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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 깎을 것인가 약 칠 것인가
김혜형 전업농부·작가
제초제가 태워버린 논둑
풀 자라는 속도가 무섭다. 논둑의 풀이 금방 무성해졌다. 모내기 전 예초기로 논둑을 깎았고 모내기 후 한 차례 더 깎았는데, 장마 통에 풀이 무릎 높이로 자라 또 예초기를 든다. 풀을 방치하면 다니기도 불편하고, 갑자기 논물이 빠졌을 때 원인을 찾기도 어렵다. 며칠 전 아침에 논에 가보니 논물이 밤새 다 빠져 논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논둑을 몇 바퀴 돌아도 물 빠지는 자리를 못 찾았는데, 예초기로 풀을 바짝 깎고 나니 그제야 두더지 구멍이 보였다. 이러니 논둑 베기에 소홀할 수가 없다. 앞으로 이삭 패기 전까지 두어 번은 더 깎아야 할 것 같다.
논둑의 풀 상태를 보면 농부의 성격이 보인다. 우리는 풀이 웬만큼 자라기를 기다려 예초기를 대는데, 부지런한 옆 논 주인께선 풀 자라는 꼴을 못 보신다. 우리 논과 맞닿은 경계 논둑이 한나절 만에 싹 베어져 있으면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어른께서 또 먼저 벨까봐 신경이 쓰여 풀이 덜 자랐는데도 예초기를 둘러멘다. 염치를 차리는 일은 논둑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예초기로 벤 풀이 햇볕에 바싹 말랐다.
우리가 짓는 논은 3개 마을에 흩어져 있다. 그중 하나인 저수지 아래 첫 논은 오염원이 없고 물 대기가 좋다. 그 논 아래쪽으로 넓은 들판은 대농들의 임대 논이다. 논 주인들은 대개 혼자 계신 노인들로, 연세가 많고 기력이 딸려 직접 농사지을 엄두를 못 내신다. 대형 농기계를 가진 농부들이 어른들의 논을 빌려서 짓는데 임대 규모가 커서 우리는 그들을 ‘대농’이라 부른다.
대농들은 이앙기, 트랙터, 콤바인 등 대형 농기계를 여러 대 가지고 있어서 써레질부터 모내기, 농약 치기, 논둑 베기, 수확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운다. 대농들의 이앙기는 비료와 제초제 통이 장착된 신형이다. 모내기할 때 비료와 제초제를 동시 투입해 과정을 단축하고 인력을 절감한다. 수확할 때도 대형 콤바인으로 하루이틀 만에 그 넓은 들판의 벼를 다 벤다. 스물일곱 마지기 벼농사에 쩔쩔매는 우리 눈엔 놀라운 속도이고 효율이다.
제초제를 친 논둑.
작년까지는 팀을 이뤄 예초기로 논둑을 베던 대농들이 올해는 트럭에 600리터 대형 고무통을 싣고 나타나 강력 분사기로 논둑에 제초제를 뿌리고 다녔다. 옆사람이 그걸 보고 대농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럿이서 예초기로 하면 금방 할 것 같은데, 제초제를 뿌리는 게 더 쉬운가요?” “말하나 마나지. 제초제가 훨씬 쉬워!” 몰라서 물은 게 아니고 기왕이면 예초기가 낫지 않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막상 말하려니 조심스러웠던 게다. 오래지 않아 대농들의 논둑에서 자라던 개망초와 바랭이, 쑥과 토끼풀이 흑갈색으로 초토화됐다. 그 살풍경이 눈에 거슬려 논길을 지날 때면 반대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제초 노동은 농부의 숙명
풀이 지배하던 땅에 곡식과 작물을 심었으니 제초 노동은 농부의 숙명이다. 야생의 풀은 인간의 작물보다 몇 배 강하고 드세다. 잠깐 방치하면 순식간에 작물을 뒤덮어 흔적마저 없애버린다. 그렇다고 독한 화학물질로 풀싹과 종자를 사멸시킬 생각은 없다. 우리 밭에는 풀과 작물뿐 아니라 개구리‧두꺼비‧도마뱀도 살고, 나비와 벌과 온갖 곤충들이 살고, 지렁이와 개미와 헤아릴 수 없는 토양 미생물이 산다. 그들의 머리 위로 화학물질을 들이붓는 일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다.
