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당집 제4권[2]
[단하 화상] 丹霞
석두의 법을 이었으며, 휘諱는 천연天然이었다. 어릴 적에 유교와 묵자墨子를 전공하여 9경經을 통달하였다.
처음으로 방龐 거사와 함께 서울에 가서 과거에 응하려고 한남도漢南道 거리의 주막에서 묵는데, 어느 날 꿈에 흰 광명이 방 안에 가득함을 보았다.
해몽하는 이가 이에 대해 말했다.
“이는 공空의 이치를 잘 알게 될 징조입니다.”
또 행각行脚하는 스님을 만나 차를 마시는데, 스님이 물었다.
“수재秀才는 어디로 가시오?”
“과거를 보러 갑니다.”
“공부가 아깝구나, 어째서 부처를 뽑는 곳에는 가지 않는가?”
“부처를 어디서 뽑는가요?”
이에 그 스님이 찻종지를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알겠소?”
“높은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강서에 마조께서 지금 생존하셔서 설법하시는데, 도를 깨친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소. 거기가 참으로 부처를 고르는 곳이오.”
두 사람은 전세부터 근기가 날카로운 이들인지라, 곧 길을 떠나 큰스님에게 가서 절을 하니, 마조가 말했다.
“이 사람들 무엇 하러 왔는가?”
수재가 복건을 벗어 보이니, 마조가 근기를 살피고는 웃으며 말했다.
수재가 말했다.
“그러시다면 석두께서 계신 곳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여기서부터 남악으로 7백 리를 가면 희천希遷 장로가 돌 끝에 앉아 계신다. 그대는 그리로 가서 출가하라.”
수재가 그날로 길을 떠나 석두에게 가서 화상(석두)을 뵈니,
화상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예, 아무 곳에서 왔습니다.”
“무엇 하러 왔는가?”
수재가 전의 마조와 같이 대답하니, 석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부엌으로 보내라.”
이로부터 불 피우고, 밥 지으며 2년을 보내니,
석두 화상이 생각하기를,
‘내일 아침에는 수재秀才의 머리를 깎아 주리라.’ 하였다.
그날 저녁 동자들이 저녁 문안을 드리러 왔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전 앞의 한 무더기 우거진 풀을 내일 아침 죽 공양을 마치고는 깎아 버려라.”
이튿날 새벽에 동자들은 제각기 낫과 괭이를 들고 나왔는데, 수재만은 삭도와 물을 가지고 화상 앞에 와서 꿇어앉아 머리를 감으니, 화상이 웃으면서 머리를 깎아 주었다.
선사(수재)의 정수리에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화상이 이를 만지면서 “천연天然이로다” 했다. 머리를 다 깎고 나서 화상에게 절을 하면서 머리를 깎아 주신 것과 이름을 지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였다.
이에 화상이 물었다.
“내가 그대에게는 무슨 이름을 지어 주었는가?”
“화상께서 ‘천연’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석두 화상이 몹시 신기하게 여겨 설법을 해주니, 선사는 귀를 가리고 외쳤다.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그대가 활용해 보라.”
이에 선사가 성승聖僧의 머리에 올라타니, 화상이 말했다.
“저 중이 뒷날 불상과 탁자를 모두 부술 것이니라.”
선사가 계를 받고 나니, 대적(大寂:마조)이 강서에서 마니摩尼 구슬을 한창 빛내고 있었다.
선사가 남악을 내려와 다시 강서로 가서 대적을 뵈니,
대적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석두에서 옵니다.”
“석두의 길이 미끄러운데 미끄러져 넘어지지나 않았는가?”
“넘어졌으면 여기 오지 못했습니다.”
대적이 몹시 기특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선사는 생각을 활짝 풀어놓고, 순順과 역逆의 경계를 초월하여 운수雲水에 노닐기를 좋아하고 가고 옴에 자유자재하였다.
낙경洛京에 이르러 혜충慧忠 국사를 뵙고자 찾아가서 먼저 시자를 보고 물었다.
“화상께서 계시는가?”
시자가 대답했다.
“계시기는 하지만 객을 만나지는 않습니다.”
