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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사찰제보 스크랩 1400년 전 백제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부여Ⅰ편(무량사)
靑光 추천 0 조회 149 13.12.24 15: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백제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부여Ⅰ편) ▶

천년의 세월을 이어 온 고찰! 무량사(無量寺)

 

2008년 6월12일~13일 1박2일간 삼국시대의 옛 수도였던 신라의 경주 탐방, 2010년 6월17일 백제의 공주(옹진) 공산성과 예산의 임존성 탐방에 이어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사비)를 찾아 1400여년 전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1박 2일이란 짧은 시간 내에 넓은 부여군 전역에 흩어져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지와 문화재 그리고 사적지들을 전부 돌아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사전에 탐방 가능한 곳을 미리 정하고 백제 역사 여행을 시작하였다.

부소산성, 가림성 등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적지,

무량사와 대조사, 정림사지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나 옛 절터,

그리고 백제 무왕의 별궁 연못으로 추정되는 궁남지 등을 찾아 이번 옛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부여)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이번에 탐방한 유적지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탐방한 유적지에서 아쉽게 놓쳐버린 것이나, 짧은 일정으로 찾지 못한 유적지는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 방문을 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로 하고, 탐방기를 유적지 별로 정리하여 총 5편으로 나누어 작성을 해 보기로 한다.

 

-  Ⅰ편 <천년의 세월을 이어 온 고찰! 무량사(無量寺)>

-  Ⅱ편 <부여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객사와 관청! 홍산현 객사(鴻山縣 客舍)와 관아(官衙), 부여객사(扶餘客舍) 와 동헌(東軒)>

-  Ⅲ편 <사비성의 외곽 방어성인 금강 하류의 가림성(加林城)과 거대한 미륵석불의 대조사(大鳥寺)>

-  Ⅳ편 <왕실 별궁 연못인 궁남지와 사비시대 중심 사찰이었던 정림사지!>

-  Ⅴ편 <수도 사비의 중심 산성으로 백제 멸망의 비운의 장소! 부소산성(扶蘇山城)>

 

【 일 정 표 】2012년 9월 8일(토)-9일(일) 1박2일

                             ◈ 첫째날(9/8) : 무량사(외산면)-홍산현객사&관아(홍산면)-대조사&가림성(임천면)-궁남지(부여읍)-정림사지(부여읍)

                             ◈ 둘째날(9/9) : 부소산성&고란사-부여객사&동헌

 

【 무량사(無量寺)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 무량사 안내도

 

 

 

                 ▲ 무량사 일주문(사진 上)

                     일주문의 편액(사진 中)

                     일주문의 기둥(사진 下左)과 '광명문'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 후면(사진 下右)

 

                 ▲ 무량사 일주문 지나 경내로 들어가는 길(사진 左)과 무량사 입구의 계곡(사진 右)

 

통일신라사대 문성왕(재위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신라 말기의 고승 무염이 일시 머물렀고, 고려 초기에 대중창하여 대웅전, 극락전, 천불전, 응진전, 명부전 등의 불전과 30여동의 요사와 12 암자가 있었다.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모두 불 타 소실되고 조선 인조(1623~1649) 때 진묵선사에 의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고,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선사가 아미타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서 마시면서 도도한 시심을 펼쳤던 사찰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동양 최대의 좌불상인 보물 제1565호인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봉안하고 있는 보물 제356호인 극락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9호인 명부전, 향토유적 제70호인 영산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 무량사 범종각(사진 左)과 영산전(사진 右)

 

그리고 중요 문화재로는 극락전 앞에 일렬로 배치된 보물 제233호인 무량사 석등, 보물 제185호인 무량사 오층석탑, 천왕문 앞 우측 담장 아래 위치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무량사 당간지주, 보물 제1497호인 김시습 초상, 보물 제1265호인 무량사 미륵불괘불탱 등이 있다.

무량사 주차장 직전 좌측으로 약 15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부속 암자인 무진암 입구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인 김시습 부도가 있다.

