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義僧將 騎虛堂 靈圭大師) 발표자 박 순 규 영규대사 사적현창회장. (전)공주향교 전교
1. 영규대사의 출가와 생애 활동 2.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추모제 3.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기적비와 순의 실적비 4. 영규대사 영정각과 갑사 표충원 5. 보석사와 영규대사 6. 칠백의총 종용사 7. 그 외 의승장 영규대사 재향
임잔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은 아무런 대비가 없었고 관군은 무기력하여 왜군의 급습으로 부산성을 침탈당하고, 이어 동래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그 여세로 불과 18일 만에 한반도 반을 짓밟고, 서울 한양을 정령당하여 宣祖임금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한양을 뒤로하고 몽진(蒙塵)길에 오르자 배성들은 조정의 임금을 비롯한 관리들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들 끌었고, 관군의 무기력을 한탄하고 백성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선비 학자 농민이 분연히 의병에 참여하였고, 속세를 떠나 사찰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이 산문(山門)을 박차고 나와 우리가 나라의 은전을 입었으니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정신으로 의승병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국토회복의 발판이 되었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에서 평양을 지나 진군하였으나 의승군의 활약과 관군의 재정비와 조명연합군의 활약과 이순신장군의 해상 전에서 번번히 패하여 해로가 막혀 군수품과 군량미 조달이 차단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량미 확보를 위해 경상도, 충청도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려했으나 경상도는 곽재우 의병장이, 충청도에선 의병장 조헌과 의승장 영규대사의 사력을 다한 전투로 저지되었다. 의병장 조헌과 의승장 여규대사의 청주성 탈환은 조정과 전 백성에게 구국의 큰 희망의 활력소가 되었고, 임진왜란을 마무리 짓는데 큰 성과를 거양한 것으로 본다.
1, 영규대사의 출가와 생애 활동 1)출생과 출가 및 수도 영규대사의 호는 기허당(騎虛堂)이며, 성(姓)은 밀양 박씨 후손으로 공주 판치(板峙를 읽을 때 널티 : 판자처럼 낮은 고개), 현재의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에서 태어난 공주의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출가(出家)하여 계룡산 갑사에서 머리를 깎고, 그 뒤 당대의 고승(高僧)이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에게로 가서 가르침을 받은 고제(高弟)로 여러 명산대찰을 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갑사로 돌아왔다. 갑사로 돌아온 영규대사는 청련암(靑蓮庵)과 금산 보석사(寶石寺)에서 자리를 잡고 수도선장(修道禪杖 : 스님들이 참선할 때, 또는 졸음을 깨우는 도구)으로 학승(學僧)들에게 참선수행(參禪修行)을 지도하는 한편, 학승들의 건강을 위한 신체단련 운동과 무예(武藝)를 가르치기도 하여 각지에서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드는 젊은 학승들이 적지 않았다 한다. 당시 영규대사의 출중한 무예솜씨는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2) 의승군 모병과 활동의 성과 1592년(선조 25년)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분에 찬 영규대사는 승려들의 창의(倡義)를 독려하였지만 처음에는 승려들이 따르지 않았다. 영규대사가 3일간 통곡하니 승여들이 감복하여 따랐다. 영규대사는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자비(慈悲)와 호국(護國)의 정신인데 ‘한 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이다’외치면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로 공주 청연암에서 봉기할 때 처음은 삼백여 명을 불러 모으고서 ‘우리는 조정의 명령이 아니니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내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외치니, 전국에 흩어져 있던 승려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의승군(義僧軍) 800여명을 규합할 수 있었다.(선조실록) 임진왜난이 일어난 후 의승병을 모병한 것은 영규대사가 최초로서, 전국 곳곳에서 의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사람됨이 장건(壯健)하고 키가 보통사람의 갑절정도나 되었으며, 소년시절 호랑이를 잡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용력(勇力)이 남달랐으며, 금산의 보석사 대웅전 지붕을 뛰어 넘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자 이었으며,지략과 계책이 있고, 뛰어난 전략가로서 많은 무리를 잘 부렸다. 부족함이 없는 기량과 무예를 가다듬고 있었다.
