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수학으로 분석한 고구려의 장안성
- 서안에서 5100여리,압록수 동남쪽1000여리에 위치한 장안성-
□ 창의적인 교육과 인간의식, 그리고 정치개혁
자고로 학문이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역사학이라는 것도 수학과 과학이 전제되야 분석되고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란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주입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게 하는 창의력을 개발하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교육이 바로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게 만드는 창의적인 교육이다. 그러한 교육에서 자란 아이는 성장하여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과학과 철학과 역사학을 주도하는 위대한 인물들로 성장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교육방식이 본래 우리 민족의 교육방식이였음을 안다면 교육제도를 전면 바꾸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말했다."인간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이다. 깊이 사유하는 국민속에서 위대한 정치가와 경제가와 철학가와 역사가와 문학가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깊이 파고 드는 것을 거부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국민들은 식민지로 전락하기 쉽고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 가는데 익숙할 수 밖에 없다.
암기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식민지 교육이라면 창의적인 교육은 선진적이고 자주적인 국가의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날조하고 왜곡하는 행위를 바로 인식하고 폭로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힘 또한 국민의 인식론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정치가 잘못 나가고 정치인이 잘못 나가는 것을 감지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힘 또한 국민의 올바른 인식론에서 가능한 일이다.
예컨대 정치개혁을 외치는 국민들도 지금의 한국정치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국민들이 몇이나 될까? 어떤 정치인이 그럴듯한 이슈를 들고 나오면 환호하고 순간 지지하고 대통령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고 난 후에 변질되는 모습을 보면 절망하는 상황이 한국정치의 현 주소인 것이다. 아무리 개혁을 내세우고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말을 해도 실제로 그러한 정치인들은 별로 없다. 말이 난무하는 정치인 것이다. 고난과 투쟁으로 정치인생을 살아 온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은 그래서 진심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현재 한국정치가 변하려면 먼저 선거법과 정당법부터 바꾸는 급선무이다. 선거법과 정당법 개정을 통하여 모든 정당들을 법적으로 민주화시켜 버리는 일이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과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어도 출마할 수 없는 정치상황에서 정치개혁이란 빚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돈이 없어도 유능한 정치인들이 정치할 수 있는 정치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정치개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당원들이 주인이라면서 정당의 권력을 장악하면 당원들을 물로 보는 정당체제, 당원들이 들러리 서는 정당체제를 정당법 개정으로 강제적으로 바꾸어 줘야 한다. 즉, <모든 정당은 당원들에게 정당조직을 구성할 선출권과 선거출마자를 결정할 공천권을 부여하도록 각 정당 당헌에 명시하고 반드시 이행한다. 이행하지 않는 정당은 정당법에 의거하여 정당승인을 하지 않는다.>로 개정하는 일이다. 이렇게 선거법과 정당법을 개정하여 정치와 정당을 국민과 당원들에게 돌려 줘야 한다는 정치세력이야 말로 진정한 국민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에 따른 국민의 정치의식 또한 성숙해져야함은 물론이다.
□ 역사와 수학 - 고구려 장안성은 어디인가
고구려 말기 고구려 수도성을 장안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장안성하면 당나라의 수도성 이름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자칭 장안성이라 부른 배경에는 고구려의 역사자체가 해모수로부터 시작하면 900년이요, 고추모로부터 시작하면 700년의 역사이기 때문에 당시 천하의 중심이라고 내세우는 당나라 장안성은 인정할 수 없다는 고구려 중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광개토태왕을 17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추모부터 출발하면 12세손임에도 불구하고 17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배경에는 고추모의 할아버지되는 해모수의 부여로 부터 고구려가 시작한다는 의미이고, 해모수의 고향이 고리국이기 때문이다. 즉, 고리는 코리,고려로 고구려의 공식 국호이기도 하다. 고리국은 단군조선 당시 단군조선의 태자들이나 친척들이 다스리는 봉후국의 하나로 초대 단군천황의 차남인 부소태자가 1대 왕으로 임명된 나라로 지금의 요하상류 지역에 위치했다. 요나라 당시 수도인 임황지역이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해 온 고서들을 일제시대 계연수가 홍범도.신채호 선생의 도움으로 하나의 책으로 묶은 [환단고기-대진국본기]에서는 고리국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달 16일 3신1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의 땅이다...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그러니까 서압록수 지역 임황에 고리국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거란족이 세운 나라가 요나라인데,거란족이 활동지역이 요하지역이 되다 보니 요하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고, 지금의 요하는 [환단고기]의 기록내용대로 고대에는 압록수라고 했다. 지금의 요하인 압록수를 중심으로 요하서쪽의 강은 서압록수가 되고, 동쪽의 강인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수가 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만주와 한반도를 가르는 동압록수를 압록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고구려 말기 장안성에 대한 문헌 기록들을 보자.
"고구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한다...진나라 의희(A.D 405~418년) 후 장수왕은 (요양의)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지금의 요하) 동남 1,000여리에 있는 평양성(북한 평양성)은 전에 (장수왕이 기거하던 요양의) 평양성이 아니다."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晉 義熙 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元史地里志 東寧路]
<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京師>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후한) 낙랑군의 옛 땅이다. 경사(즉,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고구려 영토는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장안과 낙양까지의 거리는 950리다. 낙양 + 평양 = 5000리라고 하였으므로 장안 + 낙양 + 평양 = 5950리다. 즉, 구당서.신당서는 장안에서 고구려 평양성까지 5100리라고 하였고, 후한서 군국지는 5950리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실지 거리를 수학적으로 측정해 보면 정확히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학은 수학이고 과학이 전제되야 객관적으로 분석되고 이해된다는 의미다.
