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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입문 하권
제36장 선정 중에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을 증험함
수행자가 지법止法을 잘 닦아 온갖 산란한 생각들을 그치면 곧 그 마음이 맑고 고요해지며,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숙세의 선악근성이 자연히 나타나고 일어난다.
경전에서 “먼저 선정으로 움직이게 한 뒤에 지혜로 없애 버린다.”고 하였다.
마음이 이미 지를 얻으면 선과 악, 두 가지 가운데 반드시 한 가지가 나타나니, 반드시 잘 분석해야 한다.
누군가 “어째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업으로 익힌 것이 나타납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것은 병이 극심할 때는 심한 증상만 보이고 다른 병은 알지 못하다가 병이 점점 나으면서 잡다한 증세들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들은 무명이 깊고 두터워 그 업이 익힌 대로 부림을 당하면서도 알거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마음과 생각이 청정해져 부림을 받지 않으므로 그 업이 발현하는 것이고, 또 마음에 의해 단련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내방편內方便의 제2절에 해당하는데 여기에서는 선근善根 2장과 악근惡根 2장으로 나누었다.
선근의 성품을 증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정 중에 홀연히 나타나는 여러 가지 좋은 경계를 말한다. 여기에는 내, 외의 두 가지가 있다.
바깥으로 선근善根이 나타나는 모습은 어떠한가?
여러 가지 보물이 보이는데 아끼거나 탐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과거와 금생에 보시를 행한 습習과 보報이다.
혹은 그 모습이 단엄하고 깨끗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지계와 인욕을 행한 습과 보이다.
혹은 부모나 스승, 가족들을 보고 환희하며 공경하기도 하는데, 이는 효도를 행한 습과 보이다. 혹은 절ㆍ탑ㆍ불경ㆍ불상에 공양하고 장식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삼보를 공경하고 믿은 습과 보이다.
혹은 삼장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곧 깨닫기도 하는데 이는 불경을 독송하고 설법을 들은 습과 보이다.
무릇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좋은 모습이 보이는 것은 대부분 보인報因의 상相이 나타난 것이며,
여러 가지 좋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대부분 습인習因의 선善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모습은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또한 마사魔事가 있으므로 잘 분별해야만 한다.
만일 수행자의 심식을 어지럽히거나 혹은 번뇌를 증가시켜 핍박하고 가리는 등 선정의 마음에 이롭지 않다면 이는 곧 마魔이다. 만약 몸에 색력이 있고 마음에 선한 생각이 일어나 심신心神이 쉽게 다스려짐을 자각하며 신체가 편안하고 아픈 곳이 없다면, 이는 선근이 나타난 모습이다.
또 보인의 모습은 잠시 나타났다가 문득 사라지고 습인의 선은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의 작용이라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없어졌다가도 다시 나타날 것이다.
또 그 선한 마음이 잠시 나타났다가 곧 없어지거나 때로 악한 생각으로 변하기도 한다면 이것은 모두 삿된 것이다.
이처럼 삿되거나 올바른 모습은 헤아리기가 아주 어려우므로 스스로 밝은 스승을 가까이하지 않고 망령되이 취해선 안 된다.
안으로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은 어떠한가?
수행에는 다섯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 아나파나문阿那波那門,
둘째 부정관문不淨觀門,
셋째 자심관문慈心觀門,
넷째 인연관문因緣觀門,
다섯째 염불문念佛門이다.
다섯 문에 각기 세 가지 법이 있어 모두 열다섯 문이 되므로 나타나는 모습도 각각 다르다.
(첫째) 식문息門(阿那波那門)으로부터 선근이 모습을 드러내면
선정에 들었을 때 홀연히 몸과 마음이 고동치면서 여덟 가지 감촉이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 기쁨과 즐거움과 안온함은 이루 비할 데가 없다.
이것은 수식문數息門으로부터 초선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와 같이 나타난 뒤에 사선과 사공처정 등이 일어나는 데 이른다.
혹은 선정 중에 호흡이 출입하는 모습과 그 길고 짧음, 나아가 온몸의 모공이 허공처럼 트이는 것을 지각한다.
