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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노랑의 반경
임가영
왁자한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그림과 짐을 들고 흩어졌다. 나도 스케치북을 챙겨 가방에 넣은 뒤 차를 세워둔 골목 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속도가 절로 느려졌다. 몇 분 전까지 그림을 그리느라 앉아 있던 노란 수건 집 앞이었다. 슬그머니 집을 올려다보았다. 어쩐 일인지 대문에 걸려있던 노란 수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과 집을 번갈아 살폈다. 노란 수건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아까는 반쯤 열려 있던 대문이 완전히 닫혀 있었다.
노란 수건은 거칠게 쌓아 올린 층계 위에 있는 집의 반쯤 열린 대문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오래된 집과 산뜻한 노랑의 대비가 마음에 들었다. 접이식 의자와 화구가방을 내려놓고 그 수건을 중심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른 가슴 높이 정도 되는 대문 바로 안쪽, 대각선으로 마주한 철제문 두 개가 보였다. 하나는 현관, 다른 하나는 창고 같았다. 층계 옆 콘크리트 담장에는 거무튀튀한 얼룩이 가득했고 갈라진 틈새와 군데군데 덧바른 자국도 꽤 있었다. 그래도 담장 쪽 층마다 놓인 화분에 심은 고추는 싱그러웠으며 담장과 마주한 철제 난간 바깥쪽 오르막에는 작은 소나무가 있었다. 그 경사진 땅은 집 뒤편 텃밭으로 이어졌다. 곱게 돋은 이랑 위에 가지, 상추, 들깨 등이 보였다.
노란 수건이 없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작고 허름한 단층집이었다. 수건은 저 집에 사는 사람이 일하느라 흘린 땀, 혹은 밭일을 하고 손을 씻은 뒤 젖은 물기를 말리려 널어놓았을 거였다. 어떻게 쓰였든 간에 반듯하게 펼쳐져 햇볕을 받고 있는 수건은 낭만적인 상상마저 떠오르게 했다. 노란 수건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신호, 이를테면 놀러 와, 내지는 나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 하는 표식이라고. 저 수건이 내걸리기를 내내 기다리던 친구가 있을 거라고. 조만간 작은 쿠키 상자를 든 누군가가 집에 찾아올 거라고. 안에 있던 주인이 반갑게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는 장면까지.
나는 피식 웃으며 앉을 자리를 찾아보았다. 내가 선 곳은 노란 수건 집 건너편, 낡은 다세대 주택 출입구 앞이었다. 바로 옆 화단의 키 큰 접시꽃은 벌레가 먹은 듯 이파리에 구멍이 여럿 뚫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파와 상추가 마구 자라 있었다. 애벌레라도 기어 나올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다세대 주택 덕에 그늘이 드리워졌고 출입구를 조금 비켜 앉으면 두어 시간 있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찌감치 도착한 참가자는 벌써 스케치를 시작하고 있었다. 몇몇은 그릴 곳을 찾느라 이곳저곳을 오갔다. 나는 다시금 노란 수건 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앉아 화구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모자를 벗으려는데 한 사람이 두리번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는 챙이 넓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스케치북을 꺼내며 분주한 척을 했다. 그는 정쌤으로 불리는 이 모임의 운영진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인데 철도 기관사로 일하다 퇴임했다고 들었다. 사람들에게 소실점이라든가 원근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기에 모임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한편 그림 실력이 늘지 않는 나에게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그림 연습을 안 하느냐 물었다. 가을에 정기 전시회가 있으니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번거로운 전시회 전에는 모임에서 나갈 작정이었기에 그런 참견이 편치 않았다. 언제든, 아니 조만간 슬그머니 모임에서 빠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모임에 나오는 것은 혼자 길거리에 앉아 야외 스케치를 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가 아무 말 없이 지나가길 바랐다. 모자 아래로 기어이 요란한 디자인의 샌들 끝이 보였다. 내가 아는 남자 중에 형광색 가죽끈을 꼬아 만든 샌들을 신을 사람은 정쌤 뿐이었다. 절로 작은 한숨이 나왔지만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네었다. 그는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다짜고짜 물었다. 여기서 그리려고? 그렇다고 하자 시선을 맞은편 노란 수건 집에 둔 채 말을 이었다. 아, 저 집 그리려는구나. 봐서 잡다한 거는 안 그려도 돼요, 딱 그리고 싶은 부분에만 집중해요, 전봇대 줄도 다 그릴 필요 없어, 색깔도 너무 자세히 넣지는 말고. 내 눈에는 그저 그의 해골 장식이 붙은 굵은 금속 팔찌만 들어왔다. 도대체 저런 소품은 어디에서 구하는 건가, 하는 호기심이 들 정도로 흔치 않은 액세서리였다. 그는 말하는 중간중간 나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내가 귀 기울여 듣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 보였다. 내가 성의 없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팔찌만 쳐다보고 있었는데도 말하는 속도를 늦춘다거나 멈추지 않았다.