위 문헌들의 기록들을 정리해 보면 고대 압록수는 지금의 요하이고, 고구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 불렀으며, 당나라 수도 서안에서 고구려 평양성까지는 5100여리 혹은 5950여리라는 것이다. 고구려 평양성은 한나라(후한) 낙랑군의 옛땅이다. 그런데, 구당서 기록에서 백제.신라의 위치를 고구려 중심으로 보니 현재 한반도지역이고 고구려말기가 분명하다.
고구려 평원태왕이전까지는 요양을 평양성으로 삼고 있었다. 즉 고구려 장수태왕 당시 평양성 관련 문헌기록내용을 보자면,「장수왕(長壽王) 15년(A.D 427년)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十五年移都平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곳은 요의 동경(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遼史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북위 A.D 423-452년 때면 고구려 장수태왕 시기다. 장수태왕 시기 고구려 평양성은 요양이였다는 기록이다.
고구려말기 고구려.백제.신라 3국 영역도 - 지나대륙은 수.당나라에 의해 통일된 상황이다
고구려 말기는 당나라에게 장수태왕 당시 평양성인 요양을 빼앗기고 요하지역을 경계로 동서3100리, 남북200리에 불과한 만주와 한반도북부지역을 영역으로 삼고 있었고, 백제 또한 동성왕이후 지나대륙의 담로지역을 완전히 상실하고 한반도 서남해지역과 일본열도(왜)을 영역으로 삼고 있었고, 신라의 경우 경상도와 강원도지역을 영역으로 삼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멸망당하기 직전의 고구려 말기의 고구려 평양성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대응한다면서 문헌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의하여 고구려 말기 평양성을 당나라 수도인 서안에다 설정하고 지나대륙이 모두 고구려 땅이였는 식으로 과대포장하는 엉터리 대륙사관론자들의 주장은 주관적 관념론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고로 국수주의적 차원의 민족사 전개 또한 역사를 날조하는 폐해를 가져온다는 점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제 거리를 측정해 볼 차례다.
가운데 원 지역이 환민족의 환문명권이며, 고대 단군3조선(마.번.진조선)연방국가의 영역이다-
단군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다물(담로)정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고구려.백제가 고집했던 영역이다
1)[원사 지리지]고대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이니까 압록수 동남쪽 1,000여리면 북한 평양성이 딱 들어 맞는다. -
빨강색
2)[구당서]에 고구려말기 장안성(북한 평양성)은 서안에서 5,100여리에 위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딱 들어 맞는다-노란색
고로 식민사관이고 동북공정이고 엉터리 대륙사관이고 역사를 날조.왜곡.과장하려는 자들은 대중의 정신을 공허하고 황폐하게 만드는 지능적인 공갈사기범들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말기 북한 평양성(장안성)의 구조도-사방 둘레 23km의 세계최대규모의 성곽도시
북한 평양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 안악궁 조감도-얼마나 크고 웅장한 궁궐인가!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와 전투에서 전사한 성이고 광개토태왕이 신라의 군대요청에 5만을 지원해 성이 하평양.남평양으로 기록된 북한 평양성이다.평원태왕 시절42년에 거쳐 축조된 북한 평양성은 23키로 달하는 20여만명이 거주했던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성으로 고구려말기 수도성이였다.평양시 대성산(大城山) 남쪽 기슭에 안악궁터가 남아 있다.
안학궁의 규모와 구조는 1957년부터 이루어진 안학궁터에 대한 발굴작업으로 그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안학궁은 궁성의 한변의 길이가 622m이고 면적이 약 10만 여평이나 되는 3국의 궁성가운데 단연 으뜸을 자랑한다 두꺼운 성벽으로 네모나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궁성 한 변의 길이는 622m에 이르고, 둘레는 2,488m, 넓이는 약 38만㎡에 달한다. 궁궐터는 남궁·중궁·서궁·동궁·북궁 의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 거기서 모두 52채의 궁전터가 발견되었다. 중궁 가운데 제1호 궁전터는 앞면 길이가 90.5m, 옆면 너비가 33m, 궁전의 크기는 앞면이 87m, 옆면이 27m나 되는 매우 장대한 건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서 쌓았으며, 성벽 밑부분은 평균 너비 8.8m로 안팎에 일정 높이까지 돌을 쌓고 그 안에 진흙을 다져 넣었다. 성벽 네 모서리에는 각루를 세우고, 궁성의 문은 남쪽에 남문을 비롯하여 남서문ㆍ남동문의 세 대문이 있었으며, 동·서·북쪽에도 각각 하나의 대문이 있었다. 그리고 궁성 동서쪽 성벽 밖으로는 해자(垓字)가 있었다. 또 궁성에는 큰 궁전 등과 회랑, 인공적으로 만든 동산과 호수도 있었다.
이 궁성은 약 35cm의 고구려자[尺]를 사용하여 설계, 건립되었는데, 5세기 무렵의 고구려 건축술을 전해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대성산성을 중심으로 1000기의 고구려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모두 52개의 집자리가 드러났는데 정전은 모두 2층 누각 형식으로 된 목조 건축물로 추정된다. 그 외에 수많은 와당 조각과 귀면, 치미 등이 출토되었다. 장엄한 안학궁의 위용은 고구려 지배층의 현세에서의 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이들은 살아서의 영광을 죽어서도 지속하기를 바랐고, 죽어서의 생활공간인 무덤 안에 이를 재현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