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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4권
3.2. 행의 마음을 성취함(4)
[몸ㆍ입과 뜻의 업]
[문] 여래의 수다라에는 두 가지 업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첫째가 일으키는 업[起業]이고,
둘째가 짓는 업[作業]이다.
이 두 가지 업을 널리 해서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몸ㆍ입과 뜻의 업이다.
이 세 가지 업은 어떻게 차별되는가?
의지함[依]으로부터 말하는가, 바탕[體]으로부터 말하는가, 일어남[起]으로부터 말하는가?
만약 의지함으로부터 말한다면 곧 이는 하나의 업이니, 온갖 업은 몸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바탕으로부터 말한다면 곧 이는 하나의 업이니, 온갖 업은 오직 입의 업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어남으로부터 말한다면 곧 이는 하나의 업이니, 온갖 업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답] 세 가지 차례에 의지하여 세 가지 업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각하므로 곧 이는 마음의 업이며 그 마음의 업에 의하여 몸과 입의 업이 일어나나니, 마음을 의지하기 때문에 몸과 입의 업이 일어나는 줄 이와 같이 차례로 알아야 하며, 그 작위와 무작위도 알아야 하며, 그 몸과 입의 업의 차별도 알아야 한다.
또, 몸의 업이 짓는 것은 몸의 위의(威儀)에 의하고 몸을 의지하여 짓는 그것과 그 형상이니, 이를 몸의 짓는 업이라 한다.
[문] 몸의 가고 오고 움직이고 옮는 것이 몸의 업이라 하면,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 업이라 이름하지 않는가?
[답] 만약 가고 오는 것을 몸의 업이라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온갖 함이 있는 법[有爲法]은 찰나도 머무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면 어디서 없어지는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음을 어떻게 가고 오고 움직이고 옮는다고 말하며 몸의 업이라 하겠는가?
[문]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온갖 법이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어떤 법은 찰나 동안 머무르는 것으로도 보이므로 이는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가?
[답]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함이 있는 법은 필경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저 온갖 함이 있는 모든 법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또 무슨 뜻인가?
지을 수 있는 법은 바로 인연이 있음으로써 없어진다.
법이라 함은, 곧 이는 물건이 없다. 만약 물건이 없다면 그 법은 짓는 것이 아니니, 함이 있는 법은 인도 없고 연도 없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법이 곧 생길 때에 없어지지 아니하면 뒤에도 없어지지 않아야 하며, 만약 없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정해지고 진실이어야 한다. 만약 정해지고 진실하다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아야 하며, 만약 그와 같다면 그 없어짐은 인연으로부터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문] 나는 어떤 법은 인연으로부터 없어짐을 본다. 마치 땔나무 등의 법은 그 불 등의 인연으로부터 없어지는 것과 같나니, 온갖 헤아리는 것 가운데서는 현견량(現見量)이 훌륭하다.
이 이치 때문에, 온갖 법의 없어짐은 인연(因緣)으로 부터이다.
[답] 어떻게 땔나무 등의 법이 불 등의 인연에 의하여 없어지는 것을 아는가?
나는 인연 없이 저절로 없어진다고 말했는데, 이 이치는 생각해야 한다.
불과 땔나무 등의 법으로 인하여 없어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인연이 없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이 이치는 어떤 것인가?
본래 상속한 인연이 없어지면 나머지가 다시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연으로 없어지지 않음은 마치 바람이 등불을 끄고 손이 방울 소리를 없애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 등의 앎은 이 비지[比智]로서 아는 것이다.
