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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3권
7. 제불권조품(諸佛勸助品)[1]
그때 세존께서 두려움 없는 자리[無畏座]에 스스로 올라앉으시어 설상(舌相)의 광명을 놓아서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비추시고, 시방 무앙수 항하 모래 수효의 불국토 및 시방의 항하 모래 수효의 지옥ㆍ축생ㆍ아귀 나아가 시방 허공까지 다 비추시니, 중생들이 모조리 광명을 보았다.
그때 세존께서 무앙수 억백천의 광명을 놓으시니, 저 중생들은 스스로 서로 이렇게 말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일찍이 이런 미묘한 광명은 보지 못하였다.
또한 별과 해와 달의 천자들도 이런 광명은 있지 않았다. 매우 신기하고 몹시 기특하다. 일찍이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그때 시방의 여러 나라 중생들은 이러한 생각을 각각 내었다.
‘장차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으실까?’
그때에 부처님께서 시방 중생들의 마음속 생각을 즉시 아시고 온갖 광명을 나타내시니 모두가 화불(化佛)이 되었다.
한 분 한 분의 화불은 모두 무앙수의 대중에게 앞뒤로 에워싸인 채 법을 설하고 계셨다.
이른바 설하시는 법이란 형상이 없는 법, 언교(言敎)가 없는 법,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병도 없고 죽음도 없는 법이었다.
뒤에 이 음성을 듣고서 광명은 보지 못하고 형색(形色)을 본 자들은 모두 부처님 설법의 음향, 공혜(空慧), 법혜(法慧), 그리고 집착 없는 마음을 말씀하심을 들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회상에 모인 사부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자못 이 설상(舌相) 광명의 불가사의한 법이 시방의 무앙수 항하의 모래 수효와 같이 많은 찰토에 널리 이르러서 한량없는 중생의 무리를 비추고 아울러 온갖 화불(化佛)이 법문을 설하는 것을 보았느냐?”
그때 온갖 신통 있는 보살대사들이 모두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나이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모두 보았나이다.”
욕망에 집착한 중생인 범부들도 다시 스스로 부처님 앞에서 말씀을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광명은 비록 보았사오나 이 광명이 무슨 상서로운 감응(感應)인지는 알지 못하나이다.”
[열네 가지 혀 모양의 과보 법]
이때 부처님께서 저 중생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의심을 없애고 망상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연수보살(軟首菩薩)에게 문득 말씀하셨다.
“여래 지진(如來至眞)은 위없는 등정각을 이루어서 몸은 황금빛으로 둥근 광명이 일곱 자이고, 목소리는 갈비조(羯毘鳥)처럼 부드럽고 흠이 없으며, 뭇 상호로 몸을 장엄하였는데,
모두 지나간 세상 무앙수의 겁 동안 복을 쌓고 착한 일을 행하여 뭇 덕을 갖춘 것으로 말미암아 입의 허물을 범하지 않고 설하신 언교에 늘고 줄어듦이 없었느니라.
그런 까닭에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 하여금 지금 열네 가지 설상(舌相)의 과보 법을 얻게 하였느니라.
그 열네 가지는,
첫째 말소리가 지극히 정성스러워서 속임이 없고,
둘째 설하시는 바를 들으면 문득 믿어서 알게 되고,
셋째 입의 행이 근문(根門)을 잃지 않고,
넷째 때를 알아 법을 설하여서 빠뜨림이 없고,
다섯째 스스로 금계를 널리 펼침을 즐기고,
여섯째 명구(名句)가 차례대로 서로 응하고,
일곱째 큰 사랑의 가피(加被)로 보시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여덟째 부처님의 형상(形像)을 보고는 의심을 품지 않고
아홉째 부처님의 신통을 얻어 스스로 노닐고 유희하며,
열째 법계에 벌써 들어갔어도 부처 지혜를 버리지 않고,
열한째 한량없는 지혜와 다함없는 곳간을 얻고,
열두째 부처님의 뜻은 형상이 없어서 모두 다 들어가게 되고,
열셋째 권도의 지혜가 걸림이 없어서 제도가 있음을 보지 않고,
열넷째 성실한 진리의 지혜에 머물러서 누구나 다 돈독히 믿는 것이니,
이것을 열네 가지 설상(舌相)의 과보라고 이르느니라.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으로서 이 열네 가지 설상의 과보를 얻는 이는 곧 이 한량없는 광명을 놓아서 시방의 모든 불국토에 비출 수 있으니, 모두 지난 옛적의 말에 속임이 없었음을 말미암음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연수에게 말씀하셨다.
