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헌공 모친 흥려박씨(興麗朴氏) 집안
흥려박씨할머니의 친정 부친은 어모장군(御侮將軍) 박자공(朴自恭)이다. 1500년초 울산 대복生이고, 울산박씨 시조 장무공 박윤웅(울산 일대의 호족장으로서 고려 개국공신, 흥여부사)의 후손(20세손)으로 충청감사 박추의 4세손이며 아버지가 절충장군(折衝將軍) 치장(致章)이다. 그러나 모든 관리들이 당파싸움으로 백성을 돌보지 않고 권력다툼으로 나라 꼴이 한심한 지경이라 모든 것을 버리고 웅촌면 대복 향리로 들어와 생활하였다. 아들 박지영 때 웅상 명곡 입향조로 1500년 중후반 경 웅상의 명곡으로 이거 해와 정착했다. 직계 후손으로 의병장 박홍춘, 박계숙, 박취문(부북일기) 등이 문무를 겸비해 후학 양성과 명문 가문을 형성했다.
구 비석은 유실해 금석문이 남아 있지 않고 대양 우춘 산소 맞은편에 묘가 있다.
족보에도 우춘 할아버지께서 사위로 등재되어 있다.
흥려박씨 할머니의 친정 남형제인 자공의 셋째아들 지영이 무안군수를 지낸 것으로 보아 임회 선생도 무안군수인 지영과 인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영을 통해 흥려박씨 할머니께서도 훌륭한 관해공을 알고 있었기에 아들 겸복과 겸익에게 멀리 나주까지라도 자식을 위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리 집안 6세 우춘의 족보에는 흥려박씨 형제와 부친 자공, 조부 치장, 증조 조진으로 되어 있는데 흥려 박씨 집안 족보에는 '祚(조) 로 되어 있어서 알아 보고 바로 잡아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자공(自恭) 집안 묘소는 울주군 웅촌면 대복리 산8-10으로 산 등성이에 있으며 함양 울산간 고속도로 공사로 인하여 일부 들어간 상태이다. 우리 우춘 할아버지의 묘소는 대복리 산 3-7번지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사돈 간에 죽어서도 이웃할 만큼 서로가 그만큼 돈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공(自恭) 집안 묘소는 울주군 웅촌면 대복리 산8-10으로 산 등성이에 있으며 함양 울산간 고속도로 공사로 인하여 일부 들어간 상태이다. 우리 우춘 할아버지의 묘소는 대복리 산 3-7번지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사돈 간에 죽어서도 서로가 마주 볼만큼 돈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흥려박씨 명곡 자공의 아들 지영(之榮)의 무안군수공파 후손들이 명곡에 귀후제(歸厚齊)를 지어 후손들이 선조 봉양을 해오고 있다.
울산박씨 명곡군수공파 내력은 다음과 같다.
울산박씨는 신라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장무공(將武公) 윤웅(允雄)이 고려 개국공신으로 흥려백(興麗百)이 됨에 따라 울산에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흥려(興麗)는 고려를 부흥케 하였다는 뜻으로 부여된 지명이며 웅상지역을 포함한 울산 일대 지역 이었다. 당시 조정으로부터 받았던 식읍지 가운데 강동 앞바다의 곽암(藿巖)에서 나는 미역 채취권을 지금까지 울산박씨가 갖고 있으니 그 연원의 오래됨과 줄기차게 명맥을 이어온 자존감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고려가 망하자 울산박씨 시조 윤웅(允雄)의 16세손 충청감사를 재임하던 추(諏) 께서는 관직을 버리고 울산 범서로 내려와 절개를 지켰다.
세상에서 그를 사은선생(沙隱先生)이라 불렀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며 삿갓을 쓰고 미음만 드시다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이야기가 아직까지 구전(口傳)된다.
17세손 의생(誼生)께서는 훈련원 참군(訓練院 參軍)을 역임하시고 18세손 조(祚)께서는 진의 부위(進義副尉)와 참의병조참판(參議兵曹參判)을 역임하시고, 19세손 치장(致章)께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하시고, 20세손 자공(自恭)께서는 충순위(忠順衛)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하시고, 배위 분은 창원(昌原)박씨 이시며, 21세손이신 지변(之抃) 지간(之幹) 지영(之榮) 지화(之華) 네분 아드님과 한분 따님 (사위 학성 李遇春)을 두셨다. 3번째 아드님이신 지영(之榮)께서 명곡(명동)에 입향하셨다.
