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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1월 19일 목요일 흐림 비.
어제 먹다 남은 김밥과 샤와르마, 음료수를 찾아 청소하듯 아침을 떼웠다. 샤워를 하고 짐을 깨끗이 정리했다. 체크아웃을 했다.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다른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짐 한 개 당 5세겔, 3개의 짐을 10세겔을 주고 카운터에 맡기고 7시 30분에 벤유다 호스텔을 나왔다. 비는 가끔 내렸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은 유대인 지역이다.
구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간다. 지도를 잘 못 파악해서 길을 잘 못 들었다. 친절한 아가시의 도움으로 우리는 욥바문에 들어섰다. 야포거리를 지나 욥바문에 들어서니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한국인 한 무리를 만났다. 반가웠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예루살렘, 찬송과 성경에서 수없이 입으로 부르던 예루살렘 성을 처음 보았는데, 왠지 덤덤하다.
왠지 위험할 것 같았는데 평화롭고 한가로운 이스라엘이다. 유대인만 사는 줄 알았는데 아랍인과 뒤죽박죽인 거리가 재미있다. 성지로 하나님과 관계된 교회와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모스크와 교회, 회당이 나란히 있고 코란을 읽는 소리와 교회 종소리 그리고 유대인의 기도 소리가 교차되는 야릇한 도시였다. 조용함과 움직임, 유한과 무한, 전쟁과 평화, 현대와 고대, 유대인과 아랍인, 얼핏 보면 상반되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서로 공존하는 나라가 이곳인 것 같다.
일단 우리는 무작정 야포문에 들어섰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것이다. 좁은 골목들로 이루어져 도저히 위치를 잡을 수 없다. 지도도 필요 없다. 그냥 물어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야포게이트라는 이름은 욥바에서 걸어서 예루살렘에 올라오면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이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대로 이 문을 나서면 욥바 항구가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 이 문에서 투어는 시작된다.
다비드 탑으로 갔다. 10시에 문을 열어 밖에서 보고 돌아섰다. 이곳은 헤롯 대왕(BC 37~BC 4)이 자신의 아내 미리암과 형 파사엘 그리고 친구 히피코스를 기념하여 왕궁 북단에 세운 것이 3개의 탑이란다. 우리가 다비드 탑이라고 부르는 첨탑은 약 400년 전에 터키에 의해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야포게이트는 이 다윗 망대로 인해 가장 널리 알려진 문이 되었다. 성경의 다윗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한다. 헤롯시대에 요새가 있던 곳이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윗망대 박물관도 있다.
좁은 골목을 따라 통곡의 벽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니 카르도가 나타났다. 이 도로는 지금의 지표보다 2m 정도 아래에 있다. 당시의 돌기둥이 길 양옆에 줄지어 있다. 이 길이 비잔틴 시대에 시온문과 다마스커스 문을 연결하던 거리란다. 이 거리는 모자이크로 만든 메데바(medeba)의 예루살렘 지도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발굴 복구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최근의 일이란다. 카르도를 올라와 느낌으로 한참을 가다보니 둥근 지붕의 황금빛 집이보이고, 그 아래 사진에서 보던 통곡의 벽이 있는, 서쪽 벽의 넓은 광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스라엘 군인들의 검문소를 통해 내려가니 통곡의 벽이다.
유대인들이 까만 모자를 쓰고(키파)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키파라는 모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종’임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특유의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 같은 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일컬어야 하는 예배 때만 썼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평소에도 하늘에 머리를 보이지 않는 관습으로 자리 잡게 되어 일상적으로 착용하고 다닌다. 키파는 유대인 남자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 쓰는 모자인데, 뒤통수에 살짝 걸치고 흘러내리지 않게 핀으로 고정시킨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추모관 같은 성소를 방문하는 남자들은 이 전통모자인 키파를 반드시 써야 한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모든 국빈이 필수적이며, 여행객도 마찬가지다. 외국관광객들을 위해서는 성소 입구에 종이 키파를 마련해 둔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이 성전이 로마의 티토스 장군에 의해 붕괴된 것이 기원전 70년의 일이다. 그때 남은 것이 이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의 일부다. 벽의 높이가 18m, 폭이 60m인 이 벽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다. 관광객과 유대인이 섞여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이 모였던 곳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이 골고다로 향했던 광장이라고 한다. 입구에서 키파를 하나 받아쓰고 벽 가까이에 가 보았다. 남자들의 기도 처소 벽 왼쪽으로는 길게 터널식으로 입구가 있었다. 들어가보니 유대인들이 경전인 듯한 두루마리를 펴서 읽고 있었다. 도서관 같이 여러 책들이 지열되어있다. 어린 이에게 무슨 식을 한다.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가 추구하는 것을 옆 사람 의식함도 없이 열중하고 있다. 기도와 낭송소리, 예식 진행의 소리가 한데 어울려 시끄러웠고 더구나 울리는 굴속이라 더욱 왕왕 거리고 분주했다.
