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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보 아저씨가 마음 따뜻해진 날
이호철
날이 조금 쌀쌀해졌습니다. 나무에 몇 개씩 달랑달랑하던 잎도 이제 막 다 떨어졌습니다. 음식 가게를 하는 털보 아저씨는 좀 쉬고 싶어 모처럼 가게 문을 하루 닫았습니다. 피로가 겹쳐 쌓였거든요. 요즘은 더 자주 막 다툼하는 술손님들로 해서 마음 피로가 더욱 많이 쌓였습니다. 턱의 털은 말할 것 없고 구레나룻까지 텁수룩하게 많이 나 있어 사람들은 아저씨를 털보라고 부른답니다. 털보 아저씨는 가게에 손님도 없고 할 일도 없을 때는 좁은 유리문 밖 앞길에 오가는 사람들 보는 걸 즐기기도 한답니다. 그냥 사람들의 온갖 모습 그것 자체가 참 재미있거든요. 얼굴 찌푸리게 하는 일들도 심심찮게 보긴 하지만요.
털보 아저씨는 오늘 이렇게 쉴 참에 미루었던 볼일이라도 좀 봐야겠다 마음먹고 오후에 집을 나섰습니다. 볼일 볼 곳은 아저씨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 고속버스로 한 시간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다른 작은 도시입니다. 아저씨는 식당 일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무척 가벼웠습니다. 일 보려는 곳이 고속버스 정류소 바로 옆인데, 이 고속버스 정류소는 고속버스와 일반버스를 같이 운행해서 더 사람들이 붐비는 것 같습니다. 아저씨는 약속 시간이 남아 있어 대합실 안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홀짝홀짝 마시며 의자에 앉아 쉬었습니다. 거기서도 습관처럼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이 시각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붐빕니다. 표를 끊는 사람, 옆에 가방이나 다른 짐보따리를 놓고 앉아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 버스를 놓칠새라 바삐 대합실로 뛰어 들어오는 사람, 큰 가방을 양손에 들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사람, 배가 고픈지 빵을 먹고 있는 사람, 털보 아저씨처럼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는 사람…….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텔레비전이나 손전화에 눈이 박혀 있기도 합니다.
대합실 바로 밖 손님 태울 버스가 있는 곳을 보니 도시에 사는 딸네 집에 왔다가 돌아가는지 시골에 사는 한 할머니와 딸인 중년 여자분이 버스에 오릅니다. 딸은 어머니의 버스 좌석까지 따라가 가방을 짐 선반 위에 올려놓고는 어머니를 자리에 앉힙니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떠나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줍니다. 어머니는 딸을 보고 손을 흔들고요.
“엄마, 조심히 가요. 도착하면 연락하고요.”
“그래그래. 어여 가거라. 내 걱정 말고.”
떠나는 어머니나 떠나보내는 딸의 눈에는 애틋한 눈물이 기렁기렁합니다. 대합실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자 조금은 덜 붐볐습니다.
이때입니다. 칠순이 훨씬 넘어 보이는 한 할머니가 보따리와 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뒤뚱뒤뚱 대합실로 들어섰습니다. 할머니의 손자로 보이는 한 젊은이도 큰 이불 보따리를 들고 뒤따라 들어섰고요. 젊은이는 검은 양복을 입고 짙은 파란 색 바탕에 줄무니가 있는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신사입니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이 들려 있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조금 굽었고, 하얀 한복을 입었는데 치마 옆 자락을 당겨 치마와 싸잡아 허리춤을 한껏 올려 끈으로 꼭 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치마 아래쪽에는 속 바짓단이 살짝 나와 있습니다. 저고리 위에 낡은 회색 스웨터를 걸치긴 했지만 움츠린 모습을 보니 추운듯해 보입니다. 할머니는 끙 소리를 내며 양손에 든 짐보따리를 의자에 놓았습니다.
“휴우우우!”
