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가 끝나고 입춘 우수가 지나면 농가에서는 볍씨를 소독하고 한 해 농사를 준비한다.
볕이 따스한 3월이면 물좋은 논에 못자리를 장만하여 볍씨를 뿌리고,
오뉴월에 날을 잡아서 모내기를 한다.
소에 쟁기를 매어 물 댄 논을 갈고 써레질로 평평하게 고른다.
모내기 전날 못자리의 모를 쪄서(뽑아서) 짚으로 한단씩 묶어 모내기 할 논에 던져 놓아야 한다.
한번은 내가 맨발로 작은 의자에 앉아서 모를 찌는데 발목이 간질간질 하길래 뭔가 했더니
거머리가 착 달라 붙어서 피를 빨고 있다.
이 거머리는 주둥이와 꽁무니 두군데를 피부에 붙이고서 피를 빨아 먹는데
어찌나 매끌매끌한지 손으로 잡기도 어렵고 떼내는 데도 아주 힘든다.
흙을 묻혀서 겨우 떼어내면 그 자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엄청 가렵다.
화풀이 하려면 성냥개비 만한 꼬챙이로 거머리를 까 뒤집어서 바위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여러 번 원치 않는 헌혈을 하고서야 모를 찌는 일을 겨우 마무리 하였다.
모를 묶은 모춤은 물을 묵어서 꽤나 묵직하다.
일꾼들이 지게에 지고 모내기 할 논 옆에 운반하면 나는 그 곳을 하나씩
투원반 하듯이 논 가운데 여기저기에 던져놓는다.
다음날 모내기는 동네 품앗이로 하게 된다.
집집마다 한 명씩 나와서 모를 같이 심는데, 양쪽 끝에서 모내기 줄을 두사람이 잡아야 한다.
못줄에는 한 뼘 간격으로 원색 실이 매어져 있어서 거기에 맞춰 모를 심는다.
나는 주로 못줄을 잡았고 때로는 모를 심기도 하였다.
한번 줄을 넘길 때까지 나는 열포기도 채 못심는데 동네 누나들은 두배나 손이 빠르다.
조금 과장하면 손끝이 안보일 지경이다.
이건 정말인데 나중에 비단 홀치기 할 때 보면 정말 손이 안보였다.
모를 왼손에 한 줌 쥐고 오른손으로 너댓 포기를 떼낸 다음 논에 심는 순서인데
젊은 처녀들은 그냥 손만 재빨리 왔다 갔다 하는데 모가 다 심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누구는 잘 하느니 못 하느니 걸쭉한 입담 속에 허리는 아푸고 배가 출출해 지면
어머니나 형수가 머리에 새참을 이고 나타난다.
온 식구들이 아침 먹고 모내기 하러 집을 나가면 남아 있는 어머니, 형수는 새참이랑
점심 준비에 들어간다.
새참이라야 잔치국수를 불 때고 삶아서 찬물에 헹궈내면 되고, 양념장과 김치를 준비한다.
국수와 반찬을 커다란 소쿠리에 담아 따뱅이를 머리에 얹어 이고서 모내기 논으로 간다.
이 무겁고 커다란 머릿짐을 이고 십여분 시골길을 가는 것도 고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좁은 시골길에 구루마가 온다거나 동네 개가 갑자기 짖거나 하면 깜짝 놀라서 넘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작은 돌부리에 발이 걸리기만 해도 준비한 음식들이 쏟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시골 농촌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상화 되어 있어서 잘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내기 하는 입장에서는 이 새참시간이 가장 기다려 지는데, 모두 논 가로 몰려나와서
칼국시를 맛있게 금방 비워낸다.
물론 남자들은 막걸리 대폿잔이 빠질 수 없고, 처자들이나 아지매들 한테도
막걸리를 짖궂게 권해 보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그러면서 걸쭉한 농담도 오가고 한바탕 웃음꽃이 터진다.
이렇게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로 하니까 모내기는 한바탕 잔치 기분으로
수월하게 끝이 난다.
첫댓글 모내기하는날 조퇴하고 집가서 새참하고 점심하고 오후엔 논둑에 앉아 못줄대고 했던 추억이
오전 새참은 찹쌀수제비
오후엔 라면에 국수보태 끓였었지요.
라면도 귀했던 시절이었지요.
마저요, 마저~~~
그 때 그 시절의 추억은 어디서나 비슷비슷해요.
ㅋㅋ
그누무 검자리 거무자리 거머리의 아픈 추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