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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4권
5. 사품(使品)[1], 번뇌의 차별과 모습
이미 업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업은 번뇌에 수반되어 종종의 생을 받으니, 번뇌를 떠난 것이 아니다.
[번뇌]
[때문에] 번뇌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일체의 유(有)의 근본은
업을 짝하여 백고(百苦)를 낳는다.
이른바 그 유에 칠사(七使)가 있다고
모니께서 설하셨으니, 마땅히 사유해야 하리라.
이른바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1)의 이들 존재는 탐욕 등의 칠사(七使)2)를 그 씨앗으로 삼는다.
번뇌 때문에 업이 있게 되고, 업 때문에 생을 받게 된다. 그 번뇌는 업을 짝하여 백가지 고를 낳으니, 업을 떠나지 않는다.
번뇌가 전개될 때는 열 가지 일이 지어진다. 곧,
[1] 이른바 뿌리를 견고히 하고,
[2] 분(分)이 상속하고,
[3] 밭을 일으키고,
[4] 의과(依果)를 낳고,
[5] 업유(業有)를 심고,
[6] 자구(自具)에 집착하고,
[7] 연(緣)에 우치하고,
[8] 인식의 흐름을 이끌고,
[9] 선업을 지나치고,
[10] 급속히 속박당하는 것 등으로,
[번뇌의] 경계를 뛰어넘는 방편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번뇌의 차별]
이와 같은 일곱 번뇌가 98가지가 됨을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경계와 행과 종을 분별하면
아흔여덟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열 종류는 수도(修道)에서 소멸하고
나머지는 견도(見道)에서 끊는다.
이 일곱 가지 번뇌는 그 계와 행과 종류를 분별하면 98번뇌로 된다.
그 일곱 중 탐욕의 번뇌는 98번뇌 가운데 그 종류로 분별되어 다섯 가지가 된다.
노여움의 번뇌도 또한 이와 같다.
존재에 대한 애착의 번뇌는 계와 종을 분별하여 열 가지가 된다.
오만함의 번뇌는 경계와 종을 분별하여 열다섯 가지가 된다.
무명(無明)의 번뇌도 또한 이와 같다.
견(見)의 번뇌는 행으로 분별하여 다섯 가지가 되는데, 그 행과 종을 다시 분별하면 열두 가지가 되고, 경계와 행과 종으로 분별하면 서른여섯 가지가 된다.
의심의 번뇌는 경계와 종으로 분별하면 열두 가지가 된다.
이와 같이 해서 7번뇌가 되고 다시 분별하여 98번뇌가 된다.
【문】이 98번뇌는 몇 가지를 견도(見道)에서 끊게 되고, 몇 가지를 수도(修道)에서 끊게 되는가?
【답】열 종류는 수도에서 소멸하고 나머지는 견도에서 끊게 된다. 애착과 오만과 무명은 경계로 분별하여 아홉 가지가 되고 진에(瞋恚)가 그 열 번째가 된다.
나머지 88 번뇌는 견도에서 끊어진다.
그것을 진리에 비추어 잠시만 바라 보아도 끊어지는 까닭에 견도라고 일컫는다. 자주 도를 익힘으로써 끊게 되는 것은 수도라 일컫는다.
만약 견도로 끊어지게 되는 경우 이것을 견단(見斷)이라 하고 또 수도로 끊어지게 되는 경우 이것을 수단(修斷)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불각심(不覺心)ㆍ각심(覺心)과 아홉 종류 중 한 종류와 아홉 종류 중 아홉 종류, 그리고 파석방편(破石方便)에 의한 끊음과 우사방편 및 아직 보지 못한 염관(炎觀)과 이미 본 염관등이다.
그리고 그것을 끊을 때 네 가지 행도(行道)를 닦는 것은 곧 견도단(見道斷)이며, 또한 그것을 끊을 때 열여섯 가지 행도를 닦는 것은 곧 수도단이다.
대무사對無事)와 대유사(對有事)도 역시 그와 같다.
이미 번뇌[使]의 대치에 있어서의 차별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종의 차별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스물여덟 가지 번뇌 있어
고제(苦諦) 밝히는 일 장애하나
고를 봄에 임해 그것은
영원히 다해 남아 있는 일이 없다.
견도의 단계에서 끊는 98번뇌 중 스물여덟은 고제를 밝히는 일을 가로 막기에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지게 된다.
이 끊어짐[斷]의 뜻은 이 품(品)의 후반부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집(集)을 밝힘으로써 끊는 것은 열아홉 가지이니
멸(滅)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셋을 더한 것은 도제(道諦)를 밝힘으로써 끊어지며
열 가지는 수도(修道)에서 소멸한다고 말한다.