이 동호회는 따로 지도해 주는 선생도 없는 그야말로 취미로 뭉친 모임이었다. 서로 간에 소소한 정보가 오갔다. 예컨대 구름을 어떻게 표현한 거냐, 이런 색은 어떤 색을 섞어서 만드는 거냐, 어떤 드로잉 펜을 사용하는 것이 좋으냐, 그런 궁금증을 나눴다. 인간관계가 대단하게 얽혀있지는 않았다. 모임 웹사이트에 격주로 정기모임 장소가 공지되면 거기에 모였다가 흩어졌다. 마치 두 시간 남짓의 플래시몹 느낌이었는데 나는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반면 정쌤은 달랐다. 지금까지 모임에 왔다가 다른 회원의 그림에 기가 죽어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이 꽤 있었던 모양이었고, 그는 더는 낙오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게다가 미술 전공자도 아니면서 꾸준한 노력으로 수준을 높인 장본인이기에 남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마침내 정쌤이 말을 멈췄다. 나는 알겠다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드로잉 펜의 뚜껑을 열고 그림 그릴 자세를 취했다. 이제 집중할 거니까 그만 가세요, 하는 뜻이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을 허리춤에 둔 채 그대로 서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내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그려야겠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네? 그는 뭘 그렇게 놀라요, 하고 크게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내가 지도를 좀 해 주려고. 내가 당황스러워 눈만 끔뻑이는 사이, 그는 접이식 의자를 펴고 가방에서 화구를 꺼냈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길어봤자 두 시간,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동요를 들어보면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는 잘도 잔다지 않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펜을 들었다.
정쌤은 나를 흘끗 보더니 대담한 건 좋지만 아직 초보니까 연필로 대강 구도라도 잡은 다음 펜으로 하는 게 낫다고 했다.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하얀 셔츠의 소매를 걷었다. 연필로 빠르게 구도를 잡고 그 위에 펜으로 쭉쭉 선을 그어나갔다. 그러고는 알겠냐는 듯 나를 한번 본 뒤 조용하게 그림에 집중했다. 나는 그의 바뀐 분위기가 낯설어 가만히 쳐다보았다. 건너편 집과 스케치북을 오가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거북스러웠던 화려한 샌들이나 팔찌도 길거리 예술가에게 어울리는 소품인 양 느껴졌다. 작업하는 모습만 봤다면 그에게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두어 시간 만에 현장에서 완성하는 어반 스케치라면 어설프더라도 직접 드로잉 펜으로 그리는 게 나을 거라 여기고 있었지만, 한 번쯤 그의 조언대로 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펜을 내려놓고 대신 연필을 잡았다.
*
다용도실에 쉰내가 가득했다. 며칠간 쌓아둔 빨랫감에서 나는 냄새였다. 혼자 지내는 데다 요즘은 반바지와 티셔츠 위주로 입어서 양이 많지도 않거니와 최근 들어 비가 자주 와 세탁을 미룬 탓이었다. 오늘은 날이 맑으니 빨래를 하는 게 좋을 터였다. 나는 세탁기에 빨래와 세제를 쏟아 넣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집 안을 청소한 뒤에는 저녁에 먹을 채소를 따러 텃밭에 가 볼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해 주던 음식, 고추장과 신선한 채소를 듬뿍 넣은 비빔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였다.