아마 소년들에게는 발 미쯔바라는 13세 때 행하는 성년식이 것 같았다. 발 미쯔바는 ‘계명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dl 의식을 통해 성년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이대부터 구약 성경에 수록된 613개의 개명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하는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성년 의식은 친지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큰 잔치와 함께 치러진다. 통곡의 벽 앞에서 행하는데 한층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그곳을 나와 벽에 서니 벽의 돌 틈에 끼워 놓은 종이쪽지들이 수없이 많이 보인다.
성전의 서편에는 이른바 "통곡의 벽"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파괴를 마음 아파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러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 명칭을 싫어한다. 그들은 단순히 성전의 서쪽 벽이라고 해서 "하코델 하마아라비"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 지성소가 자리했던 이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야훼의 거처요, 야훼의 현존을 뜻한다.(열왕기). 따라서 헤로데 시대의 그 웅장한 성전 담에 속하는 통곡의 벽은 오늘날 유대인들에게 아주 귀중한 성역이 된다.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비장한 소원을 적어 넣어둔 것인데 너무 많아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있다. 소원을 적어 우리도 든든히 끼워 넣었다.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 통곡의 벽은 서쪽 벽이다. 탄식의 벽이라고 불린다. 밤이 되면 돌 벽에 밤이슬이 내려 자라고 있는 풀들을 타고 내리는 것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졌단다. 남자들의 벽과 여자들의 벽이 나뉘어져 있다.
서쪽 벽의 좁은 언덕을 올라가니 좁은 문이 나온다. 이 문을 무그레비의 문, 키보노스 문이라 불린다. 이 문이 서쪽 벽 상부로 통하는 문이다. 이 언덕을 모리아 산이라고도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해발 744m의 높이다. 아랍사람들에게는 2개의 중요한 모스크가 있다. 이곳은 처음에 유대교 성전이 있었으나 로마에 의해 붕괴되고 쥬피터 신전이 대신 했다. 십자군 시대는 그리스도 교회로 사용되었다. 7세기에 회교도에 의해 회교사원이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
어디서 보나 구 예루살렘 시내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이 바위 돔(오마르 모스크)이다. 지붕이 황금빛으로 눈이 부시도록 빛난다. 이 건물은 691년 칼리프 말리크에 의해 세워졌다. 이 돔 한가운데 있는 나무에 둘러싸인 커다란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제단이란다. 북쪽 문 정면 바닥에 녹색 돌은 천국 돌인데 전설에 의하면 마호메트는 이 돌에 19개의 금 못을 박았는데 모든 못이 없어져 버리면 지구는 원래의 혼돈상태로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종말이란다. 그런데 현재는 3개가 남아있단다.
중심 되는 곳에 회교 사원이 있다는 것이 좀 무겁게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 같다. 또 하나의 사원이 엘 악사 사원이다. 옛날 이곳이 솔로몬의 성전이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엘 악사라는 것은 코란에 나오는 "흔들리는 모스크"를 의미하며, 회교도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모스크이다. 마호메트가 승천한 곳이란다. 원래 비잔틴 시대의 교회를 모스크로 만든 것이지만 그 후 지진 등으로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066년에 완성되었다. 내부는 7개의 홀로 되어 있고, 스테인드 글라스와 타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서쪽 홀은 "하얀 모스크"라고 불리는 십자군 시대의 건물로 당시는 솔로몬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교 대사원과 엘 악사 사원이 자리하고 있는 성역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계약의 궤가 안치되었던 지정소가 땅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 땅을 감히 발로 밟아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경건심 때문이다. 이곳을 지나 우리는 동쪽을 보니 올리브 산이 보였다. 겟세마네 동산, 감람산이다. 몇 개의 교회가 보인다. 이곳을 향해 있는 문이 황금문이다.
황금문은 해가 뜨는 동쪽의 문인데 굳게 닫혀 있다. 메시아가 감림하는 날 열린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아랍지역에서 잠시 실례를 한 후 예수님께서 힘들게 십자가를 지시고 걸으셨던 슬픔의 길, 수난의 길인 비아 돌로로사를 향했다. 처음 들린 곳이 채찍 교회다. 교회 분위기가 어둡고 무거웠다. 교회 벽에는 예수님께서 채찍 맞아 쓰러진 모습이 그려져 있어 순례자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행하고 있는 "예수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은 1294년 리칼두스 신부에 의해 처음으로 그 위치가 대충 설정되었다. 안토니아성(제 1, 2처)에서부터 골고다(제 10, 11, 12, 13, 14처)까지 그 사이에 일곱 개 장소(제 3, 9처)를 적절하게 만들어 예수의 수난을 묵상토록 했었다.
