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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6권
3. 변차별품(辯差別品)①
3.5. 심소법(心所法)[2]
7) 심소법의 구생관계
① 욕계 제심소의 구생관계
여기서 마땅히 일체의 심소가 온갖 마음의 품류 중에서 함께 생기하는 수량에 대해 결택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마음의 품류 중에 몇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는 유심유사(有尋有伺)이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품류 중에 있어서는
스물두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며
어떤 때에는 악작(惡作)을 더하기도 한다.
불선으로서 불공(不共)이거나
견(見)과 함께 하는 경우는 오로지 스무 가지가
네 가지 번뇌나 분(忿) 등이나
악작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스물한 가지가 존재한다.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마음에는 열여덟 가지가 존재하고
무부무기의 마음에는 열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며
수면(睡眠)은 두루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모두에 하나씩을 더하게 된다.16)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욕계에서의 마음의 품류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에는 오로지 한 가지가 있고,
불선에는 불공무명(不共無明)과 구생하는 것과, 그 밖의 다른 번뇌 등과 구생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며,
무기에도 유부무기와 무부무기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욕계에서의 일체 마음의 품류는 결정코 항상 심(尋)ㆍ사(伺)와 상응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품류는 스물두 가지의 심소와 함께 생겨나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열 가지 대선지법과, 그리고 부정지법의 두 가지 심소 즉 심(尋)과 (伺)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 중에서 근(勤)과 사(捨)는 마땅히 함께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행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으로, 마치 나아가는 것[進]과 멈추는 것[止]과 같다. 즉 짓고 닦는다는 것[造修, 즉 勤을 말함]과 버린다는 것[委棄,즉 捨를 말함]은 이치상 동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계경에서도 역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생겨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으니, 두 가지 법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닦아야 하는 때와 닦지 않아야 하는 때를 동시에 설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마음이 만약 혼침의 상태라면 이 때는 마땅히 택법(즉 혜)과 근(勤)과 희(喜)를 닦아야 하지 경안이나 정(定)ㆍ사(捨)를 닦아야 하는 때가 아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이 도거의 상태라면 이 때는 마땅히 경안과 ‘정’과 ‘사’를 닦아야 하지 택법이나 ‘근’ㆍ‘희’를 닦아야 하는 때가 아니다.”17)
함께 생겨난다[俱生]고 하여도 여기에는 아무런 과실이 없으니,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올바른 이치[正理]에 머무는 자가 참다운 행[如理行]을 일으켜 멈추지 않는 것을 근(勤)이라 이름하며,
그 때 비리의 행[非理行]을 버리고 평등하게 되는 것을 사(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는 참다운 행과 비리의 행에 있어 ‘사’는 지칭(持稱)이나 진지(進止)가 평등한 것이기 때문에 ‘사’와 ‘근’은 서로가 서로에 수순(隨順)하여 선을 일으키고 악을 멈추게 하니, 그 행상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동일한 소연에 대해 하나(즉 ‘근’)는 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즉 ‘사’)는 버리는 것이라고 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위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과실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지법에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악작(惡作)이고 둘째는 수면(睡眠)이다.
이 두 법은 3계나 6식신의 유루ㆍ무루 모두에 통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불염오도 아니고, 또한 역시 오로지 염오한 것만도 아니다.
따라서 선한 마음의 품류에는 언제나 모두 악작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된다.18) 그럴 때 [욕계 선한 마음에서의 심소의] 수는 증가하여 스물세 가지에 이른다.
