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태나의 경제사
미서부 산간 지역 전체가 환경적인 불리함으로 인해 식량 생산에서 곤란을 겪고 있으며,
몬태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환경적인 불리함은 지금도 마찬갖이다.
실제로 몬태나는 상대적으로 강우량이 적어 농작물의 성장률이 낮은 편이다.
여름이 긴 지역에서는 이모작이 가능하지만
몬태나는 북쪽에 위치한 데다 고도까지 높아 작물의 성장 시기가 짧기 때문에 1년에 일모작으로 끝난다.
또한 생산물을 팔 수 있는 인구 밀접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한계까지 있다.
그런데 이런 불리함은 몬태나에서는 어떤 작물이든 더 싸고 더 생산적으로 재배해서
북아메리카의 다른 지역 , 즉 인구 밀접 지역에 더 빨리 더 싸게 운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몬태나의 역사는 "아름답지만 농업적으로 경쟁역이 떨어지는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던 투쟁의 역사일 수 있다.
몬태나의 경제사는 몇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단계는 1만 3,000년 전에 이곳에 처음 정착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몫이었다.
북아메리카의 동부와 서부에 정착한 인디언들은 농업 사회를 이루었지만
몬태나의 인디언들은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까지 수렵인이었다.
오늘날 농업과 목축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몬태나에는 토종 야생 식물이나 가축화할 만한 짐승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아메리카의 동부나 맥시코와 달리, 몬태나에서는 농업이 자생할 수 없었다.
농업이 자생적으로 발달한 두 곳에서 몬태나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따라서 유럽인이 도래한 후에야 두 곳에서 재배되던 곡물들이 몬태나에 전해졌다.
오늘날 몬태나에 거주하는 인디언 중 4분의 3이 일곱 군데의 보호 구역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보호 구역이 목초를 제외하고는 천연자원이 거의 없는 편이다.
기록에 따르면 몬태나에 도래한 최초의 유럽인은
1804년부터 1806년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Lewis and Clark Expedition)의 일원이었다.
원정대는 다른 주에 비해 몬태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원정 이후에 몬태나는 경제적으로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캐나다와 미국의 다른 곳에서 찾아논 모피 사냥꾼들, 즉 '산사람들'의 시대였다.
다음 단계는 1860년대에 시작했다.
그 중요성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 몬태나 경제의 세 기반이 구축된 시기이기도 했다.
구리광과 금광을 중심으로 한 광업, 벌목, 그리고 소아 양의 목축 및 곡류와 과일과 채소 재배를 통한 농축산업이었다.
뷰트(Butte)의 구리 광산으로 광부들이 몰려들면서 경제의 다른 분야까지 활성화시켰다.
광산에 땔감과 갱묵을 제공하고 광부들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목재들과
광부들이 먹을 식량이 근처의 비터루트밸리에서 생산되었다.
특히 밸리의 남쪽은 몬태나의 다른 지역에 비해 기후가 온화해 '몬태나의 바나나 벨트(온난지방)'라고불렸다.
강우량이 적고, 토종 식물이라곤 산쑥밖에 없엇지만
1860년대 이곳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들은 계곡 서쪽 기슭의 비터루트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이용해
작게나마 관걔 수로를 만들어 이런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기 시작햇다.
나중에는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관개 시설을 두 곳에 건설했다.
하나는 코모(Como) 호수의 물을 계곡의 서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198년부터 1910까지 공사한 '빅디치(Bjig Ditch)' 이고 ,
다른 하나는 비터루트 강의 물을 끌어들인 서너개의 대형 관개 수로이다.
이런 관개 시설의 확충으로 1880년대에 비터루트밸리에서 시작된 사과 과수원들이
큰 호황을 맞으면서 20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몇 군데의 사과 과수원만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경작되고 있을 뿐이다.
몬태나의 경제기반이 바뀌면서
사냥과 낚시는 생존 수단에서 여가활동으로 바뀌었고 모피 거래는 자취를 감추었다.
게다가 지금은 광업.벌목.농업 모두가 아래에서 논의 되는 경제적이고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사양길에 접어 들었다.
요즘 들어 성장하는 경제 분야는 관광, 레크리에이션, 노후 생활, 건강 산업 등이다.
비터루트밸리의 경제 기반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은 1996년에 일어났다.
옛 몬태나의 구리 왕 마르쿠스 달리(Marcus Daly)의 소유로
버터루트 스톡 팜(Bitteroot Stock Farm)이라고 불리던 320만 평의 농장을
증권 회사 창업자인 찰스슈위브가 사들인 사건이었다. 슈워브는 농장을 개발해,
아름다운 계곡에 별장을 마련해두고 1년에 두 번씩 낚시, 사냥, 승마, 골프 등을 즐기고 싶어하는
다른 주의 부자들에게분양했다.
스톡팜에는 18홀의 골프장이 있고, 125채의 별장 혹은 '오두막'이 있다.
말이 좋아 '오두막'이지, 여섯 개의 침실을 갖춘 건평 170평의 호화로운 별장으로 80만 달러가 넘는다.
스톡함의 입주자들은 고액 소득자로 임증된 사람들이다.
클럽 멤버십의 입회비만도 12만 5,000달러로,
라발리카운티 거주자들의 연 평군 임금보다 7배나 많기 때문이다.
스톡팜 전체가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고,
입구에는 '회원 및 초대 손님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대다수의 입주자들은 개인용 제트기를 이용해 이곳을 찾으며, 해밀턴에서 쇼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스톡팜 글럽에서 식사를 해결하지만,
다른 식료품이 필요하면 클럽의 직원을 시켜서 해밀턴에서 구입한다.
해민ㄹ턴의 한주민은 씁쓰레한 ㅁ소를 지으며,
"외국 관광객들처럼 호기심에 떼를 지어, 우리가 사는 빈민굴을 찾을 때나
그 귀족 나리들을 구경할 수 있지요"라고 내게 말했다.
스톡팜의 개발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비터루트밸리의 토박이들은 상당히 놀라며
누구도 계곡의 땅을 그렇게 비싼 값에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분양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다른 주의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이미 비터루트밸리를 방문해서 상당한 땅을 구입하고 있었지만
스톡팜의 개장은 부자들을 대거 끌어들여 비터루트 땅을 한꺼번에 팔았다는 점에서 상징적 사건이었다.
요컨대 스톡팜은 비터루트밸리가 소를 키우고 사과를 재배하는 전통적인 용도보다
레크리에이션 용도로 훨씬 가치 있는 땅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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