십지(十智) 모든 지혜를 열 가지로 나눈 것. (1) 세속지(世俗智). 세속의 일을 아는 지혜. (2) 법지(法智). 욕계의 사제(四諦)를 체득한 지혜. (3) 유지(類智). 색계·무색계의 사제(四諦)를 체득한 지혜. 미지지(未知智), 비지(比智) (4) 고지(苦智). 욕계·색계·무색계의 고제(苦諦)를 체득한 지혜. (5) 집지(集智). 욕계·색계·무색계의 집제(集諦)를 체득한 지혜. (6) 멸지(滅智). 욕계·색계·무색계의 멸제(滅諦)를 체득한 지혜. (7) 도지(道智). 욕계·색계·무색계의 도제(道諦)를 체득한 지혜. (8) 타심지(他心智).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 (9) 진지(盡智). 자신은 이미 고(苦)를 알았고, 집(集)을 끊었고, 멸(滅)을 체득했고,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지혜. (10) 무생지(無生智). 자신은 이미 고(苦)를 알았기 때문에 다시 알 필요가 없고, 집(集)을 끊었기 때문에 다시 끊을 필요가 없고, 멸(滅)을 체득했기 때문에 다시 체득할 필요가 없고, 도(道)를 닦았기 때문에 다시 닦을 필요가 없다고 아는 지혜. |
답하면서 이미 말하였는데, 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어느 한 법이 인연으로부터 없어짐이 있다고 하면 으레 온갖 법은 모두가 인연으로 없어져야 하리니, 어떤 법이라도 인연으로 없어짐이 아니라 하면 안 된다.
마치, 나는 법[生法]은 온갖 것이 다 인연으로부터 나고 인연을 쫓지 않고 나는 법이 없는 것과 같다.
마음과 소리와 불꽃같은 것이 인연으로부터 없어지지 아니함은, 그것이 인연을 기다려서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문]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뒤의 마음이 나면 앞의 마음이 없어지고 뒤의 소리가 생기면 앞의 소리가 없어지나니, 그 먼저의 법은 뒤의 법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연으로부터 없어지는 것인 줄 알 수 있다.
[답]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그 마음과 소리는 서로가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의심하며 아는 것과 결정코 아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두 가지 법은 함께 하지 않나니,
괴로움과 즐거움ㆍ탐냄과 성냄 등이 모두 또한 그와 같다.
또, 앞의 마음과 소리는 빠르고 뒤의 마음과 소리는 더디거늘,
어떻게 빠르지 않은 마음과 소리로써 그 빠른 마음과 빠른 소리를 해칠 수가 있는가?
그러므로 법의 없어짐은 인연을 쫓지 않는다.
[문] 비록 등(燈)과 불꽃이 잠깐 동안을 머무르지 않으며 인연 없이 머무른다손 치더라도 법을 없애고 법 아닌 것을 없앰이 있으므로, 그 없어지는 법에 의하여 등과 불꽃을 없애나니, 그러므로 인연에 의하여 없어져야 한다.
[답]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물건이 없다는 법으로써 어떻게 없어지는 원인을 지을 수 있는가?
또 나는 원인과 없어지는 법과 법 아닌 것은 찰나도 머무르지 않으며,
찰나의 마음과 찰나의 마음 가운데서도 마침내 나는 원인과 없어지는 원인을 지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온갖 함이 있는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없어지는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또, 대답하리라.
만약 불 등에 의하여 땔나무 등이 없어지는 원인을 지을 수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원인[生因]은 곧바로 없어지는 원인이다.
이는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어떠한 불꽃에 의하여 어떠한 빛깔을 내면 곧 그 불꽃은 갈수록 더 익게 할 수가 있고 더 익게 하는 것은 없어지는 원인이니, 그러므로 나는 원인은 곧 없어지는 원인이며, 다시는 다른 원인이 없다.
이치가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어떻게 이 하나의 법이 나게 할 수 있고 법이 없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또, 달라지고 달라지는 불꽃 가운데서 이와 같은 원인의 차별을 허망하게 분별함은,
마치 잿물[灰汁]과 쓴 술[苦酒]ㆍ눈[雪]ㆍ해ㆍ땅ㆍ물 따위로 인하여 곡식과 쌀이 나고 익고 달라질 수 있는 것과 같나니,
익고 달라지는 따위의 빛깔을 그곳에서 어떻게 분별하는가?
