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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영미와 철수
이병헌
「야, 야, 야, 내 나이라 어때서 사랑에는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다낭으로 여행을 떠나 호이안에 간다면 무조건 타 보아라. 그리고 그들의 현실을 직시해보아라,’라는 글을 한 카페에서 보았는데 베트남에 머무는 한국인이 올린 글이었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쯤 우연히 한 포탈 사이트에 카페에 가입하였고 그곳에서 다낭과 호이안의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글을 올린 사람이 현지 한국인 가이드인지 아니면 현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거나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교민인지는 몰라도 다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여행 정보를 많이 올려주어 다낭여행을 앞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나그네’라는 아이디를 가진 그의 글과 사진을 통해서 사전에 다낭여행 정보를 만나볼 수 있으니 카페의 회원들도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카페의 매니저는 아니지만 카페의 흐름을 잘 이끌고 나가는 모습이었다. 나는 ‘무조건 타 보라’라는 글귀가 솔깃하게 다가왔고 신비하게 다가오는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여행을 하기 전에 여행할 지역의 정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카페에 가입했고 다낭과 주변 여행에 관한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 카페는 베트남 전체적인 여행을 대상으로 했지만 다낭과 주변 여행지 정보가 많았다. 물론 자유 여행자들에게 여행지 정보를 주면서 그곳에서 하루 패키지여행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다낭여행에 대한 안내 글이 많이 올라와 있었고, 그곳을 다녀와서 올린 여행 후기도 많았다.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내용이 많았는데 먹먹해지게 하는 글도 있었다. 그들의 여행지가 다낭과 근처의 도시인데, 몇 년 전부터 한국인들이 많이 여행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다낭과 주변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머물던 격전지였고 라이 따이안과 후손이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는 글을 읽었는데 먹먹해졌다.
공항에서 우리 일행을 처음 맞이한 것은 키가 작은 베트남 가이드였다. 처음에는 그가 우리의 안내 가이드인 줄 알았는데 밖에 나가니 한국인 가이드가 그들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하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한국인 가이드는 공항 건물 안에서 한국 관광객을 맞이할 수 없다고 한다. 현지인 가이드를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였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한국인 가이드로부터 이곳 베트남에서의 라이 따이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전쟁의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누구나 알고 있는 답을 피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로 이동하는 도중에 현지 가이드인 한영수는 환영 인사를 한 후에 베트남인 가이드 응우엔 티엔을 소개해주었다. 그녀가 잠시 버스를 내리는 틈을 타서 그녀가 라이따이안의 손녀라고 말해 잠시 버스 안은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덤덤하게 인사를 하였고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호텔에 닿기 전 30분 동안 그 지역에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우리 군인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소위 ‘청소’라는 이름으로 베트공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부대장이 임할 수 없다는 말을 하자 다른 군인들을 투입한다는 재명령이 떨어졌고 부대장은 할 수 없이 마을의 주민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나이가 든 사람들이 앞에 나서 그들 중심으로 처형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명령을 거슬리고 처형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여러 번 정부 차원에서도 전쟁 중 베트남에서 이뤄진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사죄를 하려고 노력하였고 언젠가 한 지역의 부대장과 병사들이 학살이 이뤄진 곳을 방문해서 사죄하는 모습이 다큐멘타리로 제작되어 방송을 탄 적이 있어 국민적인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사죄하는 과정에서 이장도 자신도 그 부대장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는 말을 하였고 다른 몇 사람들도 증언하였다고 했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은 호이안 여행 일정이었다. 맑은 날이었고 기온도 높지 않았지만 그리 덥지는 않았다. 나를 포함한 고등학교 동창 네 명은 함께 퇴직한 기념으로 여행을 떠나자는 근식의 제안에 이곳 다낭을 여행지로 삼았다. 자유여행이 좋았지만 알아보고 예약하는 것이 귀찮아 패키지여행을 선택하였다. 패키지여행의 일정에 포함되어있으면 함께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따라가야만 했다. 호텔을 떠나서 한참 달리던 버스가 멈췄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버스에서 내렸다. 순간적으로 더위가 몰려왔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기념품이나 옷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수학여행을 학생처럼 잠시 기다리자 가이드가 손짓했다. 