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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第9章 中 面
연천군 2읍 8면의 하나. 이 면은 본래 연천현의 지역으로, 연천 읍내에서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면(北面)이라하여 수회리(水回里)·삼곶리(三串里)·횡산리(橫山里)·중산리(中山里)·사동리(沙洞里)·적거리(赤巨里)·마거리(馬巨里) 등 7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고종 32년 (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하수회리(下水回里)·상삼곶리(上三串里)·하삼곶리(下三串里)·중산리·횡산리·사동리·적거리·마거리의 8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의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북면을 중면으로 개칭하여 삼곶·횡산·중사·적거·마거·합수의 6개 리로 다시 개편, 관할하여 오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전지역이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6개 리 전지역이 민통선 북쪽에 위치하여 입주하지 못하고 연천읍에 면사무소를 신설하여 법정 6개 리에 대한 호적업무만 취급하여오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과거 삭녕면(朔寧面) 지역이었던 도연(陶淵)·적음(笛音)·진곡(辰谷)·어적산(漁積山)·적동산(積洞山)·삭녕(朔寧)·대사(大寺)·여척(餘尺)·고마(古馬)·상마산(上馬山) 등 10개 리가 중면으로 편입되어 16개의 법정리가 되었다.
그 후, 1980년 1월 1일 삼곶리와 1985년 9월 20일에는 횡산리가 차례로 행정리로 승인되어 민간인이 입주하였고, 1992년 7월에는 연천읍에 있던 면사무소가 삼곶리에 새로 이전 준공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19km의 휴전선을 안고 있는 중면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삼곶리와 횡산리는 민간인이 입주하였으나, 합수리·적거리·마거리 등 3개 리는 출입영농만 가능한 상태이고 그 나머지 지역은 완충지대 및 북한 지역에 속해 있다.
면의 동쪽은 신서면과 연천읍, 남쪽은 군남면과 왕징면, 서쪽은 임진강을 경계로 한 왕징면, 북쪽은 휴전선에 닿아 있다.
□ 일반현황
·면사무소 소재지 : 중면 삼곶리 302
(1994년도 통계연보 기준)
+-------+-------+-------------------+----------+----------------------------+
|면 적 | | 인 구 수 (명)| 인구밀도 | 리 수 |
| |가구수 +-----+------+------+ +-----+----+-----------+-----+
|(km ) | | 계 | 남 | 여 |(인/1km ) |법 정|행정| 자연마을 | 반 |
+-------+-------+-----+------+------+----------+-----+----+-----------+-----+
| 94,99 | 71 | 243 | 121 | 122 | 2,6 | 16 | 2 | 2 | 3 |
| | | | | | | | | | |
+-------+-------+-----+------+------+----------+-----+----+-----------+-----+
1. 삼곶리(三串里)
본래 연천현 북면의 지역으로, 임진강쪽으로 세 개의 큰 산부리가 뻗어나와 있으므 로 '삼고지' 또는 '삼꾸지'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상삼곶리(上三串里)와 하삼곶리(下三串里)로 분리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다시 하나의 법정리인 삼곶리라 하여 중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민통선 지역이 되어 출입영농만 하여오다 1980년 1월 1일 민간인 입주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1개의 행정리, 1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곶(串) : 곶이란 원래 '입(口)'이란 뜻으로, 땅의 한 끝부분이 어느 한편으로 새의 부리처럼 불쑥 뻗어 나간 곳을 뜻하는 말로 해안이나 큰 강 부근의 지명에 많이 나타난다.
1 송장그미 : 삼곶리 적석총 남쪽, 임진강에 있는 소(沼). 전설에 의하면 이 소 바닥 에 사람의 시신 크기만한 금덩이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명주실 한꾸러미가 다 들어간다는 깊은 소이다.
2 삼곶리 백제적석총(三串里 百濟積石塚) : 지정문화재편 참고.
3 삼곶리 선사유물 산포지 III(三串里 先史遺物 散布地 III)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4 앞산 : 중면사무소 남쪽에 있는 둥근 산.
5 장군이나루(將軍渡, 將軍灘) : 삼곶리와 왕징면 강내리의 장군리 사이에 있던 나 루터. 이 부근의 임진강 여울 또한 '장군이여울'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6 사강아지골 : 장군이나루 서북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
7 삼곶리 선사유물 산포지 I(三串里 先史遺物 散布地 I)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 유적과 유물" 참고.
8 장내기 : 사강아지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9 양촌말(楊村) : 장군이나루 북쪽에 있던 마을. 청주 양씨들이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꽁지등 : 중면사무소 서쪽에 있는 산 등. 지형이 새의 꽁무니에 붙은 기다란 깃처 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1 참나무골 : 개맹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참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12 높은아리 : 밤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산이 높고 가파르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 다.
13 밤고개 : 삼곶리와 중사리 경계에 있는 고개.(중사리편 참고)
14 독장골 : 높은아리 북쪽에 있는 옹기 같이 입구가 좁고 안이 넓은 모양의 골짜기.
15 개맹고개(開盲峴) : 적거리골에서 적거리 대장터로 넘어 다니던 고개.
16 적거리골 : 개맹고개가 있는 골짜기. 적거리와 통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7 돌세울 : 참나무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밤고개로 연결되는 도로가 이 골짜기 앞에서 굽어 돌아간다 하여 모퉁이처럼 '돌아가는 사이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인 '돌 (回) + 세(間) + 울(谷)'의 뜻을 가지고 있는 땅이름으로 보여진다.
18 뱀밭 : 개맹골과 돌세울 사이, 길 옆에 있는 밭. 모양이 뱀과 같이 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9 개맹골(開盲谷) : 꽁지등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부근에 살던 맹인이 이 곳에 있는 약수를 마시고 그 물로 세면을 하였더니 눈이 밝아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 온다.
20 절골 : 중면사무소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삼곶리에서 가장 위에 있다 하여 '윗말' 또는 '후동(後洞)'으로도 불리웠던 곳이다.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21 무드리고개(水回峴) : 삼곶리에서 합수리의 염촌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22 노장산(路長山) : 무드리고개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 긴 산.
23 노재다리(路長橋) : 노장산 남쪽, 삼곶리 입구에 있는 콘크리트로된 다리. '노장' 이 '노재'로 어휘가 변한 이름이다.
24 동촌말(東村) : 점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삼곶리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던 이름이다.
25 오리논 : 점말 남쪽에 있는 논. 최촌말에 정착했던 경주 최씨가 처음 개간하여 논을 만들었는데, 늘 물이 고여 있어 오리가 많이 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6 점말(店村) : 최촌말 옆에 있던 마을.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옹기, 질그릇 등을 구웠던 가마가 있던 곳이다.
