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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皮玉 스크랩 기원전 1만년 이전으로 소급되는 내몽고 흑피옥
우주후 추천 0 조회 162 15.03.15 21: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흑피옥 최초발견자 김희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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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유물 수집가인 김희용씨가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 자택에서 16년동안 모은 흑피옥./김영근 기자

 

중국 내몽고 우란차푸 박물관이 흑피옥 출토지 현장에서 초고대인의 인골을 수습하여 은폐한 것은 고고학적 만행이나 다름없다. 유물이 쏟아져 나온 현장에서 인골이 발견되면 현장을 잘 보존한 뒤 전문가들을 불러 과학적 조사를 벌이는 것이 고고학적 통례인데, 우란차푸 박물관 측은 인골을 수습한 뒤 서둘러 매장지를 은폐하고 현장조사 과정을 중앙정부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인골을 은익해버렸다(사진 우측 상하).

 

16년간 생사를 넘나든 추적 끝에 흑피옥 출토지를 최초로 발견한 김희용(사진 좌측 상하) 씨가 동아일보 20091010일자 11면 전면 광고를 통해 중국 우란차푸의 이런 만행을 지적하면서 유골 연대 측정과 함께 흑피옥 출토현장의 공개적 발굴 및 세계 학자들의 참여를 위해 발굴현장을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1991년 어느 날 40대 초반의 김희용 씨는 우리 유물을 찾으러 일본에 갔다가 거기서 한 일본인 원로 고고학자의 취중 증언을 듣게 되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만주 관동군 사령부에서 근무했던 동경제대 고고학자 출신으로 만주지역 출토 유물을 연구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검은 칠을 한 옥조각상을 연구하다 전쟁이 끝나면서 아쉽게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귀국했다며, "그 유물의 출처를 찾을 수만 있다면 인류사의 대발견이라는 불멸의 명예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김희용 씨는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때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 이전이라 궁리 끝에 홍콩을 경유해 처음 중국 땅을 밟았다. 수소문 끝에 문제의 흑피옥 여인조각상을 구해 일본의 노신사를 찾아갔다. "내가 연구했던 조각상은 맞다. 하지만 출토지를 찾는 게 핵심이다" 이때부터 김희용씨는 만사를 제쳐놓고 조각상의 출처를 찾아 16년 동안이나 중국땅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김희용 씨는 내몽고자치구 우란차푸 시 화더 션 류즈젠 썅 따징고우 춘 초원에 도착했다. 2006822. 이 현장을 발견하기까지 그는 이미 전 재산 40억을 쏟아부었다. 16년이란 세월은 그에게서 전재산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도 빼앗아갔다.

 

전라남도 영암 출신인 그는 인사동 골동품 거리에서 잔뼈가 굵었고 날카로운 안목과 과감한 거래로 이름난 인물로,그의 기이한 행적은 우리 고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에서 찾아낸 우리 청동기 유물인 청동거울 십 여점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자 북한에 기증해 김정일로부터 감사장을 받아냈는가 하면, 중국 고대 청동기를 발굴하여 미국 소더비 회장을 한국까지 불러들인 고미술에 혜안을 지닌 장본인이다.

 

허름한 청모자에 청자킷 청바지 차림의 그가 최초 도굴꾼 두 명과 함께 출토지를 찾아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동안 개인적 삶은 완전히 망가졌다. 모두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고 스스로 마지막이라고 느낄 때 기적처럼 유적지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도굴꾼들은 원래 가난한 양치기였는데, 어느날 우연히 자연노출된 흑피옥 조각상을 습득했다가 이를 북경 판자웬 골동상에게 100위안에 팔았다. 그 액수는 당시 자신들의 반달치 월급이었다. 이후 그들은 초고대 분묘의 소재를 알아냈고 본격적으로 흑피옥을 도굴해 은밀히 그 골돌상에게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도굴꾼들로부터 흑피옥을 수집해 간 골동상도 그것이 희대의 보물인 줄 몰랐다. 다만 홍산문화 옥기의 모조품으로 알고 이를 시장에 헐값에 유통시켰던 것이다.