긴 숨을 내쉬며 허리를 쭈욱 폈습니다. 오른손으로 허리를 툭툭 치면서요. 그리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습니다. 짐보따리 들고 오는 게 힘에 부쳤던 모양입니다. 따라 들어온 젊은이도 들고 온 이불 보따리를 할머니 옆에 내려놓았습니다.
“할머니, 저 이제 가볼게요.”
“아이고, 젊으이한테 폐를 끼쳐서 우째노.”
“괜찮습니다, 할머니.”
젊은이는 할머니의 손자가 아니라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손님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옆에 앉아 있는 한 아가씨에게 공손히 말했습니다.
“저기요, 아가씨. 저는 지금 가봐야 하거든요. 여기 할머니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아가씨는 눈이 살짝 동그레졌습니다.
“할머니가 아드님 집에 가시는 길인 모양인데 여기서 기다리면 아드님이 모시러 온다고 하세요. 할머니의 아드님이 언제 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들이 올 때까지, 아니 그건 어려울 테니까 아가씨가 여기에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할머니 부탁 좀 드릴게요.”
“…….”
“괜찮으시겠지요?”
“아 네에에. 그 그러지요. 뭐.”
아가씨는 잠시 머뭇머뭇하는 듯하더니 그렇게 하겠노라 했습니다.
“할머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젊은이는 할머니께 다시 머리 숙여 인사했습니다.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우째노.”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할머니를 뒤로한 젊은이는 대합실을 나서서 시내 쪽으로 총총 사라졌습니다.
느닷없이 할머니를 넘겨받은 아가씨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 젊은이가 가자마자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아드님이 어디에 살아요? 아드님 댁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여게 있으마 아들이 온다꼬 캤으니께 여기서 기다리야제.”
“할머니, 혹시 아드님 전화번호 갖고 있어요?”
할머니는 치마를 걷어 올리더니 속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쪽지를 꺼내어 아가씨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아가씨는 종이쪽지를 펴서 살펴보았습니다. 적힌 전화번호가 잘 안 보이는지 종이쪽지를 눈 가까이 대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살펴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내 자신의 손전화로 전화를 했고요. 할머니의 아들에게 정류소 위치를 차근차근 설명하고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손전화를 넘겼습니다.
“할머니, 아드님 전화 받아보세요.”
“여보세요? 응. 그런데 야야. 내가 오다 보이 쪼깨 일찍 왔네. 그래도 내 걱정은 말고 니 일 다 끝내거덩 천천히 오니라. 천처이 와도 개안타.”
할머니는 아들과 통화한 뒤 손전화기를 아가씨에게 넘겨주고는 마음이 놓이는 듯 한결 편하게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그 모습까지 보고서야 천천히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꽤 지나 잠시 쉴 참에 자판기 커피가 생각나 다시 정류소를 찾아왔습니다. 아! 그런데 아직도 그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닙니까. 털보 아저씨는 뜨거운 매실차를 한 잔 뽑아 그 할머니에게 슬며시 다가갔습니다.
“자제분이 아직 안 왔나 보죠?”
매실차를 건네 드리며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거를 댁이 우째 아는교?”
“아까 옆에서 한 아가씨와 이야기도 하고 전화하는 걸 들었거든요.”
“아, 그랬소? 이거 안 조도 되는데…….”
“저녁때가 가까워지니까 날이 더 쌀쌀해지는 것 같네요. 따끈한 이 매실차라도 한 잔 드세요.”
“아고, 미안쿠만 요.”
할머니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차가 담긴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습니다.
“아드님이 왜 이렇게 안 와요?”
“안죽 일이 안 끝났는 갑네예.”
“조퇴를 맡고라도 좀 일찍 오면 좋을 텐데 그게 어려운가 보죠?”
“작은 공장에서 맻 사람이 같이 일하는데 우째 쉽게 빠져나오겠습니꺼. 일 끝나마 바로 온다 캤으니께 마치마 오겠제요.”
“아드님 집은 어딘지 몰라요?”
“요 근래에 집을 옮기가 잘 모르제요.”
“아드님 결혼은 했어요? 결혼했으면 며느님이 있지 않아요? 며느님이 대신 마중와도 될 건데…….”