어린 학생들처럼 두 줄로 서서 걸어갔다. 배를 타는 곳에는 도우미가 있어 손을 내밀어 배에 잘 탈 수 있도록 잡아주었다. 배에 오르자 베트남 모자인 농을 건네주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우리나라 발음으로는 ‘농’, ‘논’, ‘농라’라고 하는데, 그때 가이드는 그 모자의 이름이 ‘농’이라고 말을 해 주었다. 우리나라 남자와 결혼한 베트남 여자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TV에 나올 때 콩밭 매는 여자들이 그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십여 년 전에 직장 동료들과 하롱베이 여행을 할 때도 그 모자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흐린 날 이어서 모자를 그대로 받아서 가지고 있었다. 배에 올라서 모자를 쓰자 햇빛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바구니 배는 둥근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사공과 손님을 두 명 정도 태우기에 적당했다. 우산을 펼쳐서 햇빛을 차단해도 되지만 모자를 썼기에 그대로 있었다. 우산이 시선을 가릴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배의 이름은 베트남어로는 ‘틴통’인데 ‘대나무 배’라고도 하고 ‘코코넛 배’ 라고도 부른다고 노를 저으면서 사공이 말해준다. 사공이 생각보다 한글을 잘 사용하는 것에 놀랐다. 사공 중에 라이 따이한의 자손이 많으니 그들의 삶 속에서 은근히 한글이 각인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선착장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조금 지나자 수로 옆으로 야자수가 가득했다. 이번 투어는 바구니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서 투본강까지 돌아오는 코스였다. 앞으로 나아가니 여기저기서 귀에 익은 한국노래가 들려 왔다. 틴통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일부는 틴통을 연결해서 무대를 만들어 그곳에서 뛰면서 노래와 춤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흥은 세계적인데 배를 탄 손님들은 그들의 노래와 춤에 박수치며 호응하였다. 그들의 신명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어느덧 함께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가면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그들의 손에 쥐어 졌고 그들은 ‘감사합니다.’를 연발한다. 팁을 받은 그들의 태도에서 정말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들의 흥이 우리 민족의 흥과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족은 흥이 있는 민족이고 그 피가 그들에게 전해졌다는 생각하였다. 노를 저어가면서 사공의 입에서는 계속 우리나라 말이 흘러나오고 그 말에 손님들도 반응하고 있었다. 사공들의 입에서는 ‘오리’, ‘꽥꽥’ ‘영차’, ‘빨리빨리’ 등의 말이 나오고 배를 탄 한국인 손님들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흥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묘기를 부리는 사공을 보았다. 배에 혼자 탄 사공이 바구니배 노를 저으면서 묘기를 부리는 모습이 서커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힘찬 박수를 보내고 한국인들의 지갑에서 달러나 천 원짜리 지폐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흥이 가득한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그들이 일의 일부가 아니라 즐겁게 노는 모습처럼 다가왔다. 어떤 배에서는 그물을 던지면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그 모습에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지갑이 열리기도 한다. 이곳에서 바구니배를 타는 사람 중에 한국인이 많았다. 특히 사공 중에 라이따이한이 많다고 하니 가이드 협회에서도 밀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관광상품은 한국인 가이드들이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많은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이 좋아하고 또 돈도 벌 수 있는 상품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이드는 배의 노를 라이 따이안의 자녀들이 젓는다는 말을 여러 번 말해주었다. 여행을 하게 되면 그 지역의 정보를 미리 검색해보는 편인데 베트남 여행을 하기 전에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주민 학살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베트남인이 우리나라 법원에 국가배상 소송을 했고 법원에서는 학살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인정해서 가해자가 한국인이니 피해를 입은 베트남인에게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단을 하였다. 물론 그 재판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우리나라 법원이 첫 인정 했다는 것에 대해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어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말하는 재향군인도 있었다. 전쟁 중에 민간인과 군인 식별이 어려울 수도 있고 베트공이 민간인 복장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니 오인해서 사살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면서 전쟁 탓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소송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서 더 큰 규모의 소송이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컴퓨터를 종료했던 날이 생각났다.