 

"자정 넘어 무덤을 파 보니 지하 2m에 커다란 석실(石室)이 있었다. 그곳에 전신 인골이 누워 있었다. 주변에는 31점의 흑피옥이 네 줄로 정렬해 있었고 발 아래선 높이 62의 태양신 조각상이 나왔다." 그는 그런 무덤들이 무수히 많았고 근처 산꼭대기에선 '고대 문명 대신전(大神殿)'의 흔적을 봤다고도 말했다.

 

중국인 원로 고고학자 백악(86. 전 길림대 고고학부 교수) 선생은 흑칠이 된 옥조각상을 <흑피옥>이라 처음 명명했다. 그는 30여년간 이 흑피옥을 연구해 온 옥기 전문 학자로 이 유물의 출토 현장을 몰라 전전긍긍했다. 고대 유물은 출처가 명확해야 한다. 출처가 안 밝혀진 유물은 유랑유물로 전락되거나 기존 학계에 보고된 유물의 방품(모조품)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천우신조랄까 마침 출토지를 알고 있는 김희용 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백악 선생은 2000626일 그간의 연구를 통해 이 흑피옥 유물 표면이 철, 구리, , 크롬, 니켈, 망간, 티타늄, 수은, 탄산칼슘, 코발트,갤린 등 35개 원소를 섞은 "광물성" 흑피로 도색되었음을 처음 밝혀냈다. 나중에 2009년 우실하 교수가 의뢰한 흑피옥 9점에 대한 서울대의 성분 분석 결과에서는 흑색 염료에서 23종 이상의 원소가 검출되었다. 이는 현대 어떤 기술로도 인위적 모방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그동안 한번도 출토 보고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2001912<중국문물보>"원형조각 흑피옥기의 진위와 년대에 대한 시론"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절대로 현대에 거짓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또 20084월 자신이 소장한 옥기를 도록(옥해습진玉海拾珍=民間古玉收藏集萃)으로 내면서, 흑피옥 일부를 <신화통신>을 통해 공개하는 한편, 중국국가문물국에 출토지 현장 조사를 촉구했다. 그러자 중국국가문물국은 2008114일자 서신을 통해 내몽고 문물국에 현장 조사를 지시하겠으니 김희용 씨의 협조를 부탁했다.

 

한편, 이같은 중국 정부의 결정에 베이징과기보(北京科技報)와 상보(商報) 같은 언론들도 한몫했다. 김희용 씨가 북경 현지에 머물면서 중국 정부 당국자들에게 흑피옥의 진가를 설명하고 발굴을 요청하고, 중국 국가문물국을 비롯해 북경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등 고고학 전문가들에게 발굴의 당위성을 수차례 설명하고, 또 옥기전문가협회, 민간기구인 중화문화추진협회 관계자들을 만나 발굴을 주선해 줄 것을 당부하고, 북경시내에서 흑피옥을 일부 전시하기도 하자 이들 언론이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연구 실적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자 평소 관심을 보이지 않던 원로 학자들이 입을 모아 "왜 하필 한국인인가? 이는 우리 중국인들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자기 땅에 묻혀있는 희대의 보물도 못 알아보다니!"하며 자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북공정 등 한·중 고대사에 관한 미묘한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최초로 흑피옥의 진가를 조명하고 매장지를 파악한 사람이 한국인이라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자존심 강한 중국의 입장에서 자국은 물론 세계 역사학계에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문명을 한국인이 발견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쉽겠는가.