청소기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작은 창문 밖으로 눈길이 갔다. 한 여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서 살짝 비켜섰다. 여자는 다세대 주택 앞 그늘에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앉았다. 가방을 열어 스케치북과 펜 같은 것도 꺼냈다. 잠시 뒤 어떤 남자가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 역시 내 집을 쳐다봤다. 팔을 뻗어 내 집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무어라 이야기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네에서, 아니 한국에 와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조심스럽게 창가로 한 발 가까이 가서 바깥을 살폈다. 그림을 그리거나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유화를 전공한 아내가 풍경을 그리러 야외로 나가면 소풍 삼아 따라가곤 했던, 나중에는 아내에게 배워 함께 그림을 그렸던 추억이 떠올랐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할린 동포, 나는 한국에서 그렇게 불렸다. 한국에 들어온 지는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 이송되었던 나의 부모는 탄광에서 일하며 가족을 일구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으로 오랜 기간 무국적 상태를 유지했고 자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 강조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더욱 그랬다. 발전한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똑똑해야 한다고 자부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 교육까지 받았고 건축회사를 운영했다.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으며 손주까지 있었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사업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우리 가족에게까지 기회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한국행을 택했다. 내 입에서 절로 나온 말은 저도요, 였다. 아내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건축회사도 꽤 잘 되고 있었기에 그걸 놓고 가면 어쩌느냐고, 러시아에 살고 있는 가족은 중요하지 않느냐고 나무랐다. 나는 끈질기게 한국 땅에서 지내보고 싶다며 아내를 설득했다. 마침내 아내는 나에게 삼 년의 시간을 허락했다. 삼 년 안에 남은 생을 러시아에서 지낼지, 한국에서 지낼지 결정하자고 했다. 아내야 내가 하루라도 빨리 포기하고 러시아로 돌아오길 바랄 테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는 순간에도 잊지 못했던 한국에서 사는 것이 나의 도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한국 정부가 마련해 준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지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그저 모든 상황이 고맙고 좋다는 말을 반복했고, 나 역시 아버지가 그토록 꿈꾸던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마냥 흐뭇하다는 어머니와 달리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 와서도 사할린에서 알던 사람들과만 소통하며 지낸다는 게 답답했다. 더군다나 나는 한국의 사회구성원으로 역할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도 많은 데다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서 그럴듯한 직장을 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괜히 푼돈이라도 벌다가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받지 못할까 우려스럽기도 했다.
생각해 낸 것은 자원봉사였다. 나는 우리의 이주를 도와준 기관에 통역 봉사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다행히 통역 인력이 필요한 곳은 많았고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 이민자를 돕는 복지관, 경찰서나 병원에 나갈 수 있었다. 한국어는 어눌할지라도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한 덕이었다. 한국에서 남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할 수 있어 뿌듯했다. 복지관에서는 내가 영어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무척 반기며 예전보다 공손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있다는 복지관 과장과도 곧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말했다. 러시아 사람인 내 아내는 한인들만 모여 사는 아파트를 견디기 어려워할 것이므로 언젠가 아내를 데려오려면 독립된 집이 필요하다고. 그는 반색하며 한동안 비워둔 집이 있는데 가보자고 했다.
바로 과장과 함께 집을 봤다. 한눈에 투박하고 거무튀튀한 층계, 녹슨 난간, 뒤편으로 이어지는 거친 땅이 보였다. 현관을 열자 집 안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으며 곳곳에 거미줄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과장은 민망했는지 창문을 열어젖히며 사람이 안 쓰니 금세 이 지경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거실 구석에는 아이들의 키를 잰 흔적이, 오래되어 흐릿해진 유리창과 민트색 창틀에는 깔끔하게 떼어내지 못한 스티커 자국이, 창고와 다용도실에는 군데군데 곰팡이 흔적이 있었다. 바닥도 지저분했다. 괜찮았다. 오히려 그런 흔적에 내가 아이들을 키우던 젊은 시절이 떠올라 정겹게 느껴졌다. 내 표정을 살피던 과장은 슬그머니 웃으며 월세를 낮게 받을 테니 대신 집 관리나 잘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단박에 계약했다. 그러곤 집에 정성을 쏟았다. 텃밭을 공들여 가꾸고 삐걱거리는 문과 바닥을 고쳤으며 빗자루로 층계도 자주 쓸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지낼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창밖을 살폈다. 그 사이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길은 내 집과 각자의 스케치북 사이를 계속 오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내 집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멋지게 그려달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들의 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세탁기에서 물 빠지는 소리가 났다. 퍼뜩 정신이 들어 창가에서 물러났다. 다용도실 구석에 놓인 청소기를 집어 들고 거실로 나가 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먼지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거슬렸다. 나는 청소기 전원을 끄고 우두커니 섰다. 아무래도 그들의 그림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나가서 당당하게 그림을 보고 싶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내 집을 그리는데 그 정도는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쉽사리 현관 쪽으로 가지 못했다. 아직은 복지관이나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사람들 말고는 한국인과 직접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청소기를 손에 잡은 채 이번엔 거실 창가로 다가갔다.