그후 1540년경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에 의해 오늘날 "예수 십자가의 길"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순례자들이 예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행하는 "예수 십자가의 길"은 예수께서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가셨던 바로 그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예수 수난의 길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길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행하고 있는 "십자가의 길" 중에서 복음서에 근거를 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처 (마태 27, 22-26) 제2처 (요한 19, 16,-17) 제5처 (마태 27, 32) 제8처 (누가 23, 28-31) 제10처 (요한 19, 23-24) 제11처 (요한 19, 18) 제12처 (마태 27, 50) 제14처 (마태 27, 58-60) 이다.
잠시 묵상 후 교회를 나와 성 안나 교회로 갔다. 입장료는 순례자들 단체객에 묻혀서 그냥 들어간다. 입장료는 두당 3세겔이다. 성 안나는 마리아의 어머니로 그녀를 기념해서, 또는 마리아의 탄생지를 기념해서 세운 교회다. 이 성당의 지하는 마리아의 부모이신 요아킴과 안나의 집터로 전해지며 따라서 성모 마리아의 탄생지로 여겨져 공경된다. 오늘날까지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예루살렘의 십자군 전쟁에 나선 사람들의 성당 중 가장 아름다운 이 성당은 예루살렘의 왕 발두인 1세(1058-1118)의 미망인 알다(또는 아델라시아) 여왕의 명에 의해 1140년에 세워졌다.
건축 양식은 당시의 십자군 성당의 전형적 건축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끝이 뾰족한 아치들은 곧 이어 나타나는 고딕 양식을 예고한다. 특히 건물 안에 퍼지는 뛰어난 음향 효과는 그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인 로마노 과르디니는 이 성당을 두고 "성찬례(미사)를 거행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라고 극찬했다. 이 성당 안에 서면 십자군 전쟁에 나선 사람들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비잔틴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성당 우측으로 내려가는 지하 경당은 바로 마리아의 탄생지, 곧 요아킴과 안나의 거주지였다고 전해진다. 이 자리에서 5세기에 벌써 안나를 기념하기 위한 경당이 세워졌으며, 1009년 칼리프 엘-하킴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폐허 자리에 십자군 기사들은 먼저 경당을 새로 짓고 그 다음 수녀원 성당으로 교회를 세웠다. 곧 늘어나는 공동체에 비해 성당이 너무 협소해져 크게 확장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입구 전문을 7미터 앞으로 내었다. 50년이 지난 1192년 예루살렘이 살라딘에 의해 재점령된 뒤 수도원과 성당은 코란을 배우는 학교와 회교 사원으로 바뀌어졌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중앙 현관 위에 있는 아랍어 명패를 볼 수 있다. 그 이후 시대에 교회는 눈에 띄게 파괴되어 갔다. 크리미아 전쟁 후(1856년) 터키의 슐탄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전쟁에서의 도움에 감사하는 뜻으로 이 인근 지역 전체를 선사했는데 황제는 이를 아프리카 선교회에 위임했다. 마침내 "아프리카 선교회(Weisee Vater)"는 이 성당을 재건축하고 주변지역을 완전히 새로 단장했다. 설령 이 경당이 마리아의 탄생지라는 비잔틴 전승이 아무런 근거나 확증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 이 장소는 수많은 순례자들, 그 중에는 빌리발트, 로욜라의 이냐시오, 샤를르 드 후꼬와 같은 성인들이 기도했다는 사실에서 벌써 성지가 된 것이다.
서구 순례자들을 다라 교회에 들어갔는데, 가이드 하시는 어르신이 찬송가 21장인 ‘다 찬양하여라.’를 인도하셨다. 한 줄을 부른 후 끊으니 뒤 여음이 메아리 되어 교회를 울려 한참을 끌었다. 다 찬양 하여라 전능왕 창조의 주께/^^^^^^^^^. 내 혼아 주 찬양 평강과 구원의 주님/^^^^^^^^^^^, 성도들아(크게, 크게)/^^^^^^^^^, 주 앞에 이제 나와/^^^^^^^^^, 즐겁게 찬양 하여라/^^^^^^^^^^^^. 그 울림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교회를 나와 오른쪽으로 약간 가니 벽돌로 쌓인 흔적이 있는 허물어진 유적이 보인다. 푹 파인 밑바닥에 물이 고여 있다. 좀 깊어 보인다. 이곳이 베데스다 연못이다. 이곳은 병원 지역으로 표시되어있다. 성서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한 발굴지이다. 이에 대한 역사성은 요한 복음 5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38년 동안 병을 앓아 온 부인을 예수께서 낫게 하신 기적을 베푸신 유명한 장소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망으로 갈라놓은 저수지의 잔해이며 5세기경에 세워진 3열의 회중석으로 된 비잔틴 성당의 유적과 십자군 성당의 작은 흔적들이 있다.
