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일승보성론 제2권
3. 법보품(法寶品)
≪논≫ 저 불보에 의지하여 참된 법보가 있는지라, 이러한 뜻에서 불보를 먼저하고 그 다음에 법보를 나타내 보임이니, 저 법보에 의지하기 때문에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저것에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또 저것을 여의는 것도 아니며
생각해 헤아릴 수도 없고
듣고 얻는 지혜의 경계도 아닌지라
언어(言語)의 길을 벗어나서
속마음으로만 청량함을 아시네.
저 참되고 묘한 법의 해가
청정하여 때[垢]도, 티[點]도 없으니
크나큰 지혜의 광명이
널리 모든 세계를 비추매라
능히 음산한 장애와 각관(覺觀)과
탐욕ㆍ진심ㆍ우치 따위와
일체의 번뇌를 깨뜨리시니
이 때문에 나 이제 경례하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사의하고 둘이 아니고
분별이 없고 청정하고 현현(顯現)하고 대치하는 것이
무엇에 의지하여 무슨 법을 얻는가 하면
여의는 법이 바로 두 진리의 모양이네.
이 게송은 법보가 포섭한 그 여덟 가지 공덕을 대략 밝힘이다.
그 여덟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 부사의하고,
둘째 둘이 아니고,
셋째 분별이 없고,
넷째 청정하고,
다섯째 현현하고,
여섯째 대치하고,
일곱째 결과를 여의고,
여덟째 원인을 여읨이 그것이라,
여의는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사라짐의 진리와 도의 진리인
이 두 진리가 여읨을 섭수[攝]하는지라
각각 세 가지 공덕이 있는 것을
차례대로 설명하겠으니 알아두라.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앞서 말한 여섯 가지 공덕 가운데 처음부터의 세 가지 공덕인, 그 부사의한 것과 둘이 아닌 것과 분별이 없는 것 등은 사라짐의 진리가 번뇌의 결과를 여읨을 섭수하는 것을 나타내 보임이요,
그 나머지 세 글귀인 청정한 것과, 현현하는 것과, 대치하는 것 등은 도의 진리가 번뇌의 원인을 여읨을 섭수하는 것을 나타내 보임이니, 알아두라,
또 법의 모든 여읨을 증(證)하는 것을 사라짐의 진리라 하고, 어떤 법을 수행하여 번뇌를 끊는 것을 도의 진리라 하며, 이 두 진리의 합한 것을 청정한 법이라 한다.
이 두 진리의 모양을 여의는 법이라 하나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생각해 헤아리지도 않고 말도 없이
슬기로운 이는 속 지혜로써 아느니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지라
부사의한 법과 청량함과 둘이 아닌 법과
또는 분별이 없는 법과
청정하고 현현하고 대치하는
이 세 글귀는 마치 태양과 같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사라짐의 진리에 세 가지 법이 있음을 대략 밝힘이다. 이러한 뜻이기에 부사의한 것이니, 알아두라.
또 무슨 뜻이기에 부사의한 것인가?
네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 네 가지란,
첫째 없다고 하겠는가?
둘째 있다고 하겠는가?
셋째 있다거나 도는 없다고 하겠는가?
넷째 둘이라고 하겠는가?
게송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저것에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또 저것을 여의는 것도 아니라고’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사라짐의 진리가 세 가지 법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할지니,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
사라짐의 진리를 알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 세 가지란,
첫째 생각해 헤아리는 경계가 아니니,
게송에 ‘생각해 헤아릴 수 업고 듣고서 얻는 지혜의 경계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 일체의 음향(音響)과 명자(名字)와 장구(章句)아 언어(言語)와 상모(相貌)를 아주 여의었기 때문이니,
게송에 ‘언어의 길을 벗어났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셋째 성인만이 증지(證知)하는 법이기 때문이니,
게송에 ‘속마음으로 아시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사라짐의 진리를 어떻게 둘이 아닌 법이라 하고, 또는 분별이 없는 법이라 하는가?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가운데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아, 여래의 법신이 청량(淸凉)한 것은 둘이 아닌 법이기 때문이고, 분별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음이니,
게송에 역시 청량함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이 둘인데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이른바 둘이란, 업과 번뇌가 그것이고,
분별이란, 이른바 쌓임[集]이 업 또는 번뇌의 원인과 삿된 생각 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저 자성(自性)이 본래 적멸(寂滅)하여 둘이 아니고 두 가지 행이 없는 줄을 안다면, 괴로움이 본래 나지 않음을 알 것이니, 이를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라 한다.