여자와 남자는 여전히 그대로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핏 Urban sketchers(어반 스케처스)라고 적힌 천을 지지대에 세워놓은 게 보였다. 그 근처에도 세 명이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하,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청소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얼른 휴대폰을 찾아 ‘어반 스케처스’를 검색해 보았다. 많은 글과 동영상이 떴다. 링크 하나를 클릭해서 읽어보았다. 어반 스케처스 선언문이었다. 그중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함께 그린다, 는 항목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모임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러 나라 사람이 모여 각자 그림을 그린 뒤 함께 그림을 감상하는 과정을 담은 동영상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그림을 두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무척 보기 좋았다. 모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듯했다.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모임 일정에도 언제든 참여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림을 구경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나도 저 그룹에 속하고 싶었다. 한국에 와서 적응하느라 붓을 잡지 못했던 내게 이제 다시 그림을 그리라는 하늘의 뜻으로 저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인과 교류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고 아내가 한국에 왔을 때 저런 모임에서 나와 함께 활동한다면 한결 쉽게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림을 두고 저들 속에 섞여들어 함께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보고 얼굴에 묻은 것은 없는지 살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옷장을 열어 잘 다려놓은 깨끗한 옷을 꺼냈다. 모름지기 첫인상이란 중요한 법이었다.
*
잠시 쉬려 펜을 멈추고 정쌤 쪽을 흘끗 살폈다. 나는 아직 스케치를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정쌤은 이미 채색을 하고 있었다. 집을 둘러싼 하늘과 텃밭, 땅 부분은 물을 많이 머금은 붓으로 빠르게 칠한 반면 집과 층계에는 초벌 채색 위에 세밀하게 색을 얹었다. 나도 모르게 정쌤의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멍하고 보는데, 정쌤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붓을 계속 놀리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의 그림 많이 보는 것도 좋아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 있게 그리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거예요. 집에서도 수시로 휴대폰이고 안경이고, 눈에 보이는 걸 자꾸 그려보세요, 그 방법밖에는 없다니까. 스스로 자꾸 해 봐야 해.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내가 넋 놓고 쳐다본 걸 정쌤이 눈치챈 게 어쩐지 부끄러웠고 그의 수다가 다시 시작된 것도 싫었다. 조금이나마 생겼던 호감이 단번에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도 어엿한 어른인데 언제부터 친했다고 자꾸 반말을 섞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면 그걸 보면서 내가 배우고 싶은 부분만 취할 수 있을 거였다. 각자 그렇게 할 일을 하면 되는데 정쌤은 왜 쓸데없는 기력 소모를 하는 건지.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운영하는 약국에 왔던 정쌤을 떠올렸다. 정쌤은 마스크를 쓴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피로회복제와 종합영양제를 샀다. 챙겨 먹으면 좋기야 하지만 저렇게 참견하고 다니느라 피곤해서 비타민이 절실히 필요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공연히 뭐라고 대답이라도 했다가는 말이 길어질 게 뻔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내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쌤의 그림을 한참 봐서 그런지 내 그림이 영 시원치 않아 보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쌤은 꾸준히 그리다 보면 나처럼 잘 그리게 될 거예요, 하며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겸연쩍어 입을 삐죽이며 정쌤처럼 그리고 싶다고 한 적 없거든요, 했다. 그는 고개까지 젖혀가며 크게 웃고는 착각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나온 불퉁한 말투에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유쾌하게 웃어서 조금 무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말문이 다시 터진 정쌤은 우리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모여서 그림을 그리니 얼마나 좋으냐고, 친분도 쌓으면 더 좋을 거라고, 여기 멤버 중에 성격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꽤 괜찮은 사람이 많지 않냐고. 나는 그의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최근 들어 끼리끼리라는 말이 거북했다. 비슷한 성향의 무리에 있으면 말이 통하니 편안하고 비교적 안전하다는 건 알지만 그게 요즘은 너무 심한 것 같아서였다. 정치 성향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서 상대 진영을 덮어놓고 깎아내리는 모습이 불편했다. 인간관계를 넓힌다는 소셜네트워크는 종종 목소리 크고 영향력 있는 소수가 올린 내용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어코 관계의 나눗셈을 키우고야 마는 경우도 많았다.