“퍽이나 멀리 계시는구나.”
“불안佛眼으로 봐도 볼 수 없습니다.”
“용龍은 용의 새끼를 낳고, 봉鳳은 봉의 새끼를 낳는구나.”
시자가 이 일을 국사에게 말하니, 국사가 시자를 때려 주었다.
선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주鄧州의 단하산으로 올라갔는데, 격조가 높고 험준하여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었다.
이에 어떤 선덕禪德이 단하를 찾아오다가 산 밑에서 선사를 보자 얼른 물었다.
“단하산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사가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푸른 듯 검은 듯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덕이 다시 물었다.
“단지 이것뿐만은 아니겠지요.”
선사가 대답했다.
“참 사자는 한 번 퉁기면 이내 뛰느니라.”
다음에 천태산 화정봉花頂峯에서 3년을 지내고는 다시 국일國一 선사를 뵙고, 원화元和 연간 초에 용문龍門의 향산香山에 올라 복우伏牛 선사와 절친한 도반이 되었다.
그 뒤 혜림사惠林寺에서 추운 날씨를 만나 목불木佛을 태워 추위를 막는데, 주인이 와서 꾸짖으니, 선사가 말했다.
“다비茶毘를 해서 사리舍利를 얻으려던 참이었소.”
“나무토막에서 무슨 사리가 나오겠소?”
“그렇다면 어찌 나를 꾸짖으시오.”
주인은 이로 인해 앞 눈썹이 몽땅 빠져 버렸다.
어떤 사람이 진각眞覺 대사에게 물었다.
“단하가 목불을 태웠는데, 주인에게 무슨 허물이 있었습니까?”
“주인은 부처만을 보았느니라.”
“단하는 어떻습니까?”
“단하는 나무토막만을 태웠느니라.”
선사가 한번은 어떤 토굴에서 묵게 되었는데, 노장이 행자와 자리를 같이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선사가 곧 짐을 내려놓고 두 사람 곁으로 가서 문안을 했더니, 두 사람은 전혀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행자가 한 냄비의 밥을 가지고 와서 방바닥에 놓고 노장과 둘이 먹으면서 역시 선사를 보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았다.
이에 선사도 스스로 다가가서 같이 먹으려 하니, 행자가 노장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첫새벽에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에 선사가 노장에게 말했다.
“저 행자는 어찌 가르치지 않아서 저토록 무례한가?”
노장이 대답했다.
“멀쩡한 남의 아들딸들에게 무슨 허물이 있단 말이오? 남을 몹쓸 놈으로 만들어서 무엇하리오.”
이에 선사가 말했다.
“아까부터 하마터면 몰라볼 뻔하였구려.”
선사가 고적음孤寂吟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내가 고적을 즐기는 것을 보고
한평생 아무런 이익도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고적음을 한가히 읊고 있노라면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음을 아노라.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노력하란 말,
누구나 이 말을 하지만 알지는 못한다.
알았다면 모두가 길동무가 되거늘,
그 어찌 가시덤불에 빠져들 수 있으랴.
가시덤불 무성하니 어디가 끝인가?
그저 온 대중이 종일토록 떠드는구나.
무리들 소음을 알지 못함이 끝없으니
가엾다, 진실은 공연空然히 전하지 않으리.
전하는 것, 메아리치는 것, 모두 듣지 못하니
마치 촛불과 등잔에 주발과 동이를 덮어 씌운 것 같도다.
모두가 빛나는 줄은 다 알지만
볼 때는 어두컴컴 면할 수 없네.
어두컴컴 깨닫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니
이런 무리, 티끌이나 모래와 비교해도 적지가 않네.
마치 낚시에 걸린 고기와 같고
그물에 걸려드는 새와 무엇이 다르리.
이 걱정의 유래는 참으로 오래되었으니
사방과 상하 끝없이 멀어도
잠깐 사이에 미혹하여 병들고 죽으면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곡소리만 애절하다.
애달프게 서러워해도 끝내 이익은 없고
다만 이 몸을 고통의 옥에 가둘 뿐이다.
