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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세지감(隔世之感)
이 우 상
지난 해 손녀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집사람과 함께 참석을 했는데 졸업식 형식이 옛날과 엄청나게 달랐다. 숙연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그야말로 축제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5학년 후배들이 학급별로 색다른 율동으로 언니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하는가 하면 교장선생님께서는 졸업생 모두에게 일일이 졸업장을 직접 수여하면서 악수와 함께 껴안아 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와 축하를 하셨으며 특별히 졸업생 모두에게 한 가지씩 특별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았다. 백 명이 넘는 졸업생에게 졸업장과 상장을 수여하는 데만 1시간 이상 소요되는 모습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몇 년 전 어느 신문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느 학생의 아버지가 아들의 졸업장과 앨범을 구경하다가 아이들이 쓴 글모음 공책을 발견했는데.....
그 공책에는 졸업을 앞두고 주고받은 글들을 복사하여 모은 것으로 이것저것 뒤적이던 중, 흥미로운 것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20년 후의 우리선생님은 어떤 모습일까.』하는 것을 묻는 앙케트를 발견한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기상천외의 기발한 표현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하는데........
「천국, 아니 지옥으로 갔거나 늙은 할아범으로 살아 있을 것」「꽥, 저승사자」「무덤 속에서 ㄲ ㄲ ㄲ ㄲ」「늙어빠진 할아버지」「중풍+노망」「거지가 되어 우리 반 아이 집에서 살 것이다」「죽었지 뭐, 관심 없다」「관속에 계실 것이다」「뼈와 틀니만 남겠지」등등...... 연세가 많은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겠지만 이렇게 거칠고 삭막한 표현으로 여과(濾過)없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간혹 「우리 교장 선생님 같은 인자하신 분」「손자를 데리고 다니는 점잖은 분」「초박력, 멋진 할아버지 왕」같은 표현도 발견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심성이 뒤틀려있는 표현이었다. 물론 일부의 반 장난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들의 앙케트 글모음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풍속도로 생각되어 그 아버지는 착잡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졸업식만 봐도 그렇다. 사오십년 전, 60년대의 졸업식장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재학생의 송사와 졸업생의 답사는 졸업식의 엄숙한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도 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송사, 답사, 졸업식 노래가 사라진지 오래다. 중ㆍ고등학교에서는 졸업식 노래대신에 축가를 부르는 곳이 많아졌다. 오랜 기간 동안 형설의 공을 쌓고 영광의 졸업을 축하하는 마당에 어쩌면 박수로 격려하는 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이치에 더 맞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맞게 변하는 것이 더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것도 많다. 무턱대고 옛 것에 안주하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굳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심성이나 사고방식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교실에서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듣는데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손을 내리고 바로 앉아서 들으라고 한다. 아이는 아까 앉은 채로 “왜요?”라고 대꾸한다. 아이는 똑바로 앉아서 듣는 것이나 턱을 받치고 앉아서 듣는 것이 뭐가 다르냐고 선생님에게 되묻는다. 선생님은 그 말에 적절한 대답을 궁리하다가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에게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듣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머리에 잘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웃음은 어쩐지 씁쓸하고 속이 아려오게 한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청소 지도를 하면서 직접 휴지를 줍고 있으니까 아이들이, “선생님 여기도 있네요. 저기도 있네요.” 하면서 휴지 있는 곳을 지적해 주더라는 이야기는 우리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운동회 날 담임선생님이 자기반 아이에게 “엄마 오셨나?” 하니까 “또, 뭐 얻어 잡수시려고요?”라고 되묻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그것인데 이것마저 많이 변하고 있으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졸업장과 상장을 수여받은 학생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들지만 왠지 마음 한편,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칠갑산 기행
이 우 상