언젠가 비 내리던 날이었다. 친구들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며 연예 기사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맥락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치 이야기로 이어졌다. 한 친구가 A 정당은 무조건 싫다는 식의 발언을 했고, 몇몇은 끄덕임으로 적당히 호응했다. 나도 A 정당에 대해 나쁘게 여기는 부분이 있었지만 친구의 몇몇 발언은 맹목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뉴스에서 들었던 A 정당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슬며시 흘렸다. 반박은 없었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한 친구가 고개를 모로 젓고 흘기듯 나를 꼬나보며 너 A 정당 지지해? 하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뉴스에서 나온 말을 무조건 맞다고 여겨서 하는 말은 아니라고, 그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은 거라고.
불쾌한 기분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이미 내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친구들은 괜히 맥주를 들이켜고 안주를 입에 넣으며 내 눈길을 피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연예인이 소속사와 갈등이 있다더라, 사귀던 누구와 헤어졌다더라, 그런 뉴스에 대해 여러모로 추측 해가며 의견을 나누듯 정치 기사에 대해서도 그러자는 뜻일 뿐이었다고 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이겨내기 버거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다. 그 뒤로 단체채팅방에 모이자는 이야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나를 뺀 멤버끼리 때때로 모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채팅방을 나와버렸다.
요즘 그런 분위기가 어디에나 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이 있고부터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꼈다. 그간 쌓인 시간이 어떻든 생각이 다르면 대수롭지 않게 선을 긋는 관계라니. 아마 친한 사이라고 믿었던 그룹이라 더욱 그랬을 터였다.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도움도 받을 필요 없이 재주껏 사는 게 깔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무관한 일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특별히 미움받을 일이 없었다. 점점 내 인간관계의 반경이 좁아질 수도 있지만 끼리끼리 쑥덕대는 무리에 끼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나는 정쌤이 하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부지런히 펜을 움직였다. 그제야 정쌤도 머쓱한지 입을 다물고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얼마 뒤, 노란 물감으로 수건만 간신히 칠했는데 정쌤이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되어간다고 했다. 나는 팔을 쭉 뻗어 그림을 멀찌감치 들고 노란 수건 집과 비교해 보았다. 연필로 구도를 간단하게라도 잡고 그려서인지 얼추 비슷해 보였다. 확실히 이전 그림보다는 나았다. 으쓱해져서 그림 하단에 날짜와 ‘동화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노란 수건 집을 그리다’라는 문구도 적어넣었다. 정쌤은 나의 그림을 보더니 꽤 괜찮다고 칭찬했다. 나도 그의 그림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아 고개를 들었다. 한 남자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햇빛에 그은 피부에 삭발 수준의 짧은 머리를 한 남자였다. 동남아 쪽은 아닌 것 같은데 중국인이나 일본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여간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드러난 팔과 다리에는 근육이 잡혀 있었고 눈은 빛났으며 귀에는 자그마한 귀고리까지 하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쉰은 넘었을 것 같았다. 나는 정쌤에게 앞을 보라는 눈짓을 했다. 정쌤은 특유의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노란 수건 집에서 나왔다는 듯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키는 남자를 향해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허락도 없이 그렸어요. 괜찮으시죠? 우리 앞에 가까이 온 남자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빙긋 웃더니 어눌한 한국말로 자기가 저 집에 살고 있으며 이름은 무슨 고르라고 했다.
