤에는 계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여래는 돌아가신 뒤에 계시기도 하고 또한 계시지 않기도 한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고집을 세우면서,
“여래는 돌아가신 뒤에는 계신 것도 아니요 또한 계시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比]만이 진실[實]하다고 고집[執取]하는 이와 같은 것 등을 차실집취라 한다.
신계(身繫)란,
차실집취를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면 저 여러 유정들은 저들이 얻는 자체(自體)를 인(因)으로 하고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음)……
이것을 바로 신계라 한다.
네 번째 올타남(嗢柁南)으로 말하리라.
네 번째 네 가지씩의 법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대종(大種)과 식(食)과 주(住)와
애(愛)와 불응행(不應行)과 문(問)과
시(施)와 섭(攝)과 생(生)과 자체(自體)이다.
4대종(大種)과 4식(食)과 4식주(識住)와 4애(愛)와 4불응행이행(不應行而行)과 4기문(記問)과 4종시(種施)와 4섭사(攝事)와 4생(生)과 4득자체(得自體)이다.
[4대종]
4대종(大種)이란,
첫째는 지계(地界)요, 둘째는 수계(水界)며,
셋째는 화계(火界)요, 넷째는 풍계(風界)이다.
이 네 가지는 『법온족론(法蘊足論)』의 6계(界)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4식]
4식(食)이란,
첫째는 단식(段食)이니 혹은 거칠기도[麤] 하고 혹은 미세하기도[細] 하다.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의사식(意思食)이요,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문] 어떤 것이 단식으로서 혹은 거칠기도 하고 혹은 미세한 것인가?
[답] 만일 형체 있는 음식[段食]을 연(緣)으로 삼아 모든 감관[根]을 자라게 하고 요소[大種]를 더욱 불어나게 하며 또 윤택하여지고[滋潤] 따라 윤택하여지며[隨滋潤], 가득히 기뻐지고[充悅] 따라 가득히 기뻐지며, 보호하고[護] 따라 보호하며, 움직이고[轉] 따라 움직이며, 지니고[特] 따라 지니게 하면 이것을 단식이라 한다.
[문] 왜 단식을 거친 것[麤]과 미세한 것[細]으로 시설하는가?
[답] 유정을 영양으로 기르는 것에 의하여 크고 작은 것과 먹는 음식의 형체에 따라 점차로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시설한다.
[문]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등기라(燈祇羅) 짐승 등이 먹는 것을 거칠다 하면 니민기라(尼民祈羅) 짐승 등이 먹는 것은 미세하다 하며,
니민기라 짐승 등이 먹는 것을 거칠다 하면 니미(泥彌) 등 짐승이 먹는 것은 미세하다 하며,
니미 등이 먹는 것을 거칠다 하면 거북ㆍ자라ㆍ고기 등이 먹는 것은 미세하다 하며,
거북ㆍ자라ㆍ고기 등이 먹는 것을 거칠다 하면 그 밖의 물에 살고 있는 벌레 등이 먹는 것을 미세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코끼리ㆍ말ㆍ소 등이 먹는 것을 거칠다 하면 양ㆍ사슴ㆍ돼지 등이 먹는 것은 미세하다 하고,
양ㆍ사슴ㆍ돼지 등이 먹는 것을 거칠다 하면 야간(野干)과 개 등이 먹는 것을 미세하다 하며,
야간과 개 등이 먹는 것을 거칠다 하면 기러기ㆍ공작 등이 먹는 것은 미세하다 하며,
기러기ㆍ공작 등이 먹는 것을 거칠다 하면 그 밖의 육지에서 살고 있는 벌레 등이 먹는 것은 미세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 모든 유정들이 모든 풀과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 등을 먹으면 그런 음식은 거친 것이요
만일 모든 유정들이 밥과 죽 등을 먹으면 그런 음식은 미세한 것이며,
만일 모든 유정들이 밥과 음식 등을 먹으면 그런 음식은 거친 것이요,
만일 모든 유정들이 소유(酥油) 등을 먹으면 그런 음식 등은 미세한 것이다.
