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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3권
10. 보리품[4]
[모든 부처님의 지혜]
이미 모든 부처님의 몸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네 가지의 지혜에서 경지(鏡智)가 움직이지 않아
세 가지 지혜의 의지함이 되니
8식(識)과 7식과 6식과 5식은
순서대로 전변을 얻기 때문이다.
[釋] ‘네 가지의 지혜에서 경지가 움직이지 않아 세 가지 지혜의 의지함이 된다’고 함은
모든 부처님께는 네 가지의 지혜가 있으니,
첫째는 경지(鏡智)요, 둘째는 평등지(平等智)요, 셋째는 관지(觀智), 넷째는 일을 짓는 지혜[作事智]이다.
그 경지는 움직이지 아니함으로 상(相)을 삼아서 항상 나머지 세 가지 지혜의 의지함이 된다. 왜냐하면 세 가지의 지혜는 움직이기 때문이다.
‘8식과 7식과 6식과 5식은 순서대로 전변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제8식을 전변해서 경지를 얻고,
제7식을 전변해서 평등지를 얻고,
제6식을 전변해서 관지를 얻고,
전5식(前五識)을 전변해서 일을 짓는 지혜를 얻으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경지(鏡智)는 분별이 없는 것을 반연하여
서로 이어서 항상 끊기지 아니하고
여러 식(識)에 어리석지 않아
모든 모양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釋] 이 게송은 제8식을 전변하여 경지를 얻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경지가 분별없음을 반연한다’고 함은 일체 경계에서 분단(分段)의 인연을 짓지 않는 것이다.
‘서로 이어서 항상 끊이지 않는다’고 함은 모든 경우에 항상 행하여 단절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 식에 어리석지 않다’고 함은 일체의 경계를 알아서 장애가 영원히 다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모양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함은 온갖 경계에서 행상(行相)을 벗어나 분별이 없음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경지(鏡智)는 여러 지혜[智]의 인(因)이니
이를 큰 지혜의 창고라고 말한다.
나머지의 몸과 나머지의 지혜는
그림자와 상(像)이 이를 좇아 일어난다.
[釋] 이 게송은 경지(鏡智)의 작용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경지는 여러 지혜의 인이니 이를 큰 지혜의 창고라고 말한다’고 함은 저 평등지 등의 여러 지혜와 일체의 종(種)이 다 경지로써 인을 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지혜를 비유하여 큰 창고와 같다고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지혜가 간직되기 때문이다.
‘나머지의 몸과 나머지의 지혜는 그림자와 상(像)이 이를 좇아 일어난다’고 함에서
나머지의 몸이라 함은 수용하는 몸 등을 이름이요,
나머지의 지혜라고 함은 평등지 등을 이름이니,
그 신상(身像)과 그의 지상(智像) 모두 다 이 지혜를 좇아 출생한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이 지혜를 경지(鏡智)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의 평등지는
청정함을 닦아 보리를 증득하고서
열반에 머무르지 아니함이니
구경이 없기 때문이다.
[釋] 이 게송은 제7식을 전변하여 평등지를 얻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중생의 평등지는 청정함을 닦아 보리를 증득한다’고 함은 만일 여러 보살이 법을 증득하여 앞에 나타났을 때에는 곧 일체 중생이 평등한 지혜를 얻는다.
만일 이 지혜를 닦아 익혀서 지극히 청정해지면 곧 위없는 보리를 얻는다.
‘열반에 머무르지 아니함이니 구경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중생이 다함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구경이 없음이요, 구경이 없기에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뜻으로 말미암아 평등지라고 말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대자(大慈)와 대비(大悲),
이 두 가지는 항상 끊이지 않나니
중생이 만일 믿음이 있다면
부처님의 형상이 곧 앞에 나타난다.
[釋] 이 게송은 평등지의 작용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대자와 대비, 이 두 가지가 항상 끊이지 않는다’고 함은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는 항상 중생들을 따라다닌다. 왜냐하면 대자와 대비가 단절됨이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만일 믿음이 있으면 부처님의 형상이 곧 앞에 나타난다’고 함은 그 믿는 대로 그를 따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떤 중생은 여래의 푸른빛을 보고, 어떤 중생은 여래의 누런빛을 본다.
