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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경 하권
9. 요계품[2]
[악한 비구]
사리불아, 이와 같은 승려 가운데도 좋은 비구가 있다. 당파에 기울어진 마음이 없고 중도에 처한다.
그럼에도 또한 그 악한 가운데 있으면서 서로 꾸짖으며 논쟁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안온하게 좌선(坐禪)하며 독경하지를 못하고,
또 재가(在家)와 출가(出家) 모두가 어지러이 움직인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이 때 많은 비구가 있는데 1년, 2년, 3년 내지 9년의 상좌(上座)를 업신여겨[輕慢] 공경함이 없다.
이 사람은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해도 법과 같지 않음이 많다.
화상 아사리에게 배웠음에도 또한 공경함이 없다.
사리불아, 이 때 나이 어린 비구와 먼저 출가한 자도 의지할 곳이 없고, 10년 된 비구가 모이는 곳에서 무리를 업신여긴다.
그 여러 무리는 모두가 공경함과 위의와 법칙이 없으며 또 법과 같지가 않다.
사리불아, 이 때 여러 악인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구족하고 서로 업신여겨 공경함이 없다.
서로 어기고 거스르기 때문에 나의 법은 골 멸한다.
사리불아, 이 때 여러 어리석은 사람은 계를 깨트리는 많은 죄업을 짓는다.
이 죄를 짓기를 마치고 마땅히 악도(惡道)에 떨어진다.
사리불아, 나는 지금 명료하게 너에게 말한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을 스스로 구하는 착한 비구는 이 때 마땅히 무리 속에 들어가 하룻밤이라도 자지 말아야 한다.
오직 번뇌를 이미 끓은 아라한과 병든 비구 가운데서 인연이 있는 자는 제외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마땅히 이 때의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독이 치성하여 살아도 두려워하며 항상 핍박을 받는다.
이로움을 구하는 착한 사람은 항상 마땅히 산과 숲의 공적(空寂)한 곳에 있고, 내지 목숨이 다하는 것도 들짐승이 죽는 것과 같아야 한다.
[착한 비구]
사리불아, 나는 지금 명료하게 너에게 말한다.
나의 이 진실한 법은 오래도록 세간에 머물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의 복덕과 선근은 이미 다하여 혼탁한 세상이 가까이 이르렀다.
스스로 이로움을 구하는 착한 비구는 마땅히
‘내가 어찌 법이 깨트려지고 어지러운 것을 보겠는가?
이 사문의 악세(惡世)의 난을 볼 때, 나는 마땅히 마음을 부지런히 해서 정진하여 빨리 도의 열매를 얻어야겠다’ 하고
이와 같은 염심(厭心)을 내어야 한다.
사리불아, 나의 법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없다고 하면 옷과 음식과 침구와 의약을 생각하지 말라.
너희들은 마땅히 다만 불도를 부지런히 행하여야 한다.
세간의 재물과 이익[財利]과 공양을 귀하게 여기지 말아라.
사리불아, 너는 지금 잘 들어라. 내가 마땅히 너에게 설할 것이다.
만약 일심으로 도를 행하는 비구가 있으면 천억(千億)의 하늘과 귀신 모두가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모든 악구(樂具)로써 공양하고자 한다.
사리불아, 좌선하는 비구를 여러 사람이 공양하여도 하늘과 귀신에게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사리불아, 너는 스스로 공양을 얻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아라.
부처의 참다운 교화에 마땅히 수순하여 행하여야 한다. 제일의인 공(空)으로써 사람의 잘못과 악을 들추어 내지 말아라.
왜냐 하면 사리불아, 크게 험난한 것은 이른바 공을 얻는 일이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비구가 나의 법으로 인하여 출가하여 계를 받고, 이 법 가운데서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여, 모든 하늘과 귀신과 여러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도,
다만 능히 일심으로 도를 부지런히 행하는 자는, 또 끝까지 의식(衣食)이 필요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여래의 복의 창고는 무량하여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여래가 멸한 뒤 백호상(白毫相) 중의 백천억분(百千億分)의 일이라도 사리불과 모든 제자를 공양할 것이며,
사리불아, 설사 모든 세간의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모두들 출가하게 하고 법에 수순하여 행하게 하여도 백호상의 백천억분의 일이라도 다하지 못한다.
사리불아, 여래의 이와 같은 무량한 복덕은, 만약 모든 비구가 얻는 밥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있는 대로 모두 충족함을 얻게 한다.
