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둘째 아들 한터가 다녀갔습니다.
매해 넉 주 받는 휴가를 우리와 같이 지내려 옵니다.
전에는 우리가 아이들 있는데 가서 만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늙어 여행하기 힘드니 아들이 우리를 봐 주는 셈입니다.
내가 몸이 성치 못하니 전 같이 맛있는 걸 해주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고기 못 먹는 나 대신 아빠와 고기 같이 먹어드리기도 하고,
(한 사람분은 주문할 수 없거든요.)
간단히 아침 식사 하는 것도 같이 하면서 함께임을 즐겼습니다.
그 아이가 어려서 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만화가가 되려 했기에 때에 따라 카드를 그려주었어요.
요즘은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쉰 해 전의 사진을 보고 내 얼굴울 그려주었습니다.
그림을 보고 "나 같지 않다"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익숙한 지금의 내 모양이 거기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진에 같이 찍힌 두어살 먹은 그 아이가 이제 쉰 두살이 되었으니...
우리 누구나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그만치 오래 살면,
몰라보게 달라집니다.
아주 바뀝니다.
머리 색갈, 머리 숱,
얼굴의 주름, 기미,
9cm나 줄어든 키는 어쩌고...
그런데
겉으로 들어난 변화만큼
우리 속사람도 그 만큼 바뀌었을까요?
언젠가 우리 모임에서 공부방을 위해 쓰고 읽는 글에 대해서
왜 어릴쩍 이야기를 그리 많이 하고 있는냐고 묻는 이가 있었지요.
어렸을 때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하면서 자랐는가 하는 요인들이
평생을 사는데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걸 절감하기 때문이지요.
생각의 틀이나 성품이 어릴 쩍에 굳어질 수 있고,
평생을 "세살 버릇 여든까지"로 살 수 있으니까요.
몸이 바뀌거나.
사는데 필요한 기술을 익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에 불편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얼마나 서로 마음을 알아주면서,
서로 공감하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튼튼한 마음으로 같이 살고 있는가 살펴보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보고, 알고 느끼지요.
우리가 사는 문화, 가치가 지나치게 생존에 매달려 있습니다.
지금도 100분 토론에서
우수한 사람들이 의대에 몰려가려 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달리 우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험 점수 잘 받는 사람을 우수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면으로 우수하게 만들려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들볶습니다.
조등학생이 의대 가려하는 학원에 다닌다 했더니,
유치원생을 위한 학원도 있답니다.
그렇게 의사가 되면 좋은 의사 구실을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평생 복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또 어떻게 될 까요?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려면
우리는 서로 소중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사랑받으며,
서로를 알아주고,
충분히 자기를 알아주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야겠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를 궁금해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왜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까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내면의 모습을 이웃이 알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자기도 이웃의 느낌과 생각을 궁금해 하지 않나요?
서로 다를 수록 더 흥미롭고,
같이 살 맛 나지 않나요?
모두들 똑 같이
돈 잘 벌기만 바라고,
화려한 의식주만 챙기고,
편하게 자기 생각만 다라고 생각하는 세상이 문제지요?
아닌가요?
아픈 사람을 도우려고 의사가 되려는 게 아니라,
보통 직업에 일곱 배는 많은 수입이 보장 된다고 해서
의사가 되려 한다면
그렇게 삶이 대단한 걸까요?
이웃을 알아주려는 사랑의 뜻이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나봐요.
어려서부터 어른들 말 잘 들어라 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달리 귀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나봐요.
우리가 처음 만난 관계인 아이와 엄마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알아봐 주는 경험을 못한 거지요.
동네 골목 길에서
같이 뛰어노는 동무들과도 서로 알아주고,
같이 복되게 놀아 본 역사가 부족한가 봐요.
내가 아플 때 "호" 불어주는 이웃이 없었나 봐요.
동무가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날 때
내가 뭘했던가요?
어깨가 축 늘어진 동무를 보듬어 주었던가요?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툭 떨어질 때 난 뭘 했던가요?
겁에 질린 표정을 외면하지 않았던가요?
도와달라고 소리 치는데 나는 귀를 틀어막고 외면하지 않았나요?
그러니 우리는 서로 믿지 않게 된 것일까요?
이 하늘 아래 '혼자'라고 되 뇌이면서
아무에게도 속내를 보이지 않으면서,
외롭게
아픔과
어려움을 풀어가고,
무겁게 험한 세상을 홀로 헤쳐가야 한다고
이 악 물고 다짐하며 걸이왔나요?
'이웃 사랑'을 말하면,
기껀 연말 딸랑딸랑 하는 구세군 모금 통에 몇푼 넣는 것이라구요?
아, 그래도 노숙자를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구요?
눈 앞에 있는 노숙자만 이웃이 필요한 게 아니지요.
가깝고 먼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하지요.
이웃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귀로 청력이 바뀌어야 하고,
아파하는 이웃의 마음이 보이는 시각을 갖추어야 하고,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깊고 넓어져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방법을 실천하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요.
세상이 바뀌기 전에 우리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편히 가만이 있어서 바뀔 수 없어요.
혼자 지식을 앃아가고,
혼자 명상을 한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서로 보고,
듣고,
공감하고,
어루만지며,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진심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혼자 마음 편하게
아무 생각없이
세월을 보내서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살려고 애써 왔다고 생각하나요?
그런데 서로 주고 받는 마음이 일치하지 않으면,
짝 사랑이 되겠지요.
주려는 마음이 제대로 효과를 못 보겠지요?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에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겠네요.
ㅁㅇ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