3) 의승군 모집의 배경(李錫鱗의 난중일기에서) 첫째 한국불교가 고대로부터 호국불교의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이나 고려시대 수많은 외침 과정에서 불교가 항전의 핵심이었던 사실을 보아도 이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둘째 불교가 갖고 있는 신앙심과 함께 조직성을 들 수 있다. 엄격한 수도생활을 통해 승여들은 나름대로 사제 간을 통해 학맥과 수도도량을 중심으로 한 지연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고 종교·선종의 종파적 계통의 확립이 엄격했으며 동시에 승단 자체가 하나의 군사체계처럼 조직화되어 있었다. 셋째 조선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던 불교계와 승려가 국난을 당해 그 속에서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때 상대적으로 돌아올 보상. 즉 반대급부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넷째 승려들은 출가한 몸이라 세속에 얽매일 인연이 없으므로 전투에 임했을 때 명분만 주어지면 생사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섯째 대부분의 승려들이 비록 호신술의 차원이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사찰을 통해 전승되어 오는 많은 무예기술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관군이나 의병들보다 개인 전투능력은 탁월했던 것이 상승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4) 청주성 탈환과 금산성 전투 청주성(淸州城)을 조헌(趙憲) 의병장과 합세하여 수복했다. 청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왜군에게 빼앗긴 읍성을 조선의 의승병이 합세하여 탈환한 최초의 전투로서 전국곳곳에서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규의 800 의승군은 청주에서 15리 떨어진 안심사에 집결했다가 조헌의 부대와 함께 청주성으로 진격했다. 청주성은 왜군의 후방거점으로, 김해에서 창녕을 거처 추풍령을 넘어 경기도 용인으로 이어지지는 왜군의 우로 보급로선 이였다. 그리고 아직 발길 닿지 않은 호서의 우도와 호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였다. 의병 연합군은 8월 1일 청주성 서문 밖에 이르러 돌격해들어 갔다. 이때 영규대사가 선봉장이었다. 이때[선조실록]에 비변사 보고에 “영규대사의 군령은 바람을 일으키는 듯하고 천승군이 약진하는데 제군이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라고 했다. 왜군은 의병을 얕잡아보고 성문을 열고 나와 싸우다가 영규대사가 직접 지휘하는 승병의 용맹한 기세에 밀려 퇴각했다. 적은 조총을 앞세웠지만 의병은 병장기마저 부족했지만 지형과 수풀을 잘 이용하여 잠복하고 화살사정거리에서 포위하고 일시에 공격해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왜군은 그날 밤 성의 북문을 뚫고 죽산방향으로 도망쳤다. 마침내 다음날 아침 의병연합군은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의승군이 최초의 전투로 승전고를 울렸다. 청주 전투도 실로 의승장 영규가 지휘하고 계획한 것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영규대사는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少早川隆景)의 왜군으로부터 호남지역을 사수뿐만 아니라, 호남으로 통하는 적의 한 공격로를 차단해야만 한다는 점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금산성(金山城)에 이르러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함께 왜군과 격전 중 죽기를 맹세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선조수정시록”에서 조헌은 전라감사 권율과 충청감사 허욱과 영규가 관군과 함께 공격하자고 만류했지만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금산성 공격을 서두르다 도리 킬 수 없는 화를 불려온 것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격전 중 조헌 의병장이 전사하고, 전세가 더욱 불리해지자 영규대사에게 피신 할 것을 사람들이 권유하였으나, 영규대사는 죽으면 죽었지 어찌 혼자 살아남겠는가? 하고 크게 호통을 친 뒤 흐트러진 전력을 가다듬어 사력을 다해 계속적으로 싸우다가 전사 했고, 이들의 분전으로 왜군은 피해를 추슬러야 했기에 호남 곡창지대의 방어에 기여를 했다. 우리의 의병과 승병이 모두 전사하고 일본군 역시 피해도 막대해 시체를 옮기는 데 3일이 걸렸으며, 이후 700명의 시체들을 모아 금산에 700의총이란 무덤을 만들었다. (위치는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5호 지정했다.) 