김시습이 성종24년(1493) 이곳에서 죽자 승려들이 그의 영각을 절 곁에 짓고 초상을 봉안하였으며, 그 뒤에 부여읍의 선비들이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학궁 곁에 사당을 짓고 청일사라 이름하고 그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이 밖에도 무량사에서는 조선시대에 상당수의 경판이 간행되었는데, 연산군4년(1498) '법계성풍수륙승회수제의궤'를, 중종17년(1522) '몽산화상육도보설'을, 1470년에서 1494년 사이에는 '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하였다.

 

 

                 ▲ 무량사 천왕문(사진 上)

                     천왕문을 통해 본 무량사 경내(사진 下)

 

【 무량사의 문화재들 】

♧ 부여 무량사 극락전(扶餘 無量寺 極樂殿) 

*보물 제356호(지정일:1963년01월21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무량로 203)

 

 

 

 

무량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2층 불전으로 무량사의 중심 건물이다.

외관상으로 보면 중층 건물이나 내부는 상하층의 구분없이 하나로 통해 있다. 하층은 정면 5칸(17.14m), 측면 4칸(12.23m)이며, 상층은 정면 3칸(12.23m), 측면 2칸(7.34m)의 중층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사방 주위에 1칸의 외둘레칸을 통하게 하였고, 그 안쪽에 3칸 x 4칸의 평면을 지어 고주를 돌려 세웠다.

상층은 하층에 세운 고주가 그대로 연장되어 사면의 벽기둥을 이루게 되어 있다. 원래는 얼마되지 않는 낮은 벽면에 빛을 받아 들이기 위하여 창문을 설치했었는데 지금은 나무판으로 막아두었다.

공포는 하층이 내외가 3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4출목이어서 하나의 출목 수가 많은 셈이다. 공포의 세부적 특징은 제일 위에 위치한 쇠서 받침을 초화형으로 바꾸어 조각한 점인데, 이러한 장식적 수법은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내부에도 역시 장식적 변형이 진행되어, 살미첨차는 모두 하나의 장식판처럼 연결되어 운궁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좌고 16자, 가슴둘레 24자의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하고, 좌우 협시불로 각 좌고가 16자에 가슴둘레가 18자인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인 보물 제1565호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모시고 있는 이 불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수한 건물이다.

 

♧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扶餘 無量寺 塑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565호(지정일:2008년06월27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무량로 203)

2002년 1월 1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인조11년(1633) 무렵 제작되어 중층으로 이루어진 극락전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데,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삼존상은 아미타, 관음, 대세지라는 분명한 아미타삼존을 보여주고 있고, 이미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17세기 전반기 대형불상에서 삼신 또는 삼세불상이 결합된 삼존형식이 대부분인 가운데, 극락전의 주존으로 아미타, 관음, 대세지보살이 결합된 삼존도상의 드문 예로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불신의 전체적인 모습이 도식적으로 단순화된 감이 있으나 양대 전란이후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불교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본불인 아미타불이 높이 5.5m에 이르는 대형으로 현존하는 조선 중기 불상 가운데 충청도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장중함이 돋보이는 불상이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상,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이 있는데 모두 전체적으로 당당한 체구와 넓은 무릎이 균형잡힌 불상이다.

 

 

♧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扶餘 無量寺 五層石塔) 

*보물 제185호(지정일:1963년01월21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무량로 203)

 

 

극락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높이 7.5m, 하기단 너비 5.2m, 2중의 기단 위에 세워진 웅장한 모습의 오층 사각 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하층 기단은 파묻혀 있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갑석은 규칙성도 없이 다수의 석재로 짰고 상면은 완만하게 경사져 있다. 이에 비하여 상층 기단의 짜임새는 규칙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중석은 4우주와 각 면 탱주는 모두 다른 돌이고, 각 면 면석은 2장씩 세워서 구성하였다.

갑석은 8장으로 탱주와 우주 위에 갑석을 얹히게 되어 있고, 밑의 부연은 각호형의 몰딩형식을 취하여 일반형을 벗어났다.

탑신부는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다.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있는 몸돌은 낮으나 옥개석이 넓고 체감비율도 우아하여 매우 장중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은 얇고 추녀는 우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곡이 나타나있다.

상륜부는 낮은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만 남아있다.

