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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하권
약명반야말후일송찬술(略明般若末後一頌讚述)
당(唐)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 지음
의정(義淨)은 무착보살(無著菩薩)의 반야송석(般若頌釋)을 번역하면서, 무착 대사(大士)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아홉 가지 비유[九喻]로 밝힌 것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반야송석(般若頌釋) : 인도의 무착보살(無著菩薩)이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에 붙인 게송과 세친보살(世親菩薩)이 무착보살(無著菩薩)의 게송[般若頌]에 해석을 붙인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논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을 가리킨다.]
[구유(九喩) :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논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3권에,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별ㆍ눈의 백태[翳]ㆍ등불ㆍ허깨비와 같고 이슬ㆍ물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云一切有爲法,如星、瞖、燈、幻、露、泡、夢、電、雲,應作如是觀者]”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그 비유로 밝힌 글의 운치는 너무나 그윽하고 깊었으며, 담긴 불법의 의미도 지극히 심오하면서 명료한 것이었으니, 대사 자신이 환희지[極喜]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누가 이런 밝은 지혜를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환희지[極喜] 극희(極喜) : 보살의 수행단계를 10가지[十地]로 나눈 것 중 첫 번째 경지에 해당하며, 보살이 수행을 하다가 깨달음의 눈이 뜨여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른 말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서역(西域)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착 보살(無著菩薩)은 옛날에 도사다천(覩史多天)에 있는 미륵 보살[慈氏]이 머무르는 곳에서 미륵 보살에게 직접 이 80게송[八十頌]을 받아서, 반야(般若)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풀고 유가(瑜伽)의 근본 이치[宗理]에 따라서 유식(唯識)의 의미를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치 태양[金烏]이 동쪽 바다(扶桑) 부상(扶桑)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이듯 불법의 가르침이 인도(印度)에 빠르게 전파되었고, 달[玉兔]이 눈 덮인 고개를 환히 비추듯이 불법의 진리가 중국[神州]에까지 환히 밝혀지게 되었다.
[도사다천(覩史多天) : 도솔천을 말한다. 이곳은 육욕천(六欲天) 가운데 제4천으로,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돼 있고, 내원에는 미륵 보살이 수행중이라고 한다.]
[부상(扶桑) :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신성한 나무, 또는 그 나무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은 인도[西方]에서도 여러 해석이 있는데, 그 기원을 살펴보면 무착 보살의 이 게송이 가장 앞선 것으로, 세친 대사(世親大士)가 직접 무착 보살을 위해 이 게송을 해석한 것이다. 비록 중국[神州]에서도 이것을 번역하였지만, 본래의 뜻을 나타내는 데에 모자람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 의정이 다시 직접 이 경의 강론에서 본래의 의미를 궁구하고, 거듭 이 경의 오묘한 뜻을 자세히 살펴서 본래의 뜻에 부합되게 본경(本經)을 다시 번역하였다.
그리고 세친 보살(世親菩薩)은 다시 반야칠문의석(般若七門義釋)을 지었고,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그 의론을 널리 전하였다.
[나란타사(那爛陀寺) : 고대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 북쪽에 인접해 있던 사원이다. 쿠마라굽타(kumāragupta) 1세가 창건한 이후, 역대 왕들이 증축하여 인도 불교의 중심지가 된 사원이다.]
그러나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에 담겨있는 이치[義府]가 너무나 깊고 깊어서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의부(義府) : 원래는 시경이나 서경에 담겨있는 의미나 이치를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문맥에 따라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에 담긴 이치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사자월(師子月) 법사(法師)가 이 경의 논석(論釋)을 지었고, 또 동인도(東印度) 출신 다문속사(多聞俗士)로 그 이름이 월관(月官)인 학승이 여러 학파의 해석을 두루 검토하여 의석(義釋)을 지었다.
[원문에는 검(撿)으로 되어 있는데 검(檢)으로 해석하였다.]
이들의 해석은 그 의미가 삼성(三性)의 관점에서는 부합하지만, 중관(中觀)과는 맞지 않았다.