[문]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이 물을 끓이면 물은 불로 말미암아 다하니 불은 없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답] 아까의 해석과 같나니,
어떻게 물은 불로 인하여 없어지고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닌 줄을 알 수 있는가?
[문] 만약 그렇다면, 불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답] 불길이 왕성하면 그 불의 힘에 의하여 물의 힘이 점차로 적어지며 뒤에 이르러서는 물의 서로 이어지는 바탕이 끊어져서 일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불의 하는 일이며 불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온갖 함이 있는 법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며, 인연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없어지는 법은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곧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이룩되는 모든 법은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고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이 법은 저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문] 나는 다른 곳에서 오히려 이런 법을 본다.
만약 법이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딴 곳에서 보게 되고 딴 곳에서 알게 되는가?
[답] 풀과 불꽃과 같나니, 그러므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의 점잖은 거동[威儀]은 몸의 짓는 법이라 한다.
이 이치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몸과 달리 따로 진실한 법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치 한 편으로 빛이 나 있으면 긴 빛이라고 하고,
그 긴 빛에 다시 따로 빛을 보이면 짧은 빛[色]이라고 하고,
네모진 데에 의지해서 보이면 네모진 빛이며,
둥근 물건에 의지한 것이면 둥근 빛이라 한다.
이와 같이 길고 짧고 모나고 둥글고 높고 낮은 여러 빛들은, 마치 불을 돋우는 것과 같다.
한 곁방으로 곧장 가면서 끊어지지 않고 서로 이어지면서 보이면 긴 불이라고 하고,
둘레의 네 곁방을 돌면서 끊어지지 아니하면 둥근 불이라고 하며,
갖가지로 옮김에 따라 갖가지의 불을 보게 되나니,
이와 같이 불을 여의고서는 다시 따로 진실한 형상의 법이 없다.
만약 불을 여의고 그 밖에 형상의 법이 있다면 당연히 두 개의 감관으로 엿보게 되어, 눈의 감관은 긴 것을 보고 몸의 감관은 짧은 것이 닿아져야 한다.
하나의 빛깔[色]이 두 개의 감관으로 보지 아니함은 마치 닿음의 법과 길고 짧은 것 따위와 같나니, 이와 같이 빛깔 중에서 알아야 한다.
닿음의 법은 오직 마음이어서 이는 나타나는 감관으로 붙잡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불빛[火色]을 보면서 닿음 중에서는 생각을 내어 아는 것과 같고,
꽃냄새를 맡으면서 빛깔 중에 생각을 내는 것과 같아서
이 법은 이와 같아야 하나니, 다른 법에 의하여 다른 법을 생각하나 닿음의 법은 하나도 없다.
점잖은 거동 중에서도 실로 닿음의 법에 의하여 다른 법을 얻음이 있나니, 그러므로 실로 몸의 점잖은 거동이란 없다.
[문]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캄캄한 밤에 멀리서 흙과 담장 따위의 빛깔을 보면 혹은 길기도 하고 혹은 짧기도 한데, 이것은 바로 진실이어야 한다.
[답] 다만 빛깔을 보았을 뿐, 허망하게 길고 짧음 따위의 빛깔을 분별하는 것은 분명히 몰랐다.
마치 다르지 않은 개미들이 가는 것이 보이고 둘러쌈이 보이는 것처럼,
이것 또한 그와 같아서 몸의 점잖은 거동과는 달리 다시 진실한 법이란 없다.
오직 몸의 점잖은 거동만이 짓는 법이라 하고 몸을 여읜 그 밖에서 따로 짓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리라.
아까 마음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마음속으로 분별하여
‘나는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짓겠다’고 하고서,
몸과 입의 업을 낼 수 있으면 마음의 업이라 하고,
만약 몸으로 하는 일이면 몸의 업이라 하며,
만약 입으로 하는 일이면 입의 업이라고 한다.
세 가지 업과는 달리 따로 진실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 몸과 입의 업과는 달리 실로 따로 법이 있다.
왜 그러한가?
