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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동냥 쪽박이 깨져야 구원이다>의 줄거리:
동냥은 못 줘도 쪽박은 깨지마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구를 들어주어 도움을 주기는커녕 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행하신 구원사역은 동냥은 안주시고 쪽박은 깨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참으로 숱한 신앙의 오해가 발생합니다.
동냥 쪽박이 깨져야 구원이다
(마8:18-27)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동냥 쪽박이 깨져야 구원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동냥은 못 줘도 쪽박은 깨지 마라’는 속담을 다들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요구를 할 때, 그 요구나 간청에 대해서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그를 더 해롭게 하지 말라, 그 사람의 상태에서 더 큰 장애물을 앞에 놓지는 말라는 그런 뜻이지요.
일제강점기 때에 밀양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이다 해서 아리랑이 많이 있는데, 그 아리랑의 가사를 개사해서 부른 노래인 <신아리랑>의 가사 중 5절에 이런 말이 있어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문전옥답은 다 어이하고 동냥에 쪽박이 웬 말인가’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난 때 받았던 경제적 빈곤함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메시아로 오셨는데, 그 구원이 우리들에게 쪽박을 깨시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예수님의 쪽박 깨기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마태의 인싸이트에 걸려든 거예요.
‘아,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그 구원이 어떻게 내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면 나에게 있어서 내 쪽박을 깨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본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그룹 사이에서 두 제자가 나타나며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 따르겠다는 서기관의 결단에 대해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신 것으로 서기관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지 않은 것이 21절에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이 또 한 사람은 앞에 있는 서기관이 제자그룹에 속해 있는 걸 전제로 한 말입니다.
‘또 한 제자가…’ 서기관도 제자그룹에 지금 현재 속해 있는 자입니다.
그 점을 명심해서 볼 때에, 이 두 가지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동냥을 주러 오신 게 아니라 쪽박을 깨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쪽박 깨기에 이어서 풍랑을 잠잠케 해주신 이야기가 연달아 기록됩니다.
이것은 실지 일어난 사건을 시간적으로 배열한 게 아니에요.
마태는 예수님과 연관된 사건과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끌려가는 자기나름대로의 주제를 따라서 사건들을 배열해나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을 보는 시각은 십자가사건을 경험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기록해나가고 있는 겁니다.
자, 이럴 때, 이 이야기를 우리가 왜 ‘쪽박 깨기’로 이해해야 되는 것이며, 또 ‘쪽박 깨기’라고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구체적으로 갖는 것인가? 궁금합니다.
여러분,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을 합니다.
이 사건에서 서기관의 예수 따름에 대한 오해와 예수님의 답변 속에서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의 실상이 서로 교차합니다.
오해가 있고 실상이 있다는 것이에요.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그룹에 속했다는 것만 해도 예수님의 선교의 쾌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첫 번째 적대세력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 이런 그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제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바로 쾌거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말에 대해 칭찬을 하고 기뻐하시고 환호하시면 좋은데, 찬물을 확 끼얹어버리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얘기하십니다.
자, 이 짧은 대화 속에 엄청나고 치명적인 신앙의 오해가 들어있다는 것이에요.
먼저 그 오해의 기미를 우리가 알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랍비여!’ 하고 부릅니다, 선생님으로 불러요, 그야말로 자기를 제자로 자칭합니다.
이 제자라는 것은 연초에 우리가 함께 말씀 가운데서 얘기했듯이 스승을 통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잡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완성된 뒤에는 스승이 있는 곳으로부터 하산해서 스승을 떠나게 됩니다, 자기완성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러나 선생이라고 부른 서기관의 이 결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하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여기서 ‘인자’라는 말은 메시아 호칭입니다.
‘선생님이여, 나는 선생님을 통해서 ‘나’를 완성시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생님을 따라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네가 나를 선생으로 알면서 나를 통하여 너를 완성시키려고 하느냐? 너의 인격을 완성시키든 너의 인생을 완성시키든 그런 뜻으로 나를 좇겠다고 하느냐? 유감이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머리 둘 곳이 뭡니까?
‘마음을 붙이고 안식할 만한 처소 하나 없이 살아갈 텐데, 네가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죠.