“결혼하기는 했제요. 근데 고마 안 헤어졌습니꺼.”
털보 아저씨는 그 말에 괜히 물어봤구나 싶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할머니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한 남자 젊은이가
“저, 아저씨. 저는 차 시간이 다 되어 이만 가봐야 하거든 요. 이 할머니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아, 네. 그 그러세요.”
“할머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아저씨한테 잘 부탁해 놓았으니까 할머니를 잘 지켜드릴 거예요.”
“하이고 젊은 양반 고맙수. 입 심심찮게 먹을 것도 주고……. 잘 가슈.”
미안해하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대합실을 나가 곧 떠나려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한 버스에 펄쩍 뛰어올랐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대합실 의자에 앉아 그 젊은이를 바라보며 다시 남은 커피를 홀짝 마셨습니다. 쌉쌀하고 달싹하고 따뜻한 커피가 목줄을 타고 주욱 내려옵니다. 그러고 보니 털보 아저씨도 보던 일을 마저 끝내어야겠다 싶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옆에 앉아 있는 앳돼 보이는 아가씨에게 부탁했습니다.
“저, 아가씨. 내가 볼일을 마저 봐야 해서 이 할머니를 끝까지 지켜드릴 수가 없네요. 할머니 자제분이 여기 마중 나오기로 했답니다. 이제 곧 올 것 같기는 한데 그때까지만 이 할머니 좀 지켜드려 주시면 안 될까요?”
아가씨는 생글생글 밝게 웃으며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가씨는 성격이 쾌활해서 그런지 할머니에게 바로 말을 걸었습니다.
“할머니, 기다리는 자제분이 여자예요 남자예요?”
“아들이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묵을만큼 묵었제.”
“호호호호, 총각이면 저한테 소개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까잉. 근데 아가씨가 싫타 칼 낀데 뭐.”
“에이, 할머니. 누가 알아요? 한 번 소개시켜 줘봐요.”
“우리 애는 장가 한 번 갔던 아들이우.”
“그래요? 아쉽네요. 그건 그렇고. 할머니, 저녁때도 다 되어가는데 배고프지 않으세요?”
“나는 개안소.”
아가씨는 대합실 안의 가게에서 빵과 바나나 우유를 사 왔습니다.
“할머니 이거 좀 드세요.”
“아이고, 안 묵어도 된다 캐도…….”
아가씨는 사양하는 할머니의 손에 포장지를 뜯은 빵을 쥐어드리고 자신도 먹었습니다.
“아고 이거 미안해가 우째노.”
“괜찮습니다. 우리 할머니도 할머니 연세쯤 되는 것 같네요.”
“하이고, 아가씨는 집에 할매한테도 엉가이 살갑게 잘 하겠구만.”
“네, 할머니. 저는 우리 할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하거든 요.”
잠시 말없이 빵과 우유를 먹었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나머지 볼일을 다 본 뒤 집에 가기 위해 다시 대합실로 왔습니다. 버스 떠날 시간이 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아직 자제분이 안 왔나 보네요.”
“아까 그 양반이구만. 인제 곧 오지 싶습니더.”
잠시 뒤 할머니의 아들인 듯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기름때 묻은 일복 차림으로요.
“엄마!”
“아들아! 일 다 마칬나?”
“예. 일하다 말고 나올 수가 없었어요. 너무 오래 기다렸제요.”
“아이다. 쬐끔 밖에 안 기다맀다. 내가 시간 맞차가 안 오고 쫌 일찌감치 와가 그렇제 뭐.”
할머니와 아들은 손을 맞잡고 싱글벙글했습니다.
“옆에 있는 이 아가씨가 빵도 사 주고, 이 아저씨가 매실차도 사 주고 해서 잘 기다리고 안 있었나.”
아들이 아가씨와 아저씨를 보고 공손히 허리 굽혀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아고 아가씨는 복 받을 깁니데이. 아저씨도요. 참말로 고맙습니더.”
할머니도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할머니, 잘 가세요. 그리고 건강하시고요.”