여기에 영규대사도 700의사와 함께 수절하고, 700의총에 묻히고, 종용사(從容寺)에 제향 되었다. (국사대사전) 훗날 박지원(朴趾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는 오직 승려인 영규대사 뿐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5) 임진왜란의 정황과 영규대사 상사(償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에 대한 불평세력의 관심을 돌리려고, 외국과의 전쟁 준비로 신무기 조총의 대량생산과 군사훈련을 시켜놓고, 조선을 침략할 목적으로 명나라 정벌의 길을 열러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선이 거절하자 쳐들어온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장 낸 후 호시탐탐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외쳐왔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2년 전 선조 23년(1590)3월 조선의 사절단이 일본방문길에 오르게 했는데 대표단장은 정사(正使)로 황윤길, 부단장인 부사(副使)는 김성일이 임명되어 사절단 200여명을 이끌고 다녀왔는데 주 임무는 일본과 돈독한 외교관계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동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일본서 돌아온 두 사람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침입할 것이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다른 보고를 했다. 두 사람의 정반대보고는 당시 붕당정치(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의 폐해로 말미 아마, 김성일의 애매한 태도와 발언의 세가강하여 조정은 그 뜻을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국가의 큰 참화를 초래케 했다.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를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포르투칼에서 전래된 조총을 양산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만 8,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으로 쓰시마 섬의 오우라항[大浦港]을 출항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군민과 더불어 항전했으나 전사했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그 후 18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다시 총병력 약 20여 만 명을 이끌고, 부산·동래성을 함락한 여세로 일본군은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는데, 중로(中路)는 동래-양산-청도-대구… 등, 좌로(左路)는 동래-언양-경주-영천… 등을 거쳐 조령에서 만나 충주로 향하기로 했고, 우로(右路)는 김해-성주-지례-김천-추풍령의 길을 택해 경기도로 북상했다. 우리 관군도 3로에 대한 방어전을 폈으나 실패하여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고니시는 평안도, 가토는 함경도, 구로다는 황해도로 진격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 수성 부대와 하삼도 후방지역 담당부대를 나누었다. 여러 방어전마다 실패로 일본군의 부산 상륙 이후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선조와 세자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한산도대첩 등 해전의 승리로 일본의 해상작전이 좌절되고, 육지의 곳곳에서도 유학자들과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과 의승병이 일어나 육상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을 뒤로하고 평양으로, 여기서 다시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했던 선조(宣祖)임금은, 청주성에서 영규와 의승군이 올린 승리의 소식을 듣고 영규를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에 올리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주어 비단옷(丹衣) 한 벌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왕의 상사(償賜)인 교지와 옷이 도착하기 전에 영규대사는 치열했던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비단옷은 중도에서 되돌아갔다. 이때 금산전투에서는 의병과 의승병 700인이 모두 전사해 치열했던 전황을 짐작할 수 있다. 1592년 12월 명나라는 4만 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협정에 들어갔다.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침입했으나 육지에서는 의병, 의승병과 권율·이시언의 조명연합군에 패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에게 번 번히 패하였고 마지막 노량대첩으로 일본군을 퇴각시킴으로써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났다. 