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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문학관인 목포문학관
수필가 박서정
울산문학 제78호 게재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곳이지만 이상하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항구도시 목포. 그동안 목포하면 떠올랐던 것은 대중가요로 사랑받았던 ‘목포의 눈 물’, ‘목포는 항구다’이다. 그리고 굳이 하나를 덧붙인다면 유달산 정도이다. 그곳에 지역 이름을 딴 목포문학관이 있다는 사실은 인터넷 검색을 하기 전 에는 전혀 몰랐다. 문학관으로 향하는 그날은 날씨가 매우 복잡했다. 비가 흩날리는가 싶더 니 더운 바람 찬 바람이 햇살의 양을 조절하며 번갈아 불어주고 있었다. 주 변 풍경을 음미하다가도 날씨에 대한 생각들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했다. 그 것은 마치 오늘이 복합문학관을 방문하는 날이라는 것을 강조라도 하는 듯 했다. 울산에서 4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그곳은 차 속에서의 답답함을 일소에 해소라도 시켜줄 듯 사방이 툭 트여 있었다. 앞쪽에는 넓은 바다가 뒤쪽에 는 입암산이 문학관을 사이에 두고 시원스런 소통을 하고 있었다. 산바람과 갯바람이 수시로 만나는 맞은편 한쪽에는 목포문화예술회관과 국립해양유 물전시관이 예의를 갖추고 서 있었다. 마침 그날은 야외갤러리에 문협 회원 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어 볼거리가 많았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춘 그곳에 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문학관과 예술관을 이어주는 ‘갓바위 문화의 다리’ 였다. 하얀색으로 깔끔하게 치장하고 방문객들을 멋지게 불러들이고 있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저절로 오고 싶은 곳, 자주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 도로 주변 경관이 문화의 정취를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문학관의 내력과 소개
대지 2,825.94m2, 지상 2층 건물로 1 층 왼쪽에 차범석 관, 오른쪽에 박화성 관, 2층 오른쪽에 김현 관 왼쪽에는 김우 진 관이 있다. 그 외의 공간으로는 문학체 험관, 문학창작실, 다목적실, 문학인사랑 방, 수장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네 분을 한 곳에 모신 것은 같은 날 이루 어진 게 아니다. 1991년에 목포시 대의동 2가 노적봉 아래에 개관했던 박화성 문학 기념관을 이곳으로 옮긴 후 다른 두 분을 추가로 모시면서 2007년 10월 9일에 먼 저 개관을 했다. 그런 다음 2011년 9월에 김현 선생을 모시게 되어 현재 네 분이 된 것이다. 갓바위 문화타운(목포시 남농로 95)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역과 문학을 빛 낸 그분들을 기리기 위해 국내 최초로 복합문학관이 탄생한 것이다. 이 건물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현대적이고 실용성을 추구한 점이 돋보 였다. 문학관을 들어서기 전 중앙에는 네 분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아래에는 작가의 부조상과 소개 글이 새겨져 있다. 좌우를 이어주는 2층 연 결다리의 간격만큼 천장을 투명 유리로 만들어서 1층 공간은 밝고 여유가 느껴졌다. 내부로 들어가기 전 잠깐 마음에 쉼표를 남겨주는 낭만 잉여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현대극을 정착시키다 - 차범석 관
차범석(1924-2006)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995년 희곡 ‘밀주’가 자작 으로 당선되었고 다음해 귀향이 당선됨으로써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 했다. 1963년에 산하를 창단하여 20년 동안 대표로 활동해 한국의 현대극 을 정착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50여 년 동안 철저한 사실주의를 바탕 으로 해서 다양한 주제를 통해 현대적 서민심리를 작품 속에 녹여냈다. 전 후 세대이지만 전쟁이라는 주제에만 고착하지 않고 한국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 데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한 극작가이
연출가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청주대학교 예 술대학장으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국내 최초의 극작가 전시관에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연극과 관련한 다양 한 친필원고 대본 공연포스터 등이 가득 채워져 있다. 금색으로 만들어진 그의 흉상 뒤 벽면에는 육필 원고가 조명 속에서 밝게 읽혀졌다. 그중 ‘산하 란 우리의 고향이자 조국이다-떠도는 산하 중에서-’ 글귀는 더욱 진하게 쓰여 있다. 집필실로 꾸며진 공간에는 생전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 아서 그분의 생활상이 쉽게 그려졌다. 글을 쓰다가 힘이 들 때면 흔들의자 에 앉아 잠깐의 휴식을 취했을 것 같은 여유도 느껴졌다. 벽에 걸린 자화상 에는 잠시도 생각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는 듯 고뇌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 였다. 앉은뱅이책상 뒤로 세워져 있는 10자 병풍에는 수묵화로 그린 그림이 힘차고 올곧게 작가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어떤 잡념도 물리치고 오 직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생애와 문학을 보여주는 곳에서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의 행적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잘 보관된 가방 안경 도장과 납관 회 원증, 증명서, 공로패, 상장 등이 유리관 안에서 선명했다. 어린 시절을 유 복하게 보냈고 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유품들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분임을 상 기하고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흑백 사진 속에서 반듯한 자세로 서 있기도 하고 미소를 띤 채 앉아 있기도 해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무슨 말이 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많은 업적을 감상하느라 놓치고 말았다. 육필원고, 작품활동, 작품세계. 자선 대표작, 기념사업, 연극공연과정, 생활유품들이 잘 진열돼 있다. 옷과 모자 목도리 손수건 등에서는 깔끔하고 멋진 분의 생 전 모습이 상상되어졌다. 하나도 빠뜨림 없이 그 분을 잘 전하기 위한 정성 이 넓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감지되었다. 지금도 생존하는 연극인과 영화인의 활동을 대본과 공연포스터를 통해 다시 볼 수 있어서 극장과 영화관에 있다는 착각도 잠깐 들었다. 그 분이 남긴 소중한 업적이 자손대대로 계속 전해질 것을 확신하며 맞은편 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 -박화성 관