이와 같은 일체는 앞의 두 가지의 지혜가 곧 이 법신이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관지(觀智)는 앎의 대상에 대해서
항상 걸림이 있지 않다.
이 지혜는 큰 창고와 같아서
총지(摠持) 삼매가 의지한다.
[釋] 이 게송은 제6식을 전변하여 관지(觀智)를 얻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관지는 앎의 대상의 모든 경계에 있어서 항상 장애됨이 없다.
비유하면 마치 큰 창고와 같아서 일체의 다라니문과 일체의 삼매문과 더불어 의지함이 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두 문이 다 이 지혜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항상 대중 가운데 있어서
가지가지를 다 나타내 보이고
여러 의심의 그물을 능히 끊고
큰 법의 비를 뿌리기 때문이다.
[釋] 이 게송은 관지의 작용의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관지는 이것이 곧 식신(食身)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일의 지혜는 여러 경계에 있어서
가지가지의 교화하는 일을 일으킴이
한량없고 사의할 수 없으니
여러 중생들에게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釋] 이 게송은 전오식(前五識)을 두루 통하여 일을 짓는 지혜를 얻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 일을 짓는 지혜는 일체의 세계 가운데서 가지가지 변화하는 일을 지음이 한량없고 끝없으며 가히 사의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것들의 업은 다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짓는 지혜는 곧 이것이 화신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포섭하여 가짐과 평등한 마음과
법을 여는 것과 또한 일을 짓는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뜻을 의지하여
순서대로 네 가지의 지혜가 일어난다.
[釋] ‘포섭하여 가진다’고 함은 이른바 법을 듣고 포섭하여 가짐이다.
‘평등한 마음’이라고 함은 이른바 일체의 중생에게 자기와 남이 평등함을 얻기 때문이다.
‘법을 연다’고 함은 이른바 바른 법을 연설하기 때문이다.
‘일을 짓는다’고 함은 이른바 가지가지의 교화하는 업을 일으킴이다.
제1의를 의지하여 경지가 일어나고, 제2의를 의지하여 평등지가 일어나고, 제3의를 의지하여 관지가 일어나고, 제4의를 의지하여 일을 짓는 지혜가 일어난다.
게송으로 말한다.
성품이 다름과 공허하지 아니함과
일체이고 또한 시초(始初)가 없으며
차별이 없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고
같은 것을 의지하기에 많은 것도 아니다.
[釋] 이 게송은 모든 부처님이 하나도 아니고 많음도 아님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하나가 아니다’고 함은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요, 공허하지 않기 때문이요, 일체이기 때문이요, 시초가 없기 때문이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성품이 다르다’고 함은 끝없는 모든 부처님의 성품이 다름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오직 한 부처님만 있는데 마땅히 보리를 얻는 이가 있다고 하면 이 뜻은 그러하지 않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한 분만이 아니다.
‘공허하지 않다’고 함은 만일 복과 지혜의 무더기가 비었으면 마땅히 다른 보살은 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복과 지혜 두 무더기가 비지 않았기에 이 뜻은 그러하지 않다. 그러기에 부처는 한 분만이 아니다.
‘일체’라 함은 만일 오직 한 부처님만 있다고 말하면 곧 마땅히 이 부처님은 일체의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일체의 중생들을 건립하여 부처님을 짓게 한다. 그러므로 이 뜻이 그러하지 않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한 분만이 아니다.
‘시초가 없다’고 함은 만일 오직 처음의 한 부처님만 있다면 이 부처님은 마땅히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가 없이도 부처님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이 뜻은 그러하지 않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한 분만이 아니다.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만일 차별이 있다고 말하면 부처님은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가 없이도 부처님을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이 뜻은 그러하지 않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한 분만이 아니다.
‘많지 않다’고 함은 동일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무루계를 의지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부처님으로 들어가는 방편]
이미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부처님으로 들어가는 방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분별함이 만일 항상 있으면
진실한 것은 영원히 없어질 것이요
분별함이 만일 영원히 없어지면
진실한 것이 항상 있게 된다.
[釋] 만일 분별하는 자기의 성품이 항상 있으면 진실한 자기의 성품은 영원히 없을 것이니,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분별하는 자기의 성품이 영원히 없으면 곧 진실한 자기의 성품은 항상 있을 것이니, 가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최상의 닦음을 닦고자 하면
일체의 닦음을 보지 못할 것이요
최상의 얻음을 얻고자 하면
일체의 얻음을 보지 못한다.