확실하게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귀고리를 했으니 그냥 내 멋대로 귀고르라 넘겨짚기로 했다. 어쨌든 외국인이라는 게 분명해졌고,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를 외국인노동자라 여겼다. 몸의 근육은 건설 현장처럼 몸을 쓰는 곳에서 일하며 생겼을 터였다. 이어 내 머리에는 불법체류, 가난, 범죄, 마약, 그런 낱말들이 맴돌았다. 눈만 끔뻑이는 나와 달리 정쌤은 귀고르에게 스케치북을 내밀어 그림을 보여주었다. 귀고르가 그림을 살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정쌤은 스케치북을 넘기며 예전에 그린 그림까지 보여줬다. 두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그림을 보는 모습에 긴장이 다소 누그러졌다. 얼른 그리던 그림이나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뒤 귀고르는 나를 보더니 내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이 조금 우스웠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그림을 살피는 그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귀고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떴다. 이내 고개를 들더니 러시아에서 왔다고 했다. 이어서 뭐라고 더 말하긴 했는데 나는 순간 아직도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을 떠올리느라 듣지 못했다. 푸틴의 오 선 확정 뉴스,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 나발니의 옥중 사망 사건에 이어 용병 단체인 바그너 그룹과 프리고진에 대한 기사, 세계 곳곳에서 심해지는 대립 구도에 대한 기사도 기억났다. 어떤 입장의 사람일지 알 수 없는 그와 가까이 있는 상황이 불편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정쌤이 우리 모임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귀고르가 알아듣든 말든 우리 가야 해요, 바이 바이, 하며 손짓했다. 정쌤이 무척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정신이 들어 귀고르에게 최대한 선한 미소를 지으며 바이, 하고는 바삐 화구를 가방에 넣었다. 귀고르도 멈칫대다 이내 물러섰다. 짐을 챙겨 일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노란 수건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층계 중간에 서서 우리를 보고 있던 귀고르는 얼른 몸을 돌려 화분의 고추를 하나 따더니 층계를 마저 올라갔다.
*
현관으로 들어서며 얼떨결에 딴 고추를 내려다보았다. 하필 아직 덜 자란 거였다. 고개를 내저으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거실 창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청소기를 보자 아까 집을 나서기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래 봬도 내가 젊은 시절에 꽤 인기가 많았지, 하며 고개도 치켜세워보고 한국말로 어떻게 인사할지 연습하며 들떠 있었다. 나는 식탁 위에 고추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눈을 감고 그들에게 다가갈 때 일부러 미소를 가득 머금고 씩씩하게 걸어갔던 내 모습을 되짚어 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들은 분명 친절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특히 남자는 금방 그린 내 집뿐 아니라 스케치북을 손수 한 장씩 넘겨 가며 예전에 그린 것까지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전통시장, 골목길, 카페, 식당, 공원 등 다양한 장소가 담겨 있었다. 특히 기찻길, 기차 안의 사람들, 기관실 등 기차 관련 그림이 많았다. 그들과 활동하면 어울려 기차를 타고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그림을 그리겠구나, 싶어 잠시 설레었었다.
남자의 친절에 살짝 용기가 생긴 나는 여자에게도 그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림을 건네는 여자의 무표정에 다시금 긴장되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그림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 채색까지는 진행하지 못한 상태였다. 색을 넣은 곳은 오로지 한 곳, 노란 수건뿐이었다. 하단에 뭐라고 글씨도 적혀 있었는데 흘려 쓴 글씨라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직은 정자로 쓰인 한글만 더듬거리며 읽을 수 있는 나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키며 그녀를 쳐다봤다. 읽어줄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이고르입니다, 나는 이 집에 삽니다, 라는 말을 하고 나자 더는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한국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더듬거리더라도 조금은 더 할 수 있건만 왠지 그때는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나는 그녀의 그림 위 문구를 가리키던 손을 거두어 이마를 긁적였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고민스러웠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일 텐데 나의 국적은 러시아, 나의 부모는 사할린 교포. 그러니까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의 생김새도 그렇지만 성씨인 ‘김’은 내가 한국인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여겼다. 그러나 서툰 한국말로 이런저런 설명을 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든 태어나고 오십 년 넘게 살아온 곳은 러시아였다. 나는 대답했다. 저는 러시아에서 왔습니다. 여자는 움찔하더니 입을 앙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내가 얼른 부모는 한국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지만 여자는 다만 고개를 모로 돌릴 뿐이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운 찰나, 남자가 나에게 인사했다. 