[삼성(三性) : 의식에 형성되어 있는 현상의 세 가지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온갖 분별하는 마음으로 지어낸 허구적인 대상을 가리키고,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온갖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인식 작용을 말하며, 셋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분별과 망상이 소멸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청정한 모습을 가리킨다.]
[중관(中觀) : 용수(龍樹)가 원시불교의 근본사상인 연기(緣起)설을 공(空)의 입장에서 심화시켜 내세운 사상이다.
원시불교의 연기설에서는, 현상 세계는 연기의 이법(理法)에 따라 생기거나 사멸하거나 하는 개물(個物)의 집합에 지나지 않지만, 연기의 이법 자체는 불변의 법칙으로서 전제되었다.
하지만 용수는 연기의 이법 자체도 본질적으로는 공(空)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입장은 반야개공(般若皆空)의 사고 방식에 요약되어 있다. 즉 반야란 절대지(絶對知)이며 모든 존재에 그 자체의 본질을 상정하여 그것을 실체로 보는 고정적인 인식을 부정하는 지혜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혜는 인간의 관념 세계와 사물의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을 상대적인 관계성(空性)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다시 또 다른 해석이 있지만 이 해석도 용수[龍猛]의 견해는 따랐지만, 유가(瑜伽)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유가(瑜伽) : 산스크리트어 yoga의 음사로, 상응(相應)이라 번역한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바른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면,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유가(瑜伽)는 실재[真]는 존재하고 현상[俗]은 존재하지 않다고 하여, 삼성(三性)을 근본으로 삼는 입장이고, 중관은 실재[真]는 존재하지 않고 현상[俗]은 존재한다고 하여, 속제와 진제[二諦]의 관계를 중요시 한 것이다.
[이제(二諦) : 용수가 쓴 『중론(中論)』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세속적 입장에서 본 진리, 즉 속제(俗諦)와 궁극적 입장에서 본 진리, 즉 진제(眞諦)를 말한다. 물이 수증기로 변할 때, 우리는 ‘물'과 ‘수증기'라는 이름으로 구획하고 고착화시킨 실체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차원의 진리 곧 속제(俗諦)이다. 그러나 이 속제는 임시적, 방편적 이름이요, 생성과 소멸이라는 현상 또한 임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조건들의 이합집산에 의한 찰나적 변화만이 존재할 뿐, 물이라든가 수증기라고 규정할 만한 대상은 경험적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현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연기적 관점에서 말하는 궁극적 진리가 진제(眞諦)이다. 그러나 속제와 진제는 상호 의존적이다. 언어와 사유로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眞諦]를 가리키는 수단이며 기호가, 곧 속제이기 때문이다.]
반야(般若)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큰 뿌리이니, 유가와 중관의 두 관점을 모두 담고 있다.
그런데 중국[東夏]에서 불법이 남(南)과 북(北)으로 나뉘게 되고, 인도[西方]에서도 의론[義]이 유(有)와 공(空)으로 나뉘게 되었다.
[유(有) : 현상계에 나타나는 만물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空) : 현상계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실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에 불법의 이치를 중요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으로 구분하게 되고, 불법의 이치에 다양성을 인정하고 화합하는 것도 없어져서,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부처님의 가르침[聖旨]을 해석하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실로 이해하기 어렵게 되고 그 해석도 서로 어긋나 다투게 되었다.
그래서 약명반야말후일송찬술[末後一頌]에서,
“이 세상의 모든 현상[有爲法]은 별ㆍ눈의 백태[翳]ㆍ등불ㆍ허깨비와 같고, 이슬ㆍ물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모든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게송을 해석한 글이 그 의미가 너무나 깊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 깊은 의미가 오히려 가려질 것을 근심하여, 떠오르는 대로 아홉 개의 현상에 아홉 개의 비유[二九事喻]를 들어, 열여덟 개의 글을 짓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이것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어 정신을 갉아먹는 번뇌를 없애고, 야광주[夜光]같은 이 가르침을 직접 후대에 전해주어 낯선 보배에 칼을 잡는 어리석은 의혹이 없기를 바라노라.
