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버스 정류장 옆 공터에는 할머니가 앉아 있다. 그녀는 허리 굽은 노인들이 의지 삼아 끌고 다니는 유모차에 깔개용 보루 박스와 이것저것 푸성귀를 싣고 며칠에 한 번씩 나와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어떤 날은 볼품도 없는 애호박에 상품성도 없어 보이는 무 몇 개를 놓고 바쁘게 길 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오랜 장마 탓으로 마트에서 파는 채소류 가격이 다락까지 오른 뒤부터 그녀가 파는 상품도 바뀌었다.
꼬질꼬질하게 묶은 깻잎과 쉼 없이 손을 놀려 껍질을 벗긴 고구마 순이 주종이었다. 곁에는 아이들 손가락만 한 앳된 햇고구마 몇 개도 놓여 있다.
어릴 때 먹어본 고구마 순은 특별했다. 김치를 담가 먹을 채소가 귀했던 여름이면 언제나 밥상 한 귀퉁이에 고구마순 김치가 있었다. 찝찔하면서도 고소한 생멸치 젓갈에 풋고추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담근 김치는 맛깔나고 깊은 풍미(風味)를 지녔다.
소금에 절이지 않고 겉절이 하듯 담가 그런지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 생기면서 질겨지지만 만들자마자 먹으면 아삭한 식감(食感)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특히 이즘 한참 익어가는 제피 열매를 갈아 넣으면 고구마순 김치의 알싸하고 톡 쏘는 맛은 물에 만 거친 보리밥 반찬으로 그만이다.
여린 고구마 순 껍질을 벗겨 비취옥(翡翠玉) 색깔이 나도록 살짝 데친 고구마 순 나물을 들깨가루에 묻혀 먹어도 또한 별미다. 그렇다고 한참 알이 굵어질 시기에 고구마 순을 함부로 잘라 반찬을 만들어 먹을 수는 없다.
고구마 넝쿨이 무성한 이랑 이곳저곳을 다니며 솎다가는 발자국이 건드려 순이 손상되기 십상이다. 고구마 순뿐만이 아니라 순하고 귀한 것은 그만큼 취하기가 쉽지 않다.
고구마 순에는 고향의 가을이 들어 있다. 어스름 저녁이 내려앉는 가을이면 온 땅을 가리고 있던 고구마 넝쿨과 잎들도 얼핏얼핏 맨땅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고구마 잎들의 무성함으로 겨우겨우 삶을 지탱하고 열매를 맺어온 땅꽈리도 그제야 노랗고 투명한 열매 몇 개를 대궁에 매달고 서늘한 가을바람을 맛본다.
여름의 끝, 가을 초입 고향 집 근처 텃밭은 풍성했다. 늦게 심은 옥수수는 햇빛에 바랜 노인의 수염을 달고 마지막 가는 여름을 즐겼다. 대궁은 이미 잎이 시들어 쳐지면서 옅은 볕에도 윤기 있는 껍질을 드러냈다.
가끔씩 불어오는 마른 바람에 탈색된 잎들은 서걱대고 담장 아래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고추는 비껴간 태풍에 안도하며 붉고 푸른 열매를 풍성하게 매달았다.
얼기설기 싸릿대 걸친 줄을 타고 오르는 오이 덩굴은 뿌리부터 마르기 시작했지만 처녀 허리처럼 잘록한 오이를 맨 꼭대기에 매달고 잔잔히 흔들렸다. 여름이 물러가는 텃밭에서 제일 멋진 풍경은 뭐라 해도 온 땅을 거침없이 뒤덮은 고구마 줄기다.
장맛비 탓에 신선한 풀을 제때 얻어먹지 못한 배고픈 염소가 목줄을 끊고 텃밭에 들어 입이라도 대었나보다. 간짓대 가로지른 입구의 고구마 이랑은 건중건중 드러난 고구마 줄기 아래 땅이 살며시 터져 알알이 고구마가 보인다.