이럴 때에 이르러 후회한들 무엇 하랴.
하늘과 땅 어디서도 고적은 못 찾는다.
고적은 우주宇宙에서 가장 좋은 경지境地이니
늘 읊으면서 한가한 방에 누웠노라면
찬바람이 낙엽을 휘몰아도 걱정 없거늘
그 어찌 잡초들이 서리 만남을 근심하랴.
송죽松竹이 추위를 이기는 뜻만을 지켜보나니
사시四時에 변함없이 맑은 바람 뿜어낸다.
봄과 여름은 잠시 동안 뭇 나무에 가려지나
가을과 겨울에야 비로소 울창한 숲 이룬다.
그러므로 세상일에는 강유剛柔가 있음을 알겠느니
무엇 하러 마음을 맑거나 탁한 흐름에 따르게 하리.
두 끼니의 거친 음식으로 인연 따라 지내니
한 몸 가리는 것은 베옷과 솜옷이다.
바람과 물결 따라 마음대로 동서에 머무르니
그 어찌 땅 좁음과 하늘 낮음을 근심하랴.
사람들은 알지 못하여 틀렸다 하거니와
나는 분명히 알아 미혹하지 않는다.
미혹하지 않으려면 미혹하지 않는 맘 있어야 하니
볼 때는 얕게 하고 쓸 때는 깊이 하라.
이러한 보물을 얻기만 하면
그 어찌 나무꾼이 황금을 얻은 것에 비기랴.
황금은 담금질할수록 진금이 되고
맑은 구슬은 광채를 머금고도 남에게 보이지 않네.
깨치면 털끝의 물방울에 바다를 넣으니
땅덩이가 하나의 먼지임을 알겠네.
먼지와 물방울이란 생각 있으면 허물을 면하지 못하나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에 머물려 하지 말라.
바로 먼 하늘에서 새 발자국을 찾는 것 같아야
현묘한 가운데서도 더욱 현묘하리라.
하나를 들어 모든 것에 비기면 족히 알 것이거늘
무엇 하러 중언부언 설명을 하겠는가?
주린 이가 와서 배 채우는 것은 보았으나
음료수가 목 타는 이를 좇는다는 말 듣지 못했네.
여러 사람, 도를 말하나 도를 행하지 않으니
그들은 깨닫지 못하여 거짓으로 밝은 체한다.
세 치의 날카로운 칼로 넓은 길을 개척하나
만 그루의 가시나무 몸을 둘러싸고 자라난다.
티끌과 찌꺼기 많아도 전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입으로만 현묘함을 쏟아내니
이런 이가 그 어찌 크게 쓰일까.
천생 만겁에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애오라지 고적음을 쓰는 뜻, 깊고도 머니
종자기鐘子期가 백아伯牙의 거문고를 듣는다.
도 있는 이라야 그 뜻을 알기를 손바닥 가리키듯 하여
귀중하게 여기겠기에 고적음孤寂吟이라 부르노라.
선사가 또 완주음翫珠吟을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옷 속의 보배를 알아내면
무명의 취기가 저절로 깬다.
백 토막의 뼈는 무너져 없어지나
한 물건은 영원히 신령하도다.
경계를 알아도 모두가 본체 아니요
구슬은 찾아도 형체를 보지 못하네.
깨달으면 3신身의 부처요
미혹하면 만 권의 경전이로다.
마음에 있다지만 마음으로 어찌 헤아리랴.
귀에 있으나 귀로는 들을 수 없나니
형상이 없어 천지天地보다 앞에 있고
깊고 깊어서 묘명杳冥을 벗어났네.
본래 견고하여 단련한 것이 아니요
원래 맑아서 맑힌 것 아니다.
뚜렷하기는 아침 해보다 더하고
영롱하기는 샛별보다 빛난다네.
서광瑞光이 흘러 꺼지지 않고
참 밝음은 흐린 것도 맑힌다.
공동산崆峒山의 적막함을 거울같이 비추고
노롱勞籠은 법계를 밝힌다네.
범부를 꺾으니 공이 없어지지 않고
성인을 초월하나 과果가 채워진 것은 아니네.
