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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뜻을 앞세우는 자(1902.2018.3.25.종려주일)
마26:36-46
할렐루야!
오늘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감하는 한주간의 시작인 종려주일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환영했던 것에서 유래되어 종려주일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40일 금식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공생애 마지막을 겟세마네 동산 기도로 마무리를 하셨습니다. 그때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 가롯 유다를 제외한 11명 제자 중에 딱 3명만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이것입니다. 내 뜻 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 기도는 십자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행하신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말하는 ‘이 잔’은 당시 유대인들의 은유적 표현으로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문제를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주님은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은 앞세우고 계신 것일까요?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새워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으며 또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감람산 남쪽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데 제가 96년도에 성지순례 때에 이곳에 가서 예수님께서 엎드려 기도하셨다는 바위가 있는데 나도 그 바위에 엎드려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사실은 엎드려서 포즈를 위하면서 ‘주여’ 하고 기도를 하려니까 눈물이 복받쳐 엉엉 울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주님은 바로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기 사진 두 장이 96년도에 성지순례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큰 바위가 있고 거기에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겟세마네의 이름의 뜻은 ‘기름 짜는 틀’이란 뜻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피와 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심으로 우리들은 이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번에 갈릴리 여행사 사장님이 전화가 와서 우리 지방 목회자와 다른 지역 평신도 합해서 25명이 한 팀이 되어졌는데 인솔해서 다녀오라고 하고, 4월 5일 미팅을 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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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고민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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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중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셔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몇 시간 후면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실 주님! 그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심혈을 기울인 최후의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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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44절‘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피와 땀을 흘리시며 하신 기도는 막14:36절‘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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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신성도 있지만 인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고통을 아시기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37-38절‘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너무 힘들어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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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본 영화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입니다. 멜 깁슨이라는 영화감독이 자기 사재를 털어 만든 영화인데 우리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장면을 실감있게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엄청난 수모, 모독, 채찍과 멸시의 고통을 묵묵히 견디어 내시는데 그것이 누굴 위해서입니까? 나의 죄 값 때문입니다. 내가 지은 죄 값을 대신 치르시는 예수님의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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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고통을 아시기에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시옵소서’하시면서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이 피 흘리시며 기도하신 것이 자신의 소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기도였기에 오늘의 우리들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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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꿈에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오시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얼마나 열광적으로 영접을 하고 환영을 하였습니까?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십니까? 이 시간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요즘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면 십대 청소년들은 깜박 자지러집니다. 온통 괴성을 질러대며 손을 흔들다 못해 온몸을 흔들고 어떤 학생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엉엉 우는 학생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선수가 나와서 이상한 몸짓만 해도 그들은 괴성을 질러댑니다. 펄쩍 펄쩍 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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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우리들은 그 예수님이 바로 나 때문에 내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데도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얼마나 소리쳐 찬송을 불러보았습니까? 얼마나 목 노아 울어보았습니까?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하여 감당할 수 없어 몸부림쳐 본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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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당하신 죽음의 고통은 나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와 나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이 고통을 우리도 똑 같이 느끼고 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나와 별개로 여겨오는 큰 실수를 해왔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마치 극장에서 구경하듯이 관망만 하고 지나버렸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고난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 예수 믿고 축복 받고, 잘 되는 데만 치중해 온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또 예수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라고 가르쳐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느끼면서 아파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할 때에 ‘내가 당해야 될 일을 예수님이 나 대신 지금 당하시는구나’그러면서 나도 같이 아파하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릴 때에 나도 눈물을 흘려야 하는데, 나와 별개로 생각하다보니까 예수님이 고민하고 슬퍼해도 나에게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고, 아무런 감동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이 지나면 모든 고난을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죽음이요, 예수님의 슬픔은 내 슬픔입니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이런 고통과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만 당하는 사건이 되어서는 안 되고, 나도 같이 당하고 동참해야 될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갈 2: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이 내 것이 될 때에, 나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내가 깊이 참여할 때에, 나를 상대방에게 다 줄 수 있습니다. 생명까지도 다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고난에 깊이 참여할 때에,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서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고난에 참여하여 상대방에게 주면 베푼 것은 베푼대로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상주감리교회의 희망을 여기서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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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관객이 되어서 구경만 하면 안 됩니다. 그 고난에 내가 깊이 동참하고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고난이 와도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할 수 있고, 사랑을 줄 수 있고, 참아낼 수 있는 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무엇입니까? 