27 도장뫼 : 점말 뒤에 있는 둥근 산.
28 최촌말(崔村, 間村) : 도장뫼 서쪽에 있던 마을. 지금부터 600년 전에 경주 최씨가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이라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간촌말'으로도 불리웠던 곳이다.
29 김촌말(金村) : 도장뫼 서쪽, 김씨들이 살았던 마을.
30 현금성주사 순직위령비(玄金城主事 殉職慰靈碑) : 삼곶리 마을에 있는 위령비. 6·25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1950년 10월 경, 당시 중면 일대는 미처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많은 수의 적 잔여부대가 산속에 숨어 지내며 밤낮으로 부락에 침입하여 식량과 재산을 약탈하는 등의 갖은 만행으로 불안과 긴장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강한 반공정신으로 뭉쳐 주민들 스스로 조직된 자치위원(自治委員)들과 대한청년단원(大韓靑年團員)들은 자체 무장을 하여 적들과 수 많은 전투를 하며 치안유지를 하고 있던 중, 그해 11월 20일 자치위원회에서 중면사무소로 행정권이 정식 이양되었고 당시 자치위원회의 일원이었던 현금성씨는 중면 합수리에 거주하면서 중면 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12월 5일, 합수리 지역에 적 폐잔병 수 명이 잠입했다는 정보에 따라 담당지역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출동한 현주사는 의심 지역을 수색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적 1개 소대병력과 교전도중 아깝게도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전후 중면면민회가 결성된 그 다음 해인 1987년 8월 16일, 삼곶리 마을회관에서 개최된 제2차 면민회의 석상에서 이 고장 출신 김상희(金相熙)씨로부터 반공전사 현금성위령비 건립의 눈물어린 제의에 의해 참석자 전원의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그후 356명 면민들의 성금과 현문수 면민회장의 정성어린 노력에 의해 1989년 4월 5일 현금성주사 위령비 건립의 결실을 맺게 되어 이 곳을 지나는 이들에게 통일의 염원과 나라사랑의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다.
31 황가밭 : 김촌말 위에 있는 밭. 옛날 황씨 성을 가진 사람이 경작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2 낭앞 : 최촌말 앞에 있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천연절벽.
33 삼곶리 선사유물 산포지 II(三串里 先史遺物 散布地 II)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34 쇠촌말 : 낭앞 동쪽에 있는 큰 밭.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소를 천마리 키우던 부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5 말등바위 : 노재다리 남쪽에 있는 말등처럼 생긴 바위.
36 소리개고개 : 중면에서 군남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삼곶리·합수리, 군남면 옥계리와 경계가 된다.(옥계리편 참고)
37 옥녀봉(玉女峰. 205m) : 삼곶리와 군남면 옥계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옥계리편 참고)
38 범바위 : 옥녀봉 아래에 있는 바위. 예전에 호랑이가 자주 올라와 노닐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9 백고개(城峴, 百人峴) : 삼곶리와 군남면 옥계리의 잣골 사이에 있는 고개.(옥계 리편 참고)
40 논골(畓谷) : 고미포 동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로, 삼곶리 내에서는 가장 좋은 일등답(一等畓)이 있던 곳이다.
41 거북둔치 : 고미포 뒤에 있는 거북이 형상의 언덕.
42 고미포(古美浦) : 논골 서쪽, 임진강 괴미소 옆에 있던 포구 마을. 이 곳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연천군 중면 일대와 철원지방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과 강화, 서해안 등지에서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새우젓, 소금배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장이 형성되었던 명소였다.
또한 중면사무소가 처음에는 이 곳에 있었으나, 1925년 을축(乙丑) 대홍수 때 강물이 크게 범람하여 이 일대가 모두 유실되어 현재의 면사무소 위치로 옮겼다 한다.
43 괴미소(熊淵) : 고미포 아래, 임진강에 있는 깊고 큰 소. '신성하고 높음','거룩하고 으뜸이 됨' 또는 '큰'의 뜻을 지닌 우리의 옛말인 ' ' 이 '곰'으로 음이 변하면서 한자지명인 '곰(熊)'으로 옮겨진 예이다.
현재 지명에서 네가지의 모음인 '감','검','곰','금(굼)' 등으로 나타나는데 괴미소는 '곰'이 '괴미'로 음이 변화되면서 '곰(熊)'과 관련된 듯 한자식 풀이가 되고 있으나, 원래 의미는 임진강에 있는 '큰소'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곳이다.
* 제 보 자 : 김 상 희(80) 전곡읍 은대1리
최 병 익(63) 전곡2리
2. 횡산리(橫山里)
본래 연천현 북면의 지역으로, 이 마을 북쪽에 비끼산이 있어 '비낄 횡(橫)'자와 '뫼 산(山)'자를 따서 횡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면에 편입되었고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 되어 출입영농만 하여오다, 1985년 9월 20일 군조례 "제1019호"에 의해 행정리로 승인되면서 일부 지역에 민간인이 입주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1개의 행정리, 2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횡산기(橫山記)
횡산(橫山)은 연천(漣川) 북쪽 강가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송림(松林)과 사장(沙場)이 아래 위로 널려 있고 남쪽 언덕은 모두 층암 절벽이며, 벌여 있는 산에는 숲이 우거졌으며 앞에는 옛 나루터가 있다. 강 가운데 돌이 많아 배가 돌을 스치며 지나는데, 물살이 세어서 자칫 실수하면 배가 돌에 걸려 건너갈 수 없게 된다. 서쪽으로 장경대(長景臺)의 석벽이 바라보이고 동남쪽이 석저 협구(石渚峽口)인데, 절벽위에 도영암(倒影庵)이라는 절이 있다. 그 법당(法堂)이 강을 굽어보고 있어, 중이 가사를 입고 검은 두건을 쓰고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는 것과 도끼를 들고 나무하는 사람, 동이를 들고 물 긷는 사람이며 쌀 씻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모두 그 밑 깊은 못에 비치므로 내려다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다. 그 아래는 망제여울(望諸灘)이요, 또 그 아래는 장군여울(將軍灘)인데, 장군여울 아래 웅연 석벽(熊淵石壁)에서 이상한 석문(石文)을 보았으며, 강가에는 석린(石鱗)과 석묵(石墨)이 나고 오래 사는 사람이 많았다.