김 매는 내 손목 위로 도마뱀이 폴짝 뛰어 올라왔다.
옛사람들은 자신과 식솔의 생존을 위해 풀과 싸우며 곡식을 지켰다. 새벽부터 해 떨어질 때까지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종일토록 논밭에 엎드려 김을 매야만 겨우 입에 풀칠할 곡식과 채소를 얻었다. 오죽하면 밭고랑에서 애를 낳았을까. 지금은 드물지만 10~20년 전만 해도 허리가 기역 자로 꼬부라져 지팡이 없인 일어서기도 힘든 할머니들이 많이 계셨다. 평생의 중노동으로 관절이 닳고 뼛골이 삭은 채 한 생애를 마치신 분들이다. 그분들 보시기에 제초제와 살충제, 화학비료의 보급은 얼마나 혁명적인 ‘과학 영농’이었을까.
제초제와 농약이 농사의 매뉴얼이 된 지 오래다. 농촌진흥청은 들깨‧참깨‧콩‧도라지 씨를 뿌리기 전에 치는 제초제, 고사리 종근 심기 전에 치는 제초제, 논과 논둑에 뿌리는 제초제 등을 안내하고 권장한다. 고추 같은 작물은 비닐 멀칭으로 웬만큼 풀을 막아낼 수 있지만, 고사리나 도라지처럼 비닐 멀칭을 할 수 없는 작물은 제초제 없이 농사짓기가 몹시 어렵다. 농촌이 고령화되고 일손이 부족하니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 의존도가 높다. 여전히 밭일을 놓지 못한 할머니들이 농약통을 짊어지고 밭고랑과 앞마당에 ‘풀약’(제초제)을 치신다. 농촌의 흔한 풍경이다.
마을길 벚나무 아래 평상에서 할머니가 쉬고 계신다.
관행농(화학비료와 농약을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농업)으로 밭농사를 짓는 이웃들은 두둑에 비닐 멀칭을 하고 고랑에 제초제를 친다. 유기농은 두둑에 비닐 멀칭을, 고랑엔 부직포를 깔아 풀을 제어한다. 우리도 몇 해 전 도저히 풀을 감당할 수 없어 고추밭에 비닐 멀칭을 하고 부직포를 고랑에 깔았었다. 비닐 쓰기 싫어하는 옆사람을 겨우 설득해 고추밭 풀 매는 고생은 좀 덜었는데, 양파밭‧마늘밭‧감자밭은 해마다 풀밭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매우 소수지만 비닐 멀칭도 안 하고 농약‧제초제‧화학비료도 안 치면서 큰 규모의 밭농사를 짓는 분들이 있다. 풀과 함께 무경운으로 작물을 키우며, 연구하고 실험하고 성과를 내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을 보면 감탄과 존경을 금할 수 없다.
고랑에 까는 부직포는 여러 해 재사용이 가능하고, 두둑의 비닐은 사용 후 잘 거두어 마을의 비닐 집하장에 갖다놓으면 재활용센터에서 가져간다. 그 비닐조차 거두기 싫어 겨우내 방치하다 봄에 관리기로 갈아버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몇 해 전 경북 시아버님 산소에 갔다가, 검은 멀칭 비닐 조각들이 바람에 날려 가로수 가지에 걸린 채 펄럭이는 모습을 봤다. 기괴하고 추한 풍경이었다. 옆사람이 “농부 자격이 없다”며 개탄을 금치 못했다.
나뭇가지에 검은 비닐 조각들이 걸려 있다.