성 안나교회를 지나 동쪽에 문이 있다. 잠시 밖으로 나가 문을 살펴본다. 성문 위 양편에 사자 모양이 있다. 이곳이 라이온 게이트다. 스데반 성문이라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두 마리의 사자가 술레이만 2세의 꿈에 나타나 부서진 성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고 해서 1540년경 성문을 보수했고 그 꿈을 기념하는 뜻에서 그 명칭이 주어졌다고 하는데 영어로는 "라이온 게이트", 히브리어로는 "사아르 하아라요트"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의 명칭은 바브엘 고르(요르단 성문)"였는데, 오늘날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성문 근처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해서 그를 기억 코자 하여 성 스테반 성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의 집이 이 성문 근처에 자리했다고 해서 안나 성문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바브 싯티 미리암(마리아 성문)"이라고 부른다. 마리아의 무덤이 이 성문 근처, 즉 키드론 계곡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였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여호사밧 계곡으로 통하는 문이라고 해서 "사이르 여호사밧(여호사밧 성문)"이라고 부른다. 1920년에 영국군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원래의 성문을 개조하였다. 1967년 6월 전쟁 시 이스라엘 군들은 이 성문을 점령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종려나무 가지를 든 어린 아랍 소년이 밖으로 나오고 힘들게 올라오는 나귀 새끼를 보니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생각난다. 호산나 찬송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모습이다. 다시 문을 들어와 비아 돌로로사로 접어들었다. 예수님께서 갇히셨던 감옥이라는 지하실이 보인다. 아랍인이 관장하고 있어 입장료를 내란다. 그냥 밖에서 구경만 하고 돌아섰다. 웅성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등 뒤가 아랍인들의 학교였다. 옛날에 이곳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 법정이었단다.
다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아랍인들의 장터 골목이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게로 쓰러지신 곳,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이란다.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은 곳 등을 지나 우리의 목적지인 성 분묘 교회에 도착했다. 골고다와 예수의 무덤이 위치했던 곳에 오늘날 기념 대성전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묻히신 곳이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흔적이 담긴 곳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곳 기념 성전을 "예수의 무덤", 또는 "예수 부활 기념 성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의 형벌을 당하신 곳은 시내근처 곧 골고다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예수께서 묻히신 곳은 골고다 근처에 있는 정원의 새 무덤이었다. 그 무덤은 바윗돌을 깎아서 만든 것으로서 무덤 입구에는 커다란 석문이 놓여져 있었다. 그 무덤의 주인은 당시 유다 최고 의회의 한 의원인 아리마대 출신 요셉이었다. 그는 예수를 몰래 따르던 사람이었고, 자기 동료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 이였다. 예수의 무덤은 커다란 돌로 굳게 닫혀졌고, 경비병은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안식일 다음날 무덤에 가서 봤더니 큰 이변이 일어났다. 굳게 닫혀진 돌문은 열려 있었고 그 무덤 안은 텅 비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은 경비병들의 증언을 통해 대제사장들과 원로들에게까지도 알려졌다.
골고다란 말은 "해골" 또는 "머리털이 없는 두개골"을 의미하는 아라메아어 ‘골고다"나 히브리어 "굴골레트"가 희랍어 식으로 와전된 발음이다. 그러나 라틴어로는 동일한 의미로 갈바리아(갈보리)라고 말한다. "갈바리아" 또는 "골고다"라고 칭해지고 있는 곳은 오늘날에는 성벽 안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예수시대에는 성벽 밖이 불모지였고, 주로 무덤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아홉 개의 커다란 가족 무덤을 발굴해 냈고, 그들 중 여섯 개는 오늘날도 볼 수가 있다. AD44 년 경에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단다. 골고다는 대략 40 미터 가량 높은 언덕이었으리라고 지형학자들은 추측한다.(예루살렘의 홀리랜드 호텔에 있는 구 예루살렘의 모형도를 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예루살렘이 해발 760m 가량 된다고 하겠다. 이 언덕은 바윗돌로 메꾸어 진 채석장으로서 마치 해골처럼 보였기 때문에 골고다란 명칭이 붙여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지금은 골고다와 예수 무덤의 원래 모습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다만 그 자리에 위치한 기념성전만 볼 수 있다. 기념 성전 주변에는 수많은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성전이 위치한 지대는 서쪽지대에 비해서 상당히 낮기 때문에 "과연 이곳에 골고다가 자리해 있었을까?" 하고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신빙성은 크다. 예루살렘을 로마의 군사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골고다 언덕은 깎이게 되었고, 예수의 무덤이 위치한 정원 부분은 돌로 메꾸어지게 되었다(135년).