옛날에 90살 된 효자 정희열(鄭希說)이 있었는데 부모상을 잘 치러서 3년동안 죽만 먹고 곡하였으며, 나이 90인데도 부모를 애모하는 생각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종[婢]인 금월(今月)은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재가(再嫁)하지 않고 나이 80여세가 되도록 그 자손들에게 가르치기를, "남을 속이지 말고 남과 다투지 말라!" 하였는데, 지금까지 1백년 동안에 그 마을의 습속으로 되었으며, 촌 노인들이 옛이야기를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절부(節婦) 두 사람 중에, 수재(秀才) 권 술(權述)의 아내 정씨(鄭氏)는 강가에 절부정문(節婦旌門)이 있고, 그 한 사람은 잊었다. 미수는 기한다.·절부정씨(節婦鄭氏)의 절행은 ≪여지도서≫ 연천현 편과 ≪광무읍지≫에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실려 있다.
"정씨는 사인(士人 : 학식은 있되 벼슬하지 않은 선비) 권 술의 처로 병자호란 때 적군을 만나자 벼랑에서 몸을 던져 정조를 지킨 의로운 죽음을 하였는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인조 16년(인조. 1638) 이 곳에 정려가 내려졌다".
※ 위 기록은 미수 허 목의 ≪記言別集≫ 제7권 "記"에서 옮긴 것이다.
1 수리봉(수리바위. 태풍전망대. 독수리 O·P, 264m) : 횡산리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 독수리 모양의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실제 '수리'의 뜻은 '높은'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의 '술'이 연철된 것으로, 단순히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를 가진 곳이다.(신서면 대광리 "수리봉" 참고) 지금은 이 산 정상에 태풍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어 안보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명소가 되어 있다.
2 웃비시뫼(山橫山) : 수리바위 서쪽, 산등에 있던 마을.
3 물방아터 : 당말 서쪽, 임진강에 있는 섬.(왕징면 고장리편 참고)
4 느릅소(楡沼) : 물방아터 남쪽, 임진강에 있는 소.
5 삼밭출 : 느릅소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 세 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6 당말(堂村) : 벌말 남쪽, 임진강 옆의 산비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안동권씨가 몇 집 살던 곳이다.
이 마을은 한자의 풀이 대로라면 예전에 신당(神堂)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횡산리 서쪽에 위치했던 당뒤와 벌말·당말과의 지정학적인 면으로 분석해 보면 아래와 같은 지명풀이가 가능하다.
우리 고어에 산(山)의 뜻으로 씌었던 말인 '닫'은 연결음절과의 관계나 다른 낱말과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닷','닥','닭' 등으로 옮겨 갔는데, '닥','닭' 등은 ㄴ,ㅁ을 초성으로 하는 음절의 말이 뒤에 따라올 경우 '당'으로 음이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닫(山) + 말(村) = 닫말 > 닥말 > 당말(堂村)
그러므로, 이 마을은 '산비탈에 있는 마을'이라는 원래의 뜻이 한자로 음이 옮겨 지면서 엉뚱하게 지금의 '堂村'이 된 것이며, 주변 임진강 옆에 있었던 벌말(野村)과는 상대되는 뜻을 가지고 있고, 당뒤(堂後)마을 또한 '산 뒤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7 뱃터거리 : 벌말에서 왕징면 고잔하리의 장경대로 건너 다니던 나루터. 현재 이 부근에는 필승교가 위치하고 있다.
8 벌말(野村) : 당말 남쪽, 임진강 옆의 벌판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의 이씨들이 살던 곳이다.
9 당뒤(堂後) : 벌말 동북쪽, 산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산 뒤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10 안골(內洞) : 벌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동촌말·양지말·아랫말·안골로 나뉘었고 벌말과 이 마을을 합쳐 25가구의 전의 이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11 소래(松村) : 안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6가구가 살았으며, 이 마을 남쪽에 있던 사금광(沙金鑛)으로도 유명했던 곳이다.
12 고동골(高等洞.古洞谷) : 방뫼 남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4가구 살았던 곳이다.
13 절골 : 방뫼 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한다.
14 방뫼(方洞. 芳山) : 횡산리 중앙에 있었던 가장 큰 마을. 6·25 전에 안동 권씨가 30여호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다. 횡산리에서는 최초로 안동 권씨가 정착하였고, 그 후 남양 홍씨와 전의 이씨가 차례로 개척하였다 한다.
15 횡산리 백제초기적석총(橫山里 百濟初期積石塚. 말무덤) : 문화유적·유물편 "고분" 참고.
16 뱃터거리 : 현 횡산리 마을 동쪽에 있던 임진강 나루터. 왕징면 강내리로 건너다니던 곳이다.
17 아래한여불 : 팔효문 남쪽에 있었던 마을.
18 한여불(閑如洞) : 아래한여불 위에 있었던 마을. 안동 권씨들이 살던 곳이다.
19 남양홍씨 팔효문(南陽洪氏 八孝門) : 지정문화재편 참고.
20 중군터(中軍垈) : 팔효문 주위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남양 홍씨가 20여호 살던 곳이었으며, 지금부터 약 300년 전에 정착했다 한다.
21 퇴골 : 중군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
22 잿등 : 퇴골 서쪽, 비끼산에 달린 산. 아주 옛날 임진강물이 범람하여 물바다가 되었을 때 이 산등이 잿더미 만큼 남아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3 비끼산(= 비시뫼, 橫山) : 태풍전망대 동쪽에 있는 횡산리의 유래가 되는 산.
24 지르미고개 : 횡산리 동막골에서 중사리의 윗방골로 넘어가는 고개. 질러 넘어 간다는 뜻의 '지르네미'로 불리워지다 '지르미'로 어휘가 변한 이름이다.
25 돌박재 : 지르미고개 아래에 있는 골짜기. 돌이 많이 박혀 있는 재(지르미고개)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수정(水晶)이 나는 곳이다.
26 동막골 : 지르미고개로 나 있는 큰 골짜기. 돌이 많아 '돌막골'로 불리웠던 곳이었으나, ㄱ뒤에 ㅁ이 따라올 때 ㅇ으로 발음이 변하는 자음동화로 인하여 '동막골'이 된 곳이다.
27 군개 : 빙애 남쪽, 임진강에 있는 소(沼). 예전에 큰 바위 2개가 물 가운데 솟아 있었으나 지금은 묻혀버렸다.
28 망제여울(望諸灘) : 군개 옆에 있는 임진강 여울.
29 빙애(氷崖) : 중군터 북쪽에 있었던 마을. 삼곶리에서 이 마을까지 오는 동안 임진강 옆으로 펼쳐져 있는 길고 높은 절벽인 빙애(氷崖)가 있어 지어진 이름으로, '빙애'와 '안빙애'로 나뉘어진다.
6·25 전에는 남양 홍씨가 20여호 살았던 곳이다.
* 제 보 자 : 권 영 창(72) 전곡읍 전곡2리
홍 덕 종(63) 연천읍 차탄4리 1반
3. 중사리(中沙里)
본래 연천현 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산리(中山里)와 사동리(沙洞里)를 병합하여 중산과 사동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 중사리라 하여 중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가 되었다가, 6·25가 끝난 그 이듬 해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전지역이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완충 지대가 되어 현재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은 하나의 법정리이다.