세 가지의 때 없는 빛깔[無垢色]이 있어서 부작위의 업의 길 등을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가?
여래의 수다라에서 말씀하셨다.
“빛깔은 세 가지를 포섭하였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 빛깔이 있되 볼 수도 있고 거리낄 수도 있으며,
둘째 빛깔이 있되 볼 수는 없고 거리낄 수 있으며,
셋째 빛깔이 있되 볼 수도 없고 거리낄 수도 없는 것이니라.”
때 없는 빛깔이라 함은 샘이 없는 빛깔[無漏色]이라 말한다.
무엇이 샘이 없는 빛깔인가?
샘이 없는 빛깔은 샘이 없는 법[無漏法]을 말한다.
무엇이 샘이 없는 법인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빛깔 중에서 성냄과 애욕을 내지 않고, 나아가 의식[識] 중에서 성냄과 애욕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샘이 없는 법이라 한다.
만약 그와 같다면, 무작법(無作法)을 여의고서 어디에 빛깔이 있되 볼 수도 없고 거리낄 수도 없는가?
이는 샘이 없기 때문이니, 응당 무작법은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여의고서 더욱 자람이 있어야 하는 줄 알겠다.
여래의 수다라에서 말씀하셨다.
“믿음이 있는 이야, 선남자와 선여인이 일곱 가지 공덕을 수행하면, 가고 서고 잠을 자는 따위의 밤과 낮 동안에 언제나 공덕이 생기며 공덕이 더욱 자라나느니라.”
만약 몸과 입의 업을 떠나서 다시 무작법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마음을 달리하는 법으로서 더욱 자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몸과 입의 업을 여의고서 무작법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스스로가 업을 짓지 않고 다른 이를 시켜서 업을 짓게 할 적에, 만약 무작법이 없다면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또, 다만 사람을 시켜서 업을 짓게 하는 것만이 아니어도 곧 업의 길을 성취하였다고 이름할 수 있으며, 그 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다시 허물이야 있다.
비록 업을 지어서 아직 진실한 바탕은 성취 못하였다손 치더라도,
여래의 경전 중에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아, 밖으로 11입(入)을 거두어들이되 볼 수 없는 것과 거리낄 수 없는 것은 포섭하지 아니하나 빛깔이 아닌 것을 말하지는 않느니라” 하셨다.
이는 어떠한 이치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는가? 여래께서는 법을 보고 거두어들이는 가운데서 무작색(無作色)을 포섭하셨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또 다시, 힐난하겠다. 만약 무작법이 없다면 역시 여덟 가지 거룩한 길[八正道]도 없어야 하므로, 반드시 그 중에는 바른 말[正語]과 바른 행위[正業]와 바른 생활[正命]이 없으리니, 결정코 무작법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힐난이 있다. 만약 무작법이 없다면,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여의고서 역시 무작계(無作戒)가 없어야 하리니, 계를 받은 뒤여서 곧 없기 때문이다. 잠을 잤었고 미치광이 따위의 실심한 이들이라도 비구 또는 비구니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니, 결정코 무작법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수다라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계율 깨뜨리는 교량(橋樑)을 여의라”고 하셨는데,
만약 무작법이 없다면 어떻게 계율 깨뜨리는 교량을 여의라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러므로 무작법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답] 이 힐난은 지극히 번거롭구나. 비록 여러 가지로 많은 말을 하였지만 이치는 모두가 옳지 못하다.
왜 그러한가?
그대는 아까 여래의 수다라에서 말씀한 빛깔의 세 가지를 인용하고 있으나, 그대는 여래 경전의 뜻을 모르고 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온갖 성인은 선정의 힘으로 삼매 경계의 빛깔을 보지만 삼매의 힘에 의하여 그 빛깔이 생기므로 그 빛깔은 눈 감관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볼 수도 없으며, 그 밖의 온갖 물건이 장애할 수 없기 때문에 거리낄 수도 없다.
[문] 만약 눈 감관과의 경계가 아니고 장애할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빛깔이라 하는가?