호텔 방에서 샤워를 한 후에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사 온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룸 메이트이가 된 김근식과 자연스럽게 베트남 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제 육십이 넘었지만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막연하게 1960년에 전쟁이 일어나 1975년에 전쟁이 끝났고 우리나라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김근식의 경우는 좀 다른 면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노무자였다. 물론 베트남전에 참가했다는 것은 군인도 될 수 있고 노무자도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모르는 척하면서 근식에게는 그의 아버지를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근식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베트남에 머물고 있었다. 다행으로 베트남전이 끝난 후 무사하게 귀국할 수 있었지만 그의 부친은 고엽제로 고생을 하다가 병원을 전전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근식의 부친은 베트남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베트남전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가족들에게 거의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김근식은 그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면서 지갑에서 빛바랜 흑백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사진에는 그의 부친과 베트남인으로 보이는 소녀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두 사람이 연인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도록 하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김근식 부친과 소녀의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의 지갑을 돌려주었다. 그 사진 속의 소녀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 졌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우에라는 베트남 도시로 가는 길에 휴게소에 잠깐 들렸고, 나는 응우엔 티엔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베트남 현지 가이드는 그들이 안내하는 패키지 팀원의 안전에도 신경을 써야 했고 입장권을 사는 등 한국인 가이드 대신 많은 몫을 대신하였다. 현지인 가이드와 손님들과의 사적인 대화는 거의 이뤄질 수 없었다. 업무 이외에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는데 그것이 그들에게 내려진 방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가 한국인 노무자와 사랑을 나눠 자신의 어머니가 태어났다는 것을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제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한국말은 너무 잘했다. 한국인 가이드는 그녀가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해서 처음에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베트남 가이드가 되었지만 그들의 거친 행동을 따라갈 수 없어 다시 한국어를 공부하고 가이드 자격을 땄다는 말을 하면서 의지의 베트남인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꿈이 한국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동생이 한국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데 돈을 벌어 학비를 댄다는 말을 하여 버스에 탄 한국인 관광객들을 감동시켰다. 사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녀는 베트남어는 기본이고 중국어, 영어 그리고 한국말까지 잘할 수 있으니 대단한 노력을 했다는 것이 피부에 닿았다. 그녀는 자신을 감추지 않았고 드러내면서 한국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묘한 뉘앙스로 말을 했다. 사실 휴게소에서 그녀에 대해서 안 것은 많지 않았고 한국인 가이드를 통해서 좀 알아낼 수 있었다.
바니힐에 오르면서 나는 그녀와 함께 케이블카에 탈 수 있었고 주변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근식과 나는 고등학교 동창 사이로 친하게 지냈지만 사적인 문제는 많이 공유하지 않았기에 그의 부친에 대한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십여 년 전 장례식장에서 그의 부친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는데 호남형으로 늠름한 모습이었다. 바나힐에 올라가서 가이드가 간단한 설명을 하였고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서둘러 주변을 돌아본 후에 김근식과 함께 응우엔 티엔을 초대해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시간이 있었고 그녀와 함께 있던 한국인 가이드는 다른 여행사의 가이드들과 함께 있어서 오롯이 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김근식이 먼저 베트남에서의 라이 따이한 문제와 베트남 국민 학살에 관한 것을 말하자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커피를 마시면서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커피는 역시 베트남 커피가 맛있다는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피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전쟁 초반기에 한국인 노무자를 만났는데 그가 진정으로 잘 대해줘서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노무자와 사진을 찍은 것이 있는데 자신의 집에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그녀는 그 이상의 말을 아끼면서 전쟁 중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이해를 할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였다. 결국은 라이따이한의 문제나 한국군인들의 베트남인 학살에 대한 것은 전쟁 중이니 이해를 해야만 하지만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버렸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을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남겨두고 떠나는 상황은 이해한다는 말을 하였다. 자신의 할머니는 언젠가 할아버지가 다시 베트남에 와서 한국으로 자신들을 데려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했다. 자신이 한국인들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된 것도 언젠가는 할아버지의 후손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김근식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한국군 혹은 노무자들이 저지른 행위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었고 또 그것은 대대로 이어져 오면서 혹처럼 그들을 괴롭혔으리라 생각하였다. 응우엔 티엔은 담담하게 말을 하였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용맹스럽다는 말을 들으면서 적과 싸웠고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군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면서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베트남 전쟁도 문제이지만 지구상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짓는 모습이 다정하게 다가왔다.
