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 제97권
3. 인증장[10]
[서천(西天)의 바라제(波羅提)존자]
서천(西天)의 바라제(波羅提)존자는 이견왕(異見王)을 교화하기 위해 신통력을 나타내어 구름을 타고 그 왕의 궁전 앞에 가 닿자,
그때 대왕은 구름을 탄 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삿된 것을 위해서입니까, 바른 일을 위해서입니까?”
바라제존자가 대답했다.
“나는 삿되거나 바른 것이 아니면서 바르고 삿된 일에 왔습니다. 대왕이 만일 바르다면 나는 삿되거나 바름이 없습니다.”
왕이 또 물었다.
“어떤 이가 부처님입니까?”
바라제가 대답했다.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스님은 성품을 보셨습니까?”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함에 있습니다.”
“이 무슨 작용이기에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에도 작용을 나타내건마는 왕 자신이 알지 못합니다.“
”스님은 이미 보신 것이라 작용이 있다 하시지만 나의 처소에서도 작용하고 있습니까?“
”왕이 만일 작용한다면 눈앞의 것이 모두가 그것이지만 왕이 만일 작용하지 않으시면 그 본체도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가로되,
”만일 작용하게 되면 몇 군데서 출현하는 것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시되,
”만일 작용이 출현된 때는 그 여덟 군데가 있습니다.”고 하고,
구름 끝에 우뚝 서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胎) 안에 있을 때는 몸이라 하고
세간에 있을 때는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을 때는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고 한다.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알고
입에 있을 때는 말을 하며
손에 있을 때는 붙잡게 되고
다리에 있을 때는 걸으며 달린다.
두루 나타나면 다 함께 법계를 감싸고
거두어들이면 작은 티끌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나니
아는 이는 불성임을 알되
모르는 이는 정혼(精魂)이라고 부른다
이 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는 남천축국(南天竺國)왕의 셋째 아들로서, 항상 진리를 논의하기를 좋아했고 마음으로는 중생을 생각하면서도 부처는 알지 못했다.
또 스스로 탄식하기를,
“세간에는 형체가 있는 법이어서 알기가 쉽지만 부처와 마음의 법만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구나”고 했다.
그때, 반야다라존자가 그의 나라에 이르렀더니 왕은 하나의 보배 구슬을 주었는데 그 구슬 광명이 찬란하게 빛나서 아주 아름다웠다.
존자는 보고 나서 그 구슬로써 시험하며 물었다.
“이 보배 구슬은 큰 광명이 있어 물건을 능히 비추는데 다시 이 보다도 더 훌륭한 좋은 구슬이 있을까?”
보리다라는 말하였다.
“그것은 세간의 보배라 아직 으뜸가는 것이 못되며 모든 빛 중에서는 지혜의 빛이 으뜸이 됩니다.
그것은 세간의 밝음이라 아직 으뜸가는 것이 못되며 모든 밝음 중에서는 마음의 밝음이 첫째입니다.
그 구슬에 있는 광명은 스스로를 비출 수가 없고 반드시 지혜 광명을 빌려서 지혜가 그것을 가려야 하며 그것을 가리고 나면 곧 그것이 구슬임을 알게 되고 그것이 구슬임을 알게 되면 곧 그것이 보배임이 밝혀집니다.
만일 그것이 보배임이 밝혀지면 보배는 스스로 보배가 되지 못하고, 만일 그것이 구슬임이 가려지면 구슬은 스스로 구슬이 되지 못합니다.
구슬이 스스로 구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지혜 구슬을 빌려서 세간의 구슬임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요,
보배가 스스로 보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법의 보배를 빌려서 세속의 보배임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그 도(道)가 있으므로 그 보배가 이미 나타났으며, 중생에게도 도가 있는지라 마음의 보배 또한 그러합니다”고 했다.
존자는 기특하게 여겼고 그로 인하여 출가하여 도를 깨쳤으며 마침내는 교화를 위해 이 땅으로 왔었는데, 보지(寶誌)는 그가 부처의 심인(心印)을 전하기 위한 관음(觀音) 성인임을 알고 있었다.