악작이라고 말한 것은, 후회는 그릇되게 저질러진 일[惡作]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악작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무상정(無相定)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19)
또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무상정이나 신념주(身念住)는 처소가 있어 [무상과] 신(身)이라고 이름하였다”고도 하였다.2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릇되게 저질러진 일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악작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면], 아직 지어지지 않은 일을 소연으로 하여 마음이 후회를 낳았을 경우, 마땅히 악작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21)
그렇지 않으니, 아직 짓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역시 ‘지은 일[作]’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을 짓지 않았던 것은 바로 나의 악작(즉 잘못된 일)이다’라고 후회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악작은 선ㆍ불선과 통하며, 무기와는 통하지 않으니, 우근(憂根,근심)에 따라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며, 욕탐을 떠난 자는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기법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기법에도] ‘나는 요즈음 어찌하여 소화시키지도 않고 먹기만 하는가? ‘나는 요즈음 어찌하여 이 벽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인가? 라고 추변(追變,추억)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따위의 유형은 그의 마음이 아직 우근과 접촉하지 않은 것으로, 단지 이와 같은 성찰만으로는 악작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마음이 우근과 접촉하였다면 바로 악작을 일으킬 것이며, 그 때의 악작은 이치상 우근과 동일하다. 따라서 악작은 이와 같은 특성을 갖는 것이라고 설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마음으로 하여금 슬퍼하게 하는 것을 악작의 마음이라고 한다.’ 만약 우근을 배제한다면 무엇이 마음으로 하여금 슬퍼하게 할 것인가?
곧 악작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선과 불선의 악작이 각기 모두 두 가지 처소(짓고 짓지 않음)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22)
만약 불선으로서 불공(不共)인 마음의 품류라면 스무 가지의 심소가 구생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여섯 가지 대번뇌지법과 두 가지 대불선지법, 그리고 ‘심’과 ‘사’의 두 가지 부정지법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불공인 마음의 품류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마음의 품류에는 오로지 무명만이 존재할 뿐 어떠한 경우라도 그 밖의 탐수면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23)
불공품(不共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의 구생관계도 역시 그러한데, 대지법 중의 혜(慧)의 차별을 견(見)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그 수는 증가되지 않는 것이다.24)
그리고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은 바로 간별(簡別,변별)의 뜻으로, 오로지 ‘견’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결정코 스무 가지가 존재하지만, 불공품 중에는 악작 등이 있을 가능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만약 악작이 불선일 경우, 오로지 무명과 함께 할 뿐 다른 여타의 번뇌와는 함께 하지 않으니, 탐(貪)과 만(慢)의 두 종류는 기쁨에서 일어나는 것[歡行轉]이기 때문이며, 진(瞋)은 외면적[外門]으로 일어나 그 행상이 거칠기 때문에 악작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의(疑)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악작은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지 않으며,
유신견(有身見) 등은 기쁨에서 일어나고 지극히 맹리(猛利)하지만 악작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악작은 선악의 행사처(行事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온갖 견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사견(邪見)의 일부는 비록 근심에서 일어나는 것[戚行轉]이라 할지라도 두 가지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악작과 함께 하지 않는다.25) 그렇기 때문에 악작이 바로 불선일 경우에는 오로지 무명과 함께 하며 불공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 분(忿) 등도 역시 그러하다.
탐(貪)ㆍ진(瞋)ㆍ만(慢)ㆍ의(疑)의 번뇌와 상응하는 네 가지 불선심의 품류에는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겨나는데, 그 중의 스무 가지는 불공품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기에 탐 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한 분(忿) 등의 수번뇌와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도 역시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함께 생겨나는데, 스무 가지는 불공품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기에 ‘분’ 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선의 악작과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도 역시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함께 생겨나니, 이를테면 바로 악작이 스물한 번째이며, [스무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만약 무기로서 유부심(有覆心)의 품류라면 오로지 열여덟 가지의 심소만이 존재하여 함께 생겨나니, 이를테면 [불공의 품류에서 함께 생겨나는] 스무 가지 법 중 대불선지법[의 두 종류]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26)
여기서 욕계의 무기의 유부심이란, 이를테면 살가야견(薩迦耶見,유신견을 말함)이나 변집견과 상응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견’이 증가하지 않은 것은 마땅히 앞에서와 같이 해석해야 할 것이다.27)
그 밖의 무기인 무부심(無覆心)의 품류에서는 오로지 열두 가지의 심소만이 함께 생겨난다고 인정[許]해야 할 것이니, 말하자면 열 가지 대지법과 아울러 부정지법인 ‘심’과 ‘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악작도 역시 무기(즉 무부무기)와 통한다. 즉 우근은 희근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유기(有記)만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과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는 바로 열세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겨나게 된다”고 하였다.28)
나아가 수면(睡眠)은 일체의 마음과 상위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마음의 품류에 모두 현행할 수 있다. 따라서 선ㆍ불선ㆍ무기심의 품류 중의 어떤 한 품류에 이것이 존재한다면 이를 더하여 설해야 하니,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하나씩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29)
그런데 공교처(工巧處) 등의 온갖 무기심은 모질게 노력하는 것[勇悍,즉 대선지법의 勤]과 유사하지만,30)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가행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근(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염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태(懈怠)도 없다.