가난입니다. 그것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너무 힘들어서 피할려고 하다가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가난의 짐이 너무 힘듭니다.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가난을 벗어날 일을 물어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있는 고통이 질병의 고통입니까? ‘주님, 나는 잔을 옮기고 싶은데,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잘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고통을 이길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고난주간에 겪으신 주님의 고난에 나를 깊이 일치시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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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절입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이는 진실로 주님께서 최대의 비통함을 고백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 후 십자가에 달리신 후 마27:46절‘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 바 이 비통의 부르짖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고백과 같은 비통을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을 묘사할 때 히5:7절‘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를 올렸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고민과 슬픔, 그리고 고독해하신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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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진실로 고독하셨고 슬퍼하셨고 고민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오신 분으로 인간으로서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어찌 고민과 슬픔 그리고 고독이 없으셨겠습니까? 죽음을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는 일찍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는 담대히 책망하셨으나 눈물 뿌려 우는 자에게는 동정과 눈물을 아끼시지 아니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고민하셨다고 해서 그의 신성에 하등의 손상이 있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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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이같이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죄악을 한 몸에 지니시고 십자가를 지시려는 고민과 슬픔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무서운 죄악으로 멸망당할 것을 생각할 때 어찌 고민이 없으며 어찌 슬프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지금 인생의 모든 고민과 슬픔을 한 몸에 지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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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사53:5절‘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이 연약한 고민과 슬픔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히5:2),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고민과 슬픔을 한 몸에 지니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 오늘도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위로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히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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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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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기도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죄도 없습니다.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왜 기도했을까요? 능력이 없어서 입니까? 죄가 많아서 입니까? 왜 예수님이 울면서 고민하고 슬퍼하면서 온 몸에 땀이 젖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 하였을까요? 십자가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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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인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힘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려고 하면 예수님이 가진 무한한 영광, 하나님의 아들과 능력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다 당해야 합니다. 이런 고난과 조롱과 수치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면 기도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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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중요한 때가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기도의 때를 놓치지 말고 꼭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종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이유는 기도해야 될 순간에 기도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험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기도가 뒷받침이 되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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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겟세마네는 별도의 독립된 산(山)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하지만 사실 동산도 아닙니다. 예루살렘 동편과 감람산 서편이 만나는 곳에 깊은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을‘기드론 골짜기’ 라고 합니다. 기드론 골짜기에서 감람산 서편을 조금 올라가면 중턱에 ‘겟세마네’라 불리는 지역이 나옵니다(요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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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부근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던 감람나무(Olive tree)의 열매에서 기름을 짜는 ‘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께서 자주 기도하러 가시던 곳이었습니다.(눅22:39~40, 요18:1~2) 예수님께서는 ‘기름 짜는 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면서 자기 몸의 진액을 짜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눅22:44절‘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얼마나 절박하게 간절히 기도했으면 땀이 피방울 같이 되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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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신 사실에 대하여는 공관 복음 세 곳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엎드려 기도하였다고 하였고(막14:35) 누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기록하였고(눅22:41) 오늘 본문 39절 말씀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다 정성을 드려 간절히 그리고 겸손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함께 동행하였던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심정은 아랑곳없이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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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제자들이 시험이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도를 해야 할 때 기도를 안하면 무서운 시험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하여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실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할 상황이 되어서 기도를 요구하시는데 기도를 못하면 감당키 어려운 문제가 닥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에게 기도를 요청하실까요? 받은 은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주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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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를 행할 때도 제자들 중에 아무도 따라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엉뚱하게 구레네 에서 온 시몬이란 사람이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야 비로소 요한이 급히 달려와 예수님은 그 요한에게 모친 마리아를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아무도 십자가를 대신 진 제자도 없고 장사를 지낸 이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시험에 빠졌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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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2:9‘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리라’잠든 제자를 깨우시던 주님은 마지막 기도를 하십니다.