현재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정려각 내에 있는 글은“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의승진위장군 영규대사지려(贈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義僧振威將軍 靈圭大師之閭)현판이 있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종2품 벼슬이며, 진위대장은 조선시대 정4품 무관벼슬이다. 영규대사에게 이런 큰 벼슬이 주어졌다는 것은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정려각 옆에는 순조 13년(1813)에 세운 의병승장영규지려(義兵僧將靈圭之閭)라 적은 빗돌과 최근에 세운 하마비가 있다. 중수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승(僧)과 속(俗) 모두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영규대사께서 조국의 위기에 도피하지 않고 뜻을 모아 승군을 움직인 그의 용기가 보석사(寶石寺) 한 구석에 조용히 남아 있다. ※의병승장영규대사지여(義兵僧將靈圭大師之閭) 비(碑)의 안내판 내용
6) 의승장 영규대사에 대하여 전해오는 전설적인 실상(實狀) 금산성(금산성에서 10리 떨어진 延昆坪전투)에서 대다수의 의병과 의승병 들이 전사하였으나 왜군도 많은 희생자를 내고 영남으로 후퇴하여 이후 곡창지대인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청주성 전투에서 왜적을 괴멸시키는 전공을 세웠으나 금산 전투에서 1만5천여 왜적과 싸우다 영규대사와 의승병, 조헌의 의병 모두가 혈투 속에서 전멸하는 비운의 전장에서, 의승장 영규대사는 복부를 적봉에 맞아 창자에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죽은 줄만 알고 있던 영규대사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면서 일어나, 한손으로는 끊어진 창자를 움켜쥐고 또 한손으로는 병기를 잡고, 공주로 가서 재기할 뜻으로 60 리를 걸어 초포천(草浦川)을 건너 올 때 빗물로 냇물이 창일(漲溢)하여 복부의 상처에까지 물이 스며들어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몸을 이끌고 그의 고향인 공주감사한테 지원병을 요청키 위해 온갖 힘을 내어 오다가, 현재의 충남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정려각”이 서있는 곳인 고개 직전에서 쓰러져 목숨을 거두었다.(일설에 넘지 못한 고개인 “못넘이 고개”라 부르다가 지금은 “무네미 고개”라 불러지는 유래가 되었다는 설도 있음) 갑사의 승려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7) 묘역과 묘비 영규대사의 묘소가 있는 곳은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를 뒤로 하고 언덕을 올라 묘에 다다르면 최근 새로이 정화한 영규대사의 묘에 닿게 된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버들미)(산 5번지) 마을회관을 기준으로 서남쪽 해발 150m 산록(山麓) 경사면을 깎아 만든 묘소로 봉분높이 3m, 둘레는 23m이고, 그의 묘를 두르는 화강암 둘레석에 양각한 연화문(蓮花紋)과 불상(佛像)들이 각각 새겨져 있어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암시할 수 있으며, 1977년 1월 6일 충청남도 기념물 15호로 지정되어 현재 보호관리 되고 있으며 처음 묘의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묘소 앞에 “의병승장군영규지묘”(義兵僧將軍靈圭之墓)비 뒷면에 숭정후삼경오사월일입칠대방계박경진경태봉사(崇禎後三庚午四月日立七代傍系朴景震景兌奉祀)라 기록되어 있다. 숭정삼경오년은[순조 10년(1810)]4월에 7대 방계인 박경진과 박경태가 세웠다.“忠孝登錄”에 관찰사로 하여금 무덤을 고쳐 쌓고, 묘 옆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義兵靈圭之墓”라고 적도록 하였다.(1720) 상석 정면 쪽에 큰비가 세워 졌는데 전면에 “의승장기허당영규대선사지묘(義僧將騎虛堂靈圭大禪師之墓) 뒷면에는 ”숭정기원후계유오월(崇禎紀元後癸酉五月)“이라 씌어 있다.
2. 의승장기허당영규대사추모제(義僧將騎虛堂靈圭大師追慕祭) 1) 영규대사 영정각(影幀閣) 제향 매년 9월 25일 영규대사 영정각에서 영규대사 사적헌창회(靈圭大師 事蹟顯彰會)주관으로 관내 사찰의 주지스님과 스님, 공주시장을 비롯한 각계각층 기관장과 계룡면장님을 비롯한 지역 유지와, 계룡초등학생 수십 명 등 계룡면 유평리 부락주민이 함께 추모제를 올린다. 영정각 관리, 묘소관리, 추모제 제수준비는 공주시장, 마곡사주지, 갑사주지, 신원사주지, 원효사주지, 계룡면장과 지역 기관장 및 유지와 유평리 이장과 동민, 부녀회장과 회원 등, 여러분의 물심양면의 협조와 봉사로 추진한다.
(1) 제향 순서 : 불교의식 (독경) → 유가식 제향 → 헌화
2) 갑사(甲寺)의 기허당영규대선사대제(騎虛堂靈圭大禪師大祭) 공주 계룡산의 명승대찰이자 영규대사가 생전 머물러 수행을 하던 곳 갑사에서는 매년 “기허당영규대선사대제(騎虛堂靈圭大禪師大祭)”가 열린다. 위패봉안과 화엄시식, 추모사,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 되는 영규대제는 영규대사와 그와 함께 순국한 승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이다. 영규대제가 열리는 시기는 일 년 중 갑사가 가장 아름다운 가을철인 10월 하순경에 열리며, 연계행사로 불가의 행사로는 숲 속에서 펼쳐지는 산사음악회(山寺音樂會)를 비롯해 반야심경 사경법회, 탁본전시회, 시화전 등이 대제를 전후하여 다채롭게 열린다.
