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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2242.2024.3.24 종려주일)
슥9:9-10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로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앞두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너무 기뻐하면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어대면서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키가 약20여m나 되는데 관상수로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려고 자진하여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일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하여 하실 일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신 일입니다. 이 일에 미리 예언 하셨습니다. 막9:31절‘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마20:19절‘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이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약2,500년 전에 예수님이 어린새끼나귀를 타시고, 우리의 구원자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약 500년 전에 활동한 스가랴 선지자로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그 예언이 500여년 후에 그대로 성취되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막11:9-10절‘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이뜻을 알지요.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을 지금 그대로 성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슥9:9절‘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그는 공의로우시며’ 여기에서 ‘공의로운’(차디크)라는 말은 도덕적 또는 법적인 의미에서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이 ‘올바르다’는 (차다크)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본질상 아무 흠과 티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흠이 없는 그분이 통치를 하실 때에도 공의롭게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라고 하셨는데, 구원을 베푸시는데 왜 공의가 필요할까요? 보통 공의를 생각하면 징계, 심판, 죄에 대해 전혀 용납하지 않는 무서운 하나님, 이렇게 생각하는데, 물론 죄에 대해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고 정의 맞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한번 용서한 죄는 절대 기억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용서하지 않은 죄까지 그냥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결국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십자가에 돌아가실 이유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구원을 말하면서 공의를 언급하는 것은,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제물이 될 것이고, 그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이란 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예배 참석하신 성도여러분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행16:31절‘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요1: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여기에 나의 어떤 공로나 대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노력을 말하면 거짓선지자입니다. 공의로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모시면 됩니다. 계3:20절‘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상주감리교회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리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항상 주님과 함께 동행하여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기억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9절‘겸손하여서’했고, 마11:29절‘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하셨고, 사도 바울도 빌2:5-9절‘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하셨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명백히 겸손하시지만 나의 주인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의 모습으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신 어린 나귀새끼 주인의 헌신을 배워야 합니다.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께서 쓰시겠다는 말을 듣고 즉시 허락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지 않으나 그의 헌신은 하나님 앞에서 빛날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하셨습니다.(마10:42)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원수되게 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하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 사랑의 폭포수가 쏟아지게 하셨음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대로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그곳을 친히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모르고 가셨다가 붙잡혀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다 아시면서도 친히 그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때문입니다. 이미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로봇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움직인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섭리와 마음을 아시고 그 길을 순종으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이 예언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섭리와 마음을 헤아리셔서 그 길을 걸어가셨다면 이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실 때 가지셨던 그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그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겸손히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9절‘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그랬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왕이 누구십니까? 지금 이 시대는 왕정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우리는 왕정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으나 시84:3절‘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즉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환경을 다스려 주시고 사단을 다스려 주시고 육신을 다스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내가 왕 노릇하지 말고 겸손히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겸손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성령으로 온전히 다스려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세상의 왕들처럼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치하시는 사랑의 왕,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시고 당당하게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여기서 나귀를 타신 것은 두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이고, 하나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탄 것은 그가 힘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 많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 겸손한 왕으로 오실 것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가장 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 평생 머리 둘 땅 한 평도 없었지만 그 분은 세상을 다 가진 부유하신 분이고, 가난과 질병에서 우리를 건지신 분이셨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에 회복을 주고, 고통이 있는 곳에 치유를 주시며, 절망과 미움이 있는 곳에 희망과 사랑을 심었던 분입니다.
평화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전해지는 곳곳마다, 예수님이 전해지는 심령마다, 가정과 사회와 나라마다 평화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혹시 지금 제자들처럼 두렵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겸손하셔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입성하시면 그때부터 우리마음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런 평안으로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하면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세상 임금들은 지혜가 부족하여서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여서 본인도 불행하고 백성들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주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고 지혜로 다스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예루살렘의 딸들을 복된 길로,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영생의 길, 의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왕으로 오신 것을 예루살렘의 딸들은 환영하고 기뻐하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여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구주,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고백하고, 높이며, 사랑하면서 주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시련의 때에도 은혜를 주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부요하신 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에게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을 주실 수 있고 생명 과일과 생명수를 주어서 백성들로 배고프지 않고 영원토록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시89:11절‘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이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잠깐 있다가 썩어지고 없어질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령한 복을 사모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 것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자랑치 않고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주님만을 위해 살기를 힘쓰고 주님만을 찬양하는 자들이 됩니다. 주님을 닮은 온유 겸손한 자로 살기를 힘쓰며 삽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은 전적으로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3: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사랑은 그 어떤 장애도 이기고 나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진짜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고 나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이라는 가장 두려운 장벽마저도 막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가지고 나귀를 타고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셨습니다.