‘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이는 육체를 가지신 주님으로서 죽음의 고통을 앞에 놓고 본능적으로 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승리의 기도요 인간의 뜻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바른 기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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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도는 이제는 어찌 할 수 없어서 하는 기도가 아니요 또 어떤 불만이 있어 하는 기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억지로 하는 기도는 더욱 아니고, 패배자의 넋두리가 아니라 승리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을 때 절망하고 원망하고 마는 버릇이 있는데 이제 어떤 일이 있던지 오직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신앙으로 이제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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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디든지, 언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우리는 유다처럼 등을 보이는 배신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변함 없는 믿음, 변함없는 사랑, 변함없는 순종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변함없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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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하실 때 제자 8명은 산 아래에 두시고, 세 명의 제자는 중간에 두시고, 당신은 맨 앞에 나가 기도하신 일을 어떤 주석가들은 성전의 식양으로 해석을 하여 성전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두고 지성소에 들어가신 주님의 기도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하여간 주님은 제자들의 자리를 지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맡기신 신분과 위치와 사명(使命)을 각기 깨달아 있는 자리에서 자기 책임에 대한 충성함이 마땅한 줄 믿습니다. ‘깨어 있으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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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바로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고전16:13). 제자들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사56:10). 깨어 주위를 사주 경계하는 성도는 하나님과의 통신망을 바로 구성하는 법입니다. 곧 기도입니다(골3:1-2) 그런데 제자들은 여기서 그대로 실패하고 잠만 자고 말았습니다. 육이 약하고 눈이 피곤하였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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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이 위기 상황에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그대로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직분을 지키지 못하고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잠에 취해 있는 제자들을 급히 깨워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엉뚱하게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마침내 제자 중 어느 하나도 잡혀가는 주님을 위해 내가 대신 잡혀가겠다고 나서는 제자 한 명도 없이 다 흩어져 달아나고 말았으며 나중에는 주님을 부인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깨어서 바로 따르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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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사탄의 최후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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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6:41절‘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다시 명하셨습니다. 기도해야 하는 큰 이유는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무너질 때, 실패할 때, 절망할 때가 언제입니까? 시험에 들 때입니다. 시시하고 별것 아닌 작은 일들이 시험으로 다가와 우리들을 크게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별 볼 일 없는 시험거리들이 기도를 막고, 사랑을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막고, 결국 믿음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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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해서 유혹하여 타락시켰습니다. 그 유혹은 선악과를 먹어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선악과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습니다. 즉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 같고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뱀의 말이 오히려 더 합리적이고 그럴듯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말라는 유혹이 강하게 그들을 이끌어 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믿어서는 안 될 사탄의 말을 믿은 대신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타락이고 범죄이며 인류 비극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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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겪으신 최초의 유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0일을 주리신 후에 유혹하는 마귀가 나타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배불리 먹으라는 것과 성전 위에서 무사히 뛰어 내림으로써 신비한 마력을 발휘해 보라는 것과 천하만국의 권세를 누려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유혹을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물리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께 왔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자체이시며(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에게(요1:14) 말씀을 떠나라는 것은 주님의 주님 됨을 부정하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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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마지막 유혹이 왔습니다. 그 유혹은 하나님 뜻보다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유혹이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유혹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기 뜻에 따라 죽음을 면하고 십자가를 피하고 살고 싶은 욕망이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결국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유혹을 받아 들였더라면 십자가의 죽음 대신 편안한 생활을 더 오래 누렸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유혹을 물리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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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있는 유혹이 어떤 것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계획을 따르라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평안과 안일과 성공을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 다투어 무신론자가 되며 신앙인마저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를 높이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신앙을 도구로 삼는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우리가 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우리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로 이 최후의 유혹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자가 신앙의 승리자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깨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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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자라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깨닫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망설이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사소한 것을 심각하게 여기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알지도 못하고 그 은혜를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왜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이나 퍼져 자고 있는 것일까요? 주님의 마음도 몰랐고 십자가 구속의 의미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서는 안 될 자리에서 퍼져 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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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포지션에 있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주님을 따르며 섬기며 사는 삶을 위해 대가지불을 힘들어 하는 것일까요? 모두가 주님의 가치와 주님이 베풀어주신 구속의 가치를 알지 못하니 나오는 행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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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명이 뭔가를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왜 세상에 보내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분명한 사람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명이 뭔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길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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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러분은 이 땅에 태어났습니까? 