3.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기적비와 순위 실적비
1) 義僧將 騎虛堂 靈圭大師 紀蹟碑竝序國譯 1965년 11월 20일 창립총회로 비롯된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사적현창회사업을 고찰컨대 당대 대석학이요 문장가인 담원(薝園)(爲當) 정인보(鄭寅普) 선생 찬(撰), 노림부장관을 역임하신 정낙훈(鄭樂勳)선생의 서(書)에 동덕여자대학장인 조용욱(趙容郁)선생의 국역비문을 제시하니 위대한 애국의 충의정신과 금석문(金石文)에 표천(表闡) 된 영규대사님과 문열공(文烈公) 조헌 선생간의 대의(大義)! 그리고 임진왜난 오대(五大) 대첩(大捷)중 이대(二大) 대첩의 주역(主役)으로 청주성 탈환하여 임진왜란을 승리의 기틀을 마련, 전사(戰史)에 기리 빛날 신인(神人)에 가까운 육박전으로 왜(倭)의 대군을 격파하여, 곡창 호남을 수호한 것은 역대(歷代)드문 호국불교의 정신과 유불(儒彿)의 융합된 이 위대한 대사님의 충의(忠義)를 기리고 현창(顯彰)하여, 후손 대대(代代)로 일깨워 주는 사업인 동(同) 기적비(紀蹟碑)인 현창비(顯彰碑)가 1973년 11월 21일 수립(竪立)되고 1974년 5월 18일 제막(除幕)케 되었는데 참여 인사로는 (1)국회의원 23명 (2)중앙정부장관 및 서울인사 15명 (3)대전 · 공주 지방 인사 65명이 당시 금 1,451,000원을 출연(出捐)하여 갑사(甲寺) 표충원(表忠院)에 의연(毅然)히 수립(竪立)되었고, 이어 묘소가 있는 유평리에 영규대사영정각(靈圭大師影幀閣)을 총사업비 11,034만원을 들여 1995년 4. 11. 기공(起工), 1996. 11. 20. 준공(竣工)하고 해마다 (양력)9월 25일에 추모제(追慕祭)를 거행하고 있다.
2)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 “義僧將 騎虛堂 靈圭大師 殉義實蹟碑”비문 의 일부분 조선조 선조 때 임진란의 참상을 어찌 형언하리요, 당시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삼남이 연함 됨에 어가는 의주로 파천되고 국가는 거의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 불문에서 의병을 일으킨 분들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을 규합하고 지휘한 청허(淸虛)와 그리고 관동의 유정(惟政)과 관서의 의엄(義嚴)과 호남의 뢰묵(雷默)이었으며 또 한분이 있었으니 이분이 바로 호서에서 거의한 기허당 영규대사이었다. 대사는 일찍이 계룡산에 입산 출가하였고 후에 청허의 문하에서 불교의 진제를 전수하였으며 대사의 외모가 질박하고 노둔 한듯하여 어질고 지혜로움을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기략병법의 포부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나 무환만은 홀로 그것을 알아 기중히 여겼다 . 선장으로 무예를 익힌 대사는 왜구의 침보를 듣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삼일동안을 통곡하고 제승을 사문에 회집하여 궐기격적하기를 서약하였고 그들을 인솔하여 출정하였다 . 문열공 조헌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이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격하여 드디어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금산에서 왜군이 곡장 호남으로 진격하려 하는데 이를 막고자 두 의병이 혈투로 항전하다가 전사 700의총에 뭍이다. 이하생약. 이비는 공주군과 사암연합회가 1994년에 건립하였는데 긍암(兢庵) 김연뢰(金淵雷)선생이 찬(撰)하고, 공주대 韓相珏 敎授 校閱하고, 사문(沙門) 석일화(釋一華) 쓰다.