'병신 육갑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육갑보다 한 수를 더한 칠갑을 하러 칠갑산에 오르기로 했다. 칠갑산의 베일을 벗기기 위함이다. 가는 곳마다 연록색의 잎이 하늘하늘 봄바람에 나부낀다. 날씨 하나 끝내준다. 이렇게 좋은 날씨를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다며 교회도 안다니는 동료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서두에서도 잠깐 논했지만 칠갑산의 명칭은 어떻게 붙여진 이름일까? ‘콩밭 매는 아낙네’는 실존 인물일까? 왜 그는 하필이면 콩밭을 맸을까? 평소 가졌던 의문을 오늘 해결해 보기로 했다. 이런 예지력을 가진 그 결단자(?)에 대해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느낀다. 오전 7시 30분까지 우리 집에 모이기로 했는데 박장로가 늦는 바람에 8시기 넘어서야 출발했다. 오늘 같은 날은 칠갑산 테이프 하나쯤은 챙겼어야 하는 건데 아무도 그런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나보다. 모두들 큼직한 배낭에 먹을 것만 준비한 모양이다. 전국의 경치 좋은 곳만 골라 찾아다니는 사진작가, 지인의 친절하고도 알뜰하게 챙겨 준 여행 코스 안내 약도를 들고 대충 계획을 세웠다. 일단 경부 고속도로에 올려 옥천, 판암을 통과, 서대전을 거쳐, 유성을 빠져나가 공주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칠갑산은 공주와 청양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정확히 말하면 충남 청양군 대치면 대치리와 청산면 마치리가 접하고 있는 산이다. 1시간 30분쯤 지났을까, 우리는 유성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공주방면으로 향했다. 일반 국도인데 고속도로보다 오히려 시원하게 뚫렸다. 그런데 눈이 번쩍 띄는 현수막이 웬 말인가? '전화데이트‘ 현수막, 전화번호가 새겨진, 안내 현수막이 길 가에 버젓이 붙어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굴절될 수 있을까 싶다. 10시 20분, 한치 고개 정상에 위치한 칠갑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조그마한 광장에는 칠갑산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콩밭 메는 아낙네 상'이 있다. 베적삼에 호미를 든 아낙네의 모습이 소박하게 와 닿는다. 이 아낙네상은 두 군데에 있는데, 하나는 인도 바로 옆에 혼자 서 있는 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칠갑산장 오른쪽의 리어카 위에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잡고 있는 아저씨와 나란히 서 있는 상이다. 아낙네는 일하는 모습인데 남편은 두루마기를 걸친 한량의 모습이어서 어쩐지 어색하다. 칠갑산장에서는 '칠갑산' 노래가 흘러나온다. 예상대로 칠갑산 노래비가 우리를 반기고 있다. 작사, 작곡: 조운파, 노래; 주병선,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짓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다.」칠갑산 자락 어디를 봐도 콩밭은 보이지 않고 노래비만 우리들 가슴을 적시고 있다. 칠갑산장이 길손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칠갑산 고갯마루에 주차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곳 광장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니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이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최익현 선생은 고향인 경기도 포천을 두고서도 이곳 청양 땅에 와서 의병활동을 벌인 공을 기념하기 위해서인 듯 싶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이몽학이 칠갑산을 근거지로 하여 봉기하여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다. 3 1운동도 유독 이 고장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고 하는데........ 불의 앞에서 떨쳐 일어나 분연히 항거해 왔던 이곳 주민들의 기질은 칠갑산의 정기 때문인가 싶다. 혼자서 외롭게 산을 지키고 있는 최익현 어른이 왠지 외로워 보인다. 10시 50분, ’한국 제일의 청정지역으로 지정‘이라 쓴 팻말에 큰 기대를 걸고 산행을 시작했다.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즐길 수 있는 소개 된대로 청정 코스다. 가족 등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흙이 보드랍고 길이 완만하여 초보자들에게도 매혹적인 길이다. 완만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소나무 사이사이에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려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작은 키의 진달래는 특별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봄 산의 격조를 한층 높여준다. 속은 비어 있으면서도 겉만 번지르하게 치장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기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돋보이는 진달래의 교훈은 산이 준 또 하나의 가르침이리라. 칠갑산의 유래는 이렇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하늘과 산악을 숭앙하여 왔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 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가졌다. 이 산 이름을 만물 생성의 칠대 근원인 칠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자로 하여 칠갑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칠갑산에 오르는 길도 7곳으로 했다고 하는데 사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일곱 자락의 능선을 거느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월요일인데도 제법 등산객들이 많은 걸 보면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가 싶다. 몇 걸음 앞에 대학생인 듯한 여학생 두 명이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면서 산행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온 산이 연녹색 잎을 다투어 밀어내느라고 정신이 없는 듯하다. 사실, 일 년 중 요즈음의 나뭇잎 색깔이 가장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정상 약간 못 미쳐서 그래도 등산 기분이 좀 날 정도로 로프를 설치해 놓고 있다. 11시55분,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헬기장과 산불 감시 초소 등이 있고 ’해발 561m‘라는 표지판이 약간 실망을 안겨 준다. 주변을 살펴봐도 머리에 수건을 둘러 쓴 콩밭 매는 아줌마가 있을만한 곳이 없다. 칠갑산, 정상에 올라보니 비록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그래도 주변의 다른 산들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높아 주변의 산들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