이로써 마음이 밝아져 창고를 열고 곡식을 보듯 몸 안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보면, 고요하고 편안하고 상쾌하며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특승관이다.
이는 수식문隨息門으로부터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혹은 선정 중에 문득 내 몸의 호흡이 모공으로 드나들며 몸 전체에 걸림이 없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다 점점 밝고 예리해져 마치 비단을 사이에 둔 것처럼 여러 겹으로 된 살가죽을 보고 뼈와 살까지 보며, 굵고 가늘며 길고 짧은 몸 안의 팔만 마리 벌레를 보고 그 소리까지 듣게 된다.
이때 선정에 든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은 전보다 배나 된다.
혹은 자신의 몸이 마치 파초나 거품, 뜬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통명관이다.
이는 관식문觀息門으로부터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둘째) 부정관문不淨觀門으로부터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혹은 선정에 들어서 남녀의 시체가 불어 터지고, 퍼렇게 멍이 들고, 썩어 문드러지고, 벌레가 파먹고, 뼈만 남고, 바스러져 흩어지는 모습 등을 보게 된다.
이때 깜짝 놀라며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 애착하던 오욕을 영영 가까이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구상九想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혹은 자신의 더러움과 부풀어 올랐다 낭자하게 허물어진 모습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백골 내지 뼈만 남은 사람이 휘황한 빛을 뿜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선정에 든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오욕을 혐오하고 나와 남이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배사背捨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혹은 자신의 몸이나 다른 이의 몸, 온갖 짐승ㆍ옷ㆍ음식ㆍ나무 등도 모두 더러운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한 집안ㆍ한 나라 내지 시방 모든 세계가 다 더러운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백골이 빛을 내뿜는 등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는 대부정관大不淨觀인 승처勝處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 관이 생길 때 모든 집착하는 마음을 타파할 수 있다.
(셋째) 자심관문慈心觀門으로부터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선정 중에 문득 자비로운 생각을 일으켜 먼저 가까운 사람을 반연하고 나아가 많은 사람에까지 미치며 그들이 다 즐거움을 얻는 것을 본다. 그러면 성냄이나 원한이 없어지고 무한히 넓어져 시방에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중생을 반연한 자심慈心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중생을 반연한 비심悲心 내지 희심喜心과 사심捨心 역시 이 모습과 같다.
혹은 선정 중에 안팎의 일체에는 음陰과 입入의 법만 있을 뿐이라서 생기는 것도 오직 법이 생기는 것이고 없어지는 것도 오직 법이 없어지는 것임을 지각한다.
이로써 ‘중생’이라든지 ‘나’ 또는 ‘나의 것’을 보지 않으니, 단지 오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수음受陰에 즐거운 느낌이 있으면 이 즐거운 느낌을 반연하여 자심의 선정을 일으켜 원한을 없애고 성냄을 없애며 무한히 확장시킨다.
이것은 법을 반연한 자심이다.
혹 법을 반연한 비심 내지 희심과 사심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역시 이와 같은 모습이다.
혹은 선정 중에 홀연히 일체 모든 법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님을 깨달아 양 극단을 보지 않기도 한다.
즉 중생이건 중생이 아니건 법이건 법이 아니건 그 모두를 얻을 수 없어 반연할 것이 없다. 반연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전도된 생각이 그쳐서 고요하고 안락해지며, 마음이 자심의 선정과 상응하여 일체가 이와 똑같이 안락하다고 평등하게 관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냄과 고뇌를 없애고 무한히 확장시킨다.
이것은 반연함이 없는 자심의 모습이다.
비심 및 희심과 사심 역시 이와 같은 모습이다.
(넷째) 인연관문因緣觀門으로부터 (선근이) 나타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선정 중에 홀연히 자각하는 마음이 생겨 삼세三世를 미루어 살펴보면 과거의 무명 이래로 아상ㆍ인상을 찾아볼 수 없고, 무명 등의 법은 단절되는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이로써 육십이사견六十二邪見의 그물을 찢고 마음에 올바른 선정을 얻게 되어 안온하고 고요해진다.
또한 관하는 지혜가 분명해지고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며, 몸과 입으로 짓는 행위가 청정해지고 바른 행이 성취된다.