 

  

 

옥개석이 넓다거나 상층기단 갑석의 받침을 만든 수법, 각부 부재를 다른 돌로 한 점 등은 정림사지 5층석탑의 따른 것으로서, 지역적인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석탑은 많은 양식을 절충하였으나 잘 조화된 것으로,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조화시켜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백제의 기법이 이어졌고 통일신라의 시대적인 양식도 계승되었다.

해체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 무량사 석등과 오층석탑

                 ▲ 일렬로 배치된 무량사 석등, 오층석탑, 그리고 극락전

 

♧ 부여 무량사 석등(扶餘 無量寺 石燈) 

*보물 제233호(지정일:1963년01월21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무량로 203)

 

 

극락전 법당 앞뜰의 무량사 오층석탑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현재 무량사 석등이 있는 곳이 원래의 위치로 추정된다.

하대석은 측면부분까지 파묻혀 있어 지대석의 형태는 물론 그 유무도 알 수 없으나, 하대석 측면이 8각이었음이 시굴에서 밝혀졌다.

하대 상부는 원형 연화대로 8잎의 겹꽃잎 복련(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맨 위에는 1단의 각형 받침을 새겨 8각 각주를 받치게 하였다.

상대석 역시 8각이며, 밑면에 1단의 각형 받침을 새겨내고 8잎의 홑꽃잎 양련(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돌렸으며, 상면에는 받침도 새기지 않아 평평한 위에 8각 화사석을 얹었다.

 

 

 

화사석은 8각이나 부등변 8각으로 4면은 넓은 반면에 다른 면은 좁아 한편의 4모를 죽인 것이다.

옥개석은 하면에 넓은 굄이 얕게 새겨졌고, 8각 추녀마다 반전이 현저하여 전각의 반전과 어울려 경쾌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옥개석이 약간 큰 편이나 엷은 옥개에 추녀마다 반전이 경쾌하여 둔중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래,위 받침돌의 연꽃조각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화려한 연꽃무늬와는 차이가 있고, 각 부분이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부여 무량사 미륵불괘불탱(扶餘 無量寺 彌勒佛掛佛)

*보물 제1265호(지정일:1997년08월08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무량로 203)

미래불인 두 손에 용화수 가지를 받쳐들고 서 있는 미륵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여덟구씩의 화불을 그린 괘불로,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예배를 드리는 대상으로 법당 앞 뜰에 걸어놓았던 대형 불교그림이다.

형상은 보석으로 꾸민 관을 쓴 여섯 구의 화불과 본존인 미륵존을 합쳐 과거칠불을 나타내고 있으며, 여섯 구의 화불 사이로는 동자, 동녀 등 59구의 얼굴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다.

네모 반듯한 모양의 얼굴은 반쯤 뜬 눈에 눈동자와 속눈썹, 두틈한 입술과 콧수염까지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도식적이다. 중후한 신체와 더불어 신광내의 화려한 연화, 모란, 화문과 불의의 영락장식 등 여러 장식들 또한 도식적이다.

원형의 두광과 거신형 신광의 바깥 오색 서운 사이에 배치된 화불은 마치 미륵존을 수호하듯이 애워싸고 있으며, 색채는 녹색과 홍색을 기본으로 회색과 연두색, 분홍 등 중간색을 사용하여 녹색과 홍색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한다.

조선 인조5년(1627)에 그려진 이 불화는 5단의 화면을 이어 한 화면을 만든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17세기 전반 불교미술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과 중후한 형태미가 밝고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화기의 끝 부분의 "미륵괘불탱일회유전야"라는 기록이 있어 미륵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불화의 내용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제존상만을 그리는 존상화와, 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변상도의 성격을 지닌 것이 있는데 이 불화는 존상화에 속한다.

 

♧ 부여 무량사 명부전(扶餘 無量寺 冥府殿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9호(지정일:2004년04월10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무량로 203)

극락전 앞 오른쪽에 있는 불전으로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의 삼존상을 중심으로 명부의 시왕상, 사자, 판관, 인왕, 동자상 등 총 23구를 봉안하고 있으며,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1872년 원열화상이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낮게 조성하였고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좌우 측면 중앙기둥과 뒷면 평주는 사각형 단면이다. 앞면 3칸에는 세 창살문을 2짝씩 달았으며 뒷면은 판장벽으로 처리하고 양옆에 방풍판을 달았다.