4. 영규대사영정각과 갑사 표충원 1) 영규대사영정각 영규대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분향(焚香) 참배(參拜)와 제향(祭享)을 올리는 곳“규대영사영정각(靈圭大師影幀閣)”은 앞면 3칸 옆면3칸의 겹처마 팔자지붕이며 앞면 1칸은 퇴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영정각 뒤 에는,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가 있다.
2) 공주 갑사 표충원(公州 甲寺 表忠院) 공주 갑사 표충원은 충남 공주시 계룡면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로 1984년 5월 17일 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표충원은 승병장(僧兵將)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영조 14년(1738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격퇴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전각이다. (갑사 표충원과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기적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자연석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써서 세운 맞배 건물이다. 앞면 3칸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으며 양옆에는 판벽을 설치하였다. 갑사 경내 좌측 편으로 조금 언덕진 곳에 자연석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기적비와 일곽(一廓)을 형성하고 있다. 의승장 영규대사 천지가 유림되는 임진왜란 말발굽에 칡넝쿨 마디마디 의병꽃 피어나고 풀잎도 날세워 싸움터로 향할 때 장삼을 방패삼아 낫들고 일어나서 빗발치는 조총알을 몸으로 막으시며 부러진 낫끝으로 청주성 탈환하신 거룩하신 대사님시여! 여기! 그날의 함성모아 님곁에 묻습니다 (갑사 표충원 왼쪽 문에 부착한 문장) 5. 보석사(寶石寺)와 영규대사 금산군 진악산(進樂山) 남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보석사는 한때는 호남의 수많은 말사(末寺)를 거느린 31개 본사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천년을 한 결 같이 제 자리를 지키는 은행나무와 함께 승병장 영규대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일주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의병승장비’. 충남 문화재자료 제 23호인 의병승장비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와 의병장 중봉(重峰) 조헌(趙憲) 선생의 충혼(忠魂)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졌다. 보석사(寶石寺) 대웅전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의선각(義旋閣)은 영규대사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공주 계룡산의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도를 닦았다고 한다. 영규대사는 금산 700의총(사적 제105호) 종용사(從容祠)에도 배향되었으며, 뒤에 금산 진악산 기슬에 그의 영정을 안치한 영정각과 순절사적비를 세웠다.
6) 칠배의총 종용사(從容祠) “칠배의총 종용사”는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영혼위패를 봉안한 곳인 데 위패 수는 21위인 데 이름이 드러난 조헌선생과 영규대사 등 여러분 이외에 사졸(士卒), 의사(義士)의 위패가 있는데, 사졸과 의사는 많은 수의 영혼을 위패에 봉안하였으므로 정확한 위령(慰靈)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1647년 유림에 의해 사당이 건립되었고, 1663년 현종 때 종용사(從容祠)라 사액(賜額)되었다. 1940년 일제에 의해 항일 유적이라고 훼철되었다가 1952년 주민의 성금으로 사당이 복원되고, 1971년 재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향은 임진년 음력 8월 18일 순절한 날에 해당하는 양력 9월 23일로 정하고 위령제를 올린다.
7. 그 외 의승장 영규대사 제향
1) 금산 보석사(寶石寺) 조인영(趙寅永)이 1839년에 지은 ‘영규대사 순의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산 종용사(從容祠)에 조공(趙公)의 신위를 모시고, 대사(大師)도 제사 드리고 있었는데, 200여년 뒤 을미년(현종 원년)에 법 문도인 대인(大仁)이 금산남쪽 진락산(進樂山) 서쪽 기슬에 전각을 세우고 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편액(扁額)을 의선각(毅禪閣)이라하고 이후 비석을 세우고 향화(香火)로 공양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의선각에 영규대사의 진영을 모시고 제향 했음을 알 수 있다. 보석사는 영정을 모신 기허당을 새로 조성(2014. 10. 18.)하고 영규대사 추모법회를 개최하였다.