그리고 신(信)과 불신(不信)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욕계에서 심소가 함께 생기[俱生]할 때, 온갖 품류에서의 정해진 수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② 색ㆍ무색계 제심소의 구생관계
이제 마땅히 상계(上界)에 대해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정려에서는 불선과
그리고 악작과 수면(睡眠)을 제외하며
중간정려에서는 또한 심(尋)을 제외하며
그 이상에서는 아울러 사(伺) 등을 제외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초정려 중에서는 앞(욕계)에서 설한 온갖 심소법 중에서 오로지 불선과 악작(惡作)과 수면(睡眠)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이 모두 함께 존재한다.
여기서 ‘오로지 불선’이라고 함은 진(瞋)번뇌와 무참ㆍ무괴와, 첨(諂)ㆍ광(誑)ㆍ교(憍)를 제외한 그 밖의 분(忿) 등을 말하며,
‘그 밖의 것이 모두 존재한다’고 함은 욕계에서 설한 바와 같다.31)
중간정려에서는 앞에서 제외한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 다시 심(尋)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이 모두 함께 존재한다.32)
제2정려 이상에서부터 무색계 중에 있어서는 앞에서 제외한 것을 제외하고, 또한 사(伺) 등을 제외하는데,
여기서 ‘등’이라 함은 첨(諂)과 광(誑)도 제외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 밖의 심소는 모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함께 존재한다.
즉 욕계에서부터 범천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왕과 신하와 중생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첨’과 ‘광’이 존재하지만, 그 이상의 단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33)
이와 같이 3계(界)에 계속(繫屬)되는 온갖 마음과 심소법이 함께 생겨나는데 정해진 수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8) 서로 유사한 심소법의 분별
①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그런데 온갖 심소법의 성상(性相)에는 매우 유사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차별을 알기가 어렵다. 이제 유부 종의(宗義)에 따라 그 같은 심소의 개별적인 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애(愛)와 경(敬)의 개별적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참과 무괴는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죄에 대해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이며
‘애’와 ‘경’이란 말하자면 신(信)과 참(慚)으로서
오로지 욕계와 색계에만 존재할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참과 무괴의 차별은 이러하다.
온갖 공덕과 공덕 있는 자에 대해 공경[敬]하는 일이 없고, 존중[崇]하는 일이 없으며, 어렵게 여겨 꺼리는 일[忌難]도 없을 뿐더러 따라 속하는 일[隨屬,즉 제자가 되어 예의를 갖추는 일]도 없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고 한다.
여기서 온갖 공덕이란 시라(尸羅,śila, 계율) 등을 말하며,34) 공덕 있는 자란 친교사(親敎師, 스승) 등을 말한다. 곧 이러한 두 대상에 대해 공경하는 일도 없고, 존중하는 일도 없는 것이 바로 무참의 특성이니, 이는 바로 공경하고 존중하는 것을 능히 장애하는 법인 것이다.
혹은 ‘공경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온갖 공덕에 근거로 하여 설한 것이고,
‘존중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공덕 있는 자에 근거로 하여 설한 것이며,
‘어렵게 여기는 일도 없을 뿐더러 따라 속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앞의 두 가지(공덕과 공덕 있는 자)를 모두 나타낸 것이거나 혹은 그 순서에 따른 것이다.35)
지은 죄에 대해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한다.