1 수리봉(독수리 O·P, 태풍전망대. 264m) : 중사리와 횡산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횡산리편 참고)
2 장고개(長峴) : 지로동에서 횡산리의 방뫼로 넘어다니던 고개.
3 지르미고개(장구목고개) : 지로동에서 횡산리의 동막골로 넘어다니던 고개.(횡산리편 참고)
4 윗방골(= 윗밤골) : 지로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우리 고어에 산의 뜻으로 씌었던 '받'과 '골'이 합하여 '산 골짜기'라는 뜻의 '받골'로 불리워지던 것이 아래와 같이 음이 변하여 '밤골'이 된 땅이름이다.
받골 > 밧골 > 반골 > 밤골(방골)
5 징싱골 : 윗방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6 연당고개 : 지로동과 소목골 사이에 있는 고개.
7 낡은터 : 지로동 북쪽에 있던 밤나무밭. 옛날 집터가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8 지로동(芝露洞) : 수리봉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25가구가 있었고 안동 권씨가 많이 살던 곳이다.
9 나가모이번댕이 : 지로동 서쪽에 있는 넓은 산비탈. 나씨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물푸레나무떼기 : 지로동 서쪽, 물푸레나무가 많았던 곳.
11 양지밭 : 낡은터 서쪽, 양지바른 곳에 있던 좋은 밭. 1,700평 넓이였다 한다.
12 되박등고개 : 지로동에서 소둔지로 넘어가는 고개.
13 화중터(火葬 -- ): 소둔지 서남쪽, 야산에 있는 밭. 옛날 이 곳에서 화장을 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4 소둔지(牛臀地, 소돈지) : 시욱이와 지로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곳의 지형이 소의 궁둥이 모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소목골은 소의 목에 해당한다 한다. 6·25 전에는 윤씨가 2집 살았던 곳이다.
15 금점굴(金店窟) : 시욱이나루 남쪽, 임진강옆에 있는 굴. 일제 강점기 때 금을 캤던 곳이라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6 둔지고개 : 시욱이와 소돈지 사이에 있는 고개.
17 시욱이나루(時都津) : 중사리 수오동과 왕징면(옛 서남면 지역)의 시욱이장거리 사이에 있던 임진강 나루터.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서해안에서 올라온 새우젓, 소금배가 이 곳에 정박하여 곡물, 땔감 등과 물물교환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6·25 전에는 이 나루터에 큰 오리나무 한그루와 주막이 있었다 한다.
18 한드루비냥 : 시욱이나루 북쪽, 한드루로 가는 곳에 있는 임진강 옆의 천연절벽.
19 수오동(洙澳洞) : 시욱이나루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안동 권씨 12가구 살았던 곳이다.
20 백고개 : 수오동과 소목골 사이에 있는 조그만 고개. 전설에 의하면 아주 옛날 임진강물이 크게 범람했을 때 이 곳에 배를 묶어 놓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산(山)의 옛말인 '받'이 '백'으로 음이 변하면서 '배(舟)'와 연관된 엉뚱한 유래를 달아 '산고개'라는 본래의 뜻이 잘못 풀이되고 있는 땅이름이다.
21 소목골(牛項洞) : 수오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풍수지리설로는 이 곳의 지형이 소의 목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백고개 북쪽에 있는 조그만 산이 소의 머리 형태, 소둔지는 소의 궁둥이와 닮은 형상이라 하며, 전체적으로는 소가 먹이를 배불리 먹고 되새김질하는 형국이라는 소(牛)와 관련된 풀이를 하고 있으나, 원래 소목골의 뜻은 이 골짜기와 지로동 사이의 목(項)인 연당고개에 정확한 유래가 담겨 있다.
즉, 연당고개의 입지조건은 두 마을 사이를 연결하는 '사이의 목'인 '새목(間 項)'이 되어 불리워지던 것이 '새'가 '쇠'로 음이 변하면서 주변의 땅이름을 모두 소(牛)와 관련된 것처럼 잘못 풀이되어 버린 땅이름이다.(사이의 뜻인 '새'가 '쇠'로 발음되는 현상은 특히 경기 북부지방에서 많이 나타난다)
22 윗소목골 : 소목골 안에 있는 골짜기.
23 푸묵골 : 소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24 낭말(落村) : 푸묵골 북쪽에 있는 마을. 벼랑같이 높은 둔덕 위에 집들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8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25 문앙골 : 중산리 안에 있는 좁은 골짜기. 예전에 어떤 부인이 남편이 죽자 장례를 치르고 이 골짜기 안에 있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26 빙애고개(氷崖峴) : 중산리에서 횡산리의 빙애마을로 넘어 다니던 고개.
27 골통대기 : 문앙골 동쪽에 있던 밭. 골짜기 안에 쑥 들어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32고랑에 700평 넓이였다 한다.
28 함박골 : 문앙골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함박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9 중산리(中山里) : 낭말 동남쪽에 있었던 산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20여호가 마을을 이루었고 전주 이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다.
30 마당소 : 중산리 마을 입구에 있는 마당만한 큰 소(沼). 두 길 정도의 깊이라 전해 온다.
31 점말(店村) : 마당소 옆에 있던 마을. 예전에 옹기를 구웠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2 시동골 : 점말 옆에 있는 골짜기.
33 작은샘골 : 시동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샘골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34 샘골(泉谷) : 밤고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
35 밤고개(栗峴) : 중사리와 삼곶리 사이에 있는 큰 고개.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부친상을 당한 작은상제(喪制)가 소상(小祥)을 지내기 위해 양주에서 밤 한 말을 사 짊어지고 이 고개를 오르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심한 돌풍이 불어 머리에 쓰고 있던 방갓(方笠 - 상제가 밖에 나갈 때 쓰는 갓)이 훌렁 벗어지며 옆에 서 있던 큰 나무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한다.
당시 상제의 신분에서는 방갓을 써야만 했던 엄한 풍습 때문에 더욱 난처하게 된 이 상제는 할 수 없이 나무에 기어 올라가기로 결심하 고 나무에 올라 방갓이 매달려 있는 나무가지에 다가가는 순간 실수로 발을 잘못디딘 상제는 이 나무 위에서 떨어져 안타깝게 목숨을 잃게 되었고, 그 뒤로 상제가 죽은 이 고개를 밤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라는 유래를 간직하고 있으나, 땅이름의 원뜻을 캐는 음의 변화 과정으로 본다면 이 고개의 유래는 '밤(栗)'과는 무관한 아래와 같은 풀이로 나타난다.