여러분,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서기관의 결단을 한번 들여다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마태는 들여다보는 거예요.
‘왜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을까?’
서기관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선생인 예수님을 통하여 무엇을 완성하려 하는가를 예수님이 보신 것이지요.
자, 서기관이 어떤 사람입니까?
서기관은 사회의 지도층이고 안정된 기득권층입니다.
그에게는 존경이 따르고 궁핍하지 않은 재정적인 여건이 주어집니다.
서기관이 원하는 것은 이제 올바른 스승을 만나서 이렇게 현재 내게 주어져 있는 안정된 형편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다가 뛰어난 스승을 만나 자기의 인생을 꽃피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스승을 찾는 중에 -가말리엘도 있고 힐렐도 있고, 여러 학자들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는 중에 예수님은 도저히 그 어떤 랍비도 행하지 못하는 기적을 행하시고 모든 사람이 놀라자빠질 권세 있는 교훈을 주시는 분으로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의 평생을 따르며 자기인생의 완성할 디딤돌로 삼으려고 결단을 얘기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네가 지금 기존의 안정된 삶의 형편을 기반으로 해서 그 위에다가 나를 통해 주어지는 어떤 도움을 통해서 네 인생을 꽃피우려 하느냐? 미안하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마음을 붙이고 편안히 쉴 장소 하나 없이 나는 살아가게 될 텐데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자, 여기서 여러분, 쪽박이 뭡니까?
서기관에게 있어서 쪽박은 지금 현재 내게 주어져 있는 상황이에요, 기존의 상황.
그 기존의 상황을 쪽박으로 삼아서 거기에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동냥해서 얹음으로 인생을 꽃피우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네가 지금 기존의 안정된 상황에 마음을 붙이고 그것을 마음의 거처로 삼고 있으면서 그 위에 나의 능력과 지혜를 더하려고 하느냐?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는 마음 붙일 곳을 너에게 허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있는 쪽박, 지금 있는 네 형편조차도 네가 결코 마음 붙이고 있을 곳이 아니고 그 모든 걸 다 버려야만 나를 좇을 수 있을 것이다’
쪽박을 깨버리는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거라는 겁니다.
‘네가 지금 형편을 쪽박 삼으려고 하느냐? 그리고 내게 은혜를 구걸하고 동냥하느냐? 내가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네가 갖고 있는 기존의 상황인 쪽박까지도 깨버리게 될 것이고 너는 마음이 결코 지금 기존의 안정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와야만 될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심청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심청이 날마다 빌어온 밥이 한 쪽박에 오색이라, 흰밥 콩밥 팥밥이며 보리 기장 수수밥 갖가지로 다 있으니 심봉사 집은 끼니때마다 정월 보름을 쇠는구나!’
구걸하러 다니다 보니 쪽박에 오색 밥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집집마다 먹는 밥이 다르니까.
그러다 보니 동냥을 주는 집들은 한 가지 밥만 먹는데 반해서 심청이네 집은 그 쪽박에 오색 밥이 있다는, 참 비참한 현실을 이렇게 해학적으로 웃음을 담아서 표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 쪽박에 오색 밥을 담겠다는 거예요.
지금 기존의 현실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권세와 능력을 통하여 이 쪽박에 오색 밥을 담아서 날마다 보름을 쇠겠다고 하는 게 우리 신앙의 목표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금의 기존 현실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거기에 보태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붙이고 안식하고 싶어 하는 이 삶의 현실을 아예 마음에서 없애버리고 마음에서 깨버리고 제거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겁니다.
마태가 보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향해 가서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해서 죄 사함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예수님을 쫓는 자들은 승천하신 하늘까지 쫓아올라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마음이 이 땅에서 머리 두고 마음 편하게 쉴 곳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호전된 경제 상황 위에 마음을 편안하게 얹어 놓고 살고 싶어 합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이 땅에서 안정된 상황 위에 얹혀 지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이 땅에서 안정되게 거하기 위해 원하는 모든 쪽박을 다 깨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서 내게 주어진 기존의 현실을 바꾸려 하고 개선하려 하고 멋지게 꾸미려 하는 마음이 있는 한, 예수님을 쫓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거치고 하늘까지 따라 올라가야 하니까…, 언제, 죽은 다음에? 아니 지금.