그 위에는 신전과 더불어 쥬피터와 비너스상이 세워졌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으로 신전이 세워짐으로 인해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념 성전이 세워질 때까지 그 자리가 유보된 것만은 사실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순례하고 참배하는 예수 무덤과 골고다의 위치는 비교적 정확하다고 하겠다. 기념 대성전 안에서 여섯 종파들이 운집해 살고 있다. 라틴교회(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대표 역할),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주로 특권과 우선권을 갖고 있고, 시리아 정교회, 곱트 교회, 그리고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사실상 더부살이하고 있는 셈이다. 여섯 종파들의 관계는 정치종교적으로 서로 얽히고 설켜 있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1757년에 법률상으로 확정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나의 기념성전이 갈기갈기 찢겨진 셈이 되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곳이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과 예수님의 시체가 묻힌 무덤이 있는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다. 오른쪽 층계를 따라 올라갔다. 층계는 경사가 급한데 순례 객들로 인해 층계 계단이 옴폭하게 파여 있어 세월의 흐름을 짐작한다. 다 올라가니 순례 객 들로 가득 차 빈틈이 없다. 비집고 들어가 재단 앞에 섰는데 구멍이 보인다. 이 구멍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던 자리란다. 이 갈보리 언덕은 두 교회가 관장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 곳은 희랍 정교회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못을 박았다고 믿어지는 자리는 로마 천주교에서 관장한다. 내려오니 교회 정문 앞에 평평한 돌 판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장사 지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 놓은 돌 판이란다.
성화를 보니 그 당시 상황을 그림으로 잘 묘사해 놓았다. 왼쪽으로 들어가니 조그만 집에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줄을 서있다. 이 굴이 예수님의 무덤이란다. 아리마대 요셉이 깎아서 만든 부유한 유대인의 무덤형태다. 현재 기념하고 있는 무덤교회는 1810년 희랍 정교회에서 무덤자리에 세워 놓은 것으로 러시아 식의 둥근 천장을 하고 있다. 무덤 앞 예배당 안에는 달걀을 세워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돌 컵이 있다.이 돌 컵은 세계의 중심, 지구의 배꼽이라고 불린다. 큰 샹들리에가 인상적이다. 아내를 잃어버렸다. 이동도 못하고 찾아 헤맸다. 겨우 찾았다.
아내가 발견했다는 헤케호모 교회를 방문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조롱하는 말로 ‘보라 이 사람이다.’라는 말이 에케 호모란다. 교회 지하실로 내려간다. 2000 년 전의 지하 저수지를 볼 수 있었다. 주위의 벽에서는 지하수가 흘러 저수지에 물이 고여 있다. 당시 요새 상황을 짐작한다. 돌아오는 길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 몇 개가 있어 하나씩 지고 사진을 찍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성 분묘 교회가 신앙인의 최고 정점 지역인 것 같다. 예수님의 무덤은 곧 예수님의 부활 장소이기도 하다. 부활을 고대하는 우리에게 더욱 주님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로마의 파괴, 십자군의 재건, 회교도의 파괴, 또 재건의 반복으로 교회 전체의 모습은 교회라기보다 성벽 같다.
교회를 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아랍인 골목 시장 수크를 둘러 보았다. 수크는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의 상업 지역을 의미한다. 다비드 거리와 다마스커스 문에서 들어가는 거리의 시장이다. 물건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거니는 사람들로 붐빈다. 생동감이 있고 흥미롭다. 이곳은 주로 아랍인이 주로 장사를 하는 것 같다. 이집트 시장에 온 것 같다. 고기 집, 채소 상인, 골동품 가게 등 우리 재래시장 골목과 흡사하다.
이 골목에서 하시미(Ha Shimi) 호텔을 발견했다. 다마스커스 게이트와 비아 돌로로사 사이의 수크 지역에 있다. 방 하나에 70 세겔 이고 취사할 수 있는 공동 취사장도 있다. 방을 2개 예약했다. 짐을 찾으러 우리가 묵었던 벤 유다 호스텔로 택시를 타고 갔다. 소형 벤츠 택시인데 느낌이 좋다. 짐을 찾아서 올 때는 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23번 버스를 타니 다마스커스 문 앞에 내려준다. 숙소에 짐을 넣고 점심을 해서 먹었다. 된장찌개, 밥 빵, 과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채소, 고기는 호텔만 나서면 널려있어서 좋았다.