이것은 삼세三世 십이인연을 관찰하는 지혜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혹은 선정 중에 홀연히 심식이 밝고 예리해짐을 느끼면서 다음과 같이 사유한다.
“내가 처음 생길 때 부모의 몸 일부를 빼앗아 내 것이라 여겼으니, 이를 가라라歌羅邏라 한다. 가라라 때를 무명이라 하고, 이를 반연하여 행行과 식識 내지 노사老死가 있게 되었으니, 이를 십이인연이라 한다.
그러나 가라라 때에는 단지 세 가지(命ㆍ煖ㆍ識)의 화합이 있을 뿐 나도 없고 남도 없다. 이 세 가지도 오히려 참되지 않은 것인데 무명 등 십이인연이 끝내 어디에 의거하겠는가. 만일 무명 등 모든 법을 찾아볼 수 없다면 진정 이것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이와 같이 되새길 때 유무有無의 두 견해를 타파하고 마음을 정도로 돌이켜 바른 선정과 상응하고 지혜와 앎이 개발된다.
이것은 과보果報 십이인연을 관찰하는 지혜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혹은 선정 중에 홀연히 찰나의 (생멸하는) 마음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으며 성품에는 본래 알맹이가 없음을 지각하기도 한다.
무엇 때문인가?
한 생각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인연을 바탕으로 한다. 인연이란 곧 십이인연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연에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한 생각에 정해진 알맹이가 있겠는가?
이미 한 생각의 알맹이를 얻지 못한다면 곧 세간의 성품에 대한 삿된 집착을 깨뜨려 마음이 바른 선정과 상응하고 지혜가 샘솟듯 개발된다.
이것은 일념一念 십이인연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다섯째) 염불문念佛門으로부터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혹은 선정 중에 홀연히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게 된다.
“여래께서는 과거 아승기겁 동안 중생들을 위해 온갖 만행을 빠짐없이 닦았기 때문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지혜가 원만하며 마귀와 원수를 항복시킬 수 있었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아 자신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며 바른 법륜을 굴려 널리 일체중생을 제도하셨으며, 열반에 드신 뒤에는 사리舍利와 경전의 가르침을 남겨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셨으니, 이러한 공덕은 한량없고 끝도 없다.”
이로써 경애하는 마음이 생기고 삼매가 개발되며 선정에 들어 안락하게 된다.
혹은 선정 중에 부처님 상호를 보거나 설법을 들어 마음이 맑아지고 믿음과 이해가 생기기도 한다.
이것은 응신불(應佛)을 염하는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혹은 선정 중에 홀연히 시방 제불의 진실하고 원만한 과보로서의 몸을 생각하게 된다.
“(그 몸은) 고요히 상주하며 색과 마음이 청정하고 미묘하면서 적멸하다.
공덕과 지혜가 법계에 충만하고 생기거나 멸하지 않으며 일부러 짓는 일도 없다. 그러니 어찌 왕궁에 태어나고 사라쌍수에서 멸도하신 일이 있겠는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생멸을 보이신 것뿐이다.”
혹은 선정 중에 불가사의한 불법의 경계를 보고 곧 한량없는 원행과 한량없는 지혜와 삼매법문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은 보신불(報佛)을 염하는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혹은 선정 중에 홀연히 제불 법신의 실상이 마치 허공과 같음을 생각하고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깨닫게 된다.
“일체의 법이 본래 생기지도 않았고 지금 또한 멸하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경계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며,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고 단절하는 것도 아니며, 계박된 것도 해탈한 것도 아니며, 생사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다.
맑고 청정하여 성性과 상相이 항상 그러하고 중생과 제불이 동일한 실상이니, 이것이 곧 법신불이다. 모든 법이 참 그대로여서 곧 부처이니, 이것을 떠나 따로 특별한 부처는 없다.”
이렇게 되새길 때 삼매가 앞에 나타나 실상의 지혜(實慧)가 개발되고 한량없는 법문을 통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고요히 부동하여 불가사의한 경계가 모두 선정 중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법신불(法佛)을 염하는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제37장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의 진위 판별
선정 중에 각 선정의 선근이 나타나는 모습에는 참된 것도 있고 거짓인 것도 있다. 따라서 마땅히 잘 구별해야지 잘못 취하거나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魔의 선정을 보고 선근이라 여겨 마음에 취착이 생기면 이 삿된 치우침으로 인해 병이 생기거나 정신이상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선근을 마의 선정이라고 의심하면 곧 좋은 이익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 그 모습으로 삿됨과 바름을 검증하고, 법으로써 허와 실을 시험해야 한다.