또 모든 유정들이 입과 부리와 혀로써 형체 있는 거친 것을 이로 씹어서 삼키거나 먹으면 그런 음식은 거칠다 하고,
만일 모든 유정으로서 태(胎)나 알[卵] 속에 있으면서 형체 있는 음식의 진액(津液)을 배꼽으로 빨아들여서 그의 몸을 돕고 길러지게 하면 그런 음식은 미세하다 한다.
또 만일 모든 유정들이 음식을 먹고 대소변의 찌꺼기가 있으면 그런 음식은 거친 것이요,
만일 모든 유정들이 음식을 먹고 대소변의 찌꺼기가 없으면 그런 음식은 미세한 것이니,
마치 향(香)ㆍ소타미(酥陀味) 등을 먹는 것과 같아서 비록 그런 것은 먹는다 하더라도 대소변의 찌꺼기가 없다.
이와 같이 단식(段食)에서 거친 것[麤]과 미세한 것[細]을 시설하게 된다.
[문] 어떤 것이 촉식(觸食)인가?
[답] 만일 유루(有漏)의 접촉[觸]을 연(緣)으로 삼아 모든 감관을 자라게 하고 요소를 더욱 불어나게 하며 또 윤택하여지고 따라 윤택하여지며 나아가 지니고 따라 지니게 하면 이것을 촉식이라 한다.
[문]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거위ㆍ기러기ㆍ공작ㆍ앵무새ㆍ구욕새ㆍ꾀꼬리ㆍ이황조(離黃鳥) ㆍ명명조(命命鳥) 등과 같다.
이것들은 알을 낳은 뒤에는 어느 때나 가까이 붙어 있고 수시로 몸을 덮어 기르며, 수시로 따뜻하게 해 주어서 즐거운 접촉[樂觸]을 나게 하는 것이니,
만일 그런 새들이 알을 까려 할 적에 수시로 가까이 붙어 있고 수시로 덮어서 기르며 수시로 따뜻하게 해 주어서 즐거운 접촉을 나게 하지 않으면 그 알은 곧 썩어서 파괴되어 버린다.
만일 그런 새들이 알을 깔 적에 어느 때나 가까이 붙어 있고 항상 덮어서 기르며 항상 따뜻하게 해 주어서 즐거운 접촉을 나게 하면 그 알은 썩거나 파괴되지 않나니,
이와 같은 것들은 촉식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의사식(意思食)인가?
[답] 만일 유루의 의사[思]를 연(緣)으로 삼아 모든 감관을 자라게 하고 요소를 더욱 불어나게 하며 또 윤택하여지고 따라 윤택하여지며 나아가 지니고 따라 지니게 하면 이것을 의사식이라 한다.
[문]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고기ㆍ거북ㆍ자라ㆍ실수마라(室首摩羅)ㆍ부로가(部盧迦) 등과 같다. 이것들은 육지로 나와서 알을 낳은 뒤에 가는 모래로 그것을 덮어 놓고 도로 물로 들어가는 것인데,
만일 그 알들이 그 어미를 생각하면서 잊지 않으면 썩거나 문드러지지 않지만,
만일 그 모든 알들이 그들의 어미를 생각하지 않게 되면 곧 썩어 문드러지게 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의사식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식식(識食)인가?
[답] 만일 유루의 의식[識]을 연(緣)으로 삼아 모든 감관을 자라게 하고 요소를 더욱 불어나게 하며 또 윤택하여지고 따라 윤택하여지며 나아가 지니고 따라 지니게 하면 이것을 식식이라 한다.
[문]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세존께서 『교파륵루나기경(敎頗勒窶那記經)』에서 말씀하시되, “파륵루나(頗勒窶那)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식식(識食)은 장차 오는 세상에 후유(後有)가 생기게 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것들을 식식이라 한다.
[4식주]
4식주(識住)란,
첫째는 색식주(色識住)요, 둘째는 수식주(受識住)며,
셋째는 상식주(想識住)요, 넷째는 행식주(行識住)이다.
[문] 어떤 것이 색식주(色識住)인가?