다마스커스 문은 현 성문들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문이다. 영어로는"다마스커스 게이트", 히브리어로는 세겜으로 통하는 성문이라고 해서"사아르 세겜(세겜 성문)", 아랍어로는"바브엘 아무드(원주형 기둥의 성문)"라고 부른다. 로마시대에는 예루살렘의 중심 성문이었고, 이 성문에서 시온 성문까지 중심도로(카르도 막시무스)가 놓여 있었는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최근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그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오후 2시에 라이온 게이트를 통해 감람 산으로 향했다. 올리브 산은 해발 825m이다. 올리브 산과 예루살렘은 서로 상당히 인접해 있다. 성경에는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라고 하나 대략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가벼운 산책거리이다. 오늘날 이곳에는 많은 주택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산" 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 올리브 산은 한때 다윗 왕이 압살롬의 소동으로 인해 피신해 지냈던 곳이고, "속죄의 날"에는 이곳에서 번제를 드리기도 했었다. 스가랴는 이곳 올리브 산을 신현(神現)의 장소로 언급하고 있다.
다윗 왕이 예배 드린 장소이기도 하고, 솔로몬이 자신의 이방 아내들을 위해 우상에게 제사 드린 곳이다. 무엇보다도 이곳 올리브 산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두루 깊게 남겨진 곳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중요시되는 성지라고 하겠다. 예수께서 베다니 에 머무르시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오고 가실 때마다 올리브 산 고갯길을 밟으셨다. 한때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시가지를 내려다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기까지 하셨고,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보시며 말세에 대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신 곳 역시 이곳 올리브 산이다. 이 언덕을 가리켜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부른다. 이는 히브리어 갇세마님("기름틀", "착유기"란 뜻)의 희랍어 식 발음이다.
이 동산에 올리브 나무가 많고,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이 많은 하나의 공장 비슷한 곳이 있었나 보다. 이 동산은 올리브 산 서편 하단부에, 즉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성벽 바로 맞은 편으로 대략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또한 예수께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 속에서 고뇌하시며 온갖 정성을 다해 성부께 기도 드리시던 곳이요,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서 유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곳이기도 하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던 곳 역시 올리브 산 어느 부분이다. 이런 유서 깊은 곳에 기념성당 내지는 소 성당들이 자리하고 있어 오늘날 순례 객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곳으로 옮겨지고 있다.
스데반이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스데반 교회를 지난다. 조그만 다리를 건넌다. 이 계곡이 기드론 계곡이다. 기드론 계곡은 성벽 동쪽 언덕과 올리브 산 사이에 위치한 계곡이다. 우기철을 제외하고는 거의 항상 메말라 있어 주로 차도나 인도로 사용되고 있다. 우기철에는 키드론 계곡의 물과 힌놈 계곡의 물이 합쳐져서 유다 사막을 가로질러 사해로 흐른다. 키드론 계곡은 성서에서 가끔씩 언급된다. 기드론("더럽다" 는 뜻) 계곡 중 올리브 산 밑부분, 즉 무덤들이 즐비해 있는 곳을 여호사밧(하느님께서 심판하시다.) 계곡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을 바로 건너가니 마리아 무덤 교회(Tomb of the Virgin) 있다. 오래되고 어두운 느낌이 겟세마네 대성전에서 북서쪽으로 거의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희랍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정교회 소속 성전이다. 이 성전에 찾아오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우선 11세기경 성전의 유물로서 오늘날까지도 잘 보관되어 있는 마리아 무덤을 향해 내려 가는 성전 안의 50여 개나 되는 대리석으로 된 웅장한 층계들이다. 이 층계들 양 옆으로 마리아의 부모였던 요아킴과 안나의 묘가, 그리고 요셉의 묘도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층계 맨 끝 오른편에는 이른바 마리아의 무덤이었다는 곳에 빈 석관과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인 신빙성은 아주 희박하다.막달라 마리아 교회(Church of Mary Magdalene)가 있다. 지붕이 양파 모양으로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다. 겟세마네로 러시아의 여제인 막달라 마리아를 기념키 위해 세웠단다.