모습으로 검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간략하게 열 쌍의 삿된 모습을 제시하겠다.
첫째는 감촉의 지나침과 모자람,
둘째는 안정됨과 산란함,
셋째는 없음과 있음,
넷째는 밝고 어두움,
다섯째는 근심과 기쁨,
여섯째는 괴로움과 즐거움,
일곱째는 선과 악,
여덟째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아홉째는 묶임과 해탈,
열째는 강함과 연약함이다.
무릇 이러한 삿된 법은 지나친 것이거나 알맞음에 미치지 못한 것이니 잘 분별하라.
움직이는 감촉(動觸)이 생길 때, 몸과 손이 어지러이 움직이거나 혹은 잠에 빠진 듯 꼼짝도 하지 않거나, 혹은 각종 이상한 경계가 보이는 경우는 ‘지나친 모습(增相)’이다.
혹은 감촉이 생겨도 몸에 두루 퍼지지 못한 채 곧 사라져 버리고, 이로 인해서 선정의 경계를 잃어버려 쓸쓸하고 무료하며 몸을 지탱하는 법(持身法)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모자라는 모습(減相)’이다.
몸과 마음이 선정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고 혹은 이로 인해 선정에 들어가서 이레가 지나도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삿되게 안정된 모습(邪定相)’이다.
혹은 마음과 뜻이 어지러워 반연하는 대상에 머물지 못하는 것은 ‘산란한 모습(亂相)’이다.
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공처정을 증득했다고 여기는 것은 ‘없는 모습(空相)’이다.
혹 몸이 나무나 돌처럼 단단하게 느껴지면 이는 ‘있는 모습(有相)’이다.
밖으로 갖가지 빛과 형상을 보거나 몸과 마음이 암실에 들어간 것처럼 어두운 것은 ‘밝은 모습(明相)’과 ‘어두운 모습(闇相)’이다.
그 마음이 번뇌에 시달려 초췌하고 기쁘지 않거나, 혹은 마음이 너무 기뻐 마구 요동치면서 안정되지 않는 것은 ‘근심의 모습(憂相)’과 ‘기쁨의 모습(喜相)’이다.
몸과 마음이 구석구석 아프거나 반대로 쾌락이 계속돼 이에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모습(苦相)’과 ‘즐거움의 모습(樂相)’이다.
스스로 부끄러워함이 없고 남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나쁜 마음이 생기거나, 밖으로 산선散善을 생각하고 각과 관이 마음을 동요시켜 삼매를 파괴시키는 것은 ‘선한 모습(善相)’과 ‘악한 모습(惡相)’이다.
심식心識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혼미하게 전도되거나, 혹은 지견이 너무 예리해 마음에 삿된 깨달음이 생겨 삼매를 파괴하는 것은 ‘지혜로운 모습(智相)’과 ‘어리석은 모습(愚相)’이다.
오개五蓋 등 온갖 번뇌가 심식을 덮어 자유스럽지 못한 것은 ‘묶인 모습(縛相)’이다.
혹 스스로 공무상정空無相定을 증득하고 이미 도과를 얻어 번뇌를 끊고 해탈했다고 여기며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는 것은 ‘해탈한 모습(脫相)’이다.
그 마음이 기와나 돌처럼 강해 들고 나는 것이 자유자재하지 못하고, 돌이키고 변화시키기 어려워 좋은 도를 따르지 못하는 것은 ‘강한 모습(强相)’이다.
또 심지가 진흙처럼 연약해 쉽게 파괴되는 것은 ‘연약한 모습(輭相)’이다.
이와 같은 스무 가지 나쁜 감촉이 마음을 어지럽혀서 선정을 파괴하고 마음을 편벽되게 만드니, 이것이 삿된 선정이 발생하는 모습이다.