털보 아저씨는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할머니의 아들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어머니 잘 모시고 가게. 오늘 아들 기다린다고 무척 힘드셨을 거네. 잘 가게. 어머니, 잘 가세요.”
털보 아저씨는 한 손으로는 보따리 들고 한 손으로는 서로 꼭 잡고 대합실 밖 시내버스 정류장 쪽으로 다정히 걸어가는 할머니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날은 쌀쌀했지만 마음은 참 따뜻했습니다. 자신도 그 사람들 사이에 끼일 수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해지기까지 했고요. 그동안 쌓였던 마음 피로까지 싹 가시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할머니를 지키던 앳된 그 아가씨가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았습니다.
털보 아저씨도 떠나려고 엔진 시동을 걸고 있는 버스 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32쪽)
엄마 냄새
이호철
내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쯤입니다.
이른 봄 햇볕 따뜻한 날 낮에 엄마가 건넌방 아궁이에 걸린 양은솥에 물을 데웠습니다. 양은솥 뚜껑을 열자 뿌연 김이 물씬 올라옵니다. 엄마는 양은솥째 덜렁 들고는 뜰앞 마당에 내어놓았습니다. 양은 대야에 부어놓은 물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옵니다. 그런데 나는 벌써 저만치 달아나 징징거리며 서 있지요.
“철아 머리 씩자.”
“흐흥, 싫다.”
“어서 오니라. 머리에 이 있다. 그라고 때도 새까맣다.”
“그래도 싫다. 전에 안 아프게 씩는다 캐놓고 아프게 안씩겄나.”
“인자 살살 하꾸마.”
“흐흥, 싫다.”
“엄마 바쁘다, 퍼떡 오니라.”
엄마는 얼굴을 찌푸리며 살짝 화난 표정을 짓습니다.
“엄마, 그라마 아프게 하지 말고 살살 씩거래이.”
“오야. 살살 하께.”
“또 박박 씩글라꼬.”
“어은제.”
“그전 때도 박박 안 씩는다 캐놓고 박박 안씩겄나.”
“야가 참말로 엄마 애믹일래. 빨래도 해야 되고 일이 산더미그치 밀맀구만.”
엄마는 눈을 흘기고 입술을 깨물었어요. 화가 더 난 표정이지요.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살살거렸어요.
“엄마, 이번에는 진짜로 아프게 하지 마. 응?”
“응.”
“참말로?”
“응, 그래.”
“진짜?”
“응.”
이렇게 해서 엄마와 나는 가까워졌습니다. 이때 엄마는 날 덥석 끌어안고는 윗 저고리를 훌훌 벗겼습니다. 그리고 왼쪽 팔로 내 머리가 물에 닿을랑말랑 거꾸로 내 몸을 달랑 껴안고 앉아 조심스레 물을 조금씩 머리에 붓지요.
나는 또 엄살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앗 뜨거! 엄마, 뜨겁다. 으아앙…….”
“어데 뜨겁노, 미지근하구만은.”
엄마는 내가 징징거리거나 말거나 머리를 박박 씻었습니다.
“아야! 아프다!”
“아프기는 뭐가 아프노, 씨원하제.”
엄마는 내 머리에서 올라오는 김을 입으로 후후 불어가면서 씻었습니다.
비누는 빨래할 때 쓰는 검정 비누. 그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 또 징징대었습니다.
“앗 따갑아라! 엄마, 눈 따갑다. 으아아앙…….”
“으이? 눈 따갑아? 가만 있어봐라.”
엄마는 깜짝 놀라며 물로 눈을 씻어줍니다.
머리를 다 씻고 얼굴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대기 시작하면 나는 두 눈은 꼬옥 감고 입은 오무려 붙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지요.
“코 팽 풀자. 킁 해라. 킁 킁 해봐.”
엄마는 내 콧물을 짜내었습니다. 나는 ‘킁 킁’ 몇 번 하고는 또 징징대고요.
“아하하하아아 아프다이잉…….”
“하이고, 이 코 쫌 봐라. 시퍼렇다. 이래 더럽은 거를 코에 낑가둘라카나. 자, 함 봐라.”