[답] 만일 물질[色]이 유루(有漏)이며 모든 집착[取]을 따라서 그 모든 물질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대하여 혹은 하고자[欲] 하고 탐내며[貪] 혹은 성내고[瞋] 혹은 어리석으며[癡] 혹은 낱낱의 심소(心所)에 따라 수번뇌(隨煩惱)를 일으키면 이것을 색식주라 한다.
수식주(受識住)와 상식주(想識住)와 행식주(行識住)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역시 그러하다.
[4애]
4애(愛)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어떤 필추나 필추니 등이 의복(衣服)으로 인해서 사랑[愛]을 내어야[生]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住]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執] 할 때에 집착한다.
둘째는 어떤 필추나 필추니 등이 음식(飮食)으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
셋째는 어떤 필추나 필추니 등이 침구[臥具]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
넷째는 어떤 필추나 필추니 등이 존재[有]하고 존재함이 없는 것[無有]으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
[문] 어떤 것을 ‘필추나 필추니 등이 의복(衣服)으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라고 하는가?
[답] 여기서 말하는 의복이란, 이른바 털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혹은 선나(扇那)로 만들어지기도 하며,
혹은 추마(蒭摩)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혹은 삼[麻]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며,
혹은 건고라(建鼓羅)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혹은 실[絲]로 만들어지기도 하며,
혹은 무명[綿]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혹은 모전[氈]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며,
혹은 교침바(憍砧婆)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혹은 돌루라(突窶羅)로 만들어지기도 하며,
혹은 아차란타(阿遮爛陀)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 의복이란, 총부의(總覆衣)ㆍ출착의(出著衣)ㆍ내복의(內服衣)ㆍ단군(單裙)ㆍ복군(複裙)ㆍ단엄액(單掩腋)ㆍ복엄액(複掩腋) 등이다.
이와 같은 등 갖가지 의복에 대하여 모든 탐(貪)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等貪] 깊이 간직하고[執藏] 막아 수호하며[防護] 굳게 집착하고[堅著] 물들어 좋아하는[染愛] 이런 것을, ‘필추나 필추니 등이 의복으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필추나 필추니 등이 음식(飮食)으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라고 하는가?
[답] 여기서 말한 음식이란, 다섯 가지 응담(應噉)과 다섯 가지 응식(應食)이다.
다섯 가지 응담이란,
첫째는 뿌리[根]요, 둘째는 줄기[莖]며, 셋째는 잎[葉]이요, 넷째는 꽃[花]이며, 다섯째는 열매[果]이다.
다섯 가지 응식이란,
첫째는 밥[飯]이요, 둘째는 죽[粥]이며, 셋째는 떡과 미숫가루[餠麨]요, 넷째는 고기와 육[魚肉]이며, 다섯째는 나물국과 고깃국[羹臛]이다.
이와 같은 등 갖가지 음식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함께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물들어 좋아하는 것을, ‘필추나 필추니 등이 음식으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필추나 필추니 등이 침구[臥具]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라고 하는가?
[답] 여기서 말한 침구란, 원우(院宇), 방당(房堂), 누각(樓閣), 대관(臺觀), 장랑(長廊), 원실(圓室), 감굴(廊窟), 청아(廳庌)와 풀잎 등으로 만든 암자[庵]며 흙과 돌 등으로 된 굴(窟) 등이다.
또 침구란, 평상ㆍ자리ㆍ모전으로 만든 요, 면단(眠單), 이불, 담요, 담계(緂罽), 베개, 두꺼운 털옷, 책상 등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침구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함께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물들어 좋아하는 것을 ‘필추나 필추니 등이 침구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필추나 필추니 등이 존재[有]하고 존재함이 없는 것[無有]으로 인해서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라고 하는가?
[답] 여기서 말한 존재란, 5취온(取蘊)이니, 곧 물질[色], 느낌[受], 생각[想], 지어감[行], 의식[識]의 쌓임이다.
존재함이 없는 것[無有]이란, 이 5취온이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아주 없는 것[斷滅]이다.