사리불아, 이 모든 비구는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마땅히 필요한 물건에 대하여 여러 삿된 명(命)과 나쁜 법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납의의 비구]
사리불아, 만약 납의(衲衣)의 비구가 분소(糞掃) 가운데서 해지고 낡은 것을 줍는다면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내어야 한다.
‘이것으로서 추위를 막고 거룩한 길을 닦으리라.
내가 지금, 이 해지고 낡은 것을 기워서 승가리(僧伽梨)를 지어 입고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리라. 만약 범부로서는 하룻밤도 마땅히 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이 비구는 깨끗하게 빨아서 기워 입는다.
만약 이 비구가 이 납의(衲衣)에 대해서 탐착하는 마음을 내도 그러한데, 하물며 다른 옷이겠느냐?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이 비구가 이 옷 가운데 있어서 비구답지 아니한 법을 행하면, 이 비구도 또 마땅히 집착하지 아니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른 물건이겠느냐? 왜냐 하면 이 옷 가운데서 마음에 물들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납의(衲衣)의 비구는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해야 한다.
‘이 납의(衲衣)를 입는 것으로써 추위와 더위를 막고 이로써 수도(修道)를 도우며, 나는 지금 또 다른 옷을 애착하지 않으며, 마땅히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사다함과(斯陀含果)와 아나함과(阿那含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겠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납의의 비구는 오로지 도를 구해야 하며, 나는 곧 집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걸식하는 비구]
사리불아, 걸식(乞食)하는 비구는 마땅히 이 모든 법 중에서 분별함이 없어야 한다.
항상 그 마음을 거두어 잡아 산란하지 않게 하여 마을에 들어가야 한다.
여러 선정(禪定)으로 스스로 장엄하고, 걸식을 마치고서는 마음이 물들지 말고 더럽히지 말라.
얻은 밥을 가지고 마을에서 나와 큰 물가, 수도하기에 좋은 곳에서 밥을 한쪽에 놓아두고, 발을 씻고, 앉아서 밥을 앞에 놓고, 마땅히 염리(厭離)를 생각하고,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과, 오줌과 똥의 생각과, 썩고 냄새나는 생각과, 변하여 뱉어내는 생각과, 곪은 생각과 염오(厭惡)의 생각과, 열매의 생각과, 무겁게 가라앉는 생각을 내야 한다.
탐착함이 없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뒤에야 먹을 것이다.
다만 몸을 가누고 굶주림과 병을 없앰으로써 수도를 얻는다.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이 밥을 먹고서 먼저의 고뇌를 깨트리고 뒤의 괴로움을 낳지 않는다.
마음에 쾌락을 얻어 고르고 적당하고 어리석음이 없다. 몸은 가볍고 편안하여 걸음걸이가 안온하다.’
또 생각해야 한다.
‘이 밥을 먹기를 마치고 나는 마땅히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ㆍ아라한과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리라.’
사리불아, 비구가 이와 같이 먹으면 나는 걸식하는 것을 허락한다.
사리불아, 만약 걸식하는 비구가 얻은 밥에 대하여 맛을 탐하는 마음을 내고,
그래서 달고 맛이 있다고 하면,
‘내가 이 밥을 먹고 마땅히 혈색이 좋아지고 기력이 충실하고 왕성함을 얻겠다’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나는 이 밥을 먹고 부지런히 거룩한 길을 행하리라’는 이러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비구가 한 모금의 마시는 물이라도 받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 하물며 밥이겠느냐?
사리불아, 만약 밥 중에서 잘못함과 악을 보지 않고 도에 나옴을 보지 않고 잊고서 곧 먹으려면 차라리 스스로의 손으로 다리의 살을 저며서 먹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행자와 얻는 자에게 남의 공양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자(行者)]
사리불아, 무엇을 이름하여 행자(行者)라고 하는가?
만약 어떤 비구가 결정코 발심(發心)하여 나의 금세(今世)에서 모든 얽매임과 번뇌의 사역(使役)을 끊고 마땅히 무여일반(無餘涅槃)에 들어 거룩한 도를 닦음이 머리에 불붙은 것을 구함과 같이 해야 한다.
또 마땅히 선하지 않은 악법(惡法)을 끊어 없애는 것, 이를 행자라고 이름한다.
또 능히 일심으로 공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을 믿고 이해하여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ㆍ아라한과를 얻기 위하여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을 행자라고 이름한다.