용녀는 마음껏 몸소 바쳤고
뱀이 직접 입으로 토해내기도 했다네.
거위를 두둔하니 사람까지 살았고
참새의 의리는 오히려 가볍다.
말을 하나 혀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있되 소리가 아니다.
끝이 없으니 누리에 가득하고
3세가 평등함이 공空하도다.
교법을 펴나 교법이라 여기지 않고
이름을 드날리나 그 명성 인정하지 않는다.
양쪽의 어디에도 서지 않고
중도中道도 행하지 않는다.
달을 보되 손가락은 보지 말고
집에 돌아왔거든 길을 묻지 말라.
알음알이로 어찌 부처를 헤아리며
어떤 부처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단하에게 한 보배가 있으니
간직한 지 많은 세월 지났다.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니
나 혼자 깊이 간직하였다.
산하에 걸림이 없고
광명이 곳곳으로 뻗는다.
본체가 고요하여 항상 맑으니
맑게 사무쳐 티가 없도다.
세간에서 이를 구하려는 이
미친 듯이 먼 길로 달리나
나는 그에게 말하리라.
손뼉을 치면서 깔깔 웃으리라고.
홀연히 공空을 아는 이를 만나면
숲 속에서 자유자재하리라.
서로 만나 아무런 표현 않아도
뜻을 내비치면 즉시 알아듣는다.
선사가 또 이룡주음驪龍珠吟을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이룡주驪龍珠, 이룡주여,
광명이 찬란하니 세간 것과 다르다.
시방세계에서 구할 곳 없고
설령 구해서 얻는다 해도 이 구슬은 아니다.
구슬은 본래 뜨고 잠김 없나니
사람들 알지 못하고 밖에서 찾는다.
하늘 끝까지 다 다니어 스스로 피곤만 더할 뿐
자기의 마음에서 찾는 것만 못하네.
찾기 위해서 헛수고를 말라.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숨으리라.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 쫓듯 하고
미친 사람 길거리를 헤매듯 하네.
모름지기 스스로 분명히 체험하라.
분명히 체험하면 더 이상 연마할 필요 없다.
인간 세계에서 얻어질 것 아님을 깊이 아나니
6류類와 생령들은 말할 것도 없다.
헛되이 신경을 쓰면 정신을 소모하니
한가한 곳에서 번뇌를 쉼만 못하리.
마음 멈추고 뜻 쉬면 구슬 항상 있나니
길거리에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라.
스스로가 미혹했을 뿐 구슬은 원래 있나니
이 이룡驪龍은 시종 변함이 없다네.
비록 오음산五陰山에 묻혔으나
사람들 스스로가 게으름을 피워
구슬을 알지 못해 매양 던져 버리니
도리어 이룡驪龍 앞에서 나그네가 되노라.
이 몸이 주인공인 줄 알지 못하고
이룡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네.
보물을 알아보라. 자기의 보물이니
이 구슬 원래 본래인本來人이다.
들어서 희롱하기 다함없나니
이룡驪龍을 아는 그 순간부터 가난하지 않으리.
만일에 이룡주를 분명히 알면
그 뒤에는 그 구슬이 나에게만 있으리.
선사는 또 농주음弄珠吟을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반야 구슬 신묘하여 헤아리기 어려운데
법성法性의 바다에서 친히 알아내었네.
숨었다 나타났다 오온산五蘊山에 노닐면서
안팎으로 광명 놓아 큰 신력을 가졌다네.
이 구슬은 형상도 없고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밤낮으로 원만히 밝아 모두에게 비친다.
활용할 땐 장소 없고, 자취마저 없으나
다니거나 머무를 때, 항상 따라 분명하다.
옛 성인들 서로 전해 일러 주었으나
이 구슬을 믿는 이 세상에는 드물다.
지혜로운 이는 밝은 줄 알아 항상 여의지 않지만
미혹한 이는 구슬을 가지고도 알지 못해 헤맨다.
우리 스승, 방편으로 마니摩尼에다 견줬는데
캐려는 이, 무수하여 봄 못으로 뛰어드네.