[싫증냄이 없는 열 가지 과보]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깊은 법을 지니고서 읊고 외는 이는 문득 몸에 싫증냄이 없는 열 가지 과보를 얻으리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두려움 없는 자리[無畏座]에 오르시자 먼저 평등관(平等觀)으로써 뜻을 거두어 침묵하면서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셨다.
‘나는 이제 대중 가운데서 사람 중의 영웅[人中雄]이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았으니 크게 구제해야겠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 생각하셨다.
‘중생의 무리는 불가사의하구나. 10신(信)의 경지에서 퇴전(退轉)하고자 하는 이나 혹은 초지(初地)부터 6지(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퇴전하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따로 두어서 성인(聖人)의 반열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음란하고 화내고 어리석어서 마음에 얽히고 집착함이 많은 중생도
역시 따로 두어서 성례(聖例)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그 뜻이 호화스러운 부귀만을 숭상하고 덕의 근본을 짓지 않는다면,
이 역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무명의 마음이 치성하여서 교만한 행을 일으킨다면,
이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마음으로 환법(幻法)을 알아서 여래는 환(幻)으로서 부처가 아니라고 본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세속의 신통을 얻어 부처님의 신통과 덕도 자기와 다름이 없다고 본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체성(體性)이 강하여 여래의 총지(摠持)의 행을 믿지 않으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보시하는 마음이 치우치게 많아서 여래의 보시를 듣고도 나와 무엇이 다른가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순수한 계의 마음[戒心]이 있어도 여래의 계를 듣고서 나와 더불어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마음이 항상 인자하고 잘 참아서
지금 세존의 참음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정진을 하면서 세존의 정진이 나와 더불어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마음으로 참선을 즐겨서 세존께서 행하시는 선(禪)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세간의 변재를 얻어서, 세존의 설하시는 지혜가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사랑하는 마음이 치우쳐서 여래께서 설하시는 인자함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비의(悲意)가 끊임이 없어서 여래가 비(悲)를 행하는 것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항상 환희를 품고 있으면서 여래의 환희가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마음을 항상 놓아버리면서 여래의 놓아버림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마음으로 항상 공을 염(念)하면서 여래가 공을 행함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마음으로 멋대로 거래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여래의 무원(無願)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상념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여래의 무상(無想)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연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이 처해 있는 지취(志趣)도 같지 않고, 온갖 시방의 부처님세계ㆍ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중생의 심념(心念)이 저마다 달라서 같지 아니하느니라.
가령 어떤 욕계의 중생은 5욕(欲)을 즐기느라고 5음(陰)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聖例)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은 색(色)을 계교하여 품에 간직하고서도 안으로 욕심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은 무색(無色)을 즐기길 원하는데,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연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의 무리는 심식(心識)이 같지 않아서 행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 왜냐하면 모두가 뒤바뀜으로 인해 갑자기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내가 오늘 중생의 무리를 살펴보니,
마음의 나아가는 바에 무슨 도(道)를 구하고 싶어 하는지 알겠다.
시방세계의 무수한 찰토에 이르도록 낱낱이 요달해 알아서 그릇되지 않으니,
마치 눈 있는 사부(士夫)가 몸소 자기 손으로 밝은 달의 신령스런 구슬을 잡고서 자세히 살펴 미혹하지 않고 다른 나머지 상념도 없는 것과 같다.
