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여래흥현경 제3권
9. 여래의 개도(開道)에 들어간다는 것
“불자여, 무엇을 보살이 여래의 개도(開道)에 들어간다고 하는가?
이 보살은 집착하는 모든 행들을 건너되 머뭇거리지 않으며, 평등한 법미(法味)에 대하여 둘 아닌 들어감[不二入]을 명료히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여래께서 천명하신 무상각(無想覺)과 무행지각(無行之覺)과 무처소각(無處所覺)과 무한중각(無限中覺)과 무변제각(無邊際覺)에 들어가 성취하지 않는 것을 버리고 중간에 의착(倚著)하여, 모든 문자와 음향이 처소가 없고 모든 음성에도 언교(言敎)가 없는 줄을 관한다.
중생의 행을 끝까지 다 궁구하고 평등각을 받들어 지성(志性)과 모든 근(根)과 번뇌와 애욕이 모두 청정해진다.
여래의 도안(道眼)으로 삼세의 모든 것을 두루 평등하게 보니, 마치 큰 바다와 같다.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며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고 모든 몸 가진 중생들을 보므로 큰 바다라고 한다.
여래의 도(道)도 이와 같아 중생들의 마음과 지성이 돌아가는 곳을 보고, 비록 비추는 것이 있으나 또한 비춘다는 생각이 없으므로 자연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의 도로써 개도(開導)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여래께서 개도 받을 자들을 교화시키시되 이미 문자로 강설하셨으나 또한 말씀하신 것이 없고, 모든 음향에서 펴신 것이 없으며,
비록 가르치신 말씀이 있으나 본래 하신 말씀이 없으며,
설사 우러름을 받으신다 하여도 또한 우러름을 받으신 일이 없다.
또 다시 중생을 권화하시니 지금 마땅히 그 대강을 들어 연설하리라.
여래의 도에 의해서 개화된 자는 최정각을 이루되 중생을 제한하지 않으니, 여래라고 하는 것과 같다.
몸이 머무는 수[身住數]와 같고 뭇 국토의 수와 같고 일체 삼세의 모든 수와 같다. 모든 몸이 머무는 수 또한 이와 같아 차별이 없다.
도교(道敎)의 수와 같고 모든 말의 수와 같고 모든 여래의 법계의 수와 같고 허공 수와 같아 장애가 없는 경계이다.
모든 어행(御行)으로 개도되는 언교(言敎)의 경계와 같고 열반의 한계와 같다.
중생의 몸의 형상이 처하여 머무는 수 또한 이와 같고, 입으로 하는 말의 한계 역시 이와 같다.
몸과 입의 수와 같고, 장애 없는 마음이 머무는 한계의 수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그가 이와 같이 무수한 곳에 들어감으로써 곧 3장(場)을 청정히 하고 도덕에 이른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과 모든 중생을 평등히 다루게 되며,
이와 같이 일체가 고요한 것을 보고 평등하게 살펴서 열반계로 인도한다.
이미 이와 같은 자연스러움을 본 자가 모두 일체에 들어가면 자연이 아니다. 또한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으므로 또한 자연이고,
나에 대하여 내가 아니라고 여기므로 또한 다시 자연이고,
남에 대해서 남이 아니라고 여기기에 또한 자연이다.
부처님께서는 생각하시는 것이 없으므로 또한 자연이며 법계도 자연이고 허공도 자연이나, 또한 자연이 아니다.
이미 이것을 명료히 깨달아 최정각을 이루어 정법의 남음이 없는 지혜에 이른다.
그리하여 여래께서 무극의 대애(大哀)로 많은 중생을 개화시키시는 것이,
비유하면 허공이 세계의 모든 방속(方俗)을 품어 받아들이되 지성(志性)이 자연스럽게 세간을 이루는 것과 같음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무리는 다하는 일도 없고 자라는 일도 없으며 또한 생겨나는 일이 없되 생기는 것이 고요한 것도 이와 같아, 최정각을 이루되 또한 깨닫는 것이 없다.
또 그 모습이란, 또한 모습이 되는 것이 없으며 또한 다시 이 모습이되 온갖 모습이 없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켜 모두 여래가 되게 하여 견줄 이가 없게 한다 하여도 또한 형용(形容)이 없는 것과 같다.
그가 또 이들을 화현(化現)시키고 나서, 곧 다시 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를 모두 겁수(劫數)가 되도록 한다면,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변화된 그 사람들을 무엇으로 교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발심하게 하여 여래가 되게 하였겠느냐?”
세존께 말씀드렸다.
“제가 알기로는 이치를 드러내어서 여래의 무리로 교화하되 교화된 일이 없는 것같이, 변화된 무리 역시 그렇습니다.”