즉 모든 관행자(觀行者)가 꾸짖고 싫어하는 법을 설하여 죄(罪)라고 말한 것인데, [관행자가] 꾸짖고 싫어하는 온갖 죄업은 능히 이 세계나 저 세계가 나무라고 헐뜯을 만한, 비난하고 벌할 만한, 애호할 수 없고 참기 어려운 이숙과를 초래한다는 등의 사실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도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무괴의 특성이다.
이는 바로 죄업의 과보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가?
그것(죄업의 과보)을 두려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인가, 보고도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마땅히 무명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마땅히 사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36)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이 말은, ‘보는 것[見, 즉 보고도 두렵지 않다는 사견]’이나 ‘보지 않는 것[不見, 즉 두려움으로 보지 않는다는 무명]’이 무괴의 본질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어떤 수번뇌의 법으로서 능히 현행의 무지(無智, 무명)와 사지(邪智,사견)의 직접적인 원인[近隣因]이 되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 말일 뿐이다.
이상의 뜻을 요약한다면, 이를테면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공덕과 공덕 있는 자에 대해 존중하고 공경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 하고,
죄가 현행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일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온갖 번뇌에 대해 능히 싫어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 하고,
온갖 악행에 대해 능히 싫어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홀로 있으면서 죄를 짓고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무참’이라 하고,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죄를 짓고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설하여 ‘무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불선심을 바로 일으킬 때 이숙인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 하고,
이숙과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 없는 것을 ‘무괴’라 한다”고 하였다.
즉 온갖 불선의 마음이 현재전하는 상태에서 그 원인과 과보에 대해 모두 살펴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한 찰나의 마음 중에 두 가지의 법이 함께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 반대로 해석한 것이 참(慚)과 괴(愧)의 다른 점이다.
즉 청정한 의요(意樂,뜻)로서 착한 이가 애락(愛樂)하는 뛰어난 업[勝業]을 익히려고 하는 이를 유참자(有慚者)라고 이름하며,
착한 이가 애락하는 뛰어난 과보[勝果]를 획득하려고 하는 이를 유괴자(有愧者)라고 이름하니,
온갖 유정으로서 뛰어난 업과 뛰어난 과보를 애락하는 이는 반드시 나쁜 원인[惡因]과 괴로운 과보[苦果]에 대해서도 역시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선한 마음이 현재전하는 상태에서는 그 원인과 과보 모두에 대해 결정코 어떠한 미혹도 없으니, 이에 따라 ‘참’과 ‘괴’는 한 찰나의 마음에 함께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여사는 이와 같은 뜻으로써 심수(心首)를 나타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지은 죄에 대해 그 자체를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 하고,
다른 것을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한다”고.
말하자면 이숙인은 때가 되면 응당 현기하기 때문에 ‘그 자체’라고 하였고,
그것의 이숙과는 후시(後時)에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한 뜻은,
‘온갖 죄를 짓는 자는 의요가 부정(不淨)하여 현행의 죄업과 당래의 괴로운 과보에 대해 모두 살펴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무참과 무괴의 차별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② 애(愛)와 경(敬)
애(愛)와 경(敬)의 차별은 이러하다.
‘애’란 애락(愛樂)을 말하는 것으로, 그 본질[體]은 바로 신(信)이다.37) 그런데
‘애’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염오함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염오함이 없는 것이다.
염오함이 있는 ‘애’란 탐(貪)을 말하며, 염오함이 없는 ‘애’란 신(信)을 말한다.38)
‘신’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가하는 것[忍許相]이고, 둘째가 즐거움을 원하는 것[願樂相]이다.
만약 이러한 이(즉 공덕이 있는 자)를 소연으로 삼아 지금 바로 인가하면 혹 거기서도 역시 원하는 즐거움을 낳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애(염오함이 없는 애)’는 바로 두 번째 ‘신’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원인에 대해서도 역시 결과의 명칭을 설정할 수 있으니, 앞의 ‘신’은 바로 ‘애’의 직접적인 원인[隣近因]이 되기 때문에 ‘애’라고 일컬어도 과실이 없는 것이다.