 

 

중국 당국의 현장 조사 결정 사실을 우리 언론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네이멍구자치구 우란차푸박물관의 후샤우눙 부관장 또한 한국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1월 말까지 이어지는) 춘절(설날) 연휴 이후 흑피옥 출토 현장에 대한 본격 조사에 들어갈 것이고 이후 발굴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용 씨는 이듬해 봄 서둘러 내몽고로 떠났다. 거기서 내몽고 문물국 관계자에게 흑피옥 출토 현장 지도를 건네줬다. 당시 내몽고 문물국 관계자들은 "미지의 초고대 문명을 발견한데 대해 진심으로 경배한다"며 김희용씨를 한껏 추켜 세웠다. 그런데 20095월경 현장 조사를 벌이겠다고 약속했던 내몽고 문물국은 현장 답사도 하지 않고 김희용 씨 주장이 근거없다는 식으로 상부에 허위 보고를 했다. 그러자 김희용 씨는 626~2710명의 민간인과 중국중앙방송(CCTV) 기자 4명을 대동하고 응웨이다 중국수장가협회옥기수장위원회 부주석을 단장으로 하여 흑피옥 발굴 현장을 안내하였다.

 

이런 와중에 지난 910일 북경 선무구 보국사에서 옥기 전시회가 열렸다. 신중국 탄생 60주년을 맞춰 중국수장가 협회 옥기수장위원회가 주최한 이 전시회에서 흑피옥 41점이 전시되어 놀라운 반응이 있었다. 전시회에 나온 흑피옥은 김희용 씨와 중국인들의 수장품이었다. 옥기위원회는 백악 선생 등 옥기에 관한 한 중국에서 내노라 하는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전시회 명칭은 <중국 만년 옥석 문화전>이었고, 팜플릿 표지에 흑피옥이 실렸다. 이재에 밝아 실리 없는 일에 돈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중국인들이 흑피옥의 명칭을 <범홍산문화흑피옥조泛?山文化 黑皮玉雕>라 칭하고 중국 옥기 만년사에 등재한 역사적인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를 앞두고 712일 중국 최고 권위 미술대학교 <중국중앙미원> 하덕무 교수가 흑피옥에 관한 체계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하 교수는 이 논문에서 흑피옥의 조형적 종류, 흑피옥이 지닌 창조성 및 이를 조각한 고대인들의 예술적 영혼, 흑피옥의 예술 특징, 조각상이 검은 이유 등을 분석하고 있다.

 

 

흑피옥을 둘러싸고 이와 같이 급격하게 돌아가는 중국 사정에 밝지 못한 국내 언론들은 지금까지도 흑피옥의 진위 여부 타령이나 하면서 아직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는 걸 보면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 중국 현지 최권위 학자들과 옥기전문가들이 앞다퉈 흑피옥을 역사적 진실로 인정하고 있고, 동북공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중국 정부가 그 유물이 우리 선조, 즉 동이족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벌써 눈치채고 꼼수를 두고 있는데도 우리 언론은 굼뜨기만 한 것이다.

 

사실 이 전시회가 있기 전까지 중국과 한국의 고고학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흑피옥이 표면의 흑피만 제외하고는 홍산문명(5000~6000년 전)에서 출토되는 옥 조각품과 흡사하여 홍산 옥기의 모조품으로 여겨왔다. 유적지에서 공식 발굴된 적이 없고, 흑피옥 조각상이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발달된 단계의 옥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희용씨가 홀로 대중국투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백악, 장일평, 하덕무 등 중국내 저명 고고학자들이 불과 3 여년 동안에 자신의 저서에 흑피옥을 소개하는가 하면(백악), 흑피옥을 대량 매집하고(장일평), 체계적인 논문을 발표(하덕무)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내몽고 우란차푸 박물관 측은 서둘러 비공개로 흑피옥 현장 조사를 벌였다. 현장 조사 전 우란차푸 박물관 부관장 후샤오눙과 김희용 씨 사이에 설전이 오갔다. 후샤오눙은 흑피옥 출토지 현장에 인골이 있을 리 없다고 했고, 만약 인골이 나온다면 자기 목을 걸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면서 "인골이 나오면 작업을 중단하고 언론과 학계에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후샤오눙은 김희용 씨를 따돌리고 박물관 직원 4명과 함께 인부 3명을 대동하고 현장 조사를 했는데, 김희용 씨 주장대로 인골이 나왔다. 후샤오눙의 지휘 아래 인부들이 고분을 파헤쳐 인골을 수습한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은밀히 현장 모습을 찍은 사람은 김희용 씨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처음 약속과는 달리 정황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남모르게 발굴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던 것이다. 후샤오눙은 파헤쳐진 고분을 다시 흙으로 덮으라고 했고, 수습한 인골은 어딘가에 은익해버렸다. 후샤오눙은 이 조사 과정을 지금까지 중앙 당국에 보고하지 않고 있다. 김희용 씨는 이 사진을 중국 신화통신(CCTV)에 건냈는데 상부 검열에 걸려 보도되지 못했다.