2) 금산 종용사 [중봉집 부록] 금산 북쪽 10리 떨어진 곳에서 순절, 그 곳에 순정 갑술년(1634) 군수 김성발(金聲發)이 찰방(察訪) 조평(趙平)과 상의 단을 세우고 제사지냈는데, 유생 이유부(李惟孚)등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악천우 중 제향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원을 짓고 강당과 재사와 주방과 창고 등을 가추고 따로 묘당을 지어 영규를 제향 했다. 현종 계묘년(1663) 종용사(從容祠)라 사액했다. [송시열[1607~1680, 을미(乙未)[1655] [義壇堂齋記] 1634년 순의단을 세워 제향지낼 때 영규대사를 따로 낮은 단을 만들었으며 사원을 만들어 사원 내 제향을 지낼 때도 승려인 영규대사를 아랫단에 배치하여 사대부와 승려의 신분을 차별했다. 영조 48년(1772) 1월에 의승 영규 등 7백 의총에 본관으로 하여금 전례(典禮)에 의거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라.‘했다. 현종 5년(1839)진락산 보석사에 세운 영규대사순의비 내용에 ‘종용사가 있는데 조공(趙公)을 제향하고 영규를 배향했다. 그런 기록으로 보아 계속 제향사실을 알 수 있다. 고종8년(1871)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종용사도 훼철(毁撤)되었다. 그러나 사림에서 공주와 금산등지에서 훼철 후에도 기허당을 받들어 제사지냈다. 일제 강점기 1940년 항일정신을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700의총과 종용사를 헐어버렸다. 해방 후 1952년 유림들과 주민들이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의총을 다시 보수하고 종용사와 조각난 비편을 모아 세우고 제향을 올리기 시작 해오다가 1976년 금산 700의총 일대를 보수 정화하는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임진년(1592)8월 18일에 해당하는 양력9월 23일에 국가적 규모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3) 옥천 가산사(佳山寺)) 숙종 원년(1675)에 기허당 영규대사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면서 가산사를 호국불교사찰로 지정하는 동시에 중봉 조헌선생과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했으니 당연히 제향을 했을 것이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 영규대사와 조헌선생의 영정을 강탈해 가버려 위패만을 모시고 제향하다가 최근 영규대사 영정을 조성하고 가산사에서도 2001년부터 영규대사 입적일 음력 8월 18일에 불교의식으로 기허당 영규대사와 중봉 조헌선생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4) 밀양 표충사(表忠祠) 처음에는 유정(惟政)만 제향하다가 사당을 고쳐 지으면서 휴정(休靜)을 합향(合享)했고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면서 다시 영규대사를 합향했다. 고종8년(1871)대원군의 사원철폐령으로 밀양 표충사도 철폐하기에 이른다. 고종 8년 3월 18일에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사람이외의 서원에 대해서는 전부 제사지내는 것을 구만 두도록 하라(武廟從享人以外書院竝爲撤享)’는 명령에 따라 이틀 뒤인 3월 20일에 대원군 심복인 예판 조병창(趙秉昌)으로 하여금, 실로 백세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개 서원의 서원별단을 올리게 하여, 전국 47개 사액서원만 남기고 모두 훼철했다. 표충서원이 훼철 된지 13년 후 고종 20년(1883)표충사 승려 포허찬명(浦虛璨溟)이 공주와 금산 등지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훼철 후에도 기허당을 받들어 예의를 봉행하는 것을 보았다. 그 가 밀양으로 돌아와 사림에게 설명하고 부사 권인국(權仁國)에게 알리자 개탄하면서 향리인의 자문을 구하고 의논 후 이듬해 1884년 봄에 향례를 다시 설치했다.
5) 합천 해인사 홍제암(弘濟庵) 1731년 영규가 지은 영자전상양기(影子殿上樑記)에 유정의 입실제자 혜구(慧球)가 1614년(甲寅)에 지었고, 순치(順治) 13년 (1656)에 중수했다. 유정의 영정을 봉안했기에 영자전(影子殿)이라 했으며, 유정의 호를 따서 홍제암(弘濟庵)이라 한다. 해인사에는 광해 2년(1610)에 유정이 해인사에서 입적하자 표충사를 짓고 휴정 • 유정과 영규를 향사했으며, 현종 15년(1674)에 사액되었다. 영조14년(1736)에“表忠”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토지 5결(結)을 받아 향화(香火)의 밑천으로 해왔다고 했다. 훗날 첩설(疊設)을 금지하면서 밀양 표충사와 중복된다하여 1739년 6월에 훼철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