사방에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을 품에 안은 안온한 산이다. 1973년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단다.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여 봄에는 산철쭉과 벚꽃이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여름에는 울창한 천연림이 현대인들의 심신을 안정시켜 주며 가을에는 울긋불긋 단풍으로, 겨울의 설경은 천상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으로 다가와 사시사철 등산객들에게 독특한 묘미를 주는 명산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수백 년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칠갑산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솔바람과 그윽한 솔향기가 신선하다. 솔 잎 사이로 드러난 청잣빛 하늘이 사뭇 청신하다. 산새들의 지저귐은 음악적인 곡조로 가슴 저 밑바닥까지 울려준다. 수많은 세월을 거처 오는 동안 나무들은 숲을 이루고, 숲은 단순한 나무들의 집합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칠갑산의 유래는 이렇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하늘과 산악을 숭앙하여 왔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 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이 산 이름을 만물 생성의 칠대 근원인 일곱 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자로, 칠갑산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칠갑산에 오르는 길도 일곱 곳이라 하는데 사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일곱 자락의 능선을 거느리고 있음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이제 온 국민의 애창 속에 불려지는, 칠갑산 노래와 함께 백제인의 얼과 혼이 서린 칠갑산은 성스러운 산으로 다시 우러러 보아야 할 것이다. 칠갑산의 명칭은 원래 칠악산(七岳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큰 명산은 대부분 '악(岳)'자가 들어 있다. 설악산, 관악산, 월악산 황악산, 풍악산 등이 그렇다. 서쪽에 옛 성터가 있는데 자비성, 일명 도솔성이라 부른다. 사찰 주변이 성으로 둘러싸인 것은 전국에서 희귀한 현상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백재 왕자 또는 왕족의 교육을 하던 사찰이란 설과, 국가의 중대사 또는 외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삼국시대의 불교 전성기의 유적이라 한다. 중요한 사실은 백제시대에 축성한 도솔성은 저 유명한 우리의 신라 향가 "도솔가"와 그 명칭이 같다. 신라 유리왕 5년에 지어졌다는 도솔가는 삼국시대 시가 중 최초의 정형시로 여기에 나오는 "칠악"이 오늘날 칠갑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정산 바로 아래 나무 그늘에서 동료들 모두 정성을 다하여 싸온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하산은 장곡사(長谷寺) 방향으로 하려 했으나 다시 되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왔던 길로 내려 와서 차편으로 가기로 했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농촌 풍경을 하고 있는 잘 포장된 시골길을 20여분 달려 장곡사 주차장에 도착 절을 관람했다. 장곡사에 들어선다. 칠갑산 정상에서 뻗어나간 395봉과 316봉 사이의 송골에 자리 잡은 장곡사는 둘레가 온통 비탈이다. 이러한 지형 때문인지 절터가 좁아 건물들이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더욱 신기한 일은 대웅전이 두 개라는 점이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우(寺宇)들 사이에 남서향으로 앉아있는 것이 하(下)대웅전이요, 하대웅전 옆 50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 90도 각도를 달리하여 조용히 자리 잡은 것이 상(上)대웅전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당연히 협소한 골짜기로 이루어진 지형 때문일 것이다. 물론 상대웅전, 하대웅전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편의상 불러온 이름이고, 두 건물 다 편액에는 '대웅전'이라 쓰여 있다. 게다가 불교 교리에 따르면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모시게 되어 있으나 하대웅전에는 약사여래, 상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이 있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러한 장곡사는 국보 제58호인 철조약사 불좌 상을 비롯하여 4점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천년의 고찰이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천년을 하루같이 조용하게 지켜온 장곡사는 '아름아름 찾아왔다가 의외로 속이 꽉 찼음을 발견하고는 다음에 또 올 것을 다짐하게 만드는 절'이라고 한다. 절 앞에 있는 샘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니 간장이 서늘해진다.
화사한 봄 날씨가 마치 가을 날씨처럼 청명하다. 덕분에 사방으로 펼쳐지는 전망을 시원스럽게 볼 수 있다. 칠갑산이 만들어낸 물줄기는 굽이쳐 흘러 백마강에 합류한다는데..... 산중에 일곱 군데의 명당자리가 있어 칠갑(七甲)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그 일곱 명당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장곡사 쪽에서 오르는 등산길이 매우 낭만적이라 하는데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토산품 파는 아줌마로부터 향토 된장 한 병 구입하고 오는 길에 파크 호텔 찜질방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메기 매운탕 한 그릇으로 오늘 등산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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