엄마 손에서 축 늘어지는 콧물을 내 눈앞에 갖다 보입니다.
목을 씻습니다. 나는 목을 자라목처럼 집어넣고
“아야아, 아프다아!”
소리 지르며 징징대지요.
“아이구우, 이 때 봐라. 이래도 안 씩글래?”
‘때’라는 말이 나오면 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아픔을 참습니다. 하지만 목은 더 움츠러들어 엄마는 씻기가 더 어려워지지요. 그러면 엄마는 이럽니다.
“야가 와 이카노. 모가지 쫌 내봐라. 때 봐라. 시커멓다. 이거 함 봐라.”
엄마는 또 손에 묻은 때를 보여 줍니다.
“아이구 이제 다 씩겄다.”
엄마는 후후 입김을 불며 맑은 물로 내 머리를 가셔줍니다. 그리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냅니다. 어느새 내 손은 엄마 젖가슴에 가 있지요. 또 이때 나는 엄마 몸에서, 엄마 입김에서 풍겨 나오는 엄마 냄새에 취해 있지요. 오직 나만이 느끼는 엄마의 사랑에 취해 있는 것이지요.
6월, 막바지 모내기에 눈코 뜰 사이 없을 때입니다. 우리 식구 모두 ‘넉박골’산골 논에 모 심으러 갔습니다. 논 다락 옆으로는 좁다란 물길이 있고 물길 바로 옆에는 물길만큼 좁다란 길이 있지요. 길 바로 옆에는 아카시나무랑 딸기나무들, 그리고 잡목이 엉켜 있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낭떠러지 아래는 깊은 산골 도랑이 있지요. 낭떠러지에는 뱀도 있습니다. 그 길을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뒤가 짜릿짜릿합니다. 또 그곳은 우리 늙다리 소가 나뭇짐이나 풀짐, 벼를 싣고 오다가 두어 번 떨어지기도 한 곳입니다. 어른들이 나뭇짐을 지고 그곳을 지나오려면 생 땀이 나는 곳이기도 하니까 아주 조심조심 지나와야 합니다.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던 어른들이 더러 굴러떨어지기도 했지요.
그날 다른 식구들은 모두 논에서 모를 심고 있고 나는 혼자 논 끝 좁은 물길에서 물장난, 흙장난하면서 놀았습니다.
“으잉? 저기 뭐꼬? 딸이네!”
길옆 낭떠러지에 나보고 오라고 손짓하듯 달려 있는 바알간 딸기. 나는 침을 꼴깍 삼켰지요. 딸기는 자꾸 나를 꼬드깁니다.
“호철아, 나 이쁘지? 나 따먹어! 새콤달콤해. 나 따 먹도 돼.어서 어서…….”
나는 그 꼬임에 조심조심 손을 뻗쳤습니다. 고 탐스러운 딸기가 내 손에 닿을 듯 말 듯. 가슴은 콩닥콩닥…….
‘쬐끔만 더, 쬐끔만 더. 그래 그래. 쬐금만 더…….’
아! 나는 그만 또르르 굴러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엄마아!”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살포시 눈을 떠보니 엄마의 치마폭에 폭 싸여 안겨 있는 게 아닙니까. 엄마가 낭떠러지 밑에서 나를 안고 나오고 있는 겁니다.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기도 하면서.
“엄마!”
나는 눈을 뜨며 이렇게 소리쳐 부르려다 그만두고 다시 눈을 사르르 감았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헐레벌떡 나를 안고 그 낭떠러지를 둘러서 길로 나오는데 엄마의 가슴은 쿵쾅쿵쾅……. 숨은 헉헉헉…….
그런데 나는 엄마 냄새에 취해 있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땀에 절어 있는 삼베 치마저고리지만 그 땀 냄새보다는 우리 엄마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냄새가 더 풍겨 나왔습니다. 나는 그 특별한 엄마 냄새에 취해 있었던 겁니다. 나는 또 그 냄새에 취해 오래오래 엄마 품에 안겨 있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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