[원문에 환(丸)으로 되어 있는데 구(九)로 고쳐 번역하였다.]
[원문에는 망(网)으로 되어 있는데 망(罔)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이 내용은 한(漢)나라 때 추양(鄒陽)이 양왕(梁王)에게 올린 글에 유래한 것이다.
“명월주나 야광벽 같은 보배를 어두운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던져주면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까닭 없이 보배가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明月之珠、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何則? 無因而至前也.]”라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아무리 훌륭한 보배라도 갑자기 접하게 되면 그 보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보는 것[見] 등의 아홉 가지 현상[九事]은 곧 삶과 죽음의 모든 세계[區寰]를 가리키는 것이고, 무착 대사[大士]는 이것들을 별 등의 비유로 밝힌 것이니, 이런 까닭에 무착 대사는 삶과 죽음의 현상 세계에 머물면서도 그 현상 세계에는 구속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 지혜는 삶과 죽음의 경계[生津]에 머무르지 않았으니, 붉은 연꽃[紅蓮]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핀 것에 견줄 만하고, 자비는 깨달음의 세계[圓寂]에만 머물지 않았으니, 새하얀 옥돌[白玉]이 중생의 세계에 잠긴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대사는 열반(涅槃)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답하며, 이 아홉 가지의 비유를 전한 것이다.
보는 것을 풀이함[論見]
보는 것을 깜깜한 밤에 반짝이는 별과 같은 헛된 집착[妄執]이라고 본 것이다.
마음을 보니 칠흑 같은 밤 풍경이고
헛된 집착 어둠에 퍼진 지 오래이나
정토 향한 세 마음 이제 일으키니
허황된 집착들 모두 사라지네.
[삼심(三心) : 지성심(至誠心), 심심(深心), 회향발원심(迴向發願心)의 세 가지 마음을 가리킨다. 지성심은 정토(淨土)를 진실 되게 원하는 마음이고, 심심은 정토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며, 회향발원심은 공덕(功德)을 닦아 정토에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을 갖추면 반드시 정토에 왕생(往生)할 수 있다고 한다.
정토를 향한 세 가지 마음이 일어나 마음속 망집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빛이 어둠을 비추어 어둠이 사라지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별로 비유함[喻星]
별이 밤에는 반짝이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느릅나무에 걸린 별들 밤하늘 수놓으니
버드나무의 풀빛에도 밝은 빛 비치네.
천 가지 별빛이 찬란히 반짝거려도
하루아침 뜨는 해에 모두 사라지리.
인식 대상[境]을 풀이함[論境]
[경(境) :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논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에서는 경(境)을 경상(境相)으로 풀이했는데, 경상(境相)은 분별상(分別相)이다. 이것은 인연에 따라 온갖 분별로써 마음속에 지어낸 허구적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 백태가 낀 눈으로 헛되게 허공에 그려진 꽃[空花]을 보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분별로 인식한 세계는 장애일 뿐이니
백태가 낀 눈으로 헛것을 본 것이네.
그러나 반야의 참된 지혜의 힘은
다시는 미혹의 꽃을 보지 않게 하리.
눈에 낀 백태로 비유함[喻瞖]
눈에 낀 백태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비유하여 애초에 망집(妄執)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만물의 실재는 본래 막힘이 없고
청정한 삼매 에는 백태가 없었네.
그러나 백태가 낀 눈으로 바라보니
결국 허공의 꽃을 보게 된 것이네.
[태허(太虛) : 천지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무형(無形)의 도(道)란 뜻이다. 《장자(莊子)》의 〈지북유편(知北遊篇)〉에 나오는 말로, 역(易)의 태극(太極)과 거의 같은 뜻이다.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라 불렀다.]
[경성(境性) : 마음이 하나로 모여 어지럽지 않고 고요해진 상태인 삼매(三昧)를 가리킨다.]
인식 작용을 풀이함[論識]
인식 작용이 마치 등불이 계속 꺼지지 않고 일렁이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감각의 작용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헛된 인식 다함이 없이 일어나네.
죽을 자리 머물러 움직이지 못하니
진실로 인식 작용 때문이로구나.