‘경’이란 경중(敬重)을 말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바로 참(慚)이다. 이를테면 앞서 대선지법을 해석하는 중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의 자재성을 설하여 ‘참’이라고 함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경’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존중[崇重]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경’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것이 선행함에 따라 비로소 ‘참’의 부끄러워함[慚恥]이 생겨나기 때문에 ‘경’은 ‘참’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그 논사는 마땅히 ‘참’의 부끄러워함이 없는 자도 능히 공경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먼저 공경을 일으켰을 때에는 아직 ‘참’의 부끄러워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마땅히 ‘참’의 부끄러워함이 없는 자일지라도 능히 공경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공경할 때 이미 ‘참’의 부끄러워함이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마땅히 “공경이 선행함에 따라 비로소 ‘참’의 부끄러워함을 낳게 되었다”고 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공경할 때 ‘참’의 부끄러워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경’이 바로 ‘참’은 아니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경은 참이 아니다’는 말에는 어떠한 논거[證因]도 없기 때문이다.
곧 먼저 공경하고 나서 비로소 ‘참’의 부끄러워함을 낳게 되는 것이 아니니, 그럴 경우 ‘참’을 갖지 않은 자는 능히 공경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며, 또한 공경함이 있는 자로서 ‘참’의 부끄러워함을 갖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경’의 본질은 ‘참’이 아니라고 확고히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만 허언(虛言)일 뿐 아무런 실제적인 의미도 없다. 따라서 마땅히 ‘경’ 자체는 바로 ‘참’의 차별로서, ‘참’을 가진 자를 일컬어 존중함이 있는 자라고 해야 하며, 이러한 ‘참’의 차별을 일컬어 ‘경’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즉 보특가라(補特伽羅,pudgala,인간을 말함)를 경계로 삼기 때문에 ‘참’을 차별하여 ‘존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저 ‘존중한다’고 함은 바로 마음의 자재로서, 앞서 마음의 자재성을 ‘참’이라 한다고 이미 논설하였다.
즉 마음 중에 자재력이 있어 능히 스스로 제복(制伏)하여 존중하게 되니, 그래서 ‘경’의 본질은 바로 ‘참’의 차별이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 존중받아야 할 모든 이에 대해 숭상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경’이라고 말한 것이니, 이는 바로 경계로서의 제7(第七,즉 處格)의 용법이거나 혹은 근거[因]로서의 제7의 용법이다. 즉 존중받아야 할 분에게 소속되고자 하는 뜻을 낳음에 따라 이를 일컬어 ‘참’이라 한 것이니, 이러한 ‘참’은 바로 존중되어야 할 분에 대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의 본질이 바로 ‘참’의 차별이라는 뜻은 잘 성취되었다. 곧 이러한 논증에 따라 보특가라를 경계대상으로 하는 신(信)과 참(慚)을 설하여 애(愛)와 경(敬)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경우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애’와 ‘경’이 비록 대선지법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무색계 중에 존재하는 것으로는 설정되지 않는다.39)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믿고 따르며[信順] 친밀할지라도 탐염(耽染)이 없는 상태를 ‘애’라 하고, 존중할 분을 우러러 숭상 존중하며, 따라 속하는 것을 ‘경’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다른 유여사는 설하기를,
“선사(善士)와 친근하게 하는 근거를 일컬어 ‘애’라 하고, 그의 말씀을 어기지 않게 하는 근거를 ‘경’이라 한다”고 하였다.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화합중(和合衆,즉 승가)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見] 등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애’라고 말하고, 존중해야 할 분에 대해서는 깊은 마음으로 공경하여 받들기 때문에 ‘경’이라 말한다”고 하였다.