겟세마네 교회로 간다. 이 교회는 여러 나라 민족들의 재정적인 보조로 1919년에 짓기 시작하여 1924년에 완성된 성전이다. 그래서 이 성전은 오늘날 "여러 나라의 대성전" 만 국민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탈리아 건축가 바를루찌에 의해 설계되었다. 내부의 어둠과 별 같은 불 빛은 기도의 밤을 상징한다. 정면에는 바위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고뇌하셨던 예수님의 체취가 담긴 곳이라고 하며 또한 "고뇌의 성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성전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눈길을 끄는 것은 성전 안의 엄숙한 분위기도 분위기려니와 무엇보다도 제단 앞에 넓게 놓여진 바위, 3개의 바위는 엎드려 3번 기도했던 자리란다. 평평한 바위 하나로 보인다. 바위는 곧 예수님의 체취가 깊숙이 담긴 것이다. 고뇌 속에 온 정성을 다해 성부께 기도 드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둘레에 가시 모양 울타리가 인상적이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비잔틴 시대 성전의 바닥에 깔렸던 모자이크와 잔존해 있는 성전의 벽이다. 역사적인 고증으로서 오랜 전통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정문 기둥에 세워진 조각 상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이고, 4 개의 기둥은 성경의 4복음을 상징한다. 아주 아름답게 가꾸어진 성전 정원에는 올리브 나무들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그것들 중 여덟 그루는 예수님 생존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70년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많은 나무들을 벌목했기 때문에 그 원목은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다만 그 원뿌리가 잔존해 새싹이 났을 가능성밖에는 없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그 고목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의 눈길을 모으고 마음을 움켜 쥐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정원에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이 만들어져 있다.
좀 떨어진 곳에 동굴이 있다. 이곳이 제자들이 잠들어 있던 곳이란다. 마리아 무덤 성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좁은 길을 따라 30미터쯤 걸어가면 이 소성당에 이르게 된다. 1681년부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관리 보호하고 있는 소 성당이다. 예수께서 홀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고 하는 곳이며, 유다의 배신 행위로 인해 예수께서 유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곳이기도 하다. 이 소성당은 겟세마네 대성전과는 거의 150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이 주가 우셨던 교회다. "도미누스 플레빗" 이란 "주께서 눈물을 흐리셨다."는 뜻인데 겟세마네 대성전에서 동쪽으로 대략 3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성당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성당은 올리브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위시해서 구 시가지를 한눈에 잘 내려다보시며 한숨을 쉬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전하는 누가 복음 가록자의 보도를 더욱 생생하게 연상케 해 줄 수 있는 곳이라고 하겠다.(누가복음 19장 41절). 눈 물 모양의 교회다. 교회 마당에는 공교롭게도 닭이 한 마리 있다. 성전 내부에는 모자이크로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모습이 있었다. ‘마치 암탉이 날개 밑에 병아리를 모으듯이~, 말씀하시며 우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상을 향해 계속 올라가니 예언자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 예언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이 묻힌 장소란다. 무덤들이 산 오른 쪽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헤지르 사람 무덤, 제카리아 무덤도 있다. 혹자는 가장 오른쪽은 스가랴의 무덤이고 베란다 모양 무덤은 야고보의 무덤이라고 한다. 올리브 산 남서쪽, 좀더 정확히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 바로 건너편에는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회교도인들의 공동묘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키드론 계곡 동쪽 언덕 부분인데, 여호사밧 언덕이라고 부르고 있어 특기할 만하다. "여호사밧"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이 곳이 최후의 심판자리가 될 것이란다. 요엘서 4장 2절, 12절과의 스가랴서 14장 4절의 내용을 토대로 공동묘지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고, 또한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곳 사람들의 전설에 의하면 최후 심판 때 모두들 무덤에서 나와 선한 이들은 이 키드론 계곡을 넘어 성전(지금 회교 대 사원이 위치해 있는 곳)에 모이게 될 것이고, 악한 이들은 이 계곡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정상에 다 와서 주기도문 교회에 도착했다. "빠데르 노스떼르(Pater Noster)성전, 즉 "주의 기도" 성전에 이른다. 성전 옆에는 갈멜 수녀원이 자리하고 있다. 지하에는 예수께서 가끔 머무르시어 기도하셨고 주의 기도를 가르치셨다고 하는 그 동굴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뒤늦게야, 즉 십자군 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원래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과 최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곳으로만 여겨져 왔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주의 기도를 이곳에서 가르치셨다고 보는 이들의 근거로 마가 복음 11장 12절부터 25절까지와 누가 복음 10장 38절부터 11장 4절까지의 내용에 준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해서 326-333년에 "엘레오나"(‘올리브나무 숲’이라는 의미를 지닌 희랍어 "엘라이온"의 와전된 발음)라고 칭하는 성전이 세워졌었다.