나도 이제 마찬가지라서 중생의 신식본행(神識本行)이 나아가는 바를 분별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일념 사이에 한 가지 행과 두 가지 행을 뜻하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일념 가운데 뭇 행을 갖추고 행 또한 무기(無記)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계는 있지만 보시는 없고 보시는 있지만 계가 없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여섯 가지 행을 갖추었거나 여섯 가지 행을 갖추지 못했다면,
이것도 또한 버려두고서 성례에 있지 않아야 한다.
[세 가지 품의 묘한 행]
과거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무수한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세 가지 품을 먼저 갖추시고 난 뒤에 법을 설하셨다.
만일 미래의 항하 모래 수효의 온갖 부처님이 법을 설하고자 한다면, 또한 마땅히 이 세 가지 품의 묘한 행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어떤 것들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중생의 생각[念]을 관하니 생각 생각마다 같지 않고,
둘째는 모든 부처님은 무외(無畏)의 도량을 장엄하시는데, 성문이나 연각은 이 도량을 능히 세울 수 없고,
셋째는 본래 아직 법을 듣지 못했어도 여래가 설해 주면 모조리 공혜(空慧)에 돌아가는 것이니라.
이것을 여래의 세 가지 품의 묘한 행이라고 말하니, 법을 설할 때가 되면 이지러지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때 연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무엇을 여래의 세 가지 품의 묘한 행이 세운 바가 같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여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대의 말한 바와 같다. 내가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낱낱이 설명해 주리라.
어떤 것을 보살의 세 가지 품의 묘한 행이라 말하는가?
여래 지진이 처음으로 정의중상삼매(定意衆相三昧)에 들어서 널리 중생을 위하여 한 모임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이처럼 무앙수의 무리가 마음이 똑같이 하나의 식(識)이고 염(念)하는 바도 또한 똑같아서
고(苦)의 뜻을 설함이 나머지 딴 법전이 아님을 들었다면,
이것은 곧 여래의 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니라.
또다시 족성자여. 지나간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의 부처님들도 저 중생의 마음속 생각을 알아서 먼저 등각(等覺)으로부터 비로소 위없는 바른 법을 이루시지만,
그러면서도 유(有)의 법을 설하여 상념의 집착을 여의지 아니하면,
이것도 또한 성례(聖例)에 있지 않아야 하느니라.
[열 가지 뜻을 거둠]
또다시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은 먼저 열 가지 뜻을 거두어서 어지러운 상념의 행을 없애고,
그런 뒤에 깊고 묘한 법장(法藏)을 연설해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듣고 있는 언교(言敎)를 빨리 알아 마치게 하여야 한다.
어떤 것들이 열 가지 뜻이 되는가?
여래가 법을 설하고자 할 때에 한결같이 걸림 없이 다 관하니,
즉 중생이 어떠한 법에 응해서 도탈(度脫)을 얻게 될까?
다시 어떤 중생은 뜻에 깊고 얕음이 있는데 무슨 방편을 써야 건져서 구제할까?
혹은 다시 법을 설하매 하나의 행일 뿐 둘이 없는데, 이제 이 중생은 이 법에 응하게 되나 못되나.
한량없는 공식심(空識心)이 염(念)하는 바는 어떠한 법을 좇아야 되는가를 관하고, 그런 뒤에 분신(奮迅)삼매를 안다.
행에 더러움이 없어서 일념 사이에 모든 법을 모조리 갖추고,
법계의 비롯함도 없고 끝남도 없음[無始無終]을 관해서 여러 가지 불사를 행하는 데 또한 걸림이 없다.
한량없는 지혜로써 일체를 널리 윤택하게 하고,
대중의 모임이 이미 정하여지면 신족의 힘으로 그들의 심의(心意)를 비추어 본래의 인연을 모두 알아서 법을 설하게 되니,
이는 바로 성례(聖例)에 있어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