먼저 이 고개는 중사리와 삼곶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활을 하는 큰 고개로 주변의 다른 고개에 비하여 비교적 높은 산을 넘어 가는 긴 거리를 가진 '산고개'이다. 이러한 이유로 보아 산을 뜻하는 옛말인 '받'이 음이 변하여 '밤'으로 굳어져 전국적으로 흔히 분포하는 현상으로 본다면 '밤고개'는 '밤(栗)'과는 무관한 단순히 '산을 넘는 고개'라는 원래 뜻이 변형되면서 상제의 슬픈전설을 낳게 된 고개 이름이다.
받(山) + 고개 = 받고개 > 밧고개 > 반고개 > 밤고개(栗峴)
36 한세울 : 베틀거리에서 적거리로 넘어 가는 곳에 있는 큰 골짜기. 중사리와 적거리 사이에 있는 '큰(=한) 사이(세)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백학면 두일리 "한세울" 참고)
37 베틀거리 : 한세울·밤고개·중산리로 갈라지는 삼도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방씨가 경영하던 주막집이 있던 곳이다.
38 깊은막지골 : 독쟁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일제 강점기 때 숯가마가 있던 곳이다.
39 높은막지골 : 깊은막지골 입구에 있는 골짜기.
40 천지봉(天祭峰. 216m) : 가리골 남쪽에 있는 봉우리. 6·25 전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정상에 있었다.
41 고라지밭골 : 천지봉 서쪽에 딸린 골짜기.
42 마야터 : 가리골 입구에 있는 터.
43 가리골(加麗洞) : 독정동 북쪽에 있었던 마을. 최초에는 전주 이씨가 개척하였으나, 약 200년 전에 한양 조씨가 들어와 살면서 집성 마을이 되었고 6·25 전에는 한양 조씨들이 20여호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44 여골 : 가리골에서 천지봉쪽으로 있는 골짜기.
45 능골 : 여골 위에 있는 골짜기.
46 논네미 : 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돌 틈에서 나오는 찬 약수가 있다 한다.
47 말미터 : 논네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48 돼지배나무골 : 말미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
49 진명산(振鳴山) : 가려동 북쪽에 있는 산. 중사리·적거리·도연리·적음리의 꼭지점이 된다.(적거리편 참고)
50 한달골 : 진명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 크다는 뜻의 '한'과 산(山)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인 '달'에 '골(谷)'이 합하여 큰 산인 진명산에 딸린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땅이름이다.
51 할미바위 : 돼지배나무골 서쪽에 있는 큰 바위. 예전에 어떤 할머니가 쌓아 놓았다 하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란다 하며, 지금은 초가 삼간만한 크기이다.
52 배매기 : 돼지배나무골 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 예전에 천지가 개벽하여 이 곳까지 조수가 들어왔는데, 그 때 당시 항해하던 배들이 이 산에 있는 바위에 줄을 묶어 정박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검은자연석으로 되어 있는 이 바위에는 그 당시에 배를 묶었다는 큰 구멍이 있다 한다.
53 숯굽골 : 말미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숯을 굽던 곳이라 한다.
54 절골 : 가리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에전에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이 곳의 지형이 병과 같이 생겼다 하여 '병목안'으로 불리웠는데, 그 중앙에 절터가 위치한다. 6·25 전에는 약 2,000평 넓이가 밭으로 경작되었고 주초석, 와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다.
55 대추골고개 : 가려동에서 대추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56 그늘곁 : 고라지밭골 서쪽에 있는 해가 일찍 저무는 응달.
57 산당(山堂) : 독정동 뒤에 산제를 모시던 당집. 10평 규모에 초가지붕을 얹은 형태였으며, 당집 주위에는 다섯그루의 큰 소나무가 산당과 함께 보호를 받고 있었고 독정동 마을 주민에 의해 매년 늦은 가을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지금은 산당이 있었던 곳으로 남방한계선이 지나간다.
58 독정동(讀亭洞) : 가려동 남쪽에 있었던 마을. 약 200년 수령의 큰 오리나무가 있어 그 아래에서 이 마을 선비들이 글을 읽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양달말, 응달말로 나뉘어져 있던 이 마을에 25가구 살았었고 이천 서씨가 많은 수를 차지했다.
59 국박골산(203m) : 독쟁이 서쪽에 있는 높은 산.
60 대추골 : 검은돌 동쪽에 있던 마을. 대추나무가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 25 전에는 원씨·이씨·윤씨가 30여호 모여 살던 곳이다.
61 서낭고개 : 대추골과 모래울 사이에 있는 큰 고개. 큰 서낭당나무들이 고갯마루에 있어, 매년 9월 9일이 되면 모래울 주민들이 산제를 올리던 곳이다.
62 가리골고개 : 모래울에서 가리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63 요골 : 모래울 북쪽에 있는 골짜기.
64 산골(山谷洞 = 웃모래울) : 모래울 북쪽에 있었던 마을. 진명산의 깊은 산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5 모래울(沙洞) : 검은돌 북쪽에 있던 마을. 진명산에서 내려 오는 하천에 모래가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달고 있으나, 실제 이 곳에는 그리 모래가 많지 않은 작은 개울로 모래를 붙여 해석하기에는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지만, 아래와 같이 '모래'에 대한 어원을 분석해 보면 단순히 '산골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산의 옛말은 '뫼'로 그 뿌리말은 '높은','위'를 뜻하는 말이었던 '몰'에 두고 있는데, 이 '몰'은 다른 낱말과 합칠 때 그 낱말과의 사이에 '아'나 '애' 같은 소유격 조사가 개입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몰(山)'과 '울'이 합하여 '몰애울'이 되었다가 다시 음이 변하여 지금의 '모래울'로 되어 엉뚱하게도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면서 발음 그대로 음차 된 '沙 洞'이라는 한자지명으로 표기되어버린 땅이름이다.
66 엄박골 : 모래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
67 정골고개 : 모래울에서 적음리의 정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68 두렁산(수리봉. 242m) : 검은돌 북쪽에 있는 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천지가 개벽하여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이 산 정상이 논두렁만큼 남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높은 봉우리'라는 뜻의 '수리봉'으로도 불리워지던 곳이다. (수리봉은 신서면 대광리 참고)
69 뱀밭 : 두렁산 서쪽, 개울 옆에 있던 뱀처럼 긴 밭.
70 검은돌(黑石洞) : 대추골 서쪽에 있었던 마을. 검은빛깔의 돌이 많은 곳이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평산 신씨가 다섯가구 살던 곳이다.
71 등정골(屯田洞) : 검은돌 남쪽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관에서 경작하던 둔전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박씨가 다섯가구 살던 곳이다.