만일 삿되고 거짓된 것을 변별하지 못하고 마음에 애착을 일으키면 대부분 마음을 잃고 미쳐서 울고 웃으며 뛰어다니게 되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한다.
따라서 만일 이런 감촉이 생기는 것을 지각했다면 곧 방편으로 제거해야 한다.
또 이 스무 가지의 삿된 감촉이 생길 때에 외도의 96종 귀신법鬼神法 가운데 서로 감응하는 것이 있으면 귀신이 생각을 따라 붙어 버리고, 이로 인해 귀신법문鬼神法門을 증득하게 된다.
이 귀신의 힘으로 깊은 선정을 얻기도 하고 지혜와 말솜씨를 얻기도 하며 길흉을 알고 신통한 이적도 많게 된다.
그래서 삿된 교화를 널리 행하여 중생들을 감동시키는데 설령 선이 있다 해도 그 행위는 거짓되고 잡스럽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어 그런 기적을 보면 성현聖賢이라 칭송하며 그가 하는 짓을 믿고 복종한다.
바른 계와 바른 견해를 파괴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삼존三尊을 공경하지 않고 삼보三寶를 훼손하는 데까지 이른다.
혹 평등법을 설하면서 이를 인도 없고 과도 없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삿된 인과 삿된 과를 설하기도 한다.
그래도 귀신의 힘 때문에 들었다 하면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없고, 보았다 하면 모두들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가 설사 몸에 승복을 걸치고 입으로 불법을 말한다 해도 그의 마음이 이미 삿되고 그의 행위가 거짓되고 편벽하니, 이는 마귀의 권속이지 부처님의 정법은 아니다.
수행자가 모름지기 이를 잘 살펴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면 이런 법은 곧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감촉이 일어날 때 또한 열 가지 바른 모습이 있다.
첫째는 감촉하는 모습이 법과 같음,
둘째는 선정의 모습이 법과 같음,
셋째는 없는 모습이 법과 같음,
넷째는 밝은 모습이 법과 같음,
다섯째는 기뻐하는 모습이 법과 같음,
여섯째는 즐거운 모습이 법과 같음,
일곱째는 선한 모습이 법과 같음,
여덟째는 지혜의 모습이 법과 같음,
아홉째는 해탈이 법과 같음, 열째는
마음의 조화로운 모습이 법과 같음이다.
‘법과 같음(如法)’이란 무엇인가?
앞의 저 열 쌍의 나쁜 모습과는 반대로 몸과 마음이 안온하고 청정하여 알맞게 조화되는 것을 ‘법과 같다’고 한다.
이러한 선법을 만나면 그 모든 것을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법에 따라 정진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좋은 경계이다.
법으로 시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간혹 삿된 선정의 모습이 바른 선정의 모습과 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세 가지 법으로 시험해 보아야만 한다.
예를 들어 진짜 금인지 알아보고자 할 때는 그것을 태워 보고, 두드려 보고, 갈아 보는 세 가지 법으로 시험해 보면 판별되지 않는 것이 없다.
진짜 금이라면 태울수록 더욱 정련되고, 두드릴수록 더욱 단단해지며, 갈수록 더욱 빛이 난다. 그러나 가짜 금은 불에 닿으면 검게 변하고, 두드리면 부서지며, 갈더라도 빛이 나지 않는다.
지금 이와 같이 지혜의 불로 비추어 보고, 본래의 법으로 잘 다스리고, 선정의 마음으로 연마하면 진위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선정의 마음으로 연마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움직이는 감촉이 일어났지만 삿됨과 바름이 아직 분명하지 않다면 곧 깊이 선정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 경계 가운데에서 취하거나 버리지 말고 다만 평등한 마음으로 선정에 머물러야 한다.
만일 이것이 선근善根이라면 선정의 힘이 더욱 깊어지고 선근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마귀의 짓이라면 오래지 않아 스스로 파괴될 것이다.
본래의 법으로 잘 다스린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나타난 것이 더러움을 관하는 선이라면 곧 부정관不淨觀을 닦아서 시험해 본다.
그 닦음을 따라 경계가 더욱 분명해진다면 이것은 숙세에 지은 선근의 모습이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닦을수록 점점 소멸한다면 이것은 삿된 것으로서 참된 것이 아니다.