사라지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에 말씀하시기를,
“문수사리여, 어떤 법 가운데에도 마음과 뜻과 의식과 지어감이 없는 것은 저 법 가운데에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삿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생각을 지니기 때문에 무명(無明)을 일으키지 않고,
무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곧 열두 가지 인연을 일으키지 않고,
열두 가지 인연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곧 나는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사라지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괴로움의 사라짐이란, 처음이 없고 지음이 없고 일어남이 없고 다함이 없고 다함을 떠나서 항상하고 청정하고 변하지 않는지라 그 자성의 청정하여 일체 번뇌장(煩惱障)에 얽매임을 벗어났습니다.
세존께서 항하사보다 지나친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부사의한 불법을 필경 성취하셨기에 여래의 법신이라고 이르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여래의법신이 번뇌장에 얽매임을 여의치 않은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르나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등등 승만경 가운데 사라짐의 진리를 널리 설해 두었으니, 알아두라.
또 무슨 인(因)으로써 이 사라짐의 진리 여래의 법신을 얻는가?
이를테면 견도위(見道位) 중에서나 또는 수도위(修道位) 중에서 분별없는 지혜가 마치 세 종류의 해[日]와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저 참된 묘법의 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른바 세 종 어떤 것인가?
첫째 해 바퀴[日輪]의 청정한 것과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일체 번뇌의 때를 아주 여의었기 때문이다.
게송에 ‘청정하여 티끌과 때가 없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 일체의 빛과 모양을 나타냄이 설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일체 종류의 일체 지혜로써 능히 비춰 알기 때문이다.
게송에 ‘큰 지혜의 광명’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셋째 어두움을 대치하는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일체의 지혜로써 대치하는 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라,
게송에 ‘널리 모든 세간을 비추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을 대치하는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진실하지 않는 일 모양에 의지하여 허망한 분별의 생각을 갖춤으로써 탐욕ㆍ진심ㆍ우치에 끌리는 번뇌를 내나니,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
우치한 범부들은 결사(結使) 번뇌에 의지하여 진실하지 않는 일 모양을 취해 생각하기 때문에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진애(瞋愛)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무명(無明)의 허망한 생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킨다.
또다시 저 탐욕ㆍ진심ㆍ우치 따위와 허망한 분별에 의지하여 진실하지 않는 일 모양을 취함으로써 그 생각이 삿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삿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의지하여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를 의지하여 탐욕ㆍ진심ㆍ우치를 일으키는지라,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몸과 입과 뜻 등이 탐욕의 업과 진심의 업과 우치의 업을 조작하고,
이 업을 의지하기 때문에 다시 나고 또 나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 우치한 범부들은 번뇌의 쌓임을 의지하여 삿된 생각을 일으키고,
삿된 생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 업을 일으키고, 업에 의지하여 나는 것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이 일체 종류의 번뇌가 업을 더럽히어 그 더러움이 또 더러움을 내는지라,
이 때문에 우치한 범부들은 하나의 진실한 성품이 저 여실한 성품과 같음을 여실히 아리도 못하고 여실히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여실한 성품을 관찰하되, 그 모양을 취하지 않고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한 성품을 볼 수 있나니, 이 같은 진실한 성품을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평등히 증명해 아시는 것이다.
또 이 같은 허망한 법의 모양을 보지 않아야만 여실한 법이 바로 진여의 법계인 줄을 여실히 알아보리니, 이는 제1의 이치인 진리를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법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기 때문에 이를 평등히 증하는 지혜[平等證智]라 하고, 이를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種智]라 한다.
장애를 대치하는 법을 응당 이렇게 알지니 진여의 이치를 일으켜서 대치하는 법이기 때문에 저 대치하는 법은 다시 현재와 같은 일을 일으키지 않는지라,
게송에 ‘모든 음산한 장애과 각관(覺觀)과 탐욕ㆍ진심ㆍ우치 등 일체 번뇌를 깨뜨린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이 사라짐의 진리를 얻는 여래의 법신은 그 견도위(見道位) 중에서나, 수도위(修道位) 중에서의 분별없는 지혜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널리 말하자면,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 등 수다라(修多羅) 가운데, 이른바 “수보리(須菩提)여, 진여와 여래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음이니, 이러한 평등을 알아야 한다.
이미 법보를 설했으므로,
다음엔 승보(僧寶)를 설하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