어떤 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원컨대 나는 장차 오는 세상에 5온이 생기게 하소서’라고 하며,
또 어떤 한 무리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내가 죽은 뒤에는 아주 없어지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이니,
이 존재하고 존재함이 없는 것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함께 탐하며 같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물들어 좋아하는 것을,
‘필추나 필추니 등이 존재하고 존재함이 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내어야 할 때에 내고 중지해야 할 때에 중지하며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라고 한다.
[4불응행이행]
4불응행이행(不應行而行)이란,
첫째는 탐욕(貪慾)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하는 것[不應行而行]이요,
둘째는 성냄[瞋恚]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하는 것이며,
셋째는 어리석음[愚癡]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하는 것이요,
넷째는 두려움[怖畏]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하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을 ‘탐욕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한다’라고 하는가?
[답] 마치 어떤 한 무리가 혹은 친교사(親敎師)거나 혹은 궤범사(軌範師)거나 혹은 동친교(同親敎)거나 혹은 동궤범(同軌範)이거나, 혹은 자주 오가는 여러 친한 벗이거나 간에 그들과 대중들[僧衆] 가운데서 다투는 일을 일으키게 되면, 그는 생각하기를,
‘만일 스승 등과 함께 붕당(朋黨)이 되면 곧 법에 어긋나고 만일 스승 등과 함께 붕당이 되지 않으면 곧 의리에 어긋난다’라고 하니,
비록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도 탐욕 때문에 가려져서 짐짓 나쁜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일으키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탐욕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성냄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한다’라고 하는가?
[답] 마치 어떤 한 무리가 원한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중들 가운데서 다툼을 일으키게 되면, 그는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저 원한이 있고 싫어하는 이들을 돕는다면 인정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요, 만일 그들을 배반한다면 도리에 어긋난 일이다’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성냄 때문에 가려져서 짐짓 나쁜 신업과 어업을 일으키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성냄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어리석음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한다’라고 하는가?
[답] 마치 어떤 한 무리가 타고난 성품이 어둡고 둔한지라, 혹은 친교사거나 혹은 궤범사거나 혹은 동친교거나, 혹은 동궤범이거나, 혹은 서로가 자주 오가는 여러 친한 벗이거나 간에 대중들 가운데서 다투는 일을 일으키게 되면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옳고 그른 것과 좋고 나쁜 것을 모르고 있다.
다만 친교사 등과 같은 패거리가 되어 도와야 할 뿐이다’라고 하면서,
그는 어리석음 때문에 가려져서 짐짓 나쁜 신업과 어업을 일으키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어리석음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두려움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한다’라고 하는가?
[답] 마치 어떤 한 무리가 혹은 국왕과 친한 벗이거나 혹은 대신과 친한 벗이거나 혹은 강한 도적과 친한 벗이거나 간에 그들이 대중들 가운데서 다투는 일을 일으키게 되면 그는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세력 있는 이들을 돕지 않으면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혹은 이름과 이익을 잃게도 되고, 혹은 옷과 발우를 잃게도 되며, 혹은 몸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나는 이제 반드시 저 세력 있는 이들과 한편이 되어 도와야 한다’라고 하면서,
그는 이런 두려움 때문에 나쁜 신업과 어업을 일으키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바로 ‘두려움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되는데도 행한다’라고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과
두려움 때문에 법을 어기는 이는
이름과 이익을 잃게 되는 것이
마치 검은 부분의 달[黑分月]과 같으니라.
[4기문]
4기문(記問)이란,
첫째는 응일향기문(應一向記問)이요, 둘째는 응불별기문(應不別記問)이며,
셋째는 응반힐기문(應反詰記問)이요, 넷째는 응사치기문(應捨置記問)이다.
[문] 어떤 것을 응일행기문(應一行記問)이라 하는가?
[답] 만일 어떤 이가 묻기를,
“세존은 바로 여래(如來)ㆍ아라한(阿羅漢)ㆍ정등각(正等覺)ㆍ명행원만(明行圓滿)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천인사(天人師)ㆍ불(佛)ㆍ박가범(薄伽梵)이신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좋은 말씀이라 실제로 나타나서 뜨거운 번뇌가 없게 하고 때에 알맞으며 인도하고 가까이 관찰하며 지혜로운 이면 안으로 증득하게 되는가?