19세기 사찰 건축물로서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익공양식과 목판재 벽체 등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잘 보전되어 있어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 무량사 당간지주(無量寺 幢竿支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지정일:1976년01월08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무량로 203)

 

 

 

 

당간지주는 기도나 불교의식 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의 깃대를 고정시켜 주는 받침대로, 보통 돌이나 쇠, 나무 등으로 만든다.

기단을 2개의 판석으로 짜고 그 사이에 간대를 끼워 넣었다. 간대 양쪽에는 45cm 정도 사이를 띄우고 화강암으로 270cm의 지주를 세웠다. 그리고 간대 중앙에는 당간을 받치는 기둥 자리를 파고 그 주위에 원좌를 도드라지게 나타냈다.

지주는 직사각형으로 왼쪽 모서리를 둥글게 마감하였다.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양각의 띠를 돌렸고,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대를 새겼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구멍은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상하 2개가 뚫려 있다. 지주나 기단부에는 아무런 수식이 없는 소박, 단아한 당간으로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 김시습 초상(金時習 肖像)

*보물 제1497호(지정일:2006년12월29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무량로 203)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6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규격(가로 x 세로) 48.1 x 71.8cm.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밀화영의 끈이 달린 평량자형의 삿갓을 쓰고 담홍색 포를 입고 있으며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굴은 전반적으로 연주황색으로 밝고, 옅은 갈색선으로 얼굴의 외곽선과 이목구비를 그렸다. 귓바퀴 및 얼굴의 음폭한 부위에는 미세한 선염이 가미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묘선을 기초로 했다.

의복은 담홍색인데 가시적인 몇 개의 주름선을 보다 짙은 갈색선으로 요약하여 그렸다. 옅은 색상과 약간 짙은 색상의 미묘하고 절제된 조화로 묘사되고 있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은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이라"고 묘사했던 서유영(1801~1874)의 배관기와 상통한데, 눈의 총기가 생생하다.

'매월당집'에 따르면 생전에 김시습이 노소이상(老少二像)을 스스로 그렸다고 하나, 이 초상화를 자화상으로 확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화상 여부를 불문하고 사형만이 아니라 사심을 그려내야 한다는 초상 예술의 본령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김시습(1435~1493)의 초상화라는 인물사적 가치 위에 조선시대 야복초상화의 가작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세종이 총애한 신동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인 김시습은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일생은 동가숙서가식하는 떠돌이의 삶이었지만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 지식인의 의무에는 누구보다 엄격하였으며, 그 결과 율곡 이이로부터 백세의 스승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강릉 김씨로 태어난 곳은 서울의 성균관 부근이었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이었으며, 법호는 설장(雪岑),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그의 집안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문재를 드날린 것에 비해 대를 이은 무반의 집안이었다.

김시습은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한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3살에 유모가 맷돌을 가는 것을 보고 한시를 지어 온 동네뿐만 아니러 궁궐에까지 신동이란 소문이 퍼졌는데, 다섯 살에는 그의 소문을 들은 세종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이때 세종은 승지를 시켜 어린 김시습에게 여러 가지 시를 지어보게 하였는데 김시습은 세종의 요구에 맞춰 시를 척척 지어내어 임금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김시습을 영특하고 귀엽게 여긴 세종은 비단 50필을 하사하고 훗날 성장하여 학문을 이루면 큰 인재로 쓰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김시습은 이날 세종에게 받은 비단을 직접 허리에 묶어 차고 궁궐을 나갔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사람들은 5세의 나이로 임금의 부름을 받은 데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김시습은 이후 '김오세'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명성을 드날리던 김시습이었지만 사춘기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정적인 역경이 시작되었다. 3년간의 시묘살이 한 김시습은 아버지의 재혼으로 외가에 맡겨졌다. 그러나 곧이어 그를 돌봐주던 외숙모마저 죽고, 아버지마저 중병에 걸리는 등 고난이 계속 되었다.

그 와중에 김시습은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았지만 결혼생활 또한 순탄치 못했다.

 

생육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그를 큰 인재로 쓰겠다고 약속한 세종이 사망하고 일어난 정치적 혼란은 그가 정치 관료로 나가 나라 일을 할 뜻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하던 공부를 접고 책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었다. 법명은 설잠(雪岑)이었다.