그게 예수님 따라 가는 거예요.
예수님은 거기까지 가셨잖아요,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으니까 우리 마음이 어디든지 하늘까지 쫓아가는 겁니다.
그게 예수 믿는 거예요, 지금의 쪽박 위에 동냥 받아서 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런 식의 동냥 주시지도 않을뿐더러 쪽박도 깨버리시는 겁니다.
자, 그러면 두 번째 제자.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사를 지내는 것은 율법의 정신에 기초한 겁니다.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계명에 기초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유대사회의 아주 경건하고 훌륭한 덕으로 기려지는 예절이에요.
그런데 그 모든 예절과 풍속과 율법에 반해서 주님께서 아버지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의 서기관의 상태가 사회적, 경제적, 이런 안정된 상태를 쪽박으로 비유되었다고 한다면, 두 번째 제자는 인간관계를 쪽박으로 제시한 겁니다.
내가 예수님 만나기 이전에 갖고 있었던 인간관계의 삶의 틀에 예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를 바라며 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내가 아버지와 아들이 화평하게 하려 온 것이 아니라 서로 싸우게 하려고 왔다.’
쪽박을 깨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만나지기 이전에 이 육체 때문에 갖게 되는 이 땅의 모든 관계의 틀 - 이 관계가 채워지며 삶이 형성된 것 아니겠어요? - 이 관계의 틀을 완전히 깨버리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첫 번째 관계자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관계라는 상태가 뭘까요?
영화 같은 데에 보면 카우보이들이 들판에 뛰어다니는 야생말을 잡아서 길들이는 장면이 가끔 나옵니다.
카우보이들이 막 줄을 돌리며 쫓아가다가 그 줄을 던져서 말의 목에 감습니다.
그러면 뒤쫓아 오던 카우보이가 또 줄을 던져서 목을 감습니다.
그렇게 한 서너 사람이 야생마의 목에 밧줄을 감아가지고, 말에서 내려와 밧줄을 잡아당기며 발버둥치는 야생마를 길들이기 시작합니다.
관계라는 게 그런 거예요.
자식이라는 밧줄이 매어져 있고, 아내라는 밧줄이 매어져 있고, 남편이라는 밧줄이 매어져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밧줄이 있어서 가족부양을 위해서 나가서 돈도 벌고 직업 활동을 합니다.
자식이라고 하는 밧줄이 나를 걸고 있어서 자식을 기르고 양육합니다.
내 생각과 내 행동의 이유를 유발시키는 자들이 바로 관계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관계라고 하는 것은 야생마의 목을 잡아당기듯이 나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관계가 없는 사람은 나에게 행동을 유발시키지 않아요.
주님께서 다 깨버리시는 겁니다.
이제 너는 행동할 때에 나 때문에만 행동하라, 나 때문에만…
앞의 서기관에게는 서기관의 쪽박을 깨시듯, 안정된 삶의 현실 그 위에 예수님의 능력을 담고 싶었고 아니면 불완전하든 어떻든 간에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서 동냥을 받아서 개선시키려 하는 마음을 예수님을 좇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주어진 모든 현실 상황을 마음이 아예 떠나버리라고 마음에서 없애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 이전의 모든 관계, 그래서 그 관계로 인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오직 행동의 이유가 예수님으로부터만 나오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부모나 형제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쪽박을 깨라고 해서 가정을 깨라는 말씀이 아니죠.
내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를 거칩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예수님, 하나님아버지와 만납니다, 그리고 내 행동의 모든 이유가 거기서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자식이라고 하는 기본 틀이 먼저 있었고 나와 자식과의 기본 틀이 쪽박이 되어서 이 쪽박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오곡밥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죽어서 마음이 모든 관계를 떠나버립니다.
실지로 가정이 깨지는 현실을 연출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십자가를 통해서 승천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이 풍족해지면서 거기서 관계를 맺고 나서, 자식 앞에 나가더라도 예수님 때문에 자식 앞으로 나가는 거고, 예수님이 보내셔서 자식 앞에 남편 앞에 아내 앞에 나가는 거라는 겁니다.