부처님의 제자들은 묘한 행[妙行]과 질박하고 정직한 행[質直行]과 이치대로의 행[如理行]과 법수법행(法隨法行)과 온화하고 공경하는 행[和敬行]과 법을 따르는 행[隨法行]이 두루 갖추어 있는가?
괴로움[苦]과 발생[集]과 소멸[滅]과 도[道]는 곧 성스러운 진리[聖諦]인가? 온갖 행(行)은 무상한 것인가? 온갖 법에는 나가 없는가[無我]?
열반은 고요한 것[寂靜]인가?”라고 할 적에,
이러한 질문은 한량없는 문(門)이 있을 것이나,
마땅히 그렇다[一向]고 대답[記]해야 한다.
‘세존은 바로 여래요 아라한이시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열반은 곧 고요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응일향기문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질문을 응일향기라 하는가?
[답] 이 질문에 대하여 만일 그렇다[一向]고 대답[記]하면 의로운 이익[義利]을 이끌고 착한 법[善法]을 이끌며 범행(梵行)을 이끌고 신통과 지혜[通慧]를 일으키며 등각(等覺)을 내고 열반(涅槃)을 증득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
[문] 어떤 것을 응분별기문(應分別記問)이라 하는가?
[답] 만일 어떤 이가 질문하기를,
“어떤 것이 법(法)인가?”라고 할 적에,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마땅히 분별해서 대답[記]해야 한다.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혹은 과거의 법이기도 하고 혹은 미래의 법이기도 하고 혹은 현재의 법이기도 하며,
혹은 선(善)한 법이기도 하고 혹은 선하지 않은[不善] 법이기도 하고 혹은 무기(無記)의 법이기도 하며,
혹은 욕계에 매인[欲界繫] 법이기도 하고 혹은 색계에 매인[色界繫] 법이기도 하고 혹은 무색계에 매인[無色繫] 법이기도 하며,
혹은 배울 것이 있는 이[學]의 법이기도 하고 혹은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의 법이기도 하고 혹은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非學非無學] 이의 법이기도 하며,
혹은 견도에서 끊어야 할[見所斷] 법이기도 하고 혹은 수도에서 끊어야 할[修所斷] 법이기도 하고 혹은 끊어야 할 것이 아닌[非所斷] 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등의 법은 한량없는 문이 있겠지만 마땅히 분별해서 대답해야 하나니, 이것을 응분별기문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응분별기라 하는가?
[답] 이런 질문에 대하여 만일 분별해서 대답하면 의로운 이익을 이끌고 착한 법을 이끌며 범행을 이끌고 신통과 지혜를 일으키며 등각을 내고 열반을 증득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마땅히 분별해서 대답해야 한다.
[문] 어떤 것을 응반힐기문(應反詰記問)이라 하는가?
[답] 만일 어떤 이가 질문하기를,
“나를 위하여 법을 설하십니까?”라고 할 적에,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마땅히 되받아 물으면서[反詰] 대답[記]해야 한다.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그대는 어떤 법을 묻는 것인가?
과거의 법인가, 미래의 법인가, 현재의 법인가?
선한 법인가, 선하지 않은 법인가, 무기의 법인가?
욕계에 매인 법인가, 색계에 매인 법인가, 무색계에 매인 법인가?
배울 것이 있는 이의 법인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법인가,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법인가?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법인가, 수도에서 끊어야 할 법인가, 끊어야 할 것이 아닌 법인가?”라고 한다.
이와 같은 법 등은 한량없는 문이 있겠지만 마땅히 되받아 물으면서 대답해야 하나니, 이것을 응반힐기문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응반힐기라 하는가?
[답] 만일 이런 질문에 대하여 되받아 물으면서 대답하면, 의로운 이익을 이끌고 착한 법을 이끌며, 범행을 이끌고 신통과 지혜를 일으키며, 등각을 내고 열반을 증득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마땅히 되받아 물으면서 대답해야 한다.
[문] 어떤 것을 응사치기문(應捨置記問)이라 하는가?