스님은 안심(安心) 법문에서 이르되,
“미혹했을 때는 사람이 법을 따르고 알았을 때는 법이 사람을 따르나니, 알면 의식[識]이 물질[色]을 포섭하되 헷갈리면 물질이 의식을 포섭한다.
다만 마음에 분별과 계교와 현량(現量)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일 뿐이며,
만일 마음이 고요히 사라져서 생각이 동요할 곳이 하나도 없음을 알면 그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 한다.
[어떻게 자기 마음으로 나타내는가]
[문] 어떻게 자기 마음으로 나타내는가?
[답] 온갖 법이 있는 것을 보건대, 있는 것은 스스로 있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있는 것을 만든다.
온갖 법이 없는 것을 보건대, 없는 것은 스스로 없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없는 것을 만든다.
이리하여 온갖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다 같이 이는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있는 것을 만들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없는 것을 만든다.
또 만일 사람이 온갖 죄를 지었으면 스스로가 자기의 법왕(法王)을 보아야 곧 해탈하게 된다.
만일 일 위에서 알게 된 이면 기력이 씩씩하고, 일 가운데서 법을 본 이면 곧 처처에서 생각을 잃지 아니한다.
문자에서 아는 이면 기력이 허약하고, 일에 즉(卽)하고 법에 즉한 이면 깊이 그대의 갖가지 움직이는 일을 좇아 뛰고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하되 모두가 법계에서 나가지도 않고 법계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만일 법계로써 법계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곧 어리석은 사람이니, 무릇 하는 일이 있어도 끝내 법계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마음 자체가 바로 법계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세간 사람들은 도를 얻지 못하는가]
[문] 세간 사람들은 갖가지로 배우고 묻고 하거늘, 어찌하여 도를 얻지 못하는가?
[답] 자기[己]를 보기 때문에 도를 얻지 못한다. 자기라 함은 ≺나≻[我]다.
도덕이 지극히 높은 사람은 괴로움을 만나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뻐하지 않나니, 자기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르는 이는 자기를 없애기 때문이요 허무(虛無)에 이르게 된다. 자기 자신도 오히려 없애거늘, 다시 무슨 물건이 있기에 없애지 않겠는가?
[모든 법이 공하다면 누가 도를 닦는가]
[문] 모든 법이 이미 ≺공≻하였다면 누가 도를 닦는가?
[답] “누가 있어서 도를 닦아야 되는가?
만일 누가 없다면 곧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
‘누구[阿誰]’한 역시 ≺나≻다.
만일 ≺나≻가 없다면 물건을 만난다 해도 시비(是非)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시(是)란 나 스스로만 옳고 중생은 옳지 않다는 것이요,
비(非)란 나 스스로만 그르고 중생은 그르지 않다는 것이다.
곧 마음에 생각이 없으면 바로 불도에 통달한 것이니, 다른 물건에 소견을 일으키지 않으면 도에 통달했다고 한다.
다른 물건을 만나서 곧장 그 근원을 통달하여 알면 이 사람은 지혜 눈이 열린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물건에게 맡기고[任物] 자기에게 맡기지 않으므로[不任己] 곧 가지거나 버리거나 어기거나 좇음이 없지만, 어리석은 이는 자기에게 맡기고 물건에게 맡기지 않는지라 곧 가지고 버리고 어기고 좇음이 있다.
한 물건도 보지 않음을 도를 본다[見道]고 하고, 한 물건도 행하지 않음을 도를 행한다[行道]고 한다.
온갖 처소에서 처소가 없는 이것이 곧 법 처소[法處]이니 곧 짓는 곳은 짓는 곳이 없고 짓는 법이 없으면 곧 부처를 뵙는다.
만일 모양을 볼 때는 온갖 처소에서 귀신을 본다.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만, 법을 관하기 때문에 해탈하게된다.
만일 기억과 분별을 보면 끓는 가마솥 물과 이글거리는 숯불에 타는 고통이 되는 일을 당하면서 실제로 나고 죽는 모양을 볼 것이요, 만일 법계의 성품을 보면 곧 열반의 성품인 것이니, 기억과 분별이 없는 이것이 곧 법계의 성품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로되 작용하면서 그만두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또 작용하면서도 항상 ≺공≻하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공≻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내가 본래 이 당에 온 것은
법을 전해 미혹된 유정 구제함이니
한 송이 꽃에서 다섯 잎사귀가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라.