어느 간증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운전을 하던 아빠는 옆에 타고 있던 딸을 살리려고 급하게 핸들을 꺾어서 딸은 무사했지만, 아빠는 많이 다쳤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급하게 수혈을 해야 합니다. 마침 옆에 있던 딸과 아빠의 혈액형이 같아서 의사 선생님이 딸에게 물었습니다. ‘아빠가 많이 위독하단다. 아빠를 위해서 너의 피를 줄 수 있겠니?’ 딸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의사선생님은 급하게 딸의 피를 아빠에게 수혈하게 되었고, 아빠는 의식을 회복하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아빠 곁에 누워서 수혈을 한 딸이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아빠가 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딸, 고마워. 너 때문에 아빠가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자 딸이 아빠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살아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그런데 아빠, 저는 언제 죽나요’라고 했습니다. 아빠가 놀라서 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왜 죽는다는 거야?’ 그러자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에게 피를 주고 나면 나는 죽잖아요?’ 잠시 병실에는 숙연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잠시 후 아빠가 딸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네가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아빠에게 피를 준 거였니?’그러자 딸이 말했습니다. ‘네, 저는 아빠를 사랑하거든요’내가 죽더라도 아빠를 사랑하기에 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것은 오직 사랑 때문에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있었고 사명도 있었지만 지금 예수님 마음에는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참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했고 그 사랑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이 숭고한 사랑 앞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온갖 어수선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우리의 삶을 곤고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도 꼭 예수님의 숭고한 사랑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며 지내야 합니다. 내 삶에 질병과의 처절한 싸움의 현장에 숭고한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릴 줄 알고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에 여러 가지 불안과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그곳을 향해서 약속의 나귀를 타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골고다 언덕과 같은 곳에 나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 같습니까? 지금 그곳에 숭고한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죄의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홀로 눈물짓고 있을 때 바로 그곳으로 숭고한 사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15:9절‘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차디찬 세상에서 살더라도 꼭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이러스로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워 불안하고, 앞으로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불안 할 때에도 꼭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랑 때문에 약속하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은 꼭 예수님 사랑을 깨달으시는 고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숭고한 사랑 안에 거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죽어가는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는 그 사명의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것은 그냥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벤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주실 때도 메시아의 사역이 어떠할 것인지 의미를 담으셨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께서 예언한 말씀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10절‘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은 남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이 남북 이스라엘은 우리 하나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섬길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는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예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이란 하나님의 정권에 순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때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가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때문이며 인간을 향한 사랑,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길을 사명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하여 가신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흐를 정도로 고뇌에 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서 사명으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명으로 걸어가셨다는 것은 무심코 걸어가다가 보니 무엇인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걸어가신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거룩한 것입니다. 사명은 위대한 것입니다. 죽음도 그 사명을 막지 못합니다. 두려움도 그 사명을 막지 못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의 권력도 그 사명을 막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 사명을 가지고 십자가를 향해서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하심으로 온 인류의 죄악을 대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거룩한 사명이 제자들을 통하여 이어졌고, 다시 또 그 사명이 예수님을 믿는 또 다른 제자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명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그 사명을 감당하는 곳곳마다 구원받는 영혼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사명의 뒤를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그 사명의 뒤를 이어 가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아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셔서 하나님의 열망을 이루신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는 그 사명의 길을 우리도 걸어가리라 결단하는 고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3.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져 그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땅 끝까지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10절‘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본문10절에서 주님나라를 말씀하시는데 동서로는 사해바다에서 지중해까지, 남북으로는 유브라데강에서 브엘세바까지를 말하지만, 2차적 의미로는 신약교회를 통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까지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세상, 땅 끝까지 이뤄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 끝’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우리주님은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어, 땅 끝까지 통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이루신 평화의 복음을 어떻게 땅 끝까지 전할 수 있을까요? 행1:8절‘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성령을 받으면 권능이 임하고 권능이 임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훈련시키셨고, 오순절 날 성령을 부어주셔서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온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또 막16:15절‘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일련의 이런 말씀들이 바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땅 끝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본문의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가신 것은 사랑 때문이며, 사명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랑도, 사명도 모두 구원 때문입니다. 사랑도 사랑하는 자가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고, 사명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고, 아무리 사명이 투철해도 그 목적 속에 구원이 빠진다면 사랑도 껍질뿐이며, 사명도 껍질뿐인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 속에 구원이 있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움직임 속에도 구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쉬지 않고 일해 오셨던 것입니다. 오로지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안 무시무시한 죽음이 기다리는 곳을 마다하지 않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바리새인들과 손을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받을 영혼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교회의 규모와 교인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곳에 구원받은 영혼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규모와 교인 수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더 오래 동안 기적을 행하셔서 사람들의 인기를 몰고 다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이 다 떠나가도 결국 구원이 이루어지는 십자가를 향해서 외롭게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걸은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져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십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목숨을 걸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을 담아 이루신 바로 나의 구원을 나는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뜨거운 사명을 가지고 이루신 바로 나의 구원을 나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이루신 구원이라면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나의 구원을 나는 얼마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2,000년 전,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모습은 만왕의 왕으로써 너무 초라한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그 이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초라하게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주님은 삼 일만에 부활하시어 사망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재림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과 함께하시고,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지배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주님명령에 순종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이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저와 여러분 가정에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에 주님은 스가랴의 예언을 통하여 말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공의로 구원을 베푸시고,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땅 끝까지 통치하시도록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다시 가슴 벅차게 구원의 감격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