“전쟁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고 또한 알 수 없는 그들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군인들을 이상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한국 군인이나 노무자들이 베트남 여인을 강간하고 또 죽인 일이 있지만 그들이 한국에 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지요. 그들도 전쟁이라는 함정에 빠졌고 어쩔 수 없이 총질해야만 했을 것 같아요. 베트남이 전쟁에서 진 것도 베트남군의 타락과 부정부패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요. 내부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알지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녀의 생각이 어느 정도 트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실 싸워야 하는 군인들이 명령에 따라야 하고 명령을 거기면 총살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근식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것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은 선택이 없고 죽음과 삶에서 한쪽을 선택당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여야 하지요. 물론 그것은 상대편 군인에 대한 것이고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성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되지요”
근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그의 뒤를 이어서 말을 하였다.
“지금 한국의 법원에는 자신의 부모나 가족이 세상을 떠난 베트남인들이 소송을 제기하고 있고 일심에서 법원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어요. 개인적으로 베트남에서 한국인 군인들에 의해서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소녀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성 노리개가 된 것을 알고 있고 사과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들은 사과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저도 그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한국은 베트남에 여러 차례에 걸쳐 진정으로 사과를 하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모습을 보면 당연히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베트남에서의 한국 군인이나 노무자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 60이 되어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한국 정부에서 그들을 한국인으로 인정해주었으면 해요. 사실 라이따이한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거예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고 고엽제 등으로 병원에서 시름 거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알아요. 사실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전쟁 중에 만난 여인과 사랑을 나눈 것은 잘못이 아닌데 그 여인이 아내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자녀가 아들이나 딸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세 명은 한참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만 보았다. 김근식은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밖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한국인 가이드가 부른다는 말을 하면서 카페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도 그녀 뒤를 따라나섰고 응우엔 티엔은 코끼리 인형을 높이 들어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하루 일정을 마친 후 밖에서 현지식으로 식사를 한 후 호텔에 와서 샤워했다. 잠시후 맥주를 한 잔 마시려고 하는데 옆 방에 있던 다른 동창들이 술 한잔 마시러 나가자는 말을 하였다. 그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그들과 함께 그들의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야시장을 찾았다. 걷다 보니 그들의 눈에 한국 소주병이 보였고 그들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야시장에서는 안주도 간단했는데 이곳이 바다와 접해있으니 해산물이 많았다. 생선구이를 시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김근식은 소주의 가격이 비싸서였는지 몰라도 술이 더 맛 있다고 말하면서 너스레 떨었다. 김근식은 머릿속에 가득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괴롭혔다. 확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베트남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군인이 아니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수첩에 있는 사진 속에 아버지는 일반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군인이 아니라는 것을 들었지만 사실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소주병을 두 병 비울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베트남 여행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그들 네 명만의 동창회장를 맞고 있는 고수철은 다낭여행이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에 그의 가족과 함께 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고수철과 친한 박두병은 다낭의 발전상에 놀라고 있었고 나는 베트남 전쟁 속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과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옆에서 술을 마시던 김근식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든지 전쟁을 치루는 군인이라면 심신이 어려웠을 것 같아.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거야. 그러한 불투명한 미래를 느끼면서 시간이 나면 그들이 머물던 근처의 마을에서 여성들을 만나기도 했겠지. 그러다 보니 외로움을 달래려 현지 여성과 사귀면서 잠도 자는 경우도 있었으니 원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였겠지. 참전한 군인들은 결혼을 하여 한국에 가족이 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귀국을 하였어. 그들이 한국으로 떠나자 베트남 여인과 한국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대로 베트남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의 긴말이 이어지자 중간에 고수철이 끼어들었다.
