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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의 영토에서도
작가는 쓰고 또 쓸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문학의 위기와 기회
김학중 시인
1. 우리는 미래에 길들여지고 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경기가 있었던 2016년 이후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거의 매년 들어오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제4차 산업혁명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이 실시간 네트워크를 통해서 연결되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산업혁명이다. 다만 기존의 산업혁명들이 사후적인 호명을 통해 우리의 생활의 변화를 짚어내는 용어로 정립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제4차 산업혁명이란 아직 진행 중인 산업혁명이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제4차 산업혁명이 정확히 무엇인지 규정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우리가 제4차 산업혁명이란 키워드를 두 번의 대선을 치르는 동안 반복적으로 들어왔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어떤 대선 후보는 제4차 산업혁명의 근간인 디지털 전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도 못했다. 그러니 우리는 궁금할 수밖에 없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혹시 그거 ‘사기’ 아니냐고. 그런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는 농업혁명도 사실 인류가 곡류를 길들여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곡류에 길들여져 생긴 것이다. 하라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농업 혁명을 ‘사기’라고 표현하였다.
물론 제4차 산업혁명을 ‘사기’로 보기는 어려운 현상들이 우리 일상 속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로 언택트 기술과 디지털 플랫폼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크게 달라졌다는데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이 기술들이다.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 등을 통해 사람들과 접촉을 줄이고 디지털 플랫폼들을 활용해 겨우 기존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인스타그램이나 페북, 유뷰브를 쓰는 것은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었기에 이런 차이에 대한 감각적 격차는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관계에서 생긴 변화보다 우리에게 훨씬 크게 체감되는 것들이 있다. 최근 늘어난 무인점포나 키호스크 결제 시스템, 배달앱, 쇼핑앱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열어 결제앱을 열고 손쉽게 무인기기에서 결제할 수 있으며, 쇼핑앱과 배달앱을 통해 오프라인 매장을 찾지 않고도 수많은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이 편리함에 쉽게 길들여지고 있다. 조금 과장하면,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인간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불안헤 휩싸이게 될 형편에 처해있다. 바로 이러한 편리한 때문에 보이스피싱을 당하자마자 계좌에 있는 피땀 어린 돈이 순식간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제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보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진정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 이 변화에 어떻게든 길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마치 더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를 강박적으로 이 변화에 적응하도록 이끄는 것은 ‘일자리’와 관련된 제4차 산업혁명의 수사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것이 디지털 데이터로 환원되면서 더 이상 디지털이 아닌 것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발전하면서 무엇보다 우리의 ‘일자리’가 위협받게 될 것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앞서 언급한 무인점포 등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를 맞이할 점원들이 기계로 바뀌고 있음을 보고 더 나아가 로봇카페와 같은 무인점포 등에서는 실제로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것을 보면서 ‘일자리’ 상실의 공포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4차 산업혁명 시대, 다가올 미래에 맞는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에 이르러서 바야흐로 인간은 스스로 창출한 혁명을 의미를 사후적으로 가치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는 혁명에 스스로 적응하려고 뛰어들고 있다. 이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환경에 스스로 적응하려고 고개를 숙이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인류는 혁신 정신이나 프론티어 정신과 같은 적극적인 정신은 낡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자신이 이 세계에 결국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가려주는 환상과 같은 것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가올 미래가 그래서 우리에겐 가능성으로 열린 시대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불안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유로 미래가 우리를 착취하고 있다는 생각은 과장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로 나아가 보겠다.