72 낡은터 : 한드루 북쪽, 적음리와 경계지점에 있던 밭. 고려장(高麗葬)이라는 원형의 작은 돌무덤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73 한드루 : 등정골 서쪽, 임진강변에 있는 넓은 들 이름.
* 제 보 자 : 신 현 남(76) 동두천시 생연4동 3통 6반
현 문 수(71) 전곡읍 전곡1리
이 재 순(69) 미산면 유촌리
서 태 산(63) 전곡읍 전곡4리 6반
조 기 창(61) 연천읍 현가리 초원연립 A동 204호
4. 마거리(馬巨里)
본래 연천현 북면의 지역으로, 합수리로 내려가는 마거리개울에 말과 같은 형상의 큰 바위가 있으므로 마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되었다가, 6·25 가 끝난 그 다음해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현재 민통선 지역이 되어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은 하나의 법정리이다.
1 바늘거리 : 아랫마거리와 합수리 경계지점에 있던 작은 마을. 지형이 뾰족한 바늘처럼 산부리가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합수리와 신서면 답곡리의 부령골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된다.
2 신배나무골 : 바늘거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신맛이 나는 배나무가 있었다 한다.
3 말바위(馬岩) : 신배나무골 북쪽, 마거리개울에 가로 놓여 있는 말과 같은 형상의 큰 바위로, 마거리의 유래가 되는 바위이다.
4 물레방앗간 : 아랫마거리 사거리에 있었던 방앗간.
5 개랄짝 : 물레방앗간 남쪽에 있는 골짜기.
6 보세울 : 악박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7 섶포골고개(薪浦峴) : 보세울에서 적거리의 섶포골로 넘어가는 고개.
8 천제봉(天祭峰) : 섶포골고개 북쪽에 있는 봉우리로, 적거리와 경계가 된다.(적거리편 참고)
9 악박골 : 보세울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10 봉화산(烽火山) : 악박골 북쪽에 있는 산. 예전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1 당정골 : 보세울과 중골 사이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옛날에 어떤 사람이 선친 묘를 이곳에 쓰고 당장 금시발복(今時發福)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뒷골'로도 불리워진다.
12 중골(重谷洞) : 봉화산 북쪽에 있었던 마거리에서 가장 큰 마을. 6·25 전에는 남양 홍씨와 광산 김씨가 80여호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아랫마거리'라고도 불리웠던 곳이다.
13 당산(堂山) : 중골 동쪽에 있는 산. 중골 마을에서 산제를 올렸던 단(壇)과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던 곳이다.
일설에는 이 산의 형상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한다.
14 당옆들 : 당산 옆에 있는 들 이름.
15 진틀거리 : 가운데마거리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들이 이 곳에 진을 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6 면화골(免禍谷) : 진틀거리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에전에 어떤 사람이 전쟁을 피하여 이 곳에서 숨어지내다 화를 면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7 까마귀봉 : 중골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 적거리와 경계가 된다.
18 노개골고개 : 진틀거리에서 적거리의 노개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19 붉은바위 : 진틀거리 막바지에 있는 붉은빛깔의 큰 바위. 높이는 8m 정도이며 '괸돌'이라고도 불리웠다.
20 덕고개 : 재래울에서 도연리의 덕고개 마을로 넘어 가는 고개.(도연리편 참고)
21 재래울 : 진틀거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22 들개골 : 재래울 입구에 있는 작은 골짜기.
23 산제당산 : 들개골 북쪽에 있는 산. 매년 9월 9일이 되면 엄고개 주민들이 산제를 올리던 곳이다.
24 수루네미(車踰峴 = 쇠네미) : 엄현동에서 도연리의 덕은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이 곳은 한자 표기인 수레(車)와는 관계가 없는 '산의 정상을 넘는 고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땅이름 가운데에는 높은 산을 넘어가는 고개에 '수레' 또는 '수루'가 들어가 있는 곳이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하는데 대부분이 '수레(車)'와 연관시켜 예전에 '수레가 넘어 다녀서......'라고 해석을 달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의미는 '마루','꼭데기','산의 정상'을 뜻하는 말인 '수리'에 있으며 '수리'는 그 어근인 '술'이 아래와 같이 변한 것으로,
술 > 술+(이) > 술이 > 수리
술 > 술+( ) > 수 > 수루 > 수레 뒤에 '넘는다'라는 뜻의 '넘이'가 변한 '네미'와 합하여 '산의 정상을 넘는 고개' 라는 뜻의 '수루네미'가 된 것이다.
25 백로산(白鷺山) : 마거리와 도연리, 신서면 경계에 있는 큰 산. 백로가 날아 가는 형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해 온다. 6·25 전에는 해마다 백로들이 날아와 서식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남방한계선이 지나간다.
26 엄고개(嚴峴) : 마거리와 신서면 신현리의 막동 사이에 있는 고개.
27 옹장골(甕場谷) : 갈골 위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옹기(甕器)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한다.
28 갈골(葛谷) : 마거리 가장 북쪽에 있었던 마을.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갈씨가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일제 강점기 때에는 '심지청'이라는 내시(內侍)를 중심으로 4가구가 내시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29 능골 : 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릉과 같은 큰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피장자가 확실하지 않았던 이 묘는 일제 강점기 때 도굴당했다 한다.
30 두리봉(= 미사봉. 339m) : 엄고개 동쪽에 있는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중면·신서·인목·삭녕 지역이 두루 내려다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1 엄고개(嚴峴洞) : 갈골 아래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파평 윤씨·연안 김씨·순흥 안씨가 14가구 살았던 곳으로, 웃마거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다.
32 원임동(員臨洞) : 가운데마거리와 엄현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어떤 고을 원이 이 곳에서 피난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3 환두골 : 가운데마거리 안에 있는 골짜기.
34 가운데마거리(中馬巨里) : 진틀거리 동쪽에 있던 마거리 중앙의 마을, 6·25 전에 예산 송씨가 16호 살았던 곳이다.
35 텃골 : 가운데마거리 아래에 있는 골짜기.
36 부령골고개 : 마거리에서 신서면 답곡리의 부령골로 넘어가는 고개.
* 제 보 자 : 윤 화 병(78) 전곡읍 은대3리 6반
원 도 상(72) 인천광역시 남동구 남촌동 266번지 삼성하이츠 7동 301호
5. 적거리(赤巨里)
본래 연천현 북면의 지역으로, 붉은 홍주석(紅柱石 : 斜方晶系 長柱狀의 硅酸 알루미나의 鑛物)이 많이 나와 적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면에 편입되었고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가 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전지역이 민통선 북쪽에 놓여 있어 현재 민간인 미입주 상태에 있는 하나의 법정리이다.