곧 이 같은 [보특가라를 대상으로 하는] ‘애’와 ‘경’은 욕계와 색계에만 존재할 뿐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의 소의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애’와 ‘경’의 차별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③ 심(尋)과 사(伺)
그렇다면 심(尋)과 사(伺), 만(慢)과 교(憍)의 차별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尋)과 사(伺)는 마음의 거칠고 세밀함이며
만(慢)은 타인에 대한 마음의 오만함[擧]이며
교(憍)는 자신의 법에 염착(染著)함으로써
마음이 고양되어 돌아봄이 없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심(尋)과 사(伺)의 차별은 이를테면 마음의 거칠고 세밀함이다.
즉 마음의 거친 성질[麤性]을 설하여 ‘심’이라 말한 것이며, 마음의 세밀한 성질[細性]을 설하여 ‘사’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심’과 ‘사’ 자체는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경에서도 바로 마음에 대해 두 가지 성질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경에서 말하고 있는 취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마음의 거칠고 세밀한 성질을 일컬어 ‘심’과 ‘사’라고 말한 것은,
이 법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거칠게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법을 ‘심’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며,
이 법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세밀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법을 ‘사’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혹은 “그래서 [‘심’과 ‘사’] 자체는 마음과 다른 것이다”라고 달리 해석해야 할 것으로,
이를테면 우리는 마음이 지닌 거친 성질[心之麤性]을 마음의 거친 성질[心麤性]이라 이름하고,
마음이 지닌 세밀한 성질[心之細性]을 마음의 세밀한 성질[心細性]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가?
마음에 근거하는 거친 성질을 마음의 거친 성질[心麤性]이라 이름하고,
마음에 근거하는 세밀한 성질을 마음의 세밀한 성질[心細性]이라 이름한 것인가?40)
비록 일 찰나의 마음 중에 두 가지의 법체가 획득될 수 있을지라도 작용이 증강(增强)되는 때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물과 초(酢)를 같은 분량으로 화합하면 그 자체는 비록 평등할지라도 작용에 증강이 있는 것과 같다.
곧 거친 마음의 품류 중에서는 ‘심’의 작용이 증강하였기 때문에 ‘사’의 작용은 감손되어 존재하더라도 지각하기 어렵다.
또한 세밀한 마음의 품류 중에서는 ‘사’의 작용이 증강하였기 때문에 ‘심’의 작용은 감손되어 존재하더라도 지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초의 작용은 언제나 증강한 것이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나는 결정코 초를 ‘심’에 비유하고, 물을 ‘사’에 비유한다고는 설하지 않았으며, 다만 작용에 증강이 있는 것이 바로 초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심’과 ‘사’는 비록 일 찰나의 마음 중에 그 법체가 함께 획득될 수 있을지라도 작용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일 찰나의 마음이 바로 거칠고, 또한 바로 미세한 경우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비록 탐(貪)과 치(癡)의 성질이 비록 함께 현행할지라도 그 때의 마음을 유탐(有貪)의 행(行)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떠한 마음에도 작용이 강성한 법이 존재하니, 바로 이러한 법을 문(門)으로 삼아 마음의 품류를 전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무색법은 작용에 대해서만 증강을 설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과 ‘사’의 차별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④ 만(慢)과 교(憍)
만(慢)과 교(憍)의 차별은 이러하다.
‘만’이란 이를테면 타인에 대해 마음이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성질[自擧性]을 말하니, 자신과 다른 이의 덕(德)의 뛰어남과 저열함, 혹은 진실됨과 거짓됨을 재고 헤아려 마음이 스스로를 믿고 거들먹거리며[擧恃] 다른 이를 능멸하기 때문에 ‘만’이라고 일컬은 것이다.41)
‘교’란 이를테면 먼저 자신의 법에 대해 염착(染著)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오만 방일[傲逸]하게 하여 되돌아보는 일이 없는 성질[無所顧性]을 말한다. 즉 자신의 용감함이나 건강, 재산, 지위, 도덕규범[戒], 지혜, 친족 등의 존재에 대해 먼저 염착을 일으켜 마음에 오만 방일함이 생겨남으로써 온갖 선본(善本)을 되돌아보는 일이 없기 때문에 ‘교’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온갖 선본에 대해 되돌아보는 일이 없다’고 함은, 마음이 오만해짐에 따라 온갖 선업을 즐거이 수습(修習)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만’과 ‘교’의 차별의 상이다.
