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묵상 19. 용감하고 담대하게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19세기의 저명한 설교자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는 자신이 살고 있던 인디애나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부정부패의 온상을 파헤치는 놀라운 일을 했다. 그는 죄를 규명했 을 뿐 아니라, 부정부패에 연루된 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밝히는 작업까지 했다. 또한 알코올에 중독되어 있거나 도박을 일삼는 정부 수뇌부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처가 혼자서 밤길을 걷고 있는데 그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이 골목에서 뛰쳐나오더니 그에게 총을 겨누었 다. "목사 양반, 당신이 발표한 거 당장 취소해. 그러지 않으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이 될 거야."
"쏘고 싶으면 쏴 보시지." 비처는 하나도 안 무섭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갔다. 그리고는 "나만큼 과녁을 잘 맞힐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결국 그 괴한은 총을 내리고 말았다.
비처의 대담함에는 누구도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의 가치관에 반대하고 도덕적 절대성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안전과 관용과 개인의 선택권 보호를 숭상하는 현대 문화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더욱더 어렵다. 그러나 용기는 미덕의 주춧돌이다. 그래서 용기를 잃게 되면 그때부터는 어떤 미덕도 가질 수 없게 되고 만다.
담대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는 것이다. 어제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성령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를 통해 역사하는지를 보기 원한다면 사도행전을 읽어보라고 제안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여 사도행전을 훑어보았다면, 사도행전 4장 한 장에서만도 '담대히' 라는 단어가 세 번이 나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적대적인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이는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도, 돌을 던지는 폭도들 속에서도, 로마 법정에서도, 심지어는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성도들 속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했다.
어쩌면 당신은 "저는 바울도 아니고 비처 목사님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제가 하나님을 위해 용기 있고 담대하게 일어설 수 있을까요?"라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물론이다. 디모데를 한번 생각해보라. 그는 바울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딤전 1:2)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젊은 목사다. 그러나 바울과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아마 바울과 디모데만큼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바울은 두려움을 모르는 반면, 디모데는 수줍기 그지없는 젊은이였다. 바울은 결단력 있었던 반면, 디모데는 고민하며 속만 끓이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즉흥적으로 뭘 하는 걸 좋아한 반면, 디모데는 질서 정연하고 일상적인 걸 좋아했다. 바울은 필요하다면 정면충돌도 불사했지만, 디모데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 젊은 사역자 속에서 장차 하나님 나라의 거목이 될 자질을 알아보았다. 그러면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애정과 비전을 잠깐 엿보도록 하자.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2, 6-8).
그렇다면 디모데는 내향적이고 수줍음 잘 타는 자신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했는가? 절대로 아니다. 그는 에베소에서도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였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마지막 편지에 보면 디모데를 가리켜 '뜻을 같이하며' (빌 2:20), 진실히 돌보는 은사가 있다고 칭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2절).
당신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오는 경험을 한 적이 없는가? 아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올바른 말도 주시고 "나는 이 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확신하는 가운데 평안하라.
* 나의 야베스 기도 일기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만약 그 두려움 때문에 담대하지 못했을 때 내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또 순간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죄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게 없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 백 명만 달라. 그러면 내가 이 세상을 한번 흔들어보겠다.
그들이 목사냐 평신도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을 때에만 사단의 나라가 전복되고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존 웨슬리(John Wesley)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4:31 -
야베스의 기도묵상 20.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8).
헨델의 메시아' (Messiah)는 내가 이제껏 들어본 음악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특히 절정 부분인 '할렐루야 합창'은 들을 때마다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헨델은 이 음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메시아'를 250년도 넘게 사용해주셨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메시아의 첫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1743년 3월 23일, 헨델은 자신의 오라토리오를 런던에서 초연하였다. 그 자리에는 영국의 국왕도 참석해 있었다. 한 악장 한 악장 악보가 넘어갈수록, 관객들은 지금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음악이 거룩하면서도 후세에 길이 남을 음악이라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공연은 드디어 막바지에 이르러 '할렐루야 '합창'이 그 웅장한 하모니로 공연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그때 갑자기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밀려드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은 모든 관객이 '할렐루야 합창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 그 후로는 '할렐루야 합창' 이 공연될 때 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할렐루야 합창'은 "왕의 왕 주의 주! 영원히 영원히, 주 다스리시네" 라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야베스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은 이처럼 큰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큰일을 하실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일로 인한 영광이나 명예를 우리가 받고 싶어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분의 택하신 백성인 당신과 나라고 해도 말이다.
그분은 모든 영광을 혼자서만 독차지하고 싶어하신다(사 42:8).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이 어떤 분이라고 모세에게 말했는지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 34:14). 이것뿐이 아니다. 십계명의 처음 네 조항도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명예와 영광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유혹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참 힘든 싸움을 벌인다. 자신도 충분히 세상의 주목을 받을 만한데, 모든 영광과 존귀를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야 하니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게다가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면 할수록, 자기 외에는 아무도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믿고 싶은 유혹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분명 중대한 범죄다. 여기에 대해서는 모세가 가장 잘 말해줄 것이다. 그는 바위에서 물 내는 일을 하는 동안 그만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서, 그분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그는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 내리침으로써 하나님께 속했어야 할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말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입증된 것은 모세의 능력이었지 하나님이나 그분의 능력은 아니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말았고 그 결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민 20:12). 영광은 하나님 한 분만의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목적도 하나님 한 분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칭찬과 격려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칭찬이 영적 자양분으로 그치지 않고 교만하게 자신을 섬기는 데까지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탐한 적이 없는가? 최근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탐한 적이 있는지 지금 이 순간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하라. 만약 깨달음이 오면 그 내용을 일기장에 적어두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4).
음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위대한 음악가가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하이든이다. 그 역시 성경을 바탕으로 '창조' (The Creation)라는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였다. 죽기 1년 전,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한 번은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자기 음악이 공연되는 공연장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가 들어가자 관중들이 그에게 박수갈채와 환호를 퍼부었다. 그러자 하이든은 죽을힘을 다해 휠체어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는 "아니, 아니에요! 이 음악은 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저기, 저 하늘에서 나온 겁니다"라고 소리쳤다.
그 순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늙고 갈라지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그가 작곡한 '창조' 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렸을 것이다.
* 나의 야베스 기도 일기
내 주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림으로 나에게 영적인 도전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고,
이생의 영광 곧 사람들한테서 얻는
영예와 명성을 추구하는 데만 관심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은 결코 차지할 수 없다.
교만한 심령에는 믿음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