[제2조 ∼ 제6조의 법을 전하는 게송]
제2조 혜가(慧可) 대사가 이르되,
“범부는 옛날이 이제와 다르다 하고 지금이 옛날과 다르다 한다.
또 4대(大)를 떠나서 다시 법신(法身)이 있다고 하나,
알고 난 때에는 지금 5음(陰)의 이 마음이 바로 원만하고 청정한 열반이니,
이 마음은 만행(萬行)을 완전히 갖추어 있으므로 바로 대종(大宗)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본래 연(緣)으로 땅이 있고
땅의 종자로 인하여 꽃이 생기나니
본래에 종자가 없으면
꽃 또한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제3조 승찬(僧璨)대사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꽃의 종자가 비록 땅으로 인하나
땅의 종자로부터 꽃이 생기나니
만일 사람이 종자를 뿌림이 없으면
꽃 종자는 모두 생김이 없느니라.
제4조 도신(道信) 대사는 이르되,
“무릇 마음의 선정[定]을 알고자 하면, 똑바로 앉았을 때 앉아 있음을 아는 이 마음이며,
허망하게 일어남이 있음을 아는 이 마음이 허망하게 일어남이 없음을 아는 이 마음이고,
안팎이 없음을 아는 이 마음이다.
진리는 모두가 마음으로 돌아가며 마음이 이미 청정하여지면 청정함이 곧 본래의 성품이다.
안이나 바깥이 오직 한 마음일 뿐이요 이것이 지혜의 모양이며 분명히 알면서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제 성품의 선정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 융(融) 대사에게 지시하며 이르되,
“백천의 미묘한 문이 다 같이 방촌(方寸)으로 돌아가고 항하 모래만큼 많은 공덕이 모두 마음의 근원에 있다.
온갖 선정의 문과 온갖 지혜의 문과 온갖 수행의 문이 모두 다 두루 갖추어졌고 신통의 미묘한 작용도 다 같이 그대의 마음에 있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꽃의 종자는 나는 성품이 있되
땅으로 인하여 꽃은 나고 나나니
큰 연(緣)과 성품이 합치게 되면
나야 하면 나되 나지 않느니라.
제5조 홍인(弘忍) 대사가 이르되,
“법의 요의를 알고자 하는가?
마음은 12부경(部經)의 근본이다.
오직 일승(乘)의 법이 있을 뿐이다. 일승이란 마음이 그것이다.
한 마음을 지키는 것만이 곧 심진여문(心眞如門l니, 온갖 법과 행은 자기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마음 뿐임을 스스로가 알아야 하나니, 마음은 형색이 없다.
모든 조사(祖師)들은 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을 뿐이니, 통달한 이가 인가(印可)하는 것이요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고 했다.
또 이르되,
“온갖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으며 삿됨과 바름은 자기에게 있다.
한 물건도 생각지 않으면 이것이 곧 본래 마음이니, 지혜로만이 알 수 있는 것이요 다시는 다른 수행이 없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서 말했다.
유정들은 와서 씨를 뿌리고
땅으로 인하여 열매가 도로 생기지만
무정은 벌써 종자가 없는지라
성품도 없고 생김도 없다.
제6조 혜능(慧能) 대사가 이르되,
‘그대들 모든 사람의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마음 밖에 다시는 건립할 수 있는 하나의 법도 없나니, 이는 다 자기 마음에서 만 가지 법을 내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되,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긴다‘고 하였지만,
그 법은 둘이 없고 그 마음 또한 그러하다.
그 도(道)는 청정하여 모든 모양이 없나니, 그대들은 청정하고 ≺공≻한 그 마음을 관하지도 말라.
이 마음은 둘이 없고 가지거나 버릴 만한 것도 없으며, 가고 서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하나의 곧장 마음이요 이것이 곧 정토(淨土)이니, 나의 말에 의지하는 이는 결정코 보리를 이루리라”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 자리는 모든 종자 포함되어서
널리 내리는 비에 모두 다 나나니
꽃의 뜻을 단번에 깨치고 나면
보리의 열매는 저절로 이룩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