“나도 그 이야기 많이 들었어. 한국 군인이나 노무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라이 따이한이 되어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면서 살아야만 했다고 해. 라이 따이한은 베트남전 시기에 파월 한국군 혹은 한국인 노무자와 현지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을 베트남에서 부르는 명칭이야.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다른 문제들과 달리 이 문제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만 해결 될 수 없을지도 몰라.”
고수철이 말을 끝내자 이 이야기를 꺼낸 내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전쟁에서 일어나는 숱한 일들에 대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알수 있는 방법이 없어. 다만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에 현지 조사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던 일들이 막 부상되고 있어. 가이드가 전해주었던 이야기 말인데. 전쟁이 끝나고 마을의 청소를 해야 할 때 부대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자 노인들이 나섰고 사진을 찍어 보고하였다는 이야기말야. 참 어려운 일이기는 해. 한창 젊은 군인들이 전쟁하면서 생물학적으로 여자 생각이 날 수도 있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연애를 하고 싶었겠지. 그러다가 베트남 여성들이 피해자가 되었고 그 피해 여성들의 자녀가 나선 거야. 어쩌면 한국에서 먼저 나서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 인정을 하는 꼴이 되니 지지부진한 것이야. 앞으로 최종심에서 베트남인들이 이기면 봇물 터지듯 우리나라 법원에 라이따이한 가족들이 몰려올 것 같아.”
그들은 네 명이 네 병의 소주를 마시고 안주 몇 가지까지 먹은 다음에 300만 동을 내고 호텔로 들어가다가 맥주를 몇 병 사서 들어갔다. 그들은 다시 모여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였으니 호텔에서는 그들의 동창에 대한 이야기였고 맥주 병을 다 비운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밝아왔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고 오전에 마블마운틴이라고 부르는 오행산 일정과 다낭 대성당만 남겨놓았다. 오전에 오행산으로 향했는데 그리 멀지 않았다. 앞에서 가이드로부터 대충 설명을 들었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산에 6개의 거대한 동굴이 있는데 엘리베이터을 타고 가도 되었지만 그냥 걸어서 돌아보라는 말을 한다. 시간을 정해주고 모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잠시 돌아본 후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는 다른 라이 따이안의 자식들처럼 한국에 대한 동경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준 사진을 공항에서 한 장 나에게 준다고 하였다. 나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번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잘 생겼고 분명 그녀의 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있으면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가을에 한국에 갈 때 유학 중인 동생과 함께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만약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의 가족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을 함께 들은 근식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어디 아프냐는 말을 하였지만 그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녀는 오직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으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가이드 자격증을 땄고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일을 시작하였다고 반복해서 말하였다. 그는 그녀가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여행을 잘 안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한국인 가이드가 작은 실수를 하면 순간적으로 알아서 처리를 해 주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당당함은 어떠면 그녀의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으로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한국에 가는 것이었고 자신이 떳떳하게 한국의 핏줄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고 그녀도 말한 것처럼 라이따이한을 낳은 베트남 여자도 상대의 한국인 군인이나 노무자도 모두 나이가 많이 들어서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이 있었다. 만약에 베트남에 있는 여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 번쯤은 베트남을 찾았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한국인들은 자신의 핏줄을 중요하게 여기니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핏줄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쾌락을 위하여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분명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 당기는 힘이 있기 마련이었다.