지혜로 관찰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일어난 법을 관찰하여 그 근원을 헤아려 보면 그것이 생겨나는 곳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공적함을 깊이 알아 마음이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으면 삿됨은 저절로 없어지고 바름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또 시험하는 방법이 있다.
일어나는 법과 더불어 함께하면서 그 삿됨과 바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법과 함께하면서도 그 삿됨과 바름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과 오랫동안 함께하고, 오랫동안 함께해도 알지 못할 때에는 지혜로써 관찰한다. 그러면 알지 못할 것이 없다.
또 수행자가 여러 선정을 일으킬 때 마귀가 그것을 저지하고 희롱하고자 하여 그 선 가운데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이때 만일 마음에 탐욕과 집착이 있거나 근심과 두려움이 있으면 마귀가 그 틈을 노려 마귀에게 속게 된다.
그러나 만일 법대로 마음을 써서 비추어 타파하면 구름이 걷히고 해가 드러나듯 마귀가 사라지고 선정의 마음이 다시 맑아지게 된다.
마귀의 유혹으로 삿된 선정을 얻었더라도 수행자가 이를 깨달아 알아차리고 법으로써 다스린다면 마귀가 물러난 뒤에 다시는 한 터럭만큼의 삿된 선법도 없게 된다.
만약 선정이 마귀의 짓인 것 같아 법으로 이를 다스렸는데도 끝내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죄업의 장애이지 마귀의 짓은 아니다.
이럴 때는 부지런히 참회하여 죄를 멸하고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면 선정이 자연히 분명해질 것이다.
혹 선정에 들었을 때 방편이 교묘하지 못하여 법답지 못한 경계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방편을 잘 쓰면 밝고 깨끗함을 증득하게 되는데, 이 또한 마귀의 짓은 아니다.
제38장 악근이 나타나는 모습을 증험함
악근惡根의 성품을 증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악법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각관覺觀의 불선법不善法,
둘째는 탐욕의 불선법,
셋째는 성냄의 불선법,
넷째는 어리석음의 불선법,
다섯째는 악업의 불선법이다.
다섯 가지에 또 각각 세 가지 법이 있어 모두 열다섯 가지가 되지만, 이것은 모두 삼독三毒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각관의 불선법이란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과거에 선을 심지 않고 악습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 선정 중에서 선법善法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각과 관으로 대상을 반연할 뿐 찰나찰나 머물지를 못한다.
때로는 탐욕을 반연하고, 때로는 성냄과 어리석음을 반연하면서 그 반연하는 대상이 분명하고 또렷또렷해 해가 가고 달이 바뀌어도 선정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날카롭게 분별하는 마음에서 각관이 발생한 모습이다.
혹은 생각을 거두어들이는 가운데 비록 각관의 번뇌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때는 밝고 어느 때는 어두운 경우도 있다.
밝을 때는 각과 관이 대상을 반연하여 생각이 머물지를 못하고, 어두울 때는 흐리멍덩한 무기無記로 깨닫는 것이 없다. 이것은 반은 밝고, 반은 어두운 각관이 발생한 모습이다.
만약 선정을 닦을 때 마음이 잠든 것처럼 어둡긴 하지만 어두운 가운데서도 간절히 반연하여 각과 관이 머물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결같이 혼미한 마음 가운데서 각관이 발생한 모습이다.
(둘째) 탐욕의 불선법이란 다음과 같다. 만일 선정을 닦는 가운데 탐욕의 마음이 생겨나 남자는 여자를 생각하고 여자는 남자의 모습을 사모하여 찰나찰나 머물지 못한다면, 이것은 밖으로 음욕을 탐하는 번뇌가 발생한 모습이다.
혹은 욕심이 발동하여 밖으로는 남녀를 생각하고, 안으로는 자기의 몸을 애착하여 머리를 쓰다듬거나 목을 어루만지며 찰나찰나 애착하여 모든 선정을 장애하기도 한다. 이것은 안팎으로 탐욕의 번뇌가 발생한 모습이다.