 

그러자 김희용 씨는 9월말 후샤오눙의비학술적 발굴과 현장 은폐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귀국하자마자 동아일보 전면 광고를 통해 우란차푸 박물관측의 만행을 고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유물이 쏟아져 나온 현장에서 인골이 출토되면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현장을 잘 보존한 뒤 전문가들을 불러 공개적 과학적 발굴작업을 하는 것이 고고학적 통례인데, 후샤오눙의 행동은 이를 완전히 무시한 고고학적 만행이나 다름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럼 왜 인골이 중요한가? 인골의 연대 측정을 통해 흑피옥 유물 제작 연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07115일 전남과학대 정건재 교수가 인체에 짐승 머리가 붙은 흑피옥 조각상에서 흑피의 시료 9.4mg을 채취하여 서울대에 질량분석이온빔가속기를 통한 방사선 연대 측정을 의뢰했다. 2개월 후 200814일 서울대가 발표한 흑피옥의 연대는 놀랍게도 14천년 전후 60. 서울대는 흑피옥 시료에서 탄산염 제거를 위해 산 처리를 했고, 그 후 남은 유기물로부터 탄소를 얻기 위해 combustion(연소) 과정을 거쳐 이를 그래프화해서 발표했다.

 

서울대가 발표한 흑피옥의 연대는 흑피옥 표면에 달라붙은 유기물의 연대다. (흑피옥) 자체엔 방사선 동위원소 C14가 없어 옥(흑피옥) 연대 측정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골과 함께 매장된 흑피옥의 연대를 알려면 인골의 연대를 측정하면 된다.

 

왜 후샤오눙은 인골을 측정하지 않고 은익한 걸까. 동북공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흑피옥이 동북공정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인지도 모른다. 기존 중국의 학설은 만리장성 밖 지역은 한족문화와 상관없다고 주장했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시원이 가장 오래됐고,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문화는 황하의 중류 유역에서 꽃을 피운 앙소문화였다. 이른바 황하문명론의 근거가 된 문화이다.

 

그런데 이 문화보다 더 이른 시기에 문명의 변방지대라고 여겨졌던 발달한 문화가 있었다. 1935년 만리장성 외곽지역인 랴오닝 성 츠펑 시(赤峯市) 훙산에서 발견되었다. 동아시아 문명의 핵심은 발해유역의 하나인 요서지방과 동몽골 지역에서 발전한 소위 요하문명遼河文明이다. 대표적인 유적은 우하량牛河粱 유적지인데, 길이 160m에 너비 50m의 규모에 거대한 적석총들이 널려있고, 내부에 석관묘들이 있었다. 또 놀랍게도 기원전 35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 여신상의 파편들이 출토됐고, 거대한 제단도 발견됐다. 그리고 적석총 안의 석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가공수준이 뛰어난 옥제품들이 다수 나왔고, 아름답고 기묘한 형태의 채색토기가 출현했다.

 

홍산문화의 주체가 동이東夷라는 설이 중국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신석기 시대의 옥으로 만든 화살촉 등의 옥제품과 돌로 만든 각종도구들

 

홍산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여신숭배 신앙이 있었다는 점이다.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 가운데 푸른 옥이 박혀있다.

 

우하량 유적지 제5지점 1호가 1호묘. 계단식으로 돌려쌓은 전형적인 적석계단식묘 내부에 석관이 놓여져 있다. 옥벽 등 옥으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제품들이 신체 주변에 놓여있다.