오행산에서 다낭 대성당으로 향했고 그곳을 돌아보다가 비가 왔다. 여행하는 동안 처음 내리는 비였고 가이드는 소나기라고 말했다. 비가 내리는 성당에서 그녀는 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자는 가이드의 말이 있었지만 그녀는 비를 맞으면서 그곳을 떠나 비옷을 사서 모두에게 내밀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곁에 그녀가 다가왔고 그녀는 나에게 그녀의 할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가 태어난 것을 모를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녀의 할머니가 임신한 후에 그 사실을 알릴 틈도 없이 그녀의 할아버지가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할머니와 관계를 맺은 한국인은 그녀의 어머니의 태어남에 대해서도 모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응우엔 티엔은 할아버지가 그녀의 할머니에게 ‘영미’라는 한국 이름을 붙여주었다고도 하였고, 할머니는 그녀의 할아버지를 ‘철수’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고 나의 눈에는 아픔이 번져오는 것을 느꼈다. 나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이는 한 혼자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참전용사나 노무자가 베트남 여인들에게 행했던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전날 고등학교 동창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전쟁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친구와 싸울 뻔한 것도 생각이 났다. 전쟁 중이었다고 하지만 자신의 누구든지 적이 아닌 경우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 뒤에 있는 빌딩 쪽에서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스콜이니 곧 멈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있는 내 곁을 떠나서 한국인 가이드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들은 일정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갔다. 된장찌개였는데 완전 퓨전식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어서 절로 즐거워졌다. 이상한 것은 가이드 두 명은 따로 식사하는데 얼핏 보니 식사가 변변치 않았다. 외국에 나와서 가이드를 하면서 돈을 더 벌기 위해 인지 아니면 식당에서 그들에게 제공을 잘 안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왔다. 식사한 후에 그들의 코스는 오직 가게에 들리는 것뿐이었다.
사실 외국 여행을 하면서 제일 어려운 시간이 쇼핑을 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동남아의 경우 거의 비슷한 물건을 판매하는데 가격도 비싼 것이 대부분이었다. 언젠가 한 노인이 동남아 관광을 갔다가 쇼핑을 할 때 물건을 사지 않자 가이드로부터 폭언을 들은 것이 방송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많이 벌어진다고 블러그나 인터넷 카페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그들이 간 곳은 노니 제품을 파는 곳인데 처음에 노니를 설명하더니 그 후에 침향나무 추출액을 만병통치약으로 설명을 했다. 그 가격이 무려 1,100달러라고 하니 거의 150만 원 정도가 되었다. 가이드는 주변을 빙빙 돌면서 구입을 독려하니 여고 동창생 그룹에서 두 명이 구입을 했다. 그리고 한 가족에서 노니를 구입을 하여 그래도 무난하게 지나갔다. 적당하게 넘어갔으리라 생각을 하였지만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쇼핑하는 동안에는 배트남 가이드는 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다음에 향한 곳은 커피를 파는 가게였다. 호이안에서 콩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신 적이 있는데 그것이 코코넛 커피였다. 이곳에서는 코코넛 커피를 판매하는데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커피 가격이 그리 싼 편은 아니었다. 고수철이 커피를 좋아하는 자녀에게 준다고 구매를 했는데 양이 얼마 되지 않은데 150달러가 되었다. 그곳에서 몇 명이 구입하여 가이드의 얼굴빛이 그리 어둡게 변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곳에서도 가이드가 그에게 와서 커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가족 중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없다고 말로 그를 밀어내었다. 근식은 그 모습을 보면서 킥킥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가이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에 들린 곳이 잡화점이었다. 전에는 라텍스 공장도 갔는데 동남아 여행을 한 사람 중에 집에 라텍스 제품이 하나라도 있으니 인기가 뚝 떨어져 커피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잡화점에서는 잡다한 물건을 팔았다. 장어나 쥐포 말린 것부터 말린 과일까지 다양했는데 그것들도 가격이 싸지는 않았다. 그곳을 나오다가 나는 베트남 가이드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사 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만두었다. 그것은 바로 물건을 한국인 가이드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가이드의 표정은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는 평년작은 한 셈이었다. 그가 내 앞에 와서 ‘나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돈이 없다고 말을 하자 카드로도 가능하다는 말을 한다. 말을 하지 않고 버티게 된 것은 그가 동남아 여행 중 만병통치약 인줄 알고 사 왔던 것들을 반도 먹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 몇 번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말 만명통치약으로 설명을 하니 사람들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앉아있기가 어려웠지만 그 시간을 잘 이겨냈다고 생각하였다.