논둑 베기 인센티브를 제안한다
유기농 농지엔 제초제를 치면 안 된다. 논둑도 마찬가지다. 유기농 농사짓는 농부들은 예초기로 논둑을 벤다. 유기농 인증 농가엔 친환경 지원금이 나온다. 관행농은 제초제를 뿌리는 데 제한이 없다. 논둑 역시 예초기로 베든 제초제를 뿌리든 농부 마음이다. 논에 뿌리는 선택성 제초제(벼를 제외한 다른 풀을 죽임)는 과거보다 독성이 줄어 우렁이도 안 죽더라는 이야기를 이웃한테 들었다. 반면 논둑에 뿌리는 비선택성 제초제(가리지 않고 다 죽임)는 매우 독해 식물의 지상부를 태우고 뿌리까지 고사시킨다.
논둑을 뛰어다니는 참개구리.
논둑에는 개구리와 풀벌레 같은 다양한 생물들이 산다. 예초기로 논둑을 베면 다가오는 진동에 피할 겨를이라도 있지만, 쏟아지는 제초제 세례는 작은 생물들에게 공습과도 같다. 풀만 죽이는 게 아니라 어린 개구리와 늑대거미와 다양한 풀벌레들이 치명상을 입는다. 제초제가 논물로 흘러들어 수서생물들의 산란과 번식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논둑 제초제 살포를 줄일 방법은 없을까? 제초제를 치지 않고 논둑을 직접 베는 농가에 직불금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건 어떨까? 임대든 자경이든 직접 농사짓는 사람이라면 모두 직불금을 받는다. 지자체마다 농업경영체 데이터가 있으니 면적 대비 인센티브 기준만 정하면 예산 규모가 나올 것이다. 면 단위로 차량 순회 점검만 해도 예초기로 베었는지 제초제를 쳤는지 즉시 파악이 가능하다. 제초제 친 논둑은 눈에 잘 띄니 해당 지번만 체크하면 될 것이다. 모내기하는 6월 초부터 이삭 패는 8월 하순까지 2~3차례만 점검해도 충분하다. 예산은 이런 데 써야 하지 않을까?
제초제를 뿌려 누렇게 탄 논둑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정책이 시행된다면 관행농들의 논둑 제초제 살포가 획기적으로 줄 것 같은데, 이 제안에 귀 기울일 정책 입안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농촌진흥청 홈페이지엔 각종 농약과 제초제 치는 법을 안내하고 권장하는 글이 수백 건이다. 농사 잘 지으려면 제초제와 농약을 적기에 잘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열정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화학약품 덜 쓰는 농법 개발과 보급에 힘쓰면 좋을 텐데 말이다. 농식품부가 친환경 경작지 비중을 늘릴 의지가 있다던데, 관행농을 친환경(유기농+무농약)으로 전환해 나가는 일과 관행농의 제초제 사용을 줄이는 일을 동시 진행해도 좋을 것 같다.
(※ 현재 한국의 친환경 경작지 비중은 4.9%다. 농식품부는 친환경 경작지 비율을 2025년까지 1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2021년 9월에 발표했다. 2023년 현재로 보아 성과가 커 보이진 않는다.)
청둥오리가 논둑에 둥지를 틀었다.
청둥오리가 우리 논둑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매일 논을 오가며 둥지를 보았기에 그 논둑만은 베지 않고 놔두었다. 논 매는 우리를 피해 잠시 달아났던 청둥오리 한 쌍이 다시 돌아와 논물 위를 노닌다. 청둥오리는 6~12개의 알을 낳아 28~29일간 품는다고 한다. 알이 4개인 걸로 보아 앞으로 몇 개 더 낳을 것 같다. 딱새나 곤줄박이처럼 작은 새들은 12~13일간 알을 품고, 닭은 21일간 품는데, 오리는 포란 기간이 꽤 길구나.
청둥오리가 터 잡은 논의 논매기를 오늘 다 마쳤다. 인간의 방해는 더 이상 없을 테니 포란과 육아에 집중하기를. 우리 논엔 우렁이랑 새우가 많으니 새끼오리 키울 터전으로는 그만일 게다. 머잖아 청둥오리 아가들이 푸른 벼포기 사이를 헤엄치며 노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상상만 해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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