1 웃매골(上梅洞) : 적거리 입구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연주 현씨가 10여호 살았던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져 있다 하여 '뫼골(山谷)'이라 불리웠던 곳이 '뫼'가 '매'로 음이 변하여 실제 뜻과는 거리가 먼 한자 이름의 '梅'자로 표기된 곳이다.
2 대장터 : 적거리 태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일제 강점기 때까지 대장간이 있었다 한다.
3 건너골 : 나촌 서쪽 건너편에 있는 골짜기.
4 나촌(羅村) : 태봉말 북서쪽에 있던 마을.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금성 나씨가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6·25 전에는 5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5 정씨논골 : 나촌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옛날에 정씨가 경작했던 논이 있었다 한다.
6 요골 : 나촌 북쪽에 있는 골짜기.
7 웃거리 : 나촌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8 가리짝골 : 바여위 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
9 바여위(舟岩洞) : 옻나무골 서쪽에 있던 마을. 마을 뒤편에 물 위에 떠가는 배와 같은 모양의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밀양 박씨가 20 여호 살았었다. 배바위는 유리·도기 가공의 재료가 되는 차돌 성분으로 되어 있어 일제 강점기 때 채광이 되었으며, 뒤에 완전히 없어져 지금은 형체를 찾아볼 수 없다.
10 진명산(振鳴山) : 바여위 서쪽에 있는 산. 중사리·적음리·도연리와 경계가 된다. 연천 ≪광무읍지≫ 산천조에는 "진명산은 연천 관아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는데 산 정상에는 철마가 있어 이 고을 사람들이 당집을 만들어 제사를 받는다.「振鳴山在縣北三十里 山上有鐵馬縣人建宇祀之」라 되어 있고, 김정호(金正浩)의 ≪大 東地志≫에는 '眞明山'으로도 표기 되어 있다.
11 진명이골짜기 : 옻나무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진명산에 딸려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2 덕고개 : 진명이골짜기에서 도연리로 넘어가는 고개.(도연리편 참고)
13 절골 : 덕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한다.
14 노개골고개 : 노개골에서 도연리로 넘어가는 고개.
15 노개골 : 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16 복은턱 : 절골 입구에 있는 3m 높이의 폭포. 이 곳의 물이 차고 맑아 일제 강점기 때 삼베를 삶은 후 이 곳에서 빨았다 한다.
17 골댕이 : 옻나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단순히 산골짜기라는 뜻이었으나, '댕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18 옻나무골(漆木洞) : 말령골 북쪽에 있던 마을. 이 마을 중앙에 있던 공동우물 뒤 등에 세 아름 굵기의 큰 옻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나무는 6·25 때 폭격에 없어졌다 한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밀양 손씨가 20여호 살았었다.
19 방아구럼 : 옻나무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2층 형태의 큰 바위가 있었으나, 재질이 홍주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두 채광되고 지금은 밑돌만 남아 있다.
20 돛대바위(= 사공바위) : 옻나무골 남쪽, 산 등성이에 솟아 있던 큰 바위. 모양이 돛대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적거리 내에 있는 바여위, 섶포골, 사공바위가 부합되어 포구(浦口)형국을 이루고 있다 한다. 돛대바위도 홍주석 성분이 되어 6·25 이후 인위적으로 없어져 버렸다.
21 가리짝골 : 옻나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22 제당터(祭堂 -) : 옻나무골 남쪽에 있었던 제당. 옻나무골 주민들이 매년 9월 9일 새벽에 이 마을의 평안을 위해 제사지내던 곳이다.
23 서른마지기 : 제당터 남쪽에 있는 논. 30마지기가 된다 한다.
24 공동묘지 : 옻나무골 입구에 있던 공동묘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졌다.
25 날기터골 : 공동묘지가 있는 골짜기.
26 헌터골 : 말령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27 말령골 : 헌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28 쇠똥골 : 태봉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은 발음으로 나타나는 가축의 소(牛)와는 거리가 먼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곳으로, '사이'의 뜻인 '새'가 지방에 따라'세','시','소' 등으로 음이 변하는 흔한 현상(경기 북부에서는 특히 '쇠'로 발음되고 있다.)으로 보아 앞음절 '쇠'는 '새(間)'로 풀이 할 수 있으며, 뒤음절 '똥골'은 우리 고어에 '덩이','뭉침','산' 또는 '등성이'의 뜻으로 씌었던 '돔(둠)'과 '골 (谷)'이 합하여 '산골짜기'라는 의미의 '돔골'로 불리웠던 것이 자음동화 현상으로 '동골'이 되었다가 앞음절인 '쇠'의 영향으로 경음화되어 '쇠똥골'로 굳어진 땅이름으로, 여러 마을의 '사이에 있는 산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6·25 전엔 큰 주막(酒幕)으로도 유명했었다.
29 쇠똥골고개 : 쇠똥골과 섶포골 사이에 있는 고개. 이 고갯마루에 수 백년 묵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서낭당고개'로도 불리웠으나, 이 소나무는 최근에 말라 죽었다.
30 갱명두산(201m) : 쇠똥골고개 남쪽에 있는 산.
31 적거리 태봉(赤巨里 胎峰) : 쇠똥골 남쪽에 있는 뾰족한 산. 예전에 궁실에서 태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이 봉우리 정상에 강씨가 묘를 써 그 당시 태실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32 태봉말(胎峰村) : 적거리 태봉 아래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5가구가 살던 곳이다.
33 아래섶포골 : 웃매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섶포골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34 두고개 : 탄막 서쪽에 있는 고개.
35 포수죽은구럼 : 갱명두산 북쪽에 딸린 골짜기. 옛날에 포수가 사냥을 하다 죽은 곳이라 한다.
36 삼방귀떼 : 섶포골 입구에 있는 밭. 밭 가운데 찬 우물이 유명했던 곳이다.
37 봉사밭 : 섶포골 서쪽에 있는 약 1,000평 넓이의 밭. 예전에 봉씨와 사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이 경작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8 배나무골 : 윗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한다.
39 치장골 : 배나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40 깨골 : 큰골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41 큰골 : 윗말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이름.
42 까마귀봉 : 큰골 북쪽에 있는 봉우리.
43 가는골 : 치장골 동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44 윗말 : 섶포골 위에 있던 마을. 6·25 전에 원주 원씨가 5가구 살았던 곳으로 '윗섶포골'이라고도 한다.
45 천제봉(天祭峰) : 섶포골 동쪽에 있는 봉우리. 6·25 전까지 섶포골 주민들이 매년 10월에 천제를 올렸던 곳이다.
