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팔에 와닿는 공기가 선선하다. 입추가 지났고 처서도 코앞에 와 있으니는 그럴만도 하다. 집 앞에서 익숙한 9407번 버스로 청담역으로 가서 7호선 전철로 갈아타고 도봉산역에서 내렸다.
친구 M과의 약속 시간까지 역사 옆 창포원을 둘러보았다. 폰테데리아, 파피루스, 루엘리아, 탈리아 등 창포원 건물 앞 화분의 이국적 이름의 화초들과 공원과 화단을 수놓은 많은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잠시잠깐 사이에 붓꽃원, 약용식물원, 습지원 등 12개 테마로 2009년 개장한 창포원의 매력에 푹 빠졌다.
도착한 M을 만나 수락산 산행 대신에 서울둘레길 제1코스를 종주하기로 결정했다. 서울둘레길은 재작년에 첫 발을 내디뎌 2,3,4,5구간은 완주했고 1구간과 6~8구간을 남겨두었었다. 둘레길은 중랑천을 건너고 수락리버씨티 공원을 가로지르고 서울과 의정부를 가르는 수락육교를 넘어 수락산 자락으로 안겨든다. 길 옆에서 죽단화, 나팔꽃, 개망초, 달맞이꽃, 범부채꽃 등 갖가지 꽃들이 고개를 내밀며 눈길을 붙든다.
수락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 사이 계곡들은 내린 비로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창포원이 꽃 천지라면 수락산 둘레길은 녹음, 벌레소리, 물소리가 가득하다. 수락골 벽운계곡 물은 맑고 능선을 타고 넘는 길은 힘겹다. 길 옆 꽃을 피운 좀비비추는 발레리나처럼 발랄하고 상수리 나무 열매는 제법 여물었다.
아직 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요즘같은 때는 떼로 몰려다니는 단체 행락객이나 산객도 적어 걷기에 더없이 호젓하다. 신선을 닮은 노객이나 반려견을 동반한 홀로 산객이 대부분이다. 상계요양원이 위치한 만남의 광장 옆 계곡의 늘은 맑고 수량이 풍부하며 배바위와 고래바위는 모양새가 그 이름에 딱 걸맞다. 둘레길은 능선과 계곡을 넘고 건너며 수락산 자락을 휘감아 돈다.
귀암봉 자락 모퉁이 전망대에 올라서니 왼쪽으로 불암산이 모습을 보이고 앞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시가지는 연무에 싸여 있다. 청춘, 젊은 날의 회상, 추억 등의 꽃말을 가진 북아메리카 원산 '꽃범의 꼬리'가 수락산 자락에 청초한 꽃을 피우게 된 연유가 무얼까 궁금하다.
그늘이 없는 옛 채석장 터를 지날 때 햇빛이 따갑게 얼굴로 파고든다. 계곡 위 너럭바위가 덤성듬성 자리한 '사색바위' 위에서 할머니들이 모여앉았다. 다람쥐처럼 주워모은 도토리를 바위 위에 올려놓고 수다를 떠는 소리가 새들의 합창처럼 들린다.
당고개로의 갈림길 소나무 아래 쉼터에 백발 신선 두 분이 땀을 훔치며 간식을 들고 있다. 거인 '발바닥 바위'에 이어 '손바닥 바위'도 둘레길 옆에서 눈길을 끈다. 큰 바위에 손바닥과 발바닥 자국만 찍어놓고 채석 등으로 황폐해진 산을 등지고 거인은 어디론가 떠나버렸단다.
건간이 나타나는 이정표는 하나같이 정상까지 3km여라고 알려주니 둘레길은 정상을 꼭지점 삼아 여러 갈래로 뻗어내린 능선과 계곡의 들고나는 굴곡진 길을 따라서 도는 조금은 지루한 길이다. 둘레길 위 아래로 영원암 용굴암 도암사 도선사 수암사 송암사 광덕사 석가사 고려사 복천암 약사암 보광사 등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자리한 수락산 남단은 불도량 집합소라 할만하다.
그 중 원효대사가 671년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학림사가 수락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오부능선 쯤 되는 고지임에도 아스팔트가 깔려 차량이 오갈 수 있는 길을 따라 오른편 능선 위의 약사전을 스쳐지났다.
