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8:30-35, 에발산의 언약 갱신, 22.1.26, 박홍섭 목사
아이 성의 전투의 가장 큰 교훈은 언약에 대한 불순종과 교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여리고 전투의 승리에 도취 되어 그 승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잊어버리고 아이 성을 자기들의 힘으로 정복하고자 했을 때는 비참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아간을 죽여 언약을 어긴 죄를 제거하라고 하셨고 그에 순종했을 때 복병과 매복의 겸손을 배우는 방법으로 다시 아이 성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신명기 27장에서 모세가 명한 대로 에발 산에서 단을 쌓습니다. 신 27:4-8을 보실까요.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오늘 본문은 이대로 순종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모세가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저주와 축복을 선포한 대로 여호수아도 백성들의 절반은 에발 산에 세우고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세우고 그 중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세운 뒤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이 성 전투의 실패와 성공의 원인이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에 있었음을 분명히 깨닫고 앞으로 모든 전투는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가겠다는 언약 갱신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승리 이후의 언약을 갱신하는 제사를 위해서는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 산보다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이 더 적합하지 않습니까? 왜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했던 에발 산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을까요? 지금, 이 의식은 단순히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에발 산에서 단을 쌓으며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한 이유는 그 낭독한 말씀 앞에 자신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녀노소 본토인과 이방인 가리지 않고 여호수아가 낭독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율법이 낭독되고 선포됩니다. 그렇게 여호수아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복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길까요? 아니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느낄까요? 정상적이라면 후자입니다. 자신들 역시 멸망 당한 여리고 성 사람들이나 아이 성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저주받아 마땅한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저주를 선포했던 에발 산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기록하고 온 이스라엘 앞에서 그 율법을 낭독해주신 의도입니다. 율법 앞에서 보니 이스라엘도 멸망 당한 여리고 성과 아이 성 사람들과 똑같이 복이 아니라 저주받아야 하고 멸망 당해야 마땅한 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 당하지 않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점령하여 여기에 있다는 감사의 의미이며 그렇게 주의 은혜를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에발 산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입니다. 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 제사를 드릴 때는 희생의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피 흘리는 제물이 있어야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 내가 용서를 받고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얻습니다. 그 은혜를 제사가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깨닫는 자리는 그리심 산보다는 에발 산입니다. 그리심 산에서는 나는 죄인이라고 엎드리는 사람보다 나는 복 받아 마땅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을 대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에발 산에 단을 세울 때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단”을 세우라고 했죠.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세우라는 의미는 인간의 죄가 해결되는 현장에는 인간의 노력과 공로가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용서와 승리는 그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용서하고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화목의 은혜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 은혜에 인간의 어떤 공로나 조건이나 자랑을 끼워 넣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어디에 임합니까? 쉽게 그리심 산에 임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복과 저주가 임하는 장소가 아니라 복을 선포하고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입니다.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은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면 그 복은 어디로 갈까요? 맞은편을 향해 갑니다. 즉 저주 산인 에발 산에 복이 임합니다. 반대로 에발 산에서 선포한 저주는 그리심 산으로 향합니다. 복과 저주가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고 나타납니다.
이는 이런 영적 의미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자신이 스스로 죄인임을 알며 그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을 자임을 알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자신을 치면서 서 있는 장소를 상징하는 에발 산에는 그리심 산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반대로 나는 복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심 산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복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주받아 마땅한 에발 산의 우리를 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으로 옮겨놓는 분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스스로 그리심 산으로 가지 않습니다. 에발 산에 서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심 산으로 옮겨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우리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은 이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아이 성을 자기들의 힘으로 공격했던 교만의 실패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아골 골짜기에서 죽어간 아간의 죽음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자기 힘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가는 그리심 산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 긍휼과 은총과 자비만이 그들을 에발 산의 저주에서 그리심 산의 축복으로 옮겨놓을 수 있습니다. 에발 산의 언약 갱신은 바로 이 의미를 새기는 교훈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팔 복의 첫 번째 계단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에발 산은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합니다. 에발 산의 언약 갱신에서 울려 퍼졌던 율법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들으면서 그 말씀 앞에서 가난하고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에발 산에 서 있음입니다. 그때 저 반대편인 그리심 산에서 선포된 축복이 우리의 심령에 와 닿아 생명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그때 천국이 은혜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리심 산에서 선포되는 복은 우리가 쟁취하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주시는 복입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복입니다. 늘 말씀 앞에서 에발 산에 서 있는 것처럼 사십시오. 세리가 기도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스스로 그리심 산에 자기를 세워놓고 나는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하니 복을 받아 마땅하다고 스스로 자신을 높였습니다. 그가 무엇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선포하신 에발 산의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 저녁에 말씀 앞에서 우리를 돌아봅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국면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루에 확진자가 만 삼천 명을 넘어서고 앞으로 10만 명까지 예상하고 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올라간 그리심 산이 있다면 내려와서 에발 산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교만했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옛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이 있었던 세겜 골짜기에 모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이곳을 세겜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살아갈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에발 산의 언약갱신으로 확인했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도 매일 전쟁 같은 우리의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 온전한 말씀 앞에 한없이 부족한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서 있는 세겜 산에 그리심 산에서 선포되었던 축복의 말씀이 들려오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 복의 자리로 인도하여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저녁이 그런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