2. 인공지능 작가? 아직은 먼 길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서도 제4차 산업혁명으로 변화될 미래에 대한 불안의 징조들을 보이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 초기에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군의 리스트에 상단에 놓여 있던 것이 작가, 화가, 음악가였다. 그래서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나 전문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미래의 급격한 변화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안을 얻었다. 비록 현재, 그런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최저시급 수준의 벌이도 겨우겨우 하는 예술가들이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의 인공지능의 발달은 의사와 같은 오랜 숙련이 필요한 전문직의 전문성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실제로 왓슨과 같은 인공지능은 평범한 의사들이 진단자료에서 놓칠 수 있는 환자의 질환도 진단해 내는 성과를 보였다. 테슬라가 개발한 전기자동차에 설치된 자율주행 프로그램은 완전자율주행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SF영화에서나 보던 자율주행을 도로에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정 부분에서만 특화된 모습을 보여주던 인공지능은 점점 여러 영역에 걸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인 ‘GPT-3’다. ‘GPT-3’는 2020년에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 등이 투자해 선보인 ‘오픈 AI’로 인간과 마찬가지로 말하고 글쓰는 게 가능하다. 즉 자연어 처리가 가능한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세돌과 대국을 벌였던 구글의 알파고도 딥마인드 기술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를 통해 기존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의 인공지능으로 성장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자연어 처리 능력 등 인간과 유사한 능력, 즉 마인드를 가지는 수준에 이르는 인공지능의 등장 가능성은 창의성을 기반으로 살아남으리라 예측되었던 예술영역마저 인공지능에 의해 정복될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실제로 인공지능 연구에서 문학창작의 영역도 수 년간 지속적으로 다뤄져 왔다. 특히 문학의 영역에서 창작자의 주관성과 직관 등이 언어적 감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시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다. 박경수의 「인공지능(AI) 문학의 미래와 포스트 휴머니즘」(계간 실천문학, 2021, 봄호)에서 소개된 다음의 사례들이 그것이다.
① 1970년대. 미국. 랙터(Racter) 알고리즘에 의한 시 「사자가 포효하니 개가 짖는다(A lion roars and a dog barking)」
② 2013년. 미국. 튜링테스트 봇포엣(botpoet)에 소개된 시 「우린 느낄 수 있어(We can Feel)」 등.
③ 2017년. 미국. 인공지능 사이버네틱(Cybernetic Poet)이 쓴 「이젠 짙은 연기를 상상하라(Imagine now the dark smoke)」 등.
④ 2018년 4월. 일본. 인공지능이 쓴 시 「해는 노래합니다(the sun is singing)」
⑤ 2018년 6월. 한국. 인공지능 아트랩(Artlab)이 쓴 시 「어둠의 아카시아 길」 등.
위의 사례들 중에서 우리나라 포스텍 정보통신 연구소에서 개발한 아트랩이 눈에 띈다. 이들이 개발한 아트랩은 사람이 첫구절을 임의로 제시하면 그 구절과 어울릴만한 5개의 보기를 선택형 보기로 제시한다고 한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하면 똑같은 방식으로 다음 구절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를통해 한 편의 창작시를 완성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구진은 아트랩 인공지능 학습을 위해 한국어 시 10만 5399행을 학습시켰다. 그러면서 문장을 활용해 대화처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쳇봇용 문장 학습 모델인 ‘시퀀스 투 시퀀스’도 적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입력된 문장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응용할 수 있도록 학습시켰다는 것이다.1) 연구진은 그러면서 아트랩이 창작한 시를 언론에 공개했다. 아래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
어둠의 아카시아 길
그의 손은 팔을 쥐고 있는데
그 손은 다름아닌 풀잎처럼
찬란한 무지개의 풀잎처럼
말하기 위해서 다가선다
마침내 우리 향기를 따라
세상이 흘러 넘친다
㉯
나는 늘 물가에 걸려 있는
한 점 바람이라면
솔바람이 되고 싶지만
찬 빈 바람이다
나는 그리움으로
나는 또 하루을 쥐고 있다
비어 있는 세월은
숨쉬며 빛난다2)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이 시를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지면으로는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없으니, 여기서는 나의 의견만을 개진하도록 하겠다. 수 년간 시창작을 가르쳐온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하면 현재 아트랩의 수준은 초등학교 6학년 수준 정도의 시창작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시적묘사를 활용한 표현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시적 화자의 감정의 토로를 언술로 표현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으로 보아 시적 묘사를 비롯하여, 환유적 구조, 분열적 화자 구성, 알레고리 등 복합적인 시적 기교를 한 작품에 구현할 능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 우리 시단에서 창작되는 시의 수준을 고려할 때, 아직 아트랩의 수준은 초보적인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진도 개발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에 대하여 밝히기도 하였다. 한국어의 특성상 용언의 활용이 많고, 파생어 등도 많아서 우리 말의 이러한 특성을 학습시키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더불어 우리 말의 다양한 뉘앙스들을 이해시키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현대적 표현 기법인 시각적 표현과 개성을 강조하는 현대시 구현에서는 아트랩이 문제를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쓰는 것이 현대시인데, 현대시를 쓰지 못하는 창작자를 시인으로 인정해주지 않듯이 아트랩을 독자적이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시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물며 저작권이야 말할 것도 없다.