 

이 문화의 존재가 드러남에 따라 중국에서는 그동안의 학설을 변경했다. , 다지역 기원문명설을 내세워 중국문화는 황하문명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발전하여 하나의 중국문명을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기원전 4,500~3,000년 경의 랴오허(遼河)문화보다도 앞선, 최대 1만년 전까지 거슬러 오르는 초고대문명의 흔적인 흑피옥 문화가 만리장성 밖 내몽고에 있었다니! 중국으로서는 아주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흑피옥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전남과학대 정건재 교수와 항공대 우실하 교수다.

정 교수는 2008516일 흑피옥을 연구한 저서 <흑피옥>을 세상에 내놓았다. 내용은 흑피옥 연대측정 과정 및 결과, 김희용 씨 소장 흑피옥 유물 사진들, 흑피옥 문화의 사회구조 등을 다뤘다. 정교수는 김희용 씨를 만나 흑피옥을 연구하면서 미국의 한 박물관이 상당한 액수에 흑피옥 조각상 2점을 구입하면서 이 조각상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재료가 어떤 것이건 얼마나 오래됐건 상관없이 조각 자체로 이미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것이다. 정교수는200814일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에 흑피옥 조각상의 연대 측정을 의뢰하는 등 흑피옥 조각상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홍산문화 권위자인 우실하 교수는 김희용 씨가 소장한 흑피옥 조각상을 검토하면서 흑피옥 연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930일 한국일보를 통해 우란차푸 박물관측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중국과 한국의 전문가가 입회한 가운데 다시 공개 발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 교수가 흑피옥에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 랴오허문명의 핵심인 홍산문화 옥기 유물과 형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 교수는 적석묘 형태의 분묘 형식, 곰 토템 유물 등이 한반도의 고대 문화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홍산문화를 단군조선의 뿌리로 보고 있다.

 

만약 흑피옥과 홍산문화의 연관성이 확인된다면, 한민족의 고대 문명이 네이멍구 지역에까지 뻗어 있었음을 입증한다는 게 우 교수의 주장이다.

 

"흑피옥은 어쩌면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을 밝혀줄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우 교수는 "중국은 랴오허문명론 등 정치적 자세에서 벗어나, 고대사를 학술적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희용 씨는 자신이 초고대 문명지를 최초 발견했다며, 중국 정부에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

첫째, 도굴을 진두지휘한 우란차푸 박물관 후샤오눙 부관장은 즉각 유골을 공개하고 유골의 연대 측정에 나서라!

 

둘째, 중국 정부는 흑피옥 발견지 일대에 대한 공개적이고 과학적인 발굴을 실시하라!

 

셋째, 흑피옥 문명지는 중국 뿐만 아리라 한국, 몽골 등 인접국가, 나아가 전 인류의 문명 발상지인 만큼 세계적인 학자들이 모두 참여해 연구할 수 있도록 발굴 현장 및 연구 과정을 공개하라!

 

김희용 씨는 공개발굴 결정이 날 경우, "내가 수집했던 흑피옥의 출토지는 물론 흑피옥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주거지, 의식을 치렀던 대신전, 우물터 등 신비한 고대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다. 또 흑피옥 문명을 인류사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던 화산폭발 현장 등 흑피옥 문명의 생성과 소멸 전반에 관해 내용도 소개하고, 실제 발굴현장을 목격했던 흑피옥 매장지도 공개할 예정이다."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중국 당국이 발굴을 미루는 사이 광범위하게 도굴이 이뤄지는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굴되면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만큼 하루 빨리 발굴과 함께 보존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김희용 씨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흑피옥 출토지는 직경 50km에 현재 200 여 고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원래는 2천여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벌써 1800여 고분이 도굴 당한 것이다. 중국 정부가 하루빨리 공개 발굴에 착수하여 더 이상 도굴로 인해 인류 유산인 흑피옥 유물이 사라지는 것을 막았으면 한다. 16여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흑피옥 출토지를 최초 발견한 이후 지금까지 3년 동안 중국을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하는 김희용 씨의 모습이 장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http://www.siddham.kr/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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