이로서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 중에 한명이 되었는데 이를 생육신(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 김시습)이라고 한다.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지만 이들 생육신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하며 벼슬길을 권하는 세조의 부름을 거역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이에 더하여 김시습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에 의해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의 시신들을 수습하여 지금의 노량진에 매장한 사람으로 '연려실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만들어진 묘에 기초하여 숙종 때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묘가 크게 조성되었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이다.

승려가 된 후 김시습은 9년간 전국 방방 곡곡을 방황하며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고 그 후지를 썼다.

한편 김시습은 선비된 자로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승려로서는 잠시 세조의 일을 도운 적이 있다.

세조9년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10일간 교정을 보기도 하였고, 역시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머물렀을 뿐 김시습은 서울을 등지고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입산하였다.

 

'금오신화'를 쓰다

금오산실에 칩거하면서 김시습은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를 집필하였는데, 전기체 소설의 효시로서 현재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등 5편이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책의 구성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오신화 소설속 주인공들은 대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인물로, 모두 현실 세계를 등지고 몽유적 세계속에서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이전 한문 창작물들과는 달리 주인공은 우리나라 사람이며, 배경 또한 우리나라로 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풍속과 사상, 감정이 잘 녹아 있다.

'금오신화'는 중국의 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추측되는데, 작품 속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반해 인간을 압박하는 것들에 대해 강력한 대항을 하고 있어 자유와 초월을 강구하는 작가만의 개성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금오신화'는 희귀본이어서 옛 문헌에 이따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 한말 이래 소설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이 발견하여 잡지 '계명' 19호를 통해 1927년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때 발견된 목판본에 현전하는 5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에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였던 정병욱이 필사본을 발견하였다.

금오산실에 머무는 동안 김시습은 소설뿐만 아니라 많은 한시들을 썼는데 이들은 '유금오록'에 남아 있다.

금오신화를 쓰고 난 뒤 김시습은 경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와 수락산 등지에서 승려로 10여년을 살있다. 그러다가 40대 후반 문득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으며 안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는 등 환속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성종대 '폐비윤씨사건'이 일어나고 정국이 흉흉해지자 다시 길을 떠나 강원도 일대를 유람하였다. 김시습은 방랑생활 동안 지방의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여행지마다 시를 써서 남기기도 하였다. 말년에 부여의 무량사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유교식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온 대로 불교식으로 화장하였고, 유골은 부도에 안장되었다. 김시습이 죽은 후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에 의해 재평가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시집이 편찬되고 그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높이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가 유학자와 승려의 삶을 넘나든 것처럼 유교와 불교가 함께 어우러진 폭넓고 자유분방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탁월한 문장으로 후세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무량사 김시습 부도(無量寺 金時習 浮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지정일:1973년12월24일)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125-1 무량사(무량로 203)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 매월당 김시습의 사리를 안치한 묘탑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2.84m인데 서로 크기가 다른 8각의 이중 지대석 위에 놓여 있다.

대석은 8개 잎이 달린 복련의 햐대석과 여의보주를 회롱하는 2마리의 용상이 양각된 중대석, 8개 잎의 양련이 새겨진 상대석을 갖추고 있다. 또한 그 위에는 아무런 문양과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8각 탑신이 올려져 있다.

탑신 위에는 연화관이 조각된 옥개석이 얹혀 있는데, 낙수면의 합각이 뚜렷하며 반전이 현저한 8귀에는 귀꽃이 새겨져 있다. 연화관 위에는 연주문을 돌린 복발과 8각 보개, 3단의 보륜, 그리고 연꽃으로 받펴진 여의보주가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조선시대 양식으로는 조각 기법이 매우 화려하고 우수하다. 부도의 면은 전체적으로 풍화작용의 영향이 있고, 지의류 때문에 암적색으로 변색되어 조직이 박리되는 부분도 있다.

생육신 중의 한사람인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되자 21세 때에 불가에 귀의. 만년을 무량사에서 보내고 입적하였다. 절에는 그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부도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 밑에서 사리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무량사 부속 암자인 무진암(사진 上)

                     김시습 부도가 있는 무진암 앞 부도군(사진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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