연구진이 밝힌 것을 고려하고 아트랩의 시창작 방식을 고려할 때 무엇보다 문제는 이러한 인공지능이 스스로 감각하고 사고하여 창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면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최근에 딥러닝 기반 인공지능으로 한 편의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도 했다고 말이다.3) 인공지능 파람북인 쓴 『지금부터의 세계』가 있지 않냐고 말이다. 이 글에서는 시만 대상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하여 여기서는 대충 다루겠지만, 그 기술도 인간을 기획자, 에디터 또는 감독으로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러 한계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인공지능의 가장 커다란 한계는 이들을 개발하는 개발자들이 문학작품을 데이터로 대한다는 것이다. 문학을 데이터로 대한다는 것이 왜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일까? 문자데이터로 작품을 본다고 해서 사실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사실 개별 작품들만을 떼어 놓고 보면 개별 작품들은 하나의 데이터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을 역사적 맥락과 문예사조적 맥락에 옮겨 놓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대적 변곡점을 창출하는 작품들의 등장을 통해서 문학사는 새로운 물결을 맞이했는데, 데이터는 이러한 변곡점의 나타남에 대해서 어떠한 해석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문학사나 문예사조 연구에서 있어서 이 논쟁적인 작품들에 대한 학자들의 입장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독창적 지평을 확보한 작품들은 데이터로는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어떤 영토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창작을 하는데 있어서 고유한 목적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러한 영토를 확보하려는 것이며 바로 이를 위해 작가들은 작품을 쓰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제한된 지면 상에선 이 정도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보다 기술적으로 더 큰 문제는 이들 인공지능이 작가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보고, 맛보고, 향기 맡으며, 듣고, 말하며, 피부로 느낀다. 그런데,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인공지능에게는 다만 상당히 많은 양의 문자데이터만 주어질 뿐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에 로봇과 같은 신체를 부여하면 되지 않는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 문제는 로봇과 같은 신체에 달린 센서에 정보값을 어떻게 부여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프로그래밍을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개인적으로 C++까지는 해봤습니다.―컴퓨터는 카메라로 보는 사물이 정확히 무엇인지 결코 감각하지 못한다. 이 감각의 프로세스도 우리가 일일이 프로그래밍해주어야 한다. 그 기초를 이루는 것이 데이터 라벨링이다. 데이터 라벨링은 컴퓨터가 카메라나 센서를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에 라벨을 붙여서 데이터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디지털 전환을 이끄는 주요 사업 중에 하나로 인정받아 최근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 개발에서 그 초석을 닦는 데이터 입력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디지털 전환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있고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작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즉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수요가 많아져서 최근에 제법 쏠쏠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부업으로 알려저 각광받고 있다. 디지털 라벨링 작업을 훈련하고 일자리를 연계해주는 사이트도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이트가 ‘클라우드 웍스’이다.
아무튼 이런 데이터 라벨링을 통해 주변에 대한 정보와 사물들에 대한 정보값이 데이터로 제공된다고 해보자. 이를 로봇의 신체를 가진 창작 인공지능이 이를 딥러닝으로 처리할 때, 현재의 로봇이 사용하는 전력으로는 그 데이터를 연산하는데 제한이 걸릴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보라.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코인을 새로 체굴하는데 엄청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그에 따른 발열을 처리할 냉각장치도 장비해야 할 것이다. 코인 체굴이라는 단일한 작업에서도 이럴진데,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창작작품을 만들기 위해 여러 데이터 값을 연산산출하여야 한다면 상당한 전력이 요구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그런 인공지능에게 로봇형태의 신체를 가지도록 만드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연산을 시작하자마자 충전용 독을 찾아가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상에 대한 인지 프로세스는 이미 구현된 프로세스에 의해 형성된다는 한게를 넘어서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를 문학 데이터와 접목시킬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인공지능이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끌어내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오로지 창작자인 인공지능의 힘만으로 창작된 창작물이어야 할 때에는 더더구나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할 것이다. 과연 그러한 비용을 들여가면서 인공지능에게 시나 소설을 창작하도록 하게 할지는 미지수이다. 아. 물론 엘론 머스크나 제프 베이조스가 하겠다고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화성에다가 이주 우주선을 띄울 정도로 무모하고 도전적이면 무엇보다 돈이 더럽게 많기 때문이다.