등불로 비유함[喻燈]
등불이 심지를 태워 불을 밝히는 것을 비유로 인식작용도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그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붙여진 등불 끝없이 일렁이고
환한 불빛 한없이 퍼져가네.
심지를 태워 밤을 밝히니
진실로 애착의 기름 때문이구나.
중생이 거주하는 세계를 풀이함[論界]
허깨비를 빌려 중생이 거주하는 세계가 업(業)이 생겨나서 모였다가 사라지는 세계임을 설명한 것이다.
업공(業功)의 장엄한 처소 아름다우나
미혹으로 여러 모습 생겨난 것뿐이네.
집착하여 만들어 낸 것 실재가 아니니
중생세계 완전히 실체 없는 허깨비라네.
허깨비로 비유함[喻幻]
허깨비로 비유함으로 중생세계가 거짓 장인이 생겨나서 끝없이 만든 세계임을 나타낸 것이다.
마술사의 솜씨가 교묘하여
헛되게 여러 형상을 만드네.
만든 것들 진실로 실재가 아니니
보이는 것 모두 허깨비일 뿐이네.
육신을 풀이함[論身]
육신을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여, 육신이 오래도록 일정한 곳에 머물 수 없음을 서술한 것이다.
던져지듯 산자락 끝에 태어난 몸
잠시 맡은 목숨 강물에 빠져 죽네.
머문 곳에 이리저리 밤바람 부니
오히려 풀무의 세찬 바람 같네.
이슬로 비유함[喻露]
이슬로 비유함으로 육신이 이슬처럼 바람을 맞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슬방울 풀잎에 머물다가
떨어져 꽃 속에 자리 잡았지만
숲을 흔드는 밤바람 구슬피 울면
이슬도 바람 따라 쓸쓸히 사라지네.
감각의 작용을 풀이함[論受用]
물거품처럼 감각의 작용은 오근[根]⋅인식 대상[境]⋅인식 작용[識]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임을 진술한 것이다.
[근(根) : 근(根, indriya)이란 ‘인드라 신에 상응하는 힘’을 뜻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며 두드러지게 뛰어난 힘을 가리킨다. 인간에게는 오근(五根)이 있는 데, 곧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식(識)이 발생하게 되는 근거로서, 안근(眼根, cakṣurindriya)·이근(耳根, śrotrendriya)·비근(鼻根, ghrāṇendriya)·설근(舌根, jihvendriya)·신근(身根, kāyendriya)을 말한다.]
세상에서 오근에 여러 형상 쌓이면
이 때문에 가지가지 생각 일어나네.
진실로 세 가지 만나 서로 작용하니
드디어 세 감각[三受] 이 생겨났네.
[삼수(三受) : 내부의 감각기능과 외부의 감각대상이 대응하면서 느끼는 세 가지 감각을 말한다. 첫째는 괴로운 느낌[苦受], 둘째는 즐거운 느낌[樂受], 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다.]
물거품에 비유함[喻泡]
물거품으로 비유하여, 감각의 작용이 마치 물방울들이 잇달아 물결을 일으키듯 맞물려 작용함을 나타낸 것이다.
잔잔한 못에 수면은 고요한데
물방울 떨어지자 물결이 출렁이네.
이렇듯 세 가지 것들 합쳐지자
삼사(三事)만 가지 물거품 생겨나게 되었네.
[원문에는 간(看)으로 되어 있는데, 유(有)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세 가지가 합쳐지자 : 오근[根], 인식 대상[境], 인식작용[識], 이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를 풀이함[論過]
과거가 꿈과 같이 생각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임을 서술한 것이다.
과거는 지나가 인식할 대상이 없지만
깊은 생각과 뜻은 여전히 이어져있네.
이렇듯 사방 한 치 마음 안에서
오히려 아홉 성의 위용이 드러나네.
꿈에 비유함[喻夢]
꿈에 비유함으로 과거가 생각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낮엔 여러 인연 대상을 만들고
밤엔 기억과 생각으로 이어지니
마침내는 잠자는 동안에도
더욱 예전 모습 생각해내네.