대답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진실로 네가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불자여, 모든 중생은 잠깐 사이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之道]를 체득하여 최정각을 이룬다.
보살의 수(數)를 이루는 것도 이와 같고 이루지 못하는 것 역시 이와 같아 더함도 덜함도 없다.
왜냐하면 또 도(道)를 살펴보면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없으므로 정각을 이루는 일이 없고 길이 이익을 주는 일도 없으며,
비록 정각을 이루더라도 또한 체득한 것이 없다.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것으로써 여래에 들어가 비로소 정각을 이루게 된다.
만일 명료히 깨닫고 싶으면, 마땅히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래는 한 모습으로서 같은 품류(品類)이시니 품상(品相)이 없으시다. 이것을 혜성도각삼매정수(慧成道覺三昧正受)라고 한다.
이러한 선정의 뜻을 통달한 뒤에는 낱낱이 깨달은 것이 법신뿐이어서 남음이 없으니, 모든 중생의 입신(立身)을 뛰어넘는다.
비유하면 한 사람이 최정각을 이루어 도문(道門)에 이른 것과 같으니,
모든 중생이 불도를 이루어 법문(法門)에 이르는 것도 이와 같아 차별이 없으므로 한량없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각문(正覺門)을 이루게 하여 한량없는 모든 몸에 들어가 머무는 것이다.
여래계(如來界)는 끝이 없고 중생계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모든 보살이 여래에 들어가 최정각을 이루면, 낱낱이 이루게 되는 것이 중생이 본래 여래의 몸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만일 여래ㆍ지진ㆍ최정각 문에 두루 들어가게 된다면 그 몸이 행하는 것 역시 생긴 일도 없고 잃는 일도 없기 때문이니, 하나를 얻으면 그 나머지도 또한 그렇게 되는 것과 같다.
모든 법계에 이와 같이 들어가되 처소를 여의지 않고 언사를 버리지 않는다면, 진실로 이것이 여래의 법신이다.
왜냐하면 만일 능히 모든 곳에 두루 들어갈 수 있다면 정각을 이루어 무극의 지혜에 이를 것이며,
그 고요함을 널리 펴고 불도수(佛道樹)의 사자좌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보살이 두루 자기 마음을 명료히 알면 능히 정각을 이루어 곧 법신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여래ㆍ지진께서는 마음의 근본을 버리지 않고 대도(大道)에 이르셨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과 같으면 그 나머지도 그와 같으므로 그로써 모든 마음을 개도(開導)하여 이 들어가는 일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불자여, 모든 보살들이 모든 대성(大聖)이 되어 이로써 밀고 들어가 최정각을 이루고 널리 두루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되,
어기거나 버리지 않고 계착하는 바가 없으며 게으르거나 쉬는 일이 없고 독실히 믿는 일도 없이, 부사의한 법품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이미 두 가지를 해탈하여 둘이 없고
모든 법 명료히 깨달아
평등하기 허공과 같으니
두루 모든 경전 깨달았네.
평등하여 이미 내가 없으니
이것이 모든 법 깨달은 것이며
이미 성각(聖覺) 분별하였으되
일체를 깨달은 일 없네.
비유하면 마치 사방 지역의
형체 있는 모든 것 받아들이고
평등히 흐르는 물 받아들이기에
이름을 바다라고 하듯이.
10력께서도 이와 같으시어
중생의 해인(海印)이시니
그 지성(志性) 환히 아시기에
분별(分別) 이라 부르네.
마음이 모두 변화[化]와 같고
모든 부처님께서도 화현(化現)하신 것 같으니
평등히 자연을 받드는 것은
변화 속에서 다시 변화된 것 같네.
불도는 모두 사설(辭說)이며
모든 중생류는
본래 자연이어서 평등하니
더함도 없고 덜어짐도 없네.
최승께 선각도(善覺道)라는
삼매 있으셨기에
불수(佛樹) 사이에 머무시어
이 선정의 뜻 이루시고
찬란한 빛 펴시어
한량없는 중생 비추시고
연꽃같이 도(道) 여시어
중생을 가르치셨네.
만일 미래겁에
중생국(衆生國)이 자연이라면
법을 생각하는 것도 이와 같아
모든 근과 지성으로
모든 것 평등히 관하여
내가 처하는 곳 없으리니
그러므로 가없이
도(道)가 덮은 것 깨닫고
보살도 행하여
고요히 자비와 지혜 넓히고
나무 아래 사자좌에 앉아
무상각(無上覺) 이루니
도력(道力) 비할 데 없고
법신의 성스러움 높고 높아
널리 들어가 두루하지 않는 일 없이
중생을 버리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