이 성전은 예루살렘 구 시가지에 자리잡고 있는 예수 무덤, 부활 기념 성전과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탄생 기념 성전과 함께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3대 대성전이라고 불린다. 이 성전은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후 1106년 십자군 시대 때 교회가 건립되었다. 이 교회 안에는 히브리어, 희랍어, 그리고 라틴어로 주의 기도문이 적힌 대리석판이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교회도 언제 누구에 의해 파괴되었는지는 몰라도 폐허로 잔재되어 있었다. 1868년 프랑스 공주 오델리가 이 교회터를 구입해 1874-1875년에 조그마한 기념 성전과 갈멜 수녀원을 지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지하 교회 위에 자리하고 있는 기념 대성전은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 이 기념 성전은 찾아 들어오는 이들의 눈길을 크게 끄는 것은 62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붙어 있는 주의 기도문 판들이다. 그것들 가운데 부산 교구에서 기증한 우리말로 된 주의 기도문 판도 자리하고 있다.
더 올라간다. 올리브 산 정상, 즉 엘투르라고 칭하는 아랍인들의 마을이 있는 곳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회교에 속한 교회(모스크)다. 처음에는 뚜껑이 없는 교회였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슬렘이 이 자리를 소유하고 있어 지붕을 만들고 그들의 모스크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승천에 관해서는 누가 복음이 전해주고 있다. 이 교회 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남겨 놓고 가셨다는 예수님의 오른쪽 발자국이 찍힌 바윗돌이 잘 보관되어 있으나, 역사적인 신빙성은 전혀 없고, 십자군 시대의 유물로 보고 있다. 670년경 이곳에 순례 왔던 프랑스 주교 아르클프는 먼지 위에 찍힌 예수님의 발자국이 예수승천 교회 안 중앙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회교도들은 놀랍게도 예언자 예수의 승천을 경배하고 숭배하고 있어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의 기념으로서 보관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승천 축일 때만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에서 예수 승천 기념 신심 예배를 거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전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황금 돔의 모습이 제일 눈에 띄고 굳게 닫힌 황금 문이 눈 앞에 선명히 보였다. 멀리 시온 산의 교회도 눈에 들어온다. 올리브 산을 내려와 힌놈 골짜기 방향으로 걸어간다. 예루살렘 서편에 위치한 계곡으로서"게헨나(지옥 또는 죽음)계곡"이라고도 불린다. 한 때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 지역이었다. 이 계곡에서는 바알과 물록 신에게 어린 아이들을 제물로 바쳐 제사 지낸 곳이었다. 요시야 왕은 이를 금했고, 예레미야는 신랄하게 비난했다. 힌놈 계곡의 하단부 언덕에 이른바 아겔다마(사도1, 16-19)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이곳은 버림받은 채 폐허로 되어 있으며, 옛 무덤들의 흔적이 눈에 뜨인다. 압살롬 무덤이라 불리는 유적 옆에 동굴이 요사파테(아사의 아들 여호사밧) 왕의 무덤이란다. 이곳에 희랍 정교회 소속 성 오누프리우스 수도원이 위치해 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찢어지거나 사용하지 못하는 성서를 이곳에 버리러 오는 습관이 있었단다.
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힘들게 질퍽거리는 언덕을 올라 분문(Dung gate) 앞에 이르렀다. 예루살렘 시내의 모든 오물이 이 성문을 통해서 키드론 계곡에 버려졌다고 해서 영어로는 "덩 게이트", 히브리어로는"사이르 하이슈포트"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서 회교도들은"바브 엘 마가르 베헤", 즉 무어 족의 성문이라고 부른다. 이유인 즉, 16세기경 북아프리카 무어 족(회교도)이 이주하여 이곳 성문 근처에서 살았다고 해서이다. 현재의 성문은 요르단 사람들에 의해 개조된 것이다. 1948년 자파 성문이 이스라엘 군에 의해 봉쇄되자 성벽 안으로 자동차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확장해 만들어진 성문이다. 들어가니 통곡의 벽이 나타났다.
불빛 밑에서 열심히 벽을 보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검은 복장 모습의 유대인이 많이 보인다. 왠지 엄숙해 보이는 밤이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피곤하다. 미로같이 복잡한 길을 헤매다가 겨우 숙소를 찾아 들어오니 엄청 지친다. 그 분주하던 수크 거리도 어두워지니 가게 문이 모두 닫혔다. 으슥한 골목으로 변했다. 난방이 안 되는 숙소다. 춥다. 전기 난로와 담요를 몇 개 더 얻어와 덮고 잔다. 담요 blanket라는 단어를 몰라 손짓 발짓하며 카페트라고 말해 겨우 담요를 얻어온 것이다. 무식하니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