비행기를 타기까지 많은 시간이 있어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해가 지면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해변에는 사람들이 나와 있고 수영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삼십 분의 시간이 주어졌고 나와 동창들은 사진 놀이를 한다는 핑계로 응우엔 티엔을 불렀다. 사진을 찍어주면서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예뻤다. 그녀는 한 달에 몇 번씩 한국인 관광객을 안내하지만 끝날 때가 제일 어렵다는 말을 한다. 사실 그들도 5일 동안 시간을 같이했기에 의무적으로든 아니면 인간적으로든 정이 조금은 들 수도 있다. 나는 근식이 베트남 가이드를 살짝 불러 그가 가지고 있던 베트남 화폐를 모두 주는 모습을 보았다. 베트남에서 필요할 것 같아서 바꿨던 돈을 근식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으니 아마 천만 동은 되리라 생각하였다. 천만 동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50만 원 정도 되니 그녀에게는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을 하였다. 나도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가방에 사용하고 남은 달러를 넣어 주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여고 동창 4인방은 가이드가 한국에 오면 자신들이 사는 곳에 오면 맛있는 것을 사준다는 말을 하면서 가이드와 약속을 하고 도장까지 찍었다. 그는 자신이 단톡방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녀들에게 특히 고마워했다. 물론 공항을 떠나 그들의 단톡방에 잘 도착했다는 말을 남기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헤어지면서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약속을 하면서 여운을 남겼다.
공항에 닿자 한국인 가이드는 임무가 끝났는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떠나버렸다. 나는 운전 기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였고 팁으로 5달러를 주었다. 물론 이미 도착했을 때 공식적으로 정해진 팁을 가이드에게 주었다. 하지만 현지인 운전 기사에게 무엇인가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다. 가방 무게를 체크했지만 나는 오리려 출발할 때 보다 가방의 무게가 줄어있음에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표를 받고 가방을 부친 후에 그녀와 작별을 하였다. 한국에 오면 동생과 함께 자신이 사는 곳으로 놀러 오라는 말을 하였고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에게 무엇인가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것은 사진 하나였고 사진 속의 남자를 찾아달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 사진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진이라는 말을 하였고 집에 몇 장이 더 있다는 말까지 하였다. 사진을 받아들고 사람들에 밀려 보지 못하고 그의 카메라 가방 한쪽에 넣어둔 후에 검색대를 통과하였다. 요란한 절차를 거쳐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비행기가 출발할 시간이 두 시간 이상 남아서 공항 라운지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근식과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의 혜택을 보면서 4명이 함께 라운지에 들어섰다. 라운지에는 뷔페처럼 차려진 코너가 있었고 음료나 와인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근식은 맥주 한 캔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제야 나는 사진을 확인해 보았다. 뒷면을 보니 자신의 전화번호와 한국에서 유학 중인 동생의 전화번호까지 적혀있었고 꼭 부탁한다는 말도 함께 머물고 있었다.
사진을 뒤집으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사진은 근식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보여주었던 사진과 비슷한 것 같았고 다시 보니 약간 더 바랜 사진이었지만 사진 속의 사람들은 똑같았다. 근식이 보여주었던 사진 속의 사람과 응우엔 티엔이 나에게 준 사진 속의 사람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을 보니 오버랩 되어 다가오는 근식 할아버지와 해맑은 베트남 소녀의 모습이 그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마침 근식은 다른 동창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근식의 곁을 떠나서 재빨리 맥주를 가지러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진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맥주 몇 캔을 가지고 와서 동창생들에게 건네주었다. 근식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지만 나는 얼버무리면서 응우엔 티엔의 사진이라고 말하고 얼른 가방 속에 숨겨버렸다. 응우엔 티엔과 사진속의 소녀의 미소가 닮은 것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맥주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끝”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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