지영(之榮)의 자(字)는 중발(仲發)이고 1524년 울산에서 출생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글재주와 무술에 뛰어나고 도량이 넓고 용맹스러웠다고 한다. 명종때 벼슬길에 올라 수우후(水虞侯)와 무안군수(務安郡守)를 역임하시다 당시 관리들이 파당을 이루어 싸움 질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1560년경 명곡(명동)에 정착하셔 후진들에 문무를 양성하며 1590년에 일생을 다하셨다. 배위분은 동래정씨이며 현감 덕령의 따님이시다.
국가에 위기가 처하면 구국전선에 나아가는게 백성된 도리라는 평소 훈화를 해왔고 이를 실행한 친척들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앞서 의병으로 출병한 분들은 지영(之榮)의 아드님 21세손이신 홍남(弘) 조카 홍춘(弘春) 사위 김해 김응방(金應邦) 생질 학성 이겸수(李謙受) 등이다.
의병장으로 출병한 인척들을 따라 전 문중 종원중 연로하신 노약자와 아녀자들을 제외하고는 혈기 있는 전 문중원들은 모두 전쟁에 출전했고 전선에 나아가지 못한 문중원들은 전쟁물자 공급을 위하여 모두 애를 태우고 재산을 받쳤다. 울산박씨 종원중 임진왜란시 울산지역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 종공신으로 추대되어 충의사에 배향된 분들은 12분이시다.
22세손 홍남(弘楠)의 자(字)는 경형(景亨)이시며 호는 설망헌(雪望軒)이시다.
1559년 명곡 (명동)에서 출생하시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형 홍춘(弘春)과 인척들과 협력하여 의병을 일으켜 전선으로 돌진했다. 문천회맹에 참가하고 남산전투 영천성 수복전과 경주부 성 탈환전에 큰 공을 세우셨다. 군 직위는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였다. 직위에 연연하지 않고 구국일념으로 임하셨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후진양성에 매진하시다 1636년 향년 78세의 연세로 하세하셨다. 배위 분은 경주김씨이시며 선공감봉사 응권(應權)의 따님으로 1560년에 출생하셔서 1585년에 하세하셨다.
문중에서는 국가에 충성하고 향토에 이바지한 공을 기리기 위하여 귀후재 (歸厚)를 건립하여 배향하고 울산 충의사와 양산 충렬사에 배향되셨다.
아드님을 보시지 못해 종제 홍신(弘信)의 아드님 23세손 계룡(繼龍)을 양자로 입양하셔 24세손 의관(義寬) 의성(義成) 의한(義漢) 의길(義吉) 네 분의 아드님을 낳으시고, 의관(義寬)의 아드님은 25세손 동우(東羽) 동익(東益) 동석(東碩)이시며, 의성(義成)의 아드님은 25세손 동주(東柱), 의길(義吉)의 아드님은 25세손 동헌(東憲) 철주(喆柱) 이시고, 동우(東羽)의 아드님은 26세손 창준(昌俊), 동익(東益)의 아드님은 26세손 창세(昌世), 동석(東碩)의 아드님은 26세손 창윤(昌潤), 동주(東柱)의 아드님은 26세손 창대(昌大), 동헌(東憲)의 아드님은 26세손 창민(昌敏), 철주(喆柱)의 아드님은 26세손 창수(昌守)이시다. 이 자리에 모셔져 있던 분들의 묘지 상태가 불비하여 문중회의에서 결의하여 2018년 청명 한식을 기해 묘역을 정비함과 동시에 매곡에 모셔져 있던 명곡 입향조 21세손 지영(之榮) 내외분 묘소 24세손 의길(義吉) 내외분 묘소 웅촌면 덕현리 복골에 모셔져 있던 25세손 철주(喆柱) 내외분 묘소가 너무 먼 첩첩산중에 소재하고 산짐승들의 심한 장난질이 잦아 이곳 묘역 내에 모시게 되었다. 지영(之榮)의 매곡 묘소에 건립되어 있던 비석은 버리고 글 내용은 그대로 옮겨 새로 세웠다. 이 묘역을 정비함에 의길(義吉) 할아버지 음덕(蔭德)이 큰 힘이 되었고 앞장서 많은 노력을 한 분은 문중회장 34세손 주화(注華 일명 華植), 직전회장 32세손 도중(渡重 일명 渡鎮) 총무 33세손 석수(石銖)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비문 지은이 33세손 극수(克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