[답] 그대는 마음과 뜻[心意]을 여의고서 무작색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무작색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또, 대답하겠다. 이 빛깔은 바로 샘이 없는 경계의 성인의 지혜로서 삼매의 빛깔이므로 세간의 함이 있는 빛깔과는 같지 않다.
또 샘이 없는 빛깔이라 함은, 곧 그 삼매의 선정의 힘에 의한 빛깔이므로 때가 없다[無垢]고 하며, 성인은 샘이 없는 삼매 중에서 샘이 없는 법을 말씀하신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라한의 빛깔과 그 밖의 빛깔을 샘이 없다고 하나니, 샘이 있는 법을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나,
나는 이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또, 공덕이 더욱 자란다 하는 이 이치는 어떤 것인가?
법이 그러하기 때문에 이와 같고 이와 같이 보시하는 이와 보시하는 물건을 자주자주 받아쓰며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자주자주 받아쓰는 이가 되지만, 받아쓰는 사람의 공덕의 힘 때문에 비록 보시하는 이가 마음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과 생각에 의하여 닦으므로 계속되는 바탕이 가늘고 가늘면서도 차츰차츰 나아지나니, 차츰차츰 나아지기 때문에 미래의 세상에서는 많은 복덕의 결과를 성취하게 된다.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공덕이 많이 생기며, 공덕이 더욱 자란다”고 하셨으며,
마음을 여의고 빛깔을 여의고서 무작법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문]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달리하고 달리한 몸과 마음에 의하여 달리한 몸과 마음 중에서 계속하여 차츰차츰 복덕이 더욱 자라나는가?
[답]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달리하고 달리한 몸과 마음에 의하여 달리한 몸과 마음 중에서 무작법이 있겠는가?
또, 대답하겠다.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마음에 의지하여 몸의 업과 입의 업에 선하고 악한 공덕이 있으므로 본래 마음에 의하여 짓고 본래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 계속되는 바탕을 지니면, 미치고 잠자는 것 등에서도 언제나 더욱 자라게 되지만, 짓지 않는 이가 이미 스스로가 짓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짓는다고 하면 어떻게 업의 길을 이룩하게 되겠는가?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심부름하는 이에 의하여 다른 중생에게 손해되는 법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심부름하는 이는 미세하게 계속되는 바탕이 점차로 굵어지게 된다. 이런 이치 때문에 미래세상 중에서 많은 허물이 생긴다.
또한, 사람을 시켜서 악을 짓는 것만이 아니고 스스로가 악을 짓는 이는 악한 일을 짓고 나서 미래세상 중에서 역시 많은 허물이 생긴다. 그러므로 저 미래에 몸이 서로 이어져서 차츰차츰 나게 됨을 업의 길이라 하나니, 원인 중에서 결과의 뜻을 밝히기 때문이다.
계율 깨뜨리는 교량을 여읜다 함은 그대가 지금 미친병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만약 미치광이라면 속히 묵은 소[酥]를 구해다가 먹고 낫게 되어서, 갖가지 그릇된 법을 말하지 않아야 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나에게 무작법이 있다 함을 더하게 하는가? 그대는 스스로가 마음으로부터 미세하게 계속되는 바탕을 일으켜 더욱 자라는 법이 있음을 성립시켰다.
[답] 나는 그대에게 무작법이 있다 함을 더하게 하지 않았다. 그대가 말할 법에는 이와 같은 이치가 없었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음에 의하기 때문에 몸과 입이 일을 행하고 일을 행하여 마친 뒤에는 업의 길이 성취된다.
그대가 지닌 법에 마음과 몸과 입을 여읜다 함은 부처님 법 중에는 이와 같은 이치가 없다. 이것은 니건자(尼乾子)가 작은 티끌의 세상에 성품과 때와 방소 따위의 법이 마음을 여의고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 없는 선과 악이라는 이와 같은 등의 법은 지혜로운 이로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빛깔과 마음을 여의고 몸과 마음의 바깥에 무작법이 있다 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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