이와 같이 온갖 심ㆍ심소의 품류의 동일하지 않음과 동시생기[俱生]의 관계와 결정적인 차별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9) 심ㆍ심소법의 이명(異名)과 오의평등(五義平等)
그런데 심과 심소에 대해 계경 중에서는 그 뜻에 따라 여러 가지의 명칭과 개념[名想]을 설정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 마땅히 이러한 명칭의 차별되는 뜻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心)과 의(意)와 식(識)은 그 본질이 동일하며
심과 심소는 유소의(有所依)로도
유소연(有所緣)으로도, 유행상(有行相)으로도
상응(相應)으로도 일컬어지니, 다섯 가지 뜻을 갖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심(心)과 의(意)와 식(識) 세 가지의 본질은 비록 동일하지만, 그러한 말 등이 사용되어진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
즉 집기(集起)하기 때문에 ‘심’이라 이름한 것이고,
사량(思量)하기 때문에 ‘의’라고 이름한 것이며,
요별(了別)하기 때문에 ‘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42)
그런데 『파륵구나계경(頗勒具那契經)』에서의 뜻은 ‘능히 요별하는 자를 배제하더라도 요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43)
혹은 여러 가지[種種]라는 뜻이기 때문에 ‘심’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며,44)
이러한 ‘심’은 다른 것의 소의지(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의’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며,
능의지(能依止)가 되기 때문에 ‘식’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45)
혹은 계(界)ㆍ처(處)ㆍ온(蘊)을 시설(施設)하기 위한 차별이며,46) 혹은 또한 증장(增長)과 상속(相續)과 업생(業生)의 종자로서 차별되어 [시설되기도 한다].47)
이와 같이 [그 말이 사용되어진] 의미상으로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심ㆍ의ㆍ식의 세 가지는, 명칭에 의해 드러나는 뜻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다.
심ㆍ의ㆍ식의 세 가지가 명칭에 의해 드러나는 뜻은 다를지라도 본질은 동일하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온갖 심과 심소를 유소의(有所依)ㆍ유소연(有所緣)ㆍ유행상(有行相)ㆍ상응(相應)이라 이름하는 것 또한 역시 그러하여 비록 말의 뜻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동일하다.
즉 심ㆍ심소는 다 같이 6내처(內處)를 소의로 삼기 때문에 ‘유소의(sāśraya)’라고 이름한 것이며,
색 등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유소연(sālambana)’이라 이름한 것이며,
바로 소연이 되는 [경계대상의] 품류의 차별에 대해 행상(行相)을 일으키기 때문에 ‘유행상(sākāla)’이라고 이름한 것이며,48)
평등하게 동시에 다른 [심ㆍ심소]법과 화합하기 때문에 ‘상응(samprayukta)’이라고 이름한 것이다.49)
무엇을 일컬어 ‘평등하다’고 한 것인가?