3. 우리는 미래가 우리를 데이터로 환원하더라도 쓰고 또 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문학은 제4차 산업혁명이 열 미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다시 이 문제로 돌아가보자. 인공지능이 지닌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주도할 이 기술에 대한 가치평가를 이 시대의 지식들이 낮추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들이 주도하는 미래의 불안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할 지도 모른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뚜렷한 묘수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최근의 뇌 과학 이론을 경유하는 것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뇌 과학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 사실들이 있다. 우리가 스마트폰 등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들을 쓰면서 멀티테스킹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기존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이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뇌는 멀티테스킹을 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일에 대한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집중력이 약해지고 있을 따름이라고 한다. 그것을 여러 작업의 전환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실 구석기 시대 인류로부터 거의 유전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인간은 그 변화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실은 본래적으로 가진 능력을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사실 달라지기 어려운데, 달라지려고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문학은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위험에 처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지니고 태어난 능력을 펼치기 위해 이러한 위험에 뛰어들 사람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작가, 시인, 시조 시인 등 뿐만 아니라 시대에 뒤떨이지고 있다고 평가를 받는 직종에도 사람들은 찾아오게 될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아직은 비가시적인 산업혁명의 파고 이전에도 그래왔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여전히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먹고 살기 좋아서 작가를, 시인을, 시조 시인을 하는가? 원고료 받아서 집 사신 분? 많으신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바로 이러한 작가라는 존재들이 지금 여기에 있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유한 내면성을 창작물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문학이 여전히 독자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가치를 지키면서 나 자신의 세속적 성공을 위한 전환에는 실패하면서도 문학적 조류의 새로운 도래를 위해서는 성공적인 작업을 남기기 위해 도전하고 있다.
결국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 문학의 위기를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은 이 무척이나 고루하고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로 변하지 않은 이 창작의 근본적 토대에 서는 것밖에는 없다. 그렇다. 뇌 과학자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구석기 시대 이후로 진화하지 않았다. 그런 뇌를 가지고도 놀랍게도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다시 그런 뇌를 믿어볼밖에. 그러니까 생긴대로 살자.
아래에 살펴볼 시조들은 바로 이런 고유성 속에도 전환적 사고를 시조 작품을 통해 시도하는 작업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내면성을 언어적으로 재현하면서 이를 문제화하는 것을 통해 시도된다.
먼 사람과
한 사람이
약속을 견뎌야할 때
침묵에 물 주거나
붙임성 있는 표정이 있지
충분히
밝고 높은 슬픔으로
안녕에 안녕하렴
*
중언하고
부언하고
늦게 오는 마음이 있지
흐트러진 등 뒤로부터
괄호를 곧, 닫을 거야
혼자서
내 얼굴을 세어볼게
무릎 당겨 앉았지?
―김남규, 「ZOOM」 전문(21세기시조동인 13집, 고요아침, 2021)
이 시조는 팬데믹 시대에 비대면 수업 프로그램으로 활용되는 ZOOM을 활용하여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의 내면성을 비추고 있다. 김남규 시인은 그간 시조 시단에서 시조가 당대적 상상력과 호흡해야 한다는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 작품도 그러한 김남규 시인의 개성적 사고가 기반이 되어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에 우리는 각자 개별적으로 격리된 장소에서 누군가와 마주해야 하는 경험들을 해오고 있다. 회의나 수업에서 이러한 일들은 일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주체는 주체 자신의 내면에서 다양한 열굴이 존재하고 있음을 감각하게 된다. 김남규는 바로 여기에 주목하여 이러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매개를 ZOOM으로 설정한다.
그러니까 “먼 사람과/한 사람”은 사실 개별 존재들이 아니다.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 표현은 “혼자서/내 얼굴을 세어볼게”이다. 주체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서로 거리감이 있다. 때문에 이 거리감을 지켜주어야 할 필요에 대해 주체들은 무의지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약속을 견뎌야할 때/침묵에 물 주거나/붙임성 있는 표정이 있”다는 표현은 이를 함의한다. 주체는 이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바로 이러한 다른 스펙트럼이 자기임을 긍정해야만 주체는 주체로서 자신을 끌어안을 수 있다. 그래서 주체는 이 다른 얼굴들을 주체로 모은다. “중언하고/부언하고/늦게 오는 마음이 있지”는 이러한 주체의 내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흐트러진 등 뒤로부터/괄호를 곧, 닫을 거야”는 주체의 여러 얼굴들을 모으는 것이 주체로 훤원되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기대어 성립되는 것임을 노래하면서 주체가 지닌 내면성의 다양성을 끌어당기는 것임을 노래한다.
