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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아산UBF 여름특강 제 6 강 메시지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
말씀 / 고린도후서 10:1~18
요절 / 고린도후서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한 인생이 새생명을 얻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도하였던 한 영혼이 살아난 것은 아름다운 열매로써 기도와 헌신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깊은 만족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것,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것, 하나님께서 영광주신 것 이것을 지향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우리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사람에게 칭찬받기 원합니다. 사람들이 높여주기 바랍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받으려는 것이 생활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말씀은 우리가 어떤 내적 투쟁을 하여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애써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께 칭찬받는 인생 되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는 로마제국 당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이어지는 교통중심지였는데, 상업과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이곳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특징은 부도덕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람’이라 하면 도덕성이 희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에 개척하고 세웠습니다. 이후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성도들의 삶이 거룩하지 않은 것이었고 내부에 분파문제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일부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바울을 과연 사도라 불러도 되는가?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은 바울의 사도 권위를 문제 삼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싸움을 하지 않음을 밝히고 고린도의 형제들도 영적인 삶을 살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애쓰도록 권면하고자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의 형제들과 함께 얼굴 대하며 지낼 때는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하였음과 멀리서 편지 할 때는 강력하고 분명하게 회개를 촉구하였던 사실을 되짚어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을 통하여서는 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하였지만, 실제로 대할 때는 예수님의 온유와 예수님의 관용을 배워서 예수님의 섬기는 자세로 고린도의 형제들을 대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대학 졸업하신 분들은 모두 학위번호가 교육부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석사학위, 박사학위 받으신 분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을 일컬어 ‘지식인’이라 합니다. 지식인은 지식인다워야 합니다. 말 하고 자기 의견을 드러낼 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지성인의 목자는 더욱 그러하여야 합니다. 지성인의 목자는 어떤 일에서든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고 무례함이 없어야 합니다. 지성인의 목자는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예수님의 너그러우심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여야 합니다.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쉽게 화내고 쉽게 토라지고 쉽게 들뜨면 본인도 사단의 시험에 들 수 있고 주님의 양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지성인의 목자로 살고자 하면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자 애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우리를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이란 바울을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비판자들을 칭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바울이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인간적인 욕심, 사업적 욕심을 동기로 사역한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워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한다. 자기가 유명해지기 위하여 일한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막상 사도 바울을 대해보면 만만하다고 보았습니다. 대해보면 화내는 일도 없고 어떤 행동을 해도 지적하지 않으며 특별히 문제삼는 것도 없었습니다. 근엄하게 위세를 보이거나 무섭게 호령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편하게 사도 바울을 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언행과 평범한 외모를 보면서 사도 바울의 사역자로써 진정성과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가서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그동안 해왔던 것과 같은 온유와 겸손을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고린도 교회에 가서 그들을 다시 만날 때, 그들에 대하여 강한 책망이나 죄악된 습성에 대한 질책을 하는 그런 상황이 생기기 않기를 원합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을 인간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돌아가 그들을 대면할 때에 책망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 중에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언제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계속 온유와 관용으로 모든 양들을 대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의 양들이 인간적인 관점을 고집하여서 책망하고 지적하고 질책하는 것을 사도 바울도 바라지 않습니다.
예전에 저의 마음에 괴로움을 지속적으로 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괴로움 주는 행동을 저에게만 했겠습니까? 그 때문에 다른 여러 사람들로부터 반복하여 공격 당하자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무례한 행동을 하면 말을 해달라’ ‘말을 해달라’ 겸손하게 자기 문제를 고치겠다는 말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무책임하고 무례한 말입니다. ‘말을 해야 내가 하는 잘못을 인지할 수 있다. 나의 무례함은 내 책임 아님!’ 이런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뼈속 깊이 파고들어 있음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모른다’는 뜻입니다. 요한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온유하게 겸손하게 말을 해주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주변사람들이 본인에 상처되지 않도록 부드럽게 많은 말을 해주어 왔지만 심각한 불이익이 생기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을 겪지 않으면, 본인이 많은 조언을 듣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타인의 인내, 타인의 용서의 열매만 먹으며 자기를 바꾸려는 노력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말을 해달라’ 이 말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하나 나 알아듣도록 알려주어야 나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뜻이지요.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이 나를 깨우치지 못하는 한 나는 무례함, 나의 잘못을 모를 것이다’ 라고 하여 미래에도 무례함은 지속될 수 있으니 그리 알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자기 잘못을 개선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해도 자기를 깨우쳐주지 않는 사람이 의무를 다하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므로 책임을 당신들에게 돌릴께요 라는 말입니다. (우리 도시 시장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도 그런 사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징계받고 심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뜻은 누구라도 회개하고 변화되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어디를 가든 평화와 생명을 전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상급을 누구든지 받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사도 바울은 우리 인생은 누구나 육신을 입고 있으며 육신이 가진 한계와 영향속에서 살아가는 실존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삶의 지향하는 것, 힘써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육신을 따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전쟁과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전쟁을 하여야 하고 영적인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영적 싸움을 싸우고 있다고 자기 입장을 밝힙니다. 말씀 전하는 말씀전파자, 예수님의 제자를 불러 양육하는 제자양성가는 기꺼이 영적 싸움을 싸워나가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사람이 인간적인 싸움을 할 수 없습니다.