다섯 가지 의미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즉 심과 심소는 다섯 가지의 의미에서 평등[五義平等]하기 때문에 ‘상응’이라고 설한 것으로, 소의ㆍ소연ㆍ행상ㆍ시(時)ㆍ사(事)가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평등이란, 하나의 상응 중에 마음의 체(體)가 하나이듯이 온갖 심소법도 각기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50) 즉 심소는 마음을 떠나 별도의 자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비유자(譬喩者)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오로지 마음[心]만이 존재할 뿐 별도의 심소는 존재하지 않으니,
마음과 상(想)이 동시에 생겨날 때 그 행상의 차별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경에서는 오로지 식(識)이 모태에 들어간다고만 설하고 있기 때문이며,51)
또한 ‘혹은 심(心)이, 혹은 의(意)가, 혹은 식(識)이 오랫동안 유전하여 온갖 취(趣)에 태어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사부(士夫,puruṣa, 인간을 말함)는 6계(界)에 포섭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52)
또한 ‘나는 바야흐로 어떠한 법도 마음처럼 빠르게 회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나는 바야흐로 마음처럼 수습(修習)되지 않으면 조절되지도 않고 유연하지도 않아 아무 것도 감당하지 못하는 어떠한 법도 보지 못하였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마음은 멀리 가고 홀로 간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심소에 대한 많은 쟁론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혹 어떤 이는 심소에는 오로지 세 가지뿐이라고 설하였고,
혹 어떤 이는 심소에는 오로지 네 가지뿐이라고 설하였으며,
혹은 열 가지가 있다고 설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열네 가지를 설하기도 하였던 것이다.53)
그러므로 오로지 식(識)만이 존재할 뿐으로, 그것이 [작용하는] 상태[位]에 따라 유전하는 것을 ‘여러 종류의 심ㆍ심소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니,
마치 사탕수수 즙과도 같고, 노래 부르는 기녀[倡伎人]와도 같다.54)
따라서 수(受) 등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획득될 수 없는 것이다.”(이상 비유자의 심소 무별체설)
그렇지만 심과 심소는 시간(생기 내지 소멸의 시간)과 경계대상과 성질(선ㆍ불선 등)이 동일하며, 행상에 어떠한 차별도 없어 그 상을 알기 어렵다.55)
그래서 계경에서도
“심ㆍ심소법은 전전(展轉)하며 상응하는 것으로, 혹은 수(受), 혹은 상(想), 혹은 사(思), 혹은 식(識) 등 이와 같은 법들은 서로 뒤섞여[和雜] 분리되지 않아 그것들의 차별의 상을 시설할 수가 없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식’과 ‘상’은 그 상이 각기 다르니,
이를테면 경계대상에 대해 전체적으로 요별하는 것을 ‘식’이라 하고,
언어적 개념[名想]을 개별적으로 취하는 것을 시설하여 ‘상’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마음이 강성하기 때문에 여러 계경 곳곳에서 이를테면 ‘왕이 온다’는 식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설하게 된 것이며,56)
[심소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마음은 홀로 간다[獨行]’고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심소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다수의 쟁론이 일어난 것이니, 어찌 쟁론이 많다고 하여 그것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이러저러한 쟁론 사이에 과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지만 여러 논자(論者)들은 모두 마음을 떠나 별도의 심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다.
다만 경에서는 결정적인 수량에 대해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다소간의 수량의 증감에 대해 쟁론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수(受) 등은 바로 마음의 차별일 뿐이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마음이 바로 심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떠한 결정적인 이치에 근거하여 식(識)을 설하여 마음[心]이라 하였으며,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마음이] 바로 심소라고 말하는 것인가?57)
만약 ‘온갖 식의 본질[體]은 바로 마음이며, 수(受) 등의 제법은 바로 이러한 마음 자체의 종류로서, 마음의 상속 중에 이러한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소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온갖 소조색(所造色)은 바로 대종(大種) 자체의 차별로서, 지(地) 등의 상속 중에 이러한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조색이라 이름한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인가?58)
이것이 이미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째서 그러한가?
대종을 떠나서도 그 밖의 별도의 소조색이 존재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순정리론』(제11권)에서 이미 널리 결택한 바와 같다.
만약 ‘심소법은 마음을 떠나 개별적인 실체로서 결정코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떠한 근거에서 알게 된 것인가?’라고 힐책하여 묻는다면, 교증(敎證)과 이증(理證)에 따랐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말하기를
“안(眼)과 색을 연(緣)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나고, 세 가지의 화합인 촉(觸)은 수ㆍ상ㆍ사와 함께 생겨나니, 이와 같은 제법은 바로 마음의 종류이며, 마음에 의지하며, 마음에 계속(繫屬)된다. 그래서 심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함께 생겨난다’고 하는 말은 무간(無間,즉 간단없는 계시상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심소가 동시에 생겨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또한 마음 자체가 구생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앞의 경설은] 다만 심소의 구기를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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