김남규의 주체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실제적으로 수용해야만 할 미적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의 생산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문학의 몫이다. 다음에 살펴볼 이송희의 시조도 마찬가지이다.
바늘같은 질문이 내 안에서 쏟아졌어요 입력창에 새겨지는 다 낡은 이름과 주소 겹겹이 열린 창으로 슬픈 표정 스치네요
빈칸을 채워가며 나는 나를 인증해요 여기가 어디인지 되묻는 문장 앞에 그동안 헤맸던 길이 울퉁불퉁 펼쳐져요
못 다한 꿈들은 임시저장 해뒀어요 언제든 꺼내 쓰는 여럿의 내가 담긴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이야기를 클릭해요 ―이송희, 「일인칭」 전문(주변인과문학, 2021 봄호)
이 시조를 읽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의 삶을 살면서 자주 경험하게 되는 어떤 상황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디지털 인증을 통해서만 ‘나’임을 인증할 수 있다. 문제는 수많은 플랫폼에 저장한 ‘나’의 정보들을 그 정보의 입력자인 주체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과거 몇 번 접속했던 사이트의 비번이 기억나지 않아서 비밀번호 찾기 인증을 해본 경험을 이 글의 독자들도 해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송희의 시조는 바로 이를 환기한다. “바늘같은 질문이 내 안에서 쏟아졌어요 입력창에 새겨지는 다 낡은 이름과 주소 겹겹이 열린 창으로 슬픈 표정 스치네요”라는 표현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주체의 감정을 나직이 표현하고 있다.
주체 자신이 자신의 존재와 내면성으로는 주체임을 인증하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대신 디지털화된 정보와 그 정보를 담고 있는 스마트폰 그리고 디지털플랫폼이 제공하는 공인인증시스템이 주체를 인증한다. 주체는 주체를 담보하는 힘을 이미 상실했다. 그 자리에는 “빈칸”이 주어져 있을 뿐이며 우리는 이 “빈칸”인 주체를 채워나가는 지점에서 “여기가 어디인지 되묻는 문장 앞에 그동안 헤맸던 길이 울퉁불퉁 펼쳐”짐을 마주해야 한다.
이 마주함 속에서 주체의 고유성이 잠시 반짝인다. 디지털의 투명성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고, 디지털의 평면성으로 환원되지 않은 주체의 차원이 “울퉁불퉁”한 길로 나마 주체에게 남겨져 있다. 이러한 내면성의 잔여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3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다가오고 있지만 언제든 내가 꺼내서는 그러한 “3인칭” 속에도 “일인칭”인 주체가 함의되어 있음을 환기한다. 이를 통해 이송희 작업은 디지털 시대에 주체의 인증이 디지털 인증시스템으로 넘어갔다고 할 지라도 여전히 주체를 주체로 감각하는 지평은 투명화되고 데이터화되지 않은 채 우리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이송희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미적 가치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조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를 경험하고 그것을 문제화하는 지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감각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에 대한 나름의 해법으로 미적 가치를 재현하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이를 보아 여전히 문학은 우리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수행할 수 있는 예술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가치의 창출의 차원을 지금 여기의 문학이, 그리고 나아가 미래의 문학이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지금 여기의 우리를 착취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될 것이고 미래에 대한 알 수 불안에서 벗어나 미래의 가치를 창출할 지금 여기의 ‘나’와 ‘우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4. 미래에 열릴 협업의 공간들
문학이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서도,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자기만의 미적 가치를 생산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러한 수행을 하는 미디어의 변화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창작을 위해 디지털화된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해 작품을 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새롭게 구현된 미디어에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미디어로 메타버스를 꼽을 수 있다.
현재 메타버스는 게임 기반으로 인 게임 플랫폼을 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하는 정도로 서비스되고 있다. 이러한 메타버스가 기존의 게임 플랫폼과 다른 것은 인 게임 내 아이템과 같은 디지털 상품을 사용자가 소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스스로 제작하여 판매할 수 있게 허용한다는 점이다. 이때에 오고가는 화폐는 블록체인으로 암호화된 화폐로 안전하게 거래될 것이라는 게 현재 메타버스 플랫폼이 추구하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메타버스는 형성중인 미디어라 게임에 기반하지 않은 플랫폼의 등장도 가능하다.