즉, 이제는 주님이 먼저 내 행동의 이유가 되어서 주님으로부터 자식에게로 나가고, 마치 파송된 자처럼…
이게 바로 주님을 따르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아래의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이 사건을 왜 여기에 갖다 붙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주무신다’라고 하는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하신 말씀이 뭡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너무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뒤에 성경 전체에서 주무시는 모습을 유일하게 묘사한 부분이 바로 이어 나옵니다, 깜깜한 밤에 풍랑 만난 배 속에서.
마태가 보여주려 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잠에서 깨어나서 풍랑까지 잠잠하게 하십니다.
모든 제자들이 놀랍니다, ‘이가 도대체 누구냐?’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겁니까?
같은 인간으로 지금 계시잖아요?
인간으로서 한 공간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달라서 이들은 그렇게도 놀랍니까?
이 땅에 머리 둘 곳을 찾지 아니하고 이 땅에서 맺어진 모든 인간관계보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안식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아버지 때문에 행동할 이유를 찾아서 움직이시는 분은,
‘보아라, 이 땅에서 안정을 찾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 풍랑이 일어도 잠을 주무실 수 있고, 그분 속에 하늘의 명령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풍랑과 바람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너희도 지금 너희가 보듯이 똑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큰 격차가 있지 않느냐?’
‘그러나 나를 따르게 될 때에 너희도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을 찾고 이 세상의 쪽박 위에 하늘의 은혜를 담으려 하는 자가 아니라 너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이고, 하늘로 올라가서 이 세상에 풍랑이 일거나 안 일거나 상관없이 잠을 잘 수 있을 것이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풍랑과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뚫고 나가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이 풍랑 만난 사건을 통해서 마태가 우리에게 해주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 세상의 기존의 상태, 이 세상의 기존의 관계라는 쪽박 위에 하늘의 오곡밥을 담겠다고 심청이처럼 구걸하고 다니며 살고 있는 겁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은 ‘주님이 머리 둘 곳도 없었던 이유가 이 땅에 머리 둘만한 데가 없으셨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마음이 머리를 두고 쉬실 곳은 하늘아버지가 계신 곳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계시는 동안에 마음이 이미 아버지께 가 계셨고 아버지께 가 계심으로써 풍랑 속에서도 잠을 주무실 수 있고, 풍랑과 같은 모든 세상의 문제에 오직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의 아들과 자녀로서 그 문제들을 관통해 뚫고 나가는 분으로 사셨다는 것이고 그런 모습을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넘겨주시려고 메시아로 오셔서 쪽박을 깨기 시작하신 거라는 겁니다.
쪽박 깨기가 뭐라고요?
마음을 이 땅에 붙이지 마라, 십자가를 거치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이 떠나라, 기존의 관계가 너의 행동과 생각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식을 만나고 남편과 아내를 만나고, 누구를 만나도 하늘로부터 내려와라, 땅에서부터 출발하지 말고 십자가를 통해 다 버리고 쪽박 깨고 마음이 온전히 승천하신 주님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서 거기에서부터 언제나 매일 매순간 내려오면서 삶을 살라! 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쪽박이 깨졌습니까?
아직도 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쪽박, 이 세상의 예수님 이전에 맺었던 육체를 중심으로 했던 관계, 그 관계의 쪽박 위에 하늘의 것을 담아서 한번 잘 인생의 꽃을 피워보겠다고 살고 계십니까?
구원 받지 못한 겁니다.
구원 받았으면 어떻게 표현되어야 됩니까?
이 세상의 쪽박을 내 마음 스스로가 버리는 겁니다.
내 마음에서 쪽박을 깨버리는 겁니다.
쪽박이 깨져야 구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해했습니다.
이 땅 위에서 주어져 있는 상황, 그리고 관계의 쪽박 위에 하늘의 힘을 빌려 채우고 가꾸고 아름답게 꽃피우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불찰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나님, 주님 따르는 진정한 길에 들어서서 십자가를 거쳐 승천하신 주님께 마음이 붙어 하늘로 올라가게 하시며 남겨져 있는 이 몸은 하늘에서 정하신 대로 천국 티를 내며 천국의 심지가 되어 하나님 뜻에 빛을 발하며 살아가게 되는 사람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