4절과 5을 보십시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우리나라 해군에 세종대왕함이 있습니다. 세계적 수준의 이지스함입니다. 비행기도 공격할 수 있고 날아가는 미사일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멀리있는 큰 배도 공격할 수 있고 가까이 다가오는 작은 배, 아주 작은 보트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 공격하는 무기로 배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작은 배를 공격하는 것은 자동추적기능있는 기관포인데 이것으로 멀리 있는 큰 배를 공격하면 별 효과가 없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인간적인 무기를 사용한다면 영적 싸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무기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영적인 무기는 강력하여서 잘못된 사상, 거짓된 이론을 부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교만한 이론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각들을 무너뜨립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영적인 무기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과 사상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 예수님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최고 최우선 명령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말씀에 따라 그렇게 하였습니다.
3~5절에 걸쳐서 자기의 사역방향과 자세를 이야기한 바울은 다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권면을 이어갑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이 완전한 순종에 이를 때를 기대하고 기다리지만, 계속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합당한 징계를 주고자 한다고 경고합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는 인간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은 대머리였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쳐지지 않는 난치성 질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전에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핍박했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바울의 인간적인 허물, 인간적인 약점을 들어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이 스스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바울이 그리스도께 부르심 입은 사실을 인정하라고 촉구합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까지 의심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영적 권위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지 무너지게 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랑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므로 부끄럽거나 소인배의 과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동안 바울이 보낸 서신도 고린도의 형제들을 놀라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쓴 목적은 고린도의 형제들을 올바른 믿음위에 굳게 세우고 그리스도께 올바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고린도의 일부 신자들은 바울의 편에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대면했을 때는 약하고 말도 시원치 않다고 평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이 일관성이 없다며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는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의 말하는 것과 실제 행동은 일치함을 강조합니다.
2.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
이제 사도 바울은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사도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행태 중에서 문제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칭찬하는 것을 즐겨하였습니다. 그들의 ‘셀프칭찬’은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를 평가하고 자기가 설정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기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가기준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기준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또 한가지 기준은 ‘예수님께 자기 삶을 드리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순종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기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스스로 칭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지혜가 없도다”고 결론 짓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하며 올바른 기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평가할 줄 알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께 칭찬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13,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차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사도 바울도 자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만, 바울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범위와 한계 안에서만 하는 자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랑의 범위 안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갖은 고생을 다하며 말씀을 전파하고 먼 나라와 가까운 나라의 모든 족속에게 순종하여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한 일만 자랑하였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세운 기초 위에서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또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로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믿음이 자라 복음의 능력이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이 이룬 성과를 자기 것으로 삼아 자랑하지 않고자 하며, 고린도 교회를 넘어서 더 많은 곳,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내가 십자가를 진 것, 십자가와 고난을 감당하며 내가 배운 예수님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자랑할 것인지 나의 자랑이 뚜렷해 집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 십자가와 고난을 내면 깊이 배우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열매가 없으므로 틈만 나면 자기 자랑으로 삼을 것을 찾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져서 주어지는 성과나 다른 사람이 고난을 통하여 생겨난 좋은 일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자랑을 하면 열매맺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십자가와 고난을 배우지 못하고 손쉽게 자랑하는 것은 금새 습관과 버릇으로 자리잡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와 고난을 배우지 못한 채 남의 수고를 가지고 자랑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비밀, 열매맺는 하나님의 비결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자랑에 맛이 들려서 끊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평을 받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자랑”이란 성취나 능력, 지위를 내세워 자신을 높이려는 행동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누구든지 자기의 업적, 재산, 명예,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본문 말씀이 기록된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자신의 영적인 능력이나 인간적인 성공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성취, 육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잘못된 자랑이며 자랑하려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모든 자랑의 근원이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랑이 자기가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개인의 모든 성취나 능력, 체험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인정하고 그 은혜를 드러내어 자랑하여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자랑의 대상이 ‘나’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하였습니다(빌3:4~8).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옳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로 인하여 우리가 허물과 죄로 인한 심판받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주의 긍휼이 아니면 나는 어떤 선한 것도 없으며 선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교만해지지 않으며, 사람들이 ‘밥맛 떨어진다’, ‘비호감이다’ 하지 않게 됩니다. 겸손과 감사로 살아가니 하나님께서 더 복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역사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를 대조하며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인정은 인간의 칭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는 칭찬이 진정한 인정입니다. 사람이 사람들에게 가서 스스로 자기를 칭찬하고 높여봐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들에게 가서 자랑하다보면 큰 과오에 빠지게 되는데, 첫째는 자기 문제나 한계를 망각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적인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습니다. 인간적인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놓칩니다. 인간적인 자랑 하다가 어리석어져서 자신의 문제를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둘째는 자기 업적을 과대평가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자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과장을 보탭니다. 그리하여 점점 인격이 자기중심, 자아집착으로 타락해 갑니다. 결국 사람들에게도 교만하게 보이고 하는 말에 과장이 있는 사람, 자기를 계속 인정해달라고 바라는 부담스러운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지 못한 채, 외적인 참 열매가 없으며 인격과 존재가 추하고 어리고 무지한 수준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 그의 내면과 동기를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그의 행한 일에 담긴 진정성 있는 믿음과 헌신을 하나님께서 아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칭찬받습니다.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내면의 믿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동기의 순수함, 예수님의 방법대로 고난받고 인내를 감당하는 과정에서의 진실함, 끝까지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성있는 목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사람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으니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때,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그의 인격과 본질이 하나님 안에서 더 은혜로 나아가는데,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배우고 덧입습니다. 하나님께 받는 칭찬은 존재자체를 변화시키며 모든 관계에서도 열매를 거둡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인정받으며, 하나님께사 영적 권위를 갖게 해주십니다. 선한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더 깊은 사랑의 내면, 더 깊은 인내와 관용을 배우고 성숙함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본질적 성숙과 관계에서 좋은 영향력 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약속된 상급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주시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상급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에게 자랑을 일삼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칭찬받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을 구하며 인간적인 자랑 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충만하게 받아야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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