이러한 메타버스 미디어에서 과연 문학, 그중에서도 시조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그것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콘탠츠가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플랫폼에서 판매된 게임인 '고스트 오브 쓰시마'가 그것이다. 이 게임은 서커펀치 스튜디오가 제작한 게임으로 몽골군이 일본으로 원정을 가지 위해 쓰시마 섬을 침공하는 스토리를 게임 스토리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게임의 스토리는 창작된 스토리이다. 게임의 주인공 캐릭터인 사카이 진은 몽고군의 코툰 칸과 맞서면서 기존의 사무라이 정신으로는 몽골과 맞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 몽골과 싸우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는 사카이의 숙부인 시무라와는 입장을 달리 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카이는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발생한 숙부와의 갈등 및 몽골군의 폭력적 행위 등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받는다. 게임에서는 이러한 정신적인 고통을 해소하는 방책으로 쓰시마의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이쿠를 읊는 것을 구현하고 있다. 아래의 사진은 그 예시이다.
하이쿠 짓기를 하기 위해서는 캐릭터를 <하이쿠 짓기>가 가능한 장소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곳에서 도착해 표시되는 지점에서 플레이서는 요구하는 버튼―여기서는 R2버튼―을 누르면 하이쿠를 지을 수 있다. 하이쿠를 지을 수 있게 게임은 주변 자연을 보여주는 화면으로 넘어간다. 이 화면에서 플레이어는 마음에 드는 풍경 중에 ○가 뜨는 곳으로 커서를 옮긴다. 여러 개의 ○중에 마음에 드는 곳에 커서를 옮기면 ○칸에 숨겨진 표현들이 뜬다. 그 표현들을 조합하면 한 편의 하이쿠가 완성된다.
앞서 살펴본 아트랩의 인공지능과 같이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인 게임 내에서 여러 개의 선택지를 조합할 수 있는 표현들을 제공해주는 정도의 기본적인 기능은 갖추고 있다. 만약 메타버스 내에서 인공지능의 조합과 함께 그에 맞는 표현을 제공하는 협업자로 시인들이 활동하게 된다면 '고스트 오브 스시마'에서 본 기능의 발전된 형태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글을 통해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이 게임에서 하이쿠 콘탠츠가 큰 호응이 있는 콘탠츠가 아닐 거라고 지레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게임을 해보면 주인공 캐릭터의 서사에 몰입할 수 있고 주인공의 심리에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끌어서 하이쿠 콘탠츠는 제법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하이쿠 짓기>와 같이 기존의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콘탠츠를 제공하고 게임 스토리 및 인터페이스가 훌륭하여서 2020년에 이 게임이 발매되었을 당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게인 업게에서 한 해에 발매된 게임들 중 최고의 게임을 기념하는 시상식인 GOTY후보로도 올랐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제4차 산업혁명 시대 문학의 위기와 기회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전개해 보았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최근의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든 생각은 상당히 많은 필자들이 포스트휴먼을 이야기하면서 미래의 변화에 우리가 적응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 글을 읽어본 독자들은 예상하겠지만 나는 그러한 적응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것이고 다만 우리는 이 변화들 속에서 서로 협업할 방식을 새로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공지능 시대의 작가가 인공지능 기획자나 감독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작가의 소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근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그러한 전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작가―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지 못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도 작가의 몫이므로―이다. 하라리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세계를 구축하려 시도할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만드는 다른 형태의 문학일 수 있다. 그 속에서 훈련되고 고난받은 작가들은 그 가상의 이야기들의 허술한 지점들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고 그 시대의 인간 군상들의 고유한 내면성을 표현해 낼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 그 작업을 부르는 호칭이 변화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나는 그것이 지금의 문학에서 이어지는 모습일 것이라 생각한다. ■
1) 류준영, “시詩 쓰는 AI, ‘인간부터 첫 구절 읊어 보시게’”, 〈머니투데이〉, 2018. 6. 7 참조.
2) 류준영, “시詩 쓰는 AI, ‘인간부터 첫 구절 읊어 보시게’”, 〈머니투데이〉, 2018. 6. 7
3) 더 자세한 것은 김태완의 기사 “AI는 ‘소설 나와라 뚝딱!’ 해서 안 나와. 인간과 AI의 협업 결 과”(《월간조선》, 2021)를 참조하라.
김학중(金鶴中)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창세』(문학동네, 2017), 청소년 시집으로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창비교육, 2020)이 있으며 소시집으로『바탕색은 점점 예뻐진다』, (스토리코스모스, 2021)가 있다. 제18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