[답] 만일 어떤 이가 질문하기를, “세간은 항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항상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무상한 것이기도 한가,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닌가?
세간은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 끝이 있기도 하고 또한 끝이 없기도 한 것인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닌가?
목숨은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여래는 돌아가신 뒤에도 계시는 것인가, 계시지 않는 것인가? 계시기도 하고 또한 계시지 않기도 하는가, 계시는 것도 아니고 계시지 않는 것도 아니가?”고 하는,
이와 같은 등의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는,
마땅히[應] 내버려두고[捨置] 대답[記]하지 않아야 한다.
이때에는 마땅히 대답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아야 하나니, 항상하다[常]거나 무상하다[無常]는 것 등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라고 해야 하나니,
이것을 바로 응사치기문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응사치기라 하는가?
[답] 이런 질문에 대하여 만일 내버려두고 대답하지 않으면, 의로운 이익을 이끌고 착한 법을 이끌며, 범행을 이끌고 신통과 지혜를 일으키며, 등각을 내고 열반을 증득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마땅히 내버려두고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첫째는 그렇다고 대답해야[應一向記] 하고
다음에는 분별해서 대답해야[應分別記] 하며
셋째는 되받아 물으면서 대답해야[應反詰記] 하고
넷째는 내버려두고 대답하지 않아야[應捨置記] 한다.
이러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차례를 알면서 대답하는 이는
의로운 이익과 착한 법을 이끌고
범행이 순수하고 청정하게 된다.
매우 깊은지라 항복 받기 어렵고
의리[義]와 의리 아닌 것[非義]을 다 같이 알며
의리 아닌 것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면서
자세히 살피므로 지혜로운 이[智者]라 한다.
[4보시]
4시(施)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施者]는 청정하지만 받는 이[受者]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는 보시가 있되 받는 이는 청정하지만 보시하는 이가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는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한 것이다.
넷째는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문] 어떤 것을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는 청정하지만 받는 이가 청정하지 않다’라고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알아야 한다. 어
떤 시주(施主)는 청정한 계율을 갖추고 율의(律儀)에 머무르며, 의(依)가 있다는 소견이 있고 과(果)가 있다는 소견이 있으면서, 이러한 소견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결정코 보시가 있으면 과(果)와 이숙(異熟)이 있다’라고 하나,
그 보시를 받는 이[受者]는 청정한 계율을 갖추지 못하고 율의에도 머무르지 못하며,
의가 있다는 소견이 없고 과가 있다는 소견도 없으면서 이러한 소견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결정코 보시가 없고 과와 이숙도 없다’라고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는 청정하지만 받는 이는 청정하지 않다’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보시에는 보시하는 이는 청정한데 받는 이는 청정하지 않은 것인가?
[답] 모든 지분(支分)과 모든 자량(資糧)을 보시하는 이는 마땅히 닦고 쌓아야 하는데, 그 지분과 그 자량을 보시하는 이는 성취한 것이요,
모든 지분과 모든 자량을 받는 이도 마땅히 닦고 쌓아야 하는데 그 지분과 그 자량을 받는 이는 성취하지 못한 것이니,
이 때문에 이 보시에서는 보시하는 이는 청정하면서 받는 이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문] 어떤 것을 ‘보시가 있되 받는 이는 청정하지만 보시하는 이가 청정하지 않다’라고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시주는 청정한 계율을 갖추지 못하고 율의에 머무르지도 못하며 의(依)가 있다는 소견이 없고 과(果)가 있다는 소견도 없으니, 이와 같은 소견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결정코 보시가 없고 과(果)와 이숙(異熟)도 없다’라고 하나,
이와 반대로 보시를 받는 이는 청정한 계율을 갖추고 율의에도 머무르며 의가 있다는 소견이 있고 과가 있다는 소견도 있어, 이와 같은 소견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결정코 보시가 있으면 과와 이숙도 있다’라고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보시가 있되 받는 이는 청정하지만 보시하는 이는 청정하지 않다’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보시에는 받는 이는 청정한데 보시하는 이는 청정하지 않은 것인가?