현재를 풀이함[論現]
현재가 번개와 같다고 하여, 잠깐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온갖 형상 번개칠 때 드러난 들과 같고
현상의 네 모습 번쩍이는 빛 같으나
어찌 찰나 한순간만 있음을 알았겠는가.
삼상(三常)이 있다는 건 그릇된 생각일세.
[사상(四相) : 여러 인연으로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의 네 가지 모습을 말한다.
첫째는 생상(生相)으로, 여러 인연이 모여 생기는 모습이고, 둘째는 주상(住相)으로, 머무는 모습이며, 셋째는 이상(異相)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고, 넷째는 멸상(滅相)으로, 인연이 흩어져 소멸하는 모습이다. ]
[삼상(三常) : 여기서는 인연으로 생긴 모든 현상이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번개로 비유함[喻電]
번개로 비유함으로 현재가 홀연히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천둥소리 사방 들에 울리고
내려친 번개 수많은 빛 흩뿌리네.
만물은 찰나 한순간에만 존재하니
만물의 본체는 영원한 게 아니네.
[원문에 방나(㧍那)로 되어 있으나 찰나(刹那)로 고쳐 번역하였다.]
미래를 풀이함[論未]
미래는 구름과 같아서 아뢰야식[本識]이 미래의 종자를 지닐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본식(本識) :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이다. 아뢰야식은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 의식으로, 모든 종자(種子)를 담고 주관할 수 있다.]
아뢰야식은 시작도 끝도 없어
일어난 의념 계속해서 이어지니
진실로 탐욕과 애착 때문이구나.
종자를 지니고도 정녕 의심하는가.
구름으로 비유함[喻雲]]
구름으로 비유함으로 미래의 종자가 반드시 부처의 윤택을 입을 것을 나타낸 것이다
두둥실 두둥실 구름들 모여들어
아름답고 밝은 모습으로 떠가네.
빛처럼 영화로워 사랑할 만하니
윤택을 입을 것 의심할 수 없네.
(비유의 마무리)
다시 한마디 말로 위에서 언급한 현상과 비유를 각각 정리하고 그 핵심 의미를 뽑아내어, 하나의 글로 지었다.
별빛이 사라지듯 집착을 지혜로 없애고
눈의 백태 제거하듯 미혹의 허상을 없애라.
등불의 불꽃처럼 인식함이 생각을 일으키니
세상은 생각이 만든 것이라 꿈속 수레 같네.
이 한 몸은 잠시 나타나는 아침 이슬과 같고
세 감각은 홀연히 생겨나는 물거품처럼 허망하네.
과거의 추억은 공허한 꿈을 꾸는 것일뿐이요
현재의 집착은 깜빡이는 번개를 좇는 격이네.
비를 뿌릴 구름 중에 머문 것을 이미 아니
미래 종자는 항상 아뢰야식에 의지해 있구나.
(??)확히 했다.
[次下別據三性, 三身, 眞俗, 般若, 以明
觀行九喩解九事云]
삶과 죽음의 세계를 잘 살피면 모두 이와 같으니
지혜로운 자는 당연히 열반[真常]에 힘써야 하네.
열반[真常]은 실로 깨닫기 어려운 것 아니니
눈앞에서도 원만히 이룰 수 있는 것이네.
두 몸이 공임을 알면 뱀과 노끈의 구별도 사라지고
진제도 속제도 없음을 깨달으면 거울에 달도 매다니
거울에 달도 매달 때 진실로 모든 근심 사라지고
다른 인연을 만들어서 비로소 복된 곳에 태어나네.
유식(唯識)은 초심자가 잠시잠깐 의지하는 것이요
진여(眞如)는 깨달은 뒤에도 오히려 기댈 수 없네.
기댈 것 없으니 곧 반야(般若)이고
진속을 초월하니 참과 거짓도 없네
피안의 복락은 나룻배를 버리느냐 버리지 않느냐에 달렸으며
자비와 지혜는 중생을 버리느냐 버리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네.
약명반야말후일송찬술(略明般若末後一頌讚述) 계묘(癸卯)년 고려국(高麗國)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조칙을 받들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