모든 선법(善法)을 구하여 항상 자문(諮問)을 행하는 것을 행자라고 이름한다.
또 능히 발심하여 일체를 제도하여 해탈케 하고자 함을 행자라고 이름한다.
마음을 부지런히 해서 모든 도를 돕는 법을 수습하고 모든 경 중에서 설한 바와 같이 행하고, 또 일심으로 불도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사리불아, 불법 중에 있어서 이를 행자라고 이름한다.
[얻는 자]
무엇을 얻는 자[得者]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수다원을 얻어 3악도(惡道)를 벗어나는 것을 얻은 자라고 이름한다.
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고 도를 구하여 마치고서 쉰다.
짓는 바는 이미 3학(學)을 갖추어 잘 배운다.
이를 얻는 자라고 이름한다.
나는 이 사람이 공양을 받아 얻는 것을 허락한다.
이 사람이 만약 공양을 받으면 이를 공양을 잘 받는 자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청정한 지계자(持戒者)와 신도를 개화(開化)하는 자와 다문(多聞)을 닦아 경을 독송하는 자는 이를테면 수투로지야수기경(修妬路岐夜授記經)ㆍ가타우타나(伽陀憂陀那)ㆍ니타나(尼陀那)를 독송한다.
이 사람은 또 능히 청정하게 계를 지니어 하자가 없다.
때묻지 아니하고 혼탁하지 아니하고 자재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가 찬탄하는 바를 능히 스스로 구족한다.
선정(禪定)에 수순하여 때때로 좌선(坐禪)을 즐긴다.
이와 같은 비구에게는 또한 공양을 받는 것을 허락한다.
사리불아, 몸으로 법을 증득(證得)하는 자는 의혹과 뉘우침이 없다.
나는 이 사람에게 높은 자리에서 설법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가 범부라 하여도 청정하게 계를 지니어 마음이 외도의 경의 뜻에 탐착하지 않는다.
일심으로 부지런히 사문의 뛰어난 열매를 구한다.
이익을 탐하지 않고 착하고 공교하게 결정코 설한다.
다문(多聞)이며 넓어 비유하면 마치 대해(大海)를 하지 않는다.
다루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한다. 오직 청정한 제일의 진실한 뜻을 설한다.
설하는 바가 이와 같고, 또 이와 같이 행한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설하면 나는 설법을 허락한다.
여래의 설하는 바는 능히 모든 법으로 하여금 서로 거스르고 어기지 않게 한다.
이를테면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을 설한다.
사리불아, 이익을 구하는 비구는 부처를 위하여 출가하였음에도 계품(戒品)을 깨트린다. 어찌 설법을 쓰겠느냐?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나는 경에 설하였다.
만약 사람이 스스로 착하고 공적하지 않으면 스스로 지키지 못하며, 능히 남의 착하고 공적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지키게 하려 하므로 그러할 수가 없다.
사람이 스스로는 더러운 진흙에 빠져 있으면서 남을 구출하고자 하는 것과 같아 그러할 수가 없다.
만약 사람이 능히 선적(善寂)하면 능히 더러운 진흙을 벗어 나와서 남을 구출하고자 하므로 곧 그러할 수가 있다.
[설법을 허락함]
이 까닭에 사리불아, 나는 지금 너에게 명료하게 말한다.
여래를 비방하는 그 죄는 가볍지 않다.
진실하게 말하는 비구에게는 마땅히 설법을 허락한다.
거짓말쟁이가 아닌 자와 계를 지닌 비구는 곧 능히 법을 보시한다.
사리불아, 높은 자리의 설법은 결정코 의혹을 끊는다. 무엇보다도 이는 으뜸가는 일이다.
만약 계를 지님이 부정(不淨)하여 외도의 뜻에 집착하면 나는 곧 허락하지 않는다.
또 거짓말을 하는 자와, 세간의 즐거움을 귀하게 여기는 자와, 이익을 구하는 자와, 다투기를 즐기는 자도 나는 또한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깨끗한 계를 지닌 자와, 질박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진 자와,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통달한 자에게는 높은 자리에서 설법함을 허락한다.
사리불아, 파계(破戒)한 비구는 차라리 마땅히 계를 버려야 한다.
성인(聖人)의 상(相)에다 가사를 입고서 죄와 때[垢]를 감추고서 남 모르게 악을 짓고 사람의 믿음과 보시를 받으면,
사리불아, 이 작은 인연으로 해서 영구히 지옥의 몸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