[釋] 이와 같이 최상으로 닦으려 하나 그 닦음을 가히 얻지 못하고, 이와 같이 최상으로 얻고자 하나 그 얻음을 얻을 수가 없다.
게송으로 말한다.
존중하여 긴 시간에 걸쳐
부처님의 희유한 법을 관하면
이를 반연하여 속히 부처님 됨을 얻는다고 하나
부처님 보리에 가기가 멀어진다.
[釋] 만일 어떤 보살이 부처님ㆍ세존께 극히 존중함을 내서 긴 시간에 걸쳐 바로 부지런히 부처님의 일찍이 있지 않았던 법을 관하면 이 관하는 마음과 긴 시간에 걸쳐 정진함을 반연하여 자신이 마땅히 위없는 보리를 속히 얻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보살은 부처님의 보리에 가기가 매우 멀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그에게는 아만이 있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을 관하여 오직 분별을 하면
이 뜻은 앞에서 안 것과 같다.
보살은 분별이 없어야
그가 속히 부처님을 이룬다고 말한다.
[釋] 만일 보살이 모든 법이 오직 분별이라고 관하여 저 분별에 또한 분별이 없는 것임을 관하면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지위에 들어갈 것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말미암기에 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
[모든 부처님의 동사섭]
이미 부처님에 들어가는 방편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모든 부처님의 동사섭(同事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러 강이
따로 의지하고 또한 따로 일한다.
물이 적으면 벌레의 수용이 적어서
큰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다.
일체가 큰 바다에 들어가려면
하나를 의지하고 또한 하나를 일한다.
물이 많으면 벌레의 수용도 커서
또한 다시 항상 다함이 없다.
이와 같은 여러 다른 해석은
다른 뜻이요, 또한 다른 업이어서
앎이 적으면 이익이 적으니
부처님의 체에 들어가지 못한다.
일체가 부처님의 체에 들어가려면
하나를 알고 또한 하나의 뜻이어야 한다.
앎이 크면 이익도 커서
극한 모임[聚]이 또한 다함이 없으리.
[釋] 다른 물은 여러 보살들의 따로 앎에 비유한 것이고,
따로 의지함은 여러 보살들의 다른 뜻에 비유한 것이고,
하나의 물은 모든 여래의 하나의 해석에 비유한 것이고,
하나에 의지함은 모든 여래의 한 뜻에 비유한 것이다.
모든 하수가 다르기 때문에 물의 사업(事業)도 또한 다르다.
물이 적기 때문에 물에 사는 벌레들을 수용함도 또한 적다. 왜냐하면 아직 한가지로 큰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들도 또한 그러하여서 앎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짓는 업도 또한 다르다.
앎이 적기 때문에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도 또한 적다. 왜냐하면 한가지로 부처님의 체에 들어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온갖 물이 만일 큰 바다에 들어가면 곧 한가지로 하나에 의지하듯이 곧 한가지로 일체이다.
물이 하나임으로 말미암아 사업도 또한 하나이고, 물이 큼으로 말미암아 물벌레들을 수용함도 또한 크듯이 만일 모든 보살이 한가지로 부처님의 체에 들어가면 곧 한가지로 한 뜻이어서 곧 동일한 해석이다.
해석이 하나임으로 말미암아 짓는 업도 또한 하나이다.
앎이 크기 때문에 이익도 또한 커서 일체에 극하여 중생의 무더기가 또한 다함이 있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한 게송을 말하여 희구하도록 권함]
이미 모든 부처님의 체와 작용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한 게송을 말하여 희구하도록 권하여 나아가게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길 데 없는 원만한 백법(白法)은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인(因)이다.
무진장(無盡藏)에 머물기를 즐기나
지혜 있는 자는 마땅히 일으키기를 구한다.
[釋] ‘비길 데 없는 원만한 백법’이라 한 것은 부처님께서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인’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남을 이롭게 함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무진장에 머물기를 즐긴다’고 함은 부처님의 선근은 더 나은 것이 없고 위없으며 다함없는 즐거움의 창고이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자가 마땅히 일으키기를 구한다’고 함은 지혜 있는 사람이 마땅히 이와 같은 가장 훌륭하게 머무르는 즐거움을 구하여서 큰 보리의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보리품」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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