문득 고향 집 텃밭으로 가있던 마음을 추스르는데 길거리에서 고구마 순을 파는 할머니의 눈빛이 애절하다. 손톱 밑에 까맣게 때가 낀 할머니는 연신 고구마 순 껍질을 까면서 처연하고 가엾은 눈빛으로 말을 붙여온다.
“이봐 젊은이, 한 봉지에 2천 원이다. 마트보다 양이 훨씬 많다. 두 봉지를 사면 까고 있는 이것도 마저 주께. 남은 이거마저 팔고 집으로 가려는 데 사주면 안 될까?”
큭큭, 칠십 자리 밑 닦은 지가 언젠데 젊은이라니. 그 할머니 장사 수완이 장난이 아니네. 그러면서도 곁눈질을 해가며 슬그머니 지갑을 연다.
출근길을 나설 때 그러잖아도 집사람이 고구마 순이 보이면 한 봉지 사 오라는 말이 있었다. 얼마 전 고향 간 김에 따온 제피 열매를 으깨 넣고 고구마 순으로 나물을 해먹으면 맛도 좋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 방송에 나왔다고 한다.
오가는 길에 몇 번을 재활용한 듯 너절한 비닐봉지를 곁에 두고 푸성귀를 팔고 있던 할머니를 보았던 생각이 나서
“그래 그러지 뭐”
하면서 오늘 아침 집을 나섰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어릴 때 고향의 기억들을 더듬어 보면 고구마 밭에 농약을 치던 기억은 없다.
잎 서너 개가 달린 고구마 줄기를 메마른 땅에 묻고 주전자나 조리로 물만 충분히 주면 말라비틀어진 채 죽은 것 같았던 고구마 순은 몇 주가 지나면 거짓말처럼 살아났다. 한여름에도 고구마 줄기는 온 밭을 덮으며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다가 무서리가 내리는 가을이 되면 하루아침에 모든 잎이 얼어 그 수명을 다했다.
어찌했건 암만 부지런한 농부라도 고구마 밭에 농약을 치지는 않았으리라 속으로 되뇐 후 건강한 먹거리일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한 봉지만 사 오라는 집사람의 말을 잊은 채 4천 원의 거금을 주고 두 봉지를 덜렁 샀다.
농약에 자유로울 채소가 어디 있으려나만 자기 집 밭에서 아침에 만들어온 장 꺼리란 말에 약을 쳤으리란 의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연신 고맙다는 할머니의 공치사를 뒤로하고 집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돌아보니 이게 마지막이라 했던 고구마 순이 어디서 나왔는지 다시 껍질을 까서 까만 비닐봉지에 모으고 있다.
설마 그렇게 처연한 표정으로 순박하게 푸성귀를 팔던 할머니가 나를 속였을 리야 없다. 다 팔았다 생각하며 집으로 가려고 푸성귀 보따리를 정리하다 보니 잊어 먹은 게 나와 다시 까고 있으리라 지레짐작하면서...... 마지막 떨이를 싸게 샀으니 아내에게 자랑해야지 하며 집으로 가는 길이 오랜만에 흐뭇하다.
윤사월이 들어 유난히 무더운 초가을 오후, 지체 탓에 어줍지 않게 차려입은 양복 안에서 땀은 솟구치고 손에 붙들린 흙 묻은 검정 비닐봉지가 빠른 발걸음에 제멋대로 흔들린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얼굴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지 모르는데 의식도 않고 걷는다. 제피 열매의 알싸한 향에 버무린 고향의 맛 고구마 순 나물을 생각하니 걸음이 한껏 바빠진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하다. <끝>
월간 <한국수필> 2021년 3월호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이덕대 에세이1집 수록 작품
첫댓글 와우 고구마에는 농약을 치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자체로 하얀 진 때문에 그것으로 배추벌레 약으로 쓰기도 합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고구마 종류도 변했는지 전과 다릅니다. 밤 고구마 구하려 종일 다니다 되돌아오면서 토양이 다름만 탓합니다. 입안에 구수하고 혀에 단맛을 글 안에서 정감있게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