손으로 각각 입, 눈, 귀를 가린 원숭이 석상이 양 옆에서 차례로 맞이하는 높은 돌계단 중간 쯤에 자리한 청학루에는 각각 코끼리와 해태 위에 앉은 아름다운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좌우를 지키고 있다.
나쁜 말과 행동은 각각 3년씩 말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정진을 하면 어리석은 원숭이도 능히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일까? 대웅전 앞마당에 닿는 돌계단 끝 양쪽에는 원숭이 석상이 깨달음의 환희로 만세를 부르고 있다.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 뒤로 가족들이 길게 줄지어 따르며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49재가 열리고 있다. 석조미륵입상이 신기한듯 혼자서 어정거리는 손주뻘 쯤 될 아이의 천진스로움은 대웅전 앞 뜨락에 놓인 연꽃을 엎드려서 쳐다보고 있는 동자석상을 닮았다.
골이 깊고 수량이 많은 용골암골 계곡 위에 놓인 다리의 위 아래쪽에는 산객들이 발을 담그고 더위를 피하고 있다. 계곡 언저리에 빈집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 동막골을 지나고 외곽순환로 교각 밑에서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내달리는 차량 소음에 귀가 따갑다. 그 소름에 쫓기듯 수락의 마지막 능선을 타고 오른다. 그 끝에 수락과 불암 줄기가 서로 만나는 덕릉고개 너머로 불암의 첫 봉우리가 모습을 보인다.
서울 상계동과 남양주 별내읍을 잇는 덕릉터널 위로 난 고개를 지나 불암산 자락에 접어드니 불어오는 바람이 새롭고 제법 선선하다. '작은 채석장' 위 전망데크에 서니 외곽순환로 너머 수락산 자락에 안긴 마지막 달동네가 안쓰럽지만 정겨워 보인다.
철쭉동산 쉼터 육각정에 오르면 수락산 자락과 아파트 사이로 북한산이 보이고, 공원 모퉁이를 돌면 다리가 놓인 계곡 위쪽으로 멀리 하늘 높이 불암산 암봉이 흰 머리를 드러내고 솟아있다. 지나면서 만난 여러 약수터와는 달리 불암산자연공원의 생성약수터는 수질검사가 '적합'이라 적혀있어 한 모금 목을 축였다.
운동시설이 갖춰진 쉼터 불암산 전망대에 올려다 보는 불암산 정상부의 네 암봉은 푸른 녹음에 싸여있는 벗겨진 대머리처럼 보인다. 이름 그대로 바위가 많은 산이다 보니 둘레길 군데군데 남근석, 공룡바위, 여근석 등 특이한 바위들도 눈길을 끌었었다.
좌우 둘레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능선 모퉁이 '넓적바위' 위에 배낭을 내리고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여근석 지나 계곡 옆 평상이 여러 개 놓인 너른 능선에는 근처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부채질을 하며 막바지에 다다른 여름을 나고 있다.
가늘고 긴 물줄기가 바위 틈을 따라 졸졸 소리내며 흐르는 백사마을의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서울둘레길 제1코스의 막바지다. 그 오르막 끝에 있는 마지막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화랑대는 연무에 싸여 흐릿하다.
능선을 따라 좌우로 태릉선수촌, 한전연수원, 군부대 등의 철책이 쳐진 좁은 길을 한참 지나서 '공릉산백세문'을 빠져나오면 차량이 내닫는 노원로다. 전철 화랑대역 부근 식당에서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채우며 둘레길 수락-불암 코스를 마무리한다.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 번 불러보지 못한 채
내가 광대의 길을 들어서서 염치없이 사용한
죄스러움의 세월, 영욕의 세월"
<최불암, 불암산이여! 中>
수 많은 마을, 골짜기, 사찰, 설화 등 얘깃거리를 품은 불암산. 돌아보니 명예산주 최불암의 겸손함이 배인 싯구처럼 "그 웅장함과 은둔을 감히 모른 채" 둘레둘레 눈길을 던지며 쫄래쫄래 둘레길을 쫓기에 바쁜 한나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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