혹은 안팎으로 애착할 뿐만 아니라 다시 일체 만물에 탐욕을 일으키기도 한다. 혹 생애生涯를 반연하거나 또는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반연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든 곳에 두루 미치는 탐욕이 발생한 모습이다.
(셋째) 성냄(瞋恚)이 발생한 모습은 다음과 같다.
좌선 중에 성난 느낌이 문득 일어나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가 범했는지 범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근거도 없이 성을 낸다면, 이것은 이치에 어긋나게 성내는 모습이다.
혹은 다른 이가 성가시게 건드려 이로 인해 성을 내고 성난 느낌이 계속되어 그치지 않는 경우가 있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마음에 분노와 원한을 품는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게 성내는 모습이다.
혹은 선정을 닦는 가운데 자기의 견해는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그르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사람의 행동과 말을 잘못이라 여기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며,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괴로운 느낌이 마음에 생기게 된다. 세상에는 재물에 대해서는 참을 수 있지만 의리義理에 있어서는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크게 화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논쟁으로 성내는 모습이다.
(넷째) 어리석음(愚癡)이 발생한 모습은 다음과 같다.
선정 중에 홀연히 삿된 견해를 일으켜 다음과 같이 따져서 분별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의 나와 모든 법은 없어지고 현재가 있는 것일까, (과거의 나와 모든 법이) 없어지지 않고 그로 인해 지금 있는 것일까?”
이렇게 간절하게 사유하며 삼세를 헤아려 살핀다.
만약 “(과거의 나와 모든 법은) 없어졌다.”고 한다면 단견斷見에 떨어지고,
“(과거의 나와 모든 법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상견常見에 떨어진다.
이와 같은 삿된 지각이 찰나찰나 머물지 않으면, 이로 인해 재빠른 알음알이와 걸림없는 말재주로 논쟁하고 희론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세간을 벗어나는 바른 선정을 장애하게 된다.
이것은 단견과 상견으로 헤아리는 삿된 견해의 모습이다.
혹은 “나와 오음 등의 법은 확실히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확실히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라고 헤아리고 살핀다.
그리하여 사견의 마음이 곧 발생하고 그 견해를 따라 집착을 일으켜 찰나찰나 머물지를 못한다.
이것은 유무有無을 헤아리는 삿된 견해의 모습이다.
혹은 이렇게 생각한다.
“미진微塵이 있으므로 실제로 존재하는 법이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사대四大가 있으며, 사대가 있으므로 중생세계가 차례로 있게 된다.”
그러면 곧 사견의 마음을 이루어 알음알이와 말재주가 늘어나고 시비를 다투게 된다. 이로 인해 선정이 발생하지 않고 비록 발생하더라도 삿된 선정에 떨어지게 되니,
이것은 세간의 성품을 헤아리는 삿된 견해의 모습이다.
(다섯째) 악업이 도를 장애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선정을 닦고자 할 때, 문득 혼미하게 가라앉고 잠에 빠져 무기無記가 되고 흐리멍덩하게 분별하지 못해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혼침昏沈이 어둡게 가리는 장애가 발생한 모습이다.
혹은 비록 혼미하게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나쁜 생각을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혹 십악과 오역죄를 저지르려는 생각을 하거나, 금계를 깨뜨리고 환속하려는 등의 생각이 자꾸 생기면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생각의 사유가 장애하는 모습이다.
선정을 닦을 때 몸이 갑자기 아프면서 핍박받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혹은 머리와 얼굴이 없고 옷이 갈가리 찢긴 사람을 보기도 하고, 자신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기도 하고,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보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기도 하고, 귀신이나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기도 하고, 흉한 모습이나 나쁜 일을 꿈꾸기도 한다.
이는 모두 도를 장애하는 죄가 일어나 수행자를 핍박해 놀라고 두렵게 하거나 혹은 고뇌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계가 핍박하고 장애하는 모습이다.
무릇 이 다섯 가지 장애는 모두 전생에 훈습된 삼독이 현세의 과보로 나타나는 장애이니, 이를 업장業障이라 한다. 과거세에 악업을 지으면 응당 미래에 악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선을 닦으려고 하자, 선과 악이 어긋나고 업이 곧 악이 발생하도록 부추겨 그 사람이 선정의 도에서 진전된 업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