집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지는 것은 열아홉 가지이니, 집제를 밝히는 일을 가로막기 때문에 집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멸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멸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지게 되는 열아홉 가지 번뇌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셋을 더한 것은 도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진다’라고 한 것은, 스물두 가지 번뇌가 도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짐을 말한 것이다.
‘열 가지는 수도에서 소멸한다’라고 한 것은, 열 가지 번뇌는 수도에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으로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미 번뇌의 종류의 차별을 설명하였다.
지금부터 그 경계의 차별을 설명하겠다.
첫 번째 번뇌의 종류는
욕계에 열 가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두 종류의 종(種)에도 일곱 가지가 있으며
나머지 여덟 가지는 도제를 밝혀 끊는다.
‘첫 번째 번뇌의 종류는 욕계에 열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처음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는 번뇌의 종류 가운데 열 가지 번뇌는 욕계에 결부된 것임을 말한다.
‘두 종류의 종에도 일곱 가지가 있다’라고 한 것은, 집제를 밝혀서 끊는 것과 멸제를 밝혀서 끊는 각각의 일곱 가지 번뇌는 욕계에 결부된 것임을 말한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도제를 밝혀서 끊는다’라고 한 것은, 도제(道諦)를 밝혀서 끊는 여덟 가지 번뇌는 욕계에 결부된 것임을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니, 욕계의 번뇌
네 가지는 수도(修道)에서 끊고
이른바 나머지는 위의 두 세계에서
마찬가지로 얻게 됨을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하니, 욕계의 번뇌 네 가지는 수도에서 끊는다’라고 한 것은, 수도에서 끊는 번뇌의 네 가지는 욕계에 속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해서 욕계에는 36가지 번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나머지는 위의 두 세계에서’라고 한 것은, 나머지 62 가지 번뇌는 색계와 무색계에 존재함을 말한 것이다.
【문】몇 가지가 색계에 결부되어 있으며 또 몇 가지가 무색계에 결부되어 있는가?
【답】마찬 가지로 얻게 됨을 알아야 한다. 즉 그 가운데 31가지 번뇌는 색계와 결부되고, 나머지 31가지 번뇌는 무색계와 결부된다.
이미 계와 종의 차별을 설명하였으니,
[번뇌의 독자적인 모습]
지금부터 번뇌의 독자적인 모습[自相]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이른바 유신견(有身見)과
수변견(受邊見)과 사견(邪見)
두 가지 취[二取], 이 다섯을
견(見)이라 함을 알아야 한다.
모든 행위는 연을 따라 일어난다. 하지만 무지하고 산만한 마음을 지닌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수음(五受陰)에서 독자적이건 함께 일어나건 나와 나의 것이라는 헤아림과 계착을 일으킨다. 이것을 ‘유신견’(有身見)이라고 부른다.
또한 제행에 있어서 단견(斷見)ㆍ상견(常見)을 받아들여 헤아리고 계착하는 것을 ‘수변견’(受邊見)3)이라고 부른다.
보시布施)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헤아리고 계착하는 것을 ‘사견’(邪見)4)이라 부른다.
유루법에서 그것이 제일이라고 받아들여 헤아리고 계착하는 것은 어떤 견해는 취하고 어떤 견해는 제거하는 까닭에 이것을 ‘취견견’(取見見)5)이라 부른다.
유루의 행에 있어서 청정한 행을 받아들이고는 헤아리고 계착하는데, 어떤 계등은 취하고 어떤 계등은 제거하는 까닭에 이것을 ‘취계견’(取戒見)6)이라 부른다.
이 다섯 번뇌는 결단코 끊어야 하기 때문에 견(見)이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사견이니, 삿되기에 결단코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행에 차별이 있는 까닭에 오견(五見)을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 취(取)7)는 범음으로는 마(摩)8)라고 표현할 수 있고 차(此)9)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두 표현에는 모두 ‘몰래 취한다[竊取]’ 는 의미와 ‘골라 택한다[選擇]’는 의미가 있다. 비록 사실과 이치가 서로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생각은 근본[宗]을 구하는 데 있는 까닭에 ‘골라 택한다’고 말하며, 받아들인 바가 도가 아닌 까닭에 ‘몰래 취한다’고 말한 것이다].
탐욕(貪欲)과 의심[疑]과 진에(瞋恚)와
오만[慢]과 어리석음[癡]은 비견(非見)이니
경계에 차별해서 전개되면서
갖가지 이름을 건립하는 것이다.