박화성(1903-1988)은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경순이다.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1925년 조선 문단에 ‘추석전 야’로 데뷔하였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장편소설 ‘백화’를 1932년 동아일보에 연 재하였고 이후 ‘달리는 아침에’를 집필하 였고 1985년 팔순이 넘어서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60여 년의 문단활동 에서 장편 17편 단편 62편을 비롯해 평론 과 수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기 작 품인 ‘추석전야’, ‘홍수전후’, ‘고향 없는 사 람들’, ‘헐어진 청년회관’은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현실 문제를 깊이 있게 파 헤쳤다.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회장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지냈으며 대한민국문화훈장,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박화성관도 처음 들어서면 흉상이 제일 먼저 맞이한다. 안경을 끼고 약간 웃는 듯한 얼굴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안방을 복 원해 놓은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수묵화 병풍으로 한쪽 벽면이 힘 있게 시 선을 끈다. 그 옆에 문이 열린 장롱에는 이불들이 켜켜이 쌓여있고 아래 칸 에는 작은 TV가 놓여 있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묵주가 마
리아상에 걸려 있다. 자개농과 원목의 농이 깨끗하고 정갈해 보인다. 글을 쓰고 다듬듯 애정을 쏟은 물건처럼 보인다. 구석에 놓인 경대에 얼굴을 비 춰보고 싶었지만 구조상 힘들어서 아쉬웠다. 돗자리에 놓인 찻상에 마주앉 아 차 한 잔 나누며 문학의 향기를 느껴보고 싶은 충동이 잠시 일었다. 작가가 생전에 펼쳤던 기념사업을 알리는 사진과 설명글이 있다. 문인가 족 박화성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감동으로 전해왔다. 집필실에는 빽빽이 꽂 혀 있는 책들이 보인다. 의자에 드리운 등받이는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를 보호해 줄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편액과 몇 개의 액자들이 주인의 심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작품 속에 나오는 소설공간을 알게 하는 글이 자세히 설 명되어 있고 바다색을 담은 대형지도가 벽면을 가득 채운 채 시선을 끈다. 생애와 문학, 작품세계, 생활유품들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특히 생활유품 관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올망졸망한 찻잔 세트들, 부채 향 로와 놋수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다듬잇돌, 지갑과 많은 반지, 귀고리 와 액세서리, 손때 묻은 가방 그리고 구두 한 켤레, 한복 2벌과 고무신 두 켤레, 양산, 재봉틀, 몇 개의 장갑, 손수건과 뜨개 물건 등이 잘 진열되어 있 다. 쉽게 버릴 수 있는 물건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이렇게 남기고 간 것을 보면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꼼꼼한 작가의 성향을 읽게 된다. 시 국이 어수선한 시기에 문학으로 열정을 불태운 이분의 정신과 혼이 빼곡히 가슴을 채워준다.
•평론문학의 거장 독보적 존재 - 김현 관
김현(1942-1990)은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으며 8세 때 목포로 이주하여 살았다. 본명은 김광남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한국문학사’, ‘분석과 해 석’, ‘존재와 언어’ 등이다. 서울대 불문과 재학시절인 1962년 자유문학에 문학평론 ‘나르시스의 시론-시와 악의 문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 주도했으며 1970년 가을 창 간한 문학 계간지 문학과 지성의 모태가 되었으며 동인회 68그룹 결성의 계 기가 되었다. 많은 독서량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작품 분석 그리고 인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지적관심과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비평은 절대 창작에 기생 하는 장르가 아님을 강조했다. 많은 노력 끝에 평론을 독자적인 문학 장르 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로 평가되고 있다. 살아생전 240여 편에 달하는 문학평론과 저서를 남겼고 문학과 지성사에서 김현 문학전집 전, 16권이 1993년에 발간되었다. 제1회 팔봉 비평 문학상(1989), 외국문학 논문상 (1988)등을 수상하였다. 김현 관에는 김현을 그리다, 만나다, 말하다, 등의 동사로 만들어져 있어 살아있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흉상이 없는 김현 관이지만 다른 것들로 식상 한 부분들을 채워주고 있었다. 김현의 얼굴을 그린 사람들의 이름이 공개되 어 있어 이색적이었다. 모두 다른 느낌으로 여러 컷의 그림이 캐리커쳐 돼 있어 평소에 지인들로부터 인기남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도한 권씩 한눈에 들어오게 유리관 속에 세워진 채 진열되어 있다. 각 액자에 담긴 연보는 뜨거운 생애를 눈빛을 반짝이며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야외갤러리에 세워진 문학비 앞에서 찍은 사진 속에는 이미 고인이 된 사 람과 생존한 사람들이 보인다. 이 관에는 흉상이 유일하게 없어 아쉬웠는데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사진으로 대체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 른 관보다는 조금 간략하게 꾸민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김현을 나름대로 정 성껏 알리고 있었다. 비평가라고 해서 냉혈인간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 면 안 될 것 같다. 김현은 평소 사람을 대할 때도 따뜻함을 잃지 않았고 작 품을 읽을 때도 따뜻한 마음으로 작품 속에서 따뜻함을 발견하는 사람이었 다. 비평가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함을 이 김현 관에서 깨우치게 된다. 검 색대 및 어록을 다시 둘러보며 김현을 한 번 더 만나고 나왔다.