46 섶포골(薪浦洞) : 윗말 남쪽에 있었던 마을. 이 곳은 예전에 숲이 무성히 우거져 있던 곳이 되어 숲의 옛말인 '섶'에서 음을 따와 '골'과 합하여 '섶골'로 불리웠던 것이 중간에 매개모음 '의'를 동반하면서 섶포골이 엉뚱하게도 한자지명인 '浦'자를 음차하면서 예전에 배가 이 곳까지 들어왔다는 엉뚱한 유래를 낳은 곳이다.
섶(薪) + (의)골(谷) = 섶의골 > 서프골 > 서푸골 > 서포골 또는 섶포골(薪浦洞)
6·25 전까지 원주 원씨가 35호 살던 집성촌이었다.
47 고려진사 이양소 묘(高麗進士 李陽昭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48 윤동지골 : 이양소 묘 동쪽에 있는 골짜기.
49 탄막(炭幕) : 일제 강점기 때 삼정(三井)회사가 적거리일대의 산을 벌채하여 숯을 구웠던 곳으로, 이양소 묘의 앞이 된다.
* 제 보 자 : 원 재 성(86) 연천읍 통현2리(고포리)
조 봉 선(66) 전곡읍 전곡2리 18반
나 정 연(65) 청산면 대전2리(연미골)
정 규 찬(64) 전곡읍 전곡1리 3반 445 - 36
원 심 운(60) 연천읍 통현1리(고포리)
손 한 영(59) 연천읍 차탄1리 5반
6. 합수리(合水里)
본래 연천현 북면의 지역으로, 마거리에서 발원하여 합수리의 중앙을 흐르며 임진강에 합류하는 긴 하천이 크게 휘돌아 곡류(曲流)하므로 수회리(水回里)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상수회리(上水回里)와 하수회리(下水回里)로 분할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면의 하수회리와 연천군 동면에 속해 있던 상수회리를 다시 병합하여 합수리라 하여 중면에 편입되었으나,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합수리 전지역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 되어 현재 출입영농만 가능한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무당소 : 삼곶리로 들어가는 노재다리 북쪽에 있는 소(沼).
2 소롱댕이 : 무당소 위에 있는 큰 웅덩이. 예전에 이 곳에 보(洑)를 막아 삼곶리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했던 곳이다.
3 현촌말(玄村) : 노재다리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 연주 현씨가 30여호 살았던 곳이다.
4 무드리고개(水回里) : 합수리 염촌말(廉村)과 삼곶리 사이에 있는 고개.
5 염촌말(廉村) : 현촌말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파주 염씨가 20여호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다.
6 소학골(巢鶴洞) : 쪽쪽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윗무드리와 아랫무드리의 사이에 있다 하여 '새골(= 쇠골)'이라고도 불리웠고 이천 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7 청룡고개(靑龍峴) : 소학골에서 황새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적거리에 있는 청화공 이양소(李陽昭) 묘의 좌청룡 형국이 되는 산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8 아랫벌 : 윗무드리에 있는 넓은 벌판. 정촌말 부근에 있는 벌판의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 기와말(瓦村) : 추목정 서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기와집이 있었다 한다.
10 추목정(楸木亭) : 기와말 동쪽에 있는 산 등. 예전에 가래나무 수종의 큰 정자나무가 있던 곳이라 한다.
11 황새말 : 추목정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여름철이 되면 황새가 많아 날아와 번식했던 철새도래지가 있던 곳이다.
12 바늘거리 : 합수리와 마거리 경계에 있는 모퉁이. 지형이 바늘처럼 뾰족하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 회골(灰谷) : 바늘거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회를 구웠던 곳이라 한다.
14 합수리 봉수지(合水里 烽隧址. 봉화뚝. 218m) : 바늘거리 동쪽, 산 정상에 있는 봉수지. 현재 조사불능 지역에 있어 사용시기 및 자세한 규모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15 윗말 : 황새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정촌말의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 뒤골 : 정촌말의 뒤에 있는 골짜기.
17 돌모탱이(回隅) : 뒤골과 정촌말 사이에 뻗어나온 산부리 끝을 돌아가는 모퉁이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8 첨지문하부사 임 구 묘(僉知門下府事 任球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9 정촌말(丁村) : 시랑말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 나주 정씨가 20여호 모여 살던 곳이며, 매년 9월 9일이 되면 이 마을에서 산신제를 크게 올렸다 한다.
20 방아다리 : 정촌말 남쪽, 윗무드리의 중심인 사거리에 있던 디딜방아간이다.
무드리는 마거리에서 발원하여 합수리 중앙을 흐르는 개울이 크게 돌아 흐른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물(水)'과 돈다는 뜻의 '둘이(回)'가 합치면서 ㄹ이 탈락하고 아래와 같은 음의 변화를 거치며 '무드리'가 된 땅이름이다.
물 + 둘이 = 물둘이 > 무둘이 > 무드리
21 무조래 : 정촌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22 시랑말(侍郞村) : 정촌말 남쪽에 있었던 마을. 고려 때 시랑벼슬을 역임했던 사람이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한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부군굿으로도 유명했던 곳이다.
23 안골 : 시랑말 안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24 당골(堂谷) : 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고을원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라 한다.
25 솟을봉 : 당골 동쪽, 연천읍 상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연천읍 상리편 참고)
26 쟁골고개 : 시랑말에서 작은터골을 거쳐 연천읍 상리의 재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27 작은터골 : 시랑말고개가 있는 골짜기.
28 순터골 : 작은터골 옆에 있는 골짜기.
29 윗종지미 : 순터골 옆에 있는 골짜기. 종지미의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0 종지미 : 윗종지미 서쪽에 있는 골짜기. 종지처럼 생긴 산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1 쪽쪽골 : 소학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작다'는 뜻의 옛말인 '쬡'에서 뜻을 따온 작은 골짜기이다.
32 양지말(陽村) : 현촌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하루종일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3 능골(陵谷) : 양지말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이 곳은 고려시대 고분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 때 모두 도굴당했다 한다.
34 군수막고개 : 능골에서 군남면 옥계리의 작은밤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옥계리편 참고)
35 소리개고개 : 중면의 합수리·삼곶리, 군남면의 옥계리 경계에 있는 고개.(옥계리편 참고)
* 제 보 자 : 조 봉 선(66) 전곡읍 전곡2리 18반
정 규 찬(64) 전곡1리 3반
첫댓글 몇몇 지명은 들어 보고 가본곳도 있지만 전여 못듯고 가보지 못한곳이 너무 많네요 내고향 도 제대로 찿아보지도 못하면서 해외 여행을 자주 다니시는 분들 좀 각성 해야겠군요 자증 하세요 우리 고향 에 가봅시다 좋은 곳 너무 많아요 수고 하쎴읍니다
중면은 저의 아버님 고향이어서 위에 제보자로 나오시는 이재순씨는 저의 아버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