‘탐욕과 의심과 진에와 오만과 어리석음은 비견이다’라고 했는데,
그 경계에 대해 즐기고 집착하는 것을 ‘탐’이라 부르며,
진리에 대해 의혹을 품는 것을 ‘의’라 부르고,
중생이나 비중생에게 분노하는 것을 ‘진에’라 부른다.
또한 족성ㆍ모양ㆍ힘ㆍ재력ㆍ권세ㆍ능력 등을 다른 이와 비교해서 비천하다거나 대등하다거나 혹은 낫다는 생각을 일으켜 스스로 교만해지는 것을 ‘만’이라 부르며,
진리에 어리석은 것을 ‘치’라 부른다.
이 다섯 가지 번뇌는 지혜의 성질이 아닌 까닭에 견(見)이 아니다.
이것을 열 가지 번뇌〔十使]10)로 삼는다.
‘경계에 차별해서 전개되면서 갖가지 이름을 건립한다’고 한 것은,
이 열 가지 번뇌가 경계에 차별해서 전개되기에 종종의 이름이 건립됨을 말한 것이다.
이 모든 번뇌가 만약 고제(苦諦)를 밝힘을 장애하는 경우는 고를 밝혀 끊어지는 번뇌[見苦斷]라고 말하며,
마찬 가지로 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를 밝힘을 장애하는 경우는 이것을 도를 밝혀 끊어지는 번뇌[見道斷]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고(下苦)는 일체라고 말한다.
두 가지 행은 세 가지 견을 여의고
도(道)는 두 가지 견을 제외하고
상계(上界)에서는 노여움이 행해지지 않는다.
‘하고는 일체라고 말한다’라고 했는데,
하고란 욕계의 고(苦)를 말한 것이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열 가지 번뇌는 고제를 보는 일과 서로 어긋나기에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는 것이다.
‘두 가지 행은 세 가지 견을 여읜다’고 한 것은,
신견(身見)과 변견(邊見)과 계취(戒取) 등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가지 번뇌는 집제(集諦)와 멸제(滅諦)를 밝히는 일과 서로 어긋나기에 집제와 멸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됨을 말한 것이다.
‘도제는 두 가지 견해를 제외한다’라고 한 것은,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 번뇌는 도제를 밝히는 일과 서로 어긋나기에 도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문】왜 신견과 변견은 고제를 밝혀야만 끊게 되고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하는가?
【답】그것은 고통 받는 곳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며, 결과가 맺어지는 곳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본다면 곧 끊게 된다.
멀리 뿌리 내어 이르지 않으니, 이들 견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 까닭에 최초에 진리를 밝히게 되면 곧 끊어지는 것이다.
【문】왜 계취견(戒取見)은 고제와 도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지고 집제와 멸제는 해당되지 않는가?
【답】그 처에서 일어나는 것인 까닭에 외도[異學]는 그 두 진리에 대해 [입장이] 서로 어긋난다. 따라서 집제와 멸제는 아닌 것이다. 그 역시 때 묻은 곳인 까닭에 집제를 원하고 때를 씻는 곳인 까닭에 멸제를 원하는 것이다.11) 만약 그것이 내부의 법일 경우에는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고 만약 외부의 법일 경우에는 도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된다.
【문】어째서 의심의 번뇌는 수도로 끊는 것이 아닌가?
【답】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에 의심하며, 일을 보게 되기 때문에 의심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가 바야흐로 견을 일으키는 까닭에 어떤 견이든 수도(修道)의 단계에서 끊어지는 것은 없다.
‘상계에서는 노여움이 행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색계와 무색계에는 노여움이 제외됨을 말한다. 나머지는 욕계와 같이 말한다.
그 색계에서 고제를 밝혀서 끊는 번뇌는 아홉 가지이며
집제와 멸제를 밝혀서 끊는 번뇌는 여섯 가지,
도제를 밝혀서 끊는 번뇌는 일곱 가지,
수도를 통해 끊는 번뇌는 세 가지이다.
무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문】위의 두 세계에는 왜 노여움이 없는가?
【답】그곳에는 무참(無懺)ㆍ무회(無悔)ㆍ인색ㆍ질투ㆍ근심ㆍ괴로움의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번뇌가] 적정해지고 그치어 몸을 양생하기 때문이며,
아홉 가지의 괴로워할 성질이 없기 때문이며,
요익하지 못한 상(相)을 여의고 오로지 불선(不善)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과(果)12)인 까닭에 노여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번뇌의 경계가 건립되는 과정을 설명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