[답] 모든 지분(支分)과 모든 자량(資糧)을 보시하는 이는 마땅히 닦고 쌓아야 하는데 그 지분과 그 자량을 보시하는 이는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요,
모든 지분과 모든 자량을 받는 이도 마땅히 닦고 쌓아야 하는데 그 지분과 그 자량을 받는 이는 성취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 보시에서는 받는 이는 청정한데 보시하는 이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문] 어떤 것을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하다’라고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시하는 어떤 이는 청정한 계율을 갖추고 율의에도 머무르며 의(依)가 있다는 소견이 있고 과(果)가 있다는 소견도 있으니, 이와 같은 소견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결정코 보시가 있으면 과와 이숙도 있다’라고 하며,
보시를 받는 이도 역시 청정한 계율을 갖추고 율의에도 머무르며 의가 있다는 소견이 있고 과가 있다는 소견도 있으니, 이와 같은 소견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결정코 보시가 있으면 과와 이숙도 있다’라고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하다’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보시에서는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한 것인가?
[답] 모든 지분(支分)과 모든 자량(資糧)을 보시하는 이면 마땅히 닦고 쌓아야 하는데 그 지분과 자량을 보시하는 이가 성취한 것이요,
모든 지분과 모든 자량을 받는 이도 마땅히 닦고 쌓아야 하는데 그 지분과 자량을 받는 이도 성취한 것이니,
이 때문에 이 보시에서는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한 것이다.
[문] 어떤 것을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하지 않다’라고 하는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보시하는 이는 청정한 계율을 갖추지 못하고 율의에도 머무르지 못하며 의(依)가 있다는 소견이 없고 과(果)가 있다는 소견도 없으니, 이와 같은 소견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결정코 보시가 없고 과와 이숙도 없다’라고 하며,
보시를 받는 이도 역시 청정한 계율을 갖추지 못하고 율의에도 머무르지 못하며 의가
있다는 소견이 없고 과가 있다는 소견도 없으니, 이와 같은 소견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결정코 보시가 없고 과와 이숙도 없다’라고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보시가 있되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하지 않다’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보시에서는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하지 못한가?
[답] 모든 지분(支分)과 모든 자량(資糧)을 보시하는 이면 마땅히 닦고 쌓아야 하는데 그 지분과 자량을 보시하는 이는 성취하지 못한 것이요,
모든 지분과 모든 자량을 받는 이도 마땅히 닦고 쌓아야 하는데 받는 이도 성취하지 못한 것이니,
이 때문에 이 보시에서는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다 같이 청정하지 못한 것이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계를 갖춘 이[具戒]가 계에 결함이 있는 이[缺戒]에게 보시할 때는
청정해서 법을 증득하며
업(業)과 과(果)와 이숙(異熟)을 믿기 때문에
이는 보시하는 이만이 청정할 뿐이다.
계에 결함이 있는 이가 계를 갖춘 이에게 보시할 때는
청정하지 않아서 비법(非法)을 이끌며
업과 과와 이숙을 비방하기 때문에
이는 받는 이만이 청정할 뿐이다.
계에 결함이 있는 이가 계에 결함이 있는 이에게 보시할 때는
청정하지 않아서 비법을 이끌며
업과 과와 이숙을 비방하기 때문에
나는 큰 과보 없으리라 말하느니라.
계를 갖춘 이가 계를 갖춘 이에게 보시할 때는
청정해서 법을 증득하며
업과 과와 이숙을 믿기 때문에
나는 큰 과보 있으리라 말하느니라.
업과 과와 이숙을 믿으면서
자기 자신이 존중하는 부모와
부리는 하인에게 평등히 보시하면
지혜로운 이들이 다 함께 칭찬한다.
몸과 말과 뜻에 집착이 없고
필추로서 묘한 행[妙行]을 행하며
스스로 부귀를 구하지 않아서
다른 이들에게 널리 보시하라.
온갖 것에 이미 욕심을 여의고
이미 욕심 여읜 이에게 보시하면
나는 이와 같은 보시를
재물 보시[財施] 가운데서 가장 높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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