왜? 하고 많은 나라 중에 대한민국에 태어났습니까? 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아내를 만났습니까? 왜? 하고 많은 직장 중에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 단순히 우연히, 어쩌다가, 팔자가 사나워, 라고 생각한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 사명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명을 감당하고 있어야 할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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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가신 길을 가게 해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십니다. 이것은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힘써서 기도하시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땀이 피 방울 같이 되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의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간단히 할 수 있는 것도 있으나 때로 목숨을 걸고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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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떤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네게 맡기신 그 일입니다. 그것이 크던 작던 그 일에 목숨을 걸면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대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적당히 라는 말도 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한 번도 대충 일하신 것이 없고 적당히 하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완벽하고 철저하게 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뜻이 뭡니까? 죽을 때까지/ 죽을 만큼/ 목숨 걸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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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려주일에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앞에서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내 뜻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성도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처럼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 같으나 내 뜻만 내려놓으면 간단한 것입니다. 내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 고집하지 말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받드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책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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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입니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를 부르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이 못 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며 배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절대로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주님은 나와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쓴잔을 받으셨고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고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을 하였다가 자신의 것을 포기하여야 할 것이 많은 것을 알고 동행을 포기하거나 일단 처음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광의 길인 줄 알고 따르다가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을 보고 모두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기로 하였다면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동행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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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십자가가 결코 고난의 길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십자가, 예수님이 먼저 지고 가신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통로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듯이 오늘의 십자가의 고난은 내일의 부활의 영광을 위한 기경과 파종과 같은 농사의 땀 흘림의 수고입니다. 땀 흘림의 수고를 포기하는 것은 기쁨이 추수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를 피 흘리시며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길이 아니라면 절대도 함께 하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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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에 서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언덕, 골고다로 올라갈 때에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던 모든 사람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제자라고 자랑하던 이들은 모두 도망가고 베드로는 자신은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숨어버렸습니다. 신나는 순간에는 함께 하던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순간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듯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때로 일이 잘되고 신이 날 때는 친구가 넘치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곁에 선 자가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의 순간,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도 함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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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주님을 묵묵히 따르며 섬기던 여인들이 스스로 어찌 할 수 없음을 슬퍼하면서 울고 따랐으며 평소에는 한 번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따라야 했습니다. 절망의 고난의 순간에도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적지만 있었습니다. 저는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되신 성령님은 우리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을 살라고 우리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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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사람은 위기의 때에 알아보는데 말없이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함께 하면서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일이 없고 누림이 있을 때는 모두 동행할 것처럼 보이다가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야 할 시기가 오면 많은 핑계를 대고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고 영광을 드러나는 것처럼 보일 때 사람들은 많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난의 때가오니 열심히 앞장서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떠날 때 그 때도 변함없이 고난의 주님을 따르던 사람이 있었고 돕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고난의 때를 보면서 고난의 순간에 가져야 할 바른 자세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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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어 주어도 됩니다. 여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에게 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법정에 세우는 대제사장이나 빌라도에게 대항할 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끌고 가는 병사들에게서 예수님을 빼낼 능력도 없었습니다. 단지 슬퍼하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칠 힘이 없어서 자신의 가슴밖에 칠 수 없었습니다. 그녀들은 그 고난의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주며 함께 기도해 주었던 분들이 기억이 납니다. 성전을 지으며 헌금할 돈이 없다고 빈 터에서 함께 밤을 새우며 기도해 주던 성도들, 헌금은 못해도 새벽은 지키겠다던 성도들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곁에 있어 주어도 됩니다. 고난의 자리에 눈물로 함께 하던 여인들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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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우리 가슴에, 우리 상주감리교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내 가슴으로 뜨겁게 믿어야 합니다. ‘그럴 것이다’라고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그렇게 생각지 말고 이 사실이 믿어져서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감동과 감격과 고난의 십자가를 체험하는 고난주간이 되도록 아침 한끼식이라도 금식하며 기도하고, 금요일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아침, 점심 두끼를 금식하며 기도하시는 것도 좋고, 오락을 금하고 주님을 많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고난주간에 새벽기도라도 하시고, 고난주간을 무의미하게 보낼 것이 아니라 독소리가 자기의 발톱, 털, 부리를 뽑아내는 것 같이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아서 새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