앞 다퉈 기와 조각을 보배라 하였으나
약은 이는 편안하게 그것을 얻어낸다.
끝 있는지라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으니
체體와 용用이 여여하여 굴려도 구르지 않네.
만 가지 형태의 구슬, 마음속에 달렸으니
어느 때나 교묘한 방편을 일으킨다.
황제께서 일찍이 적수赤水에 노니셨으나
보거나 들음으로는 전혀 얻지 못했네.
망상罔像)은 무심하여 구슬을 얻었으나
본다거나 듣는다는 것 모두가 거짓이다.
자기 마음도 아니요 인연도 아니니
묘한 중에도 묘하고 현현한 중에도 현현하다.
삼라만상이 광명 속에 나타나나
찾으면 그의 근원 찾을 수 없다.
여섯 도적 불태우고, 네 마군[四魔]을 무너뜨리니
아만의 산 꺾고 애욕의 강 말린다.
용녀는 영산靈山에서 부처님께 바쳤고
거지 아이는 옷 속에 품고 미쳐 헤매 다녔네.
성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니
성품도 마음도 아니어서 고금을 초월했다네.
본체에 이름을 끊었으니 이름을 붙일 수 없어
방편으로 농주음弄珠吟이라 제목하노라.
선사가 마곡麻谷과 산 구경을 하다가 개울가에 이르러 이야기를 하던 끝에 마곡麻谷이 물었다.
“어떤 것이 큰 열반입니까?”
선사가 고개를 돌리면서 대답했다.
“급하다.”
“무엇이 급합니까?”
“개울물이니라.”
선사가 처음으로 개당開堂했을 때에,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여야 문풍門風을 추락시키지 않겠습니까?”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문풍을 추락시키지 않느니라.”
“화상께서 말씀해 보여 주소서.”
“청산靑山과 녹수綠水는 닮지 않았느니라.”
선사가 어떤 스님을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산 밑에서 옵니다.”
“밥은 먹었는가?”
“먹었습니다.”
“그대에게 밥을 먹으라고 준 이도 눈이 있던가?”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어떤 스님이 이 이야기를 위산潙山에게 하니, 위산이 그 스님을 대신하여 말했다.
“있습니다.”
스님이 거듭 물었다.
“눈이 어디에 있습니까?”
“눈은 정수리에 있느니라.”
어떤 스님이 또 이 이야기를 동산洞山에게 하니, 동산이 말했다.
“만일 위산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렇게 말할 줄을 알겠는가?”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정수리에 있는 눈입니까?”
동산이 대답했다.
“위로 향하는 길을 잘 아는 것이다.”
초경招慶이 이 이야기를 들어 보복保福에게 물었다.
“밥을 주어서 먹게 한 이는 사례를 받아야 마땅하겠거늘 어째서 안목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까?”
보복이 대답했다.
“준 이나 받은 이가 모두가 눈먼 놈이기 때문이니라.”
“갑자기 어떤 사람이 그의 기봉을 다한다 해도 여전히 눈먼 놈이겠습니까?”
보복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그러면서도 사람을 위한다 합니까?”
“저더러 누구랑 의논하라 하십니까?”
며칠 뒤에 보복保福이 말했다.
“내가 눈먼 놈인가?”
선사가 여의송如意頌을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진여眞如는 여의보如意寶요
여의보는 진여이니
삼라森羅와 만상萬像이
한 법이요 더 이상은 없다.
바다가 밝아 외로운 달 비추니
하늘과 땅 사이가 훤하게 비었다.
적적하니 빈 형체와 그림자요
명명하니 한 가닥의 진여로다.
선사는 장경長慶 3년 계묘癸卯 6월 23일에 문인들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하여 목욕을 마치고 말했다.
“나는 길을 떠나야 되겠다.”
그리고는 삿갓을 쓰고 주장자를 짚고 신을 신으려 한 발을 드리워 그 발이 땅에 닿기 전에 떠나니, 춘추는 86세요, 시호는 지통智通 대사이며, 탑호塔號는 묘각妙覺이다. 유가劉軻가 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