•극예술의 선구적 극작가 - 김우진 관
김우진(1897-1926)은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고 11세 때 목포로 이주해서 살았 다. 대표작품으로는 ‘이영녀’, ‘난파’, ‘산 돼지’ 등이 있다. 1920년 홍해성, 조명희 등 유학생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 협회를 조직하였다. 동우회순회연극단을 1921년에 조직하여 국내 순회공연을 했 다. 대학을 졸업 후 목포로 귀향하여 희곡 5편, 시 50편, 소설 3편, 문학평론 20편 을 남겼다. 하지만 사회 가정 애정 문제로 고민하다가 1926년 8월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귀국하던 선상에서 현해탄에 투신했다. 그는 당시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넘는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특히 표현주 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부분에서는 유일한 극작가였다. 해박한 식견과 외국어 실력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였다. 그리고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이기도 했다. 김우진 관도 들어서는 순간 안경을 끼고 입을 굳게 다문 흉상을 제일 먼 저 만난다. 흉상 뒤로 검은 글씨로 작품의 일부분을 짧게 옮겨 놓았다. 다 른 관과 마찬가지로 희곡 시 소설 평론 등의 친필원고가 있다. 다른 것이 있 다면 5개국 대사관의 서기관을 역임한 부친 김성규 님의 유품도 함께 전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필실은 유복하게 자란 것에 비해 단출하고 조금 삭막해 보인다. 수묵화 로 되어 있던 다른 문인의 병풍과 달리 먹으로 글씨를 적은 병풍이 넓게 펼 쳐져 있다. 아무 잡념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고 싶다 는 마음을 피력한 것 같은 의지가 엿보인다. 선비기질이 강한 가정에서 태 어난 김우진의 생활상을 역력히 짐작할 수 있는 의관들이 눈에 띈다. 벽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관복, 얼굴을 가리는 가리개, 의관을 갖출 때 하는 각 대, 병부주머니, 목화(관복을 갖출 때 신는 신발), 실내에서 쓰는 건, 관모 등이 있다. 작품들이 많이 진열돼 있다. 입간판처럼 세워진 작품들과 벽에 붙어 있는 작품들이 빽빽하다. 작품들이 조금만 발걸음을 옮겨도 속삭이며 손을 내미 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뒤돌아보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국 짧은 생을 끝 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지금도 말을 걸어오고 있다. 대답은 가볍고도 무 거워진다. 안경을 끼고 고뇌에 찬 얼굴이 계속 마음을 붙잡았지만 가벼운 목례를 한 후 바쁜 듯이 나왔다. 하지만 왠지 자꾸 뒤돌아봐진다.
네 개의 관을 둘러보고 나니 가슴 속이 꽉 찬 듯 벅차다. 울산에도 오영수 문학관이 있어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럽지만 목포의 복합문학관은 또 다른 기분을 가지게 한다. 문학정신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이곳에서 오직 문학에 대한 일념으로 한평생을 살다간 그분들의 고결한 정신에 저절로 머 리가 숙여진다. 문학을 하다 생을 마친 그 분들의 그림자도 따라잡기 힘들 겠다는 생각이 탐방 내내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글을 쓰면서 잡념에 쉽게 휘둘려 볼품없는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고 복잡한 머릿속을 다 비워 공空으 로 살고 싶어 한 적도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문학에 대한 갈망은 수시로 질 문을 하고 답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대답은 언제나 뚜렷한 명분 없이 흐릿 하기만 했다. 매일 일기를 쓰며 자신을 다스렸다는 박화성, 그분처럼 오늘 진지한 일기를 쓰며 나의 약해진 부분을 다시 보수하고 헐거워진 문학관을 재정비해야겠다. 항구도시 목포에서 껴안은 고귀한 문학정신은 두고두고 나를 채찍질하는 그림자가 되고 자양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