그들과 헤어질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아쉬웠지만 뒤로 물러섰다. 짐을 챙기는 동작이 사뭇 빠르고 가벼운 걸 보아 여자는 자리를 이만 피할 수 있어 안도하는 듯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얼굴과 머리에 끼얹었다. 찬물에 흘려보내듯 다 잊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물기를 닦으며 거울에 비친 한국인과 다름없는 내 얼굴을 보는데 조금 전의 일이 또 생각났다. 내가 김씨 성이라는 점에 대해 남자도 여자도 더 묻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섭섭한 일이었다. 한국 성씨를 가졌지만 이름이 이고르라는 것에 놀라워하길 바랐었다. 그러면 나는 부모가 한국 사람이라고, 그래서 생김새도 한국인과 같은 거라고 말하려 했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길 기대했지만 그건 나의 순진한 착각 속 시나리오에 불과했나 보았다. 어쩌면 내가 동포라는 게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내 어눌한 발음을 못 알아들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생각해도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입에서 쯥,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통역 봉사를 한답시고 정작 내게 필요한 한국어 공부는 소홀히 한 것도 후회스러웠다. 그나마 자주 만나는 과장과도 영어로만 이야기했으니. 어쨌든 그들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볼 수도 있었고 번역 앱을 들이밀며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아까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다음 기회에 함께 그림을 그려도 괜찮을지 묻지 못했다. 아니, 공연히 어색한 거절을 당할 수도 있었을 테니 묻지 않길 잘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나에게 베푼 친절 그 이상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거냐고 나에게 비아냥거리며 되묻고 싶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창밖을 보았다. 그들이 사라진 골목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어쩐지 텅 빈 기분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저쪽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림을 보며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대문에 널어놓았던 노란 수건을 거두었다. 어제 오후에 텃밭에서 일하느라 목에 둘렀던 노란 수건이 땀으로 젖어 대문 위에 놓고는 잊고 있었는데 그게 쓸데없이 남들의 시선을 끈 것 같아서였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우두커니 서 있자니 벽시계의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커다랗게 울렸다. 나는 시계 옆에 걸린 가족사진을 가만히 보았다. 유리 액자는 먼지도 없이 깨끗했지만 손에 쥔 노란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았다. 웃고 있는 아내 나탈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순간 눈가가 뜨거워지며 목울대로 뭔가가 치고 올라왔다.
*
정쌤과 나는 우리 모임 배너를 세워둔 곳으로 나란히 걸었다.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걷던 정쌤은 나를 돌아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 사람 우리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왔던 것 같은데요. 마침 나도 쓸쓸하게 층계를 올라가던 귀고르를 떠올리던 중이었기에 흠칫 놀랐다. 귀고르는 그저 구경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는 분명 달랐다. 기대에 찬 눈빛과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짐작건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만약 그랬다면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정쌤은 느릿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나도 내 대답이 비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우선 귀고르의 한국어 실력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만약 귀고르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현했다면 더욱 난처한 기분이 들었을 게 뻔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내 마음속에서 더욱 그를 밀어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엷은 죄책감이 스쳤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사람이었다.
배너 앞으로 모인 멤버들은 길바닥에 각자 그린 그림을 늘어놓았다. 나도 그들을 따라 그림을 두고 뒤로 물러섰다. 언제나 그렇듯 서로의 그림을 보며 감탄과 질문이 오갔다.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넓어봤자 삼십 미터 반경 안에서 그린 작품들인데 제각각 다르다는 게 새삼스레 느껴졌다. 정쌤과 나처럼 같은 곳을 그렸더라도 그랬다. 만약 다들 똑같이 그려냈다면 그게 오히려 괴기스러웠겠지만. 문득 고개를 돌려 회원들을 살폈다. 어디에도 남의 그림을 비웃는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독특한 표현에 대해 놀라워했으며 실력이 나아진 사람을 칭찬했다.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나와 다름에 감탄하고 서로 편하게 묻고 답하는 시간은 너무 많은 것이 극단으로 치닫는 요즘 세상에서 행하는 다양성을 향한 작고 즐거운 퍼포먼스인 양 느껴졌다.
그림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회원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내 그림에 적힌 글귀가 좋다며 빙긋 웃었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렇지만 머릿속에서는 내가 쓴 글귀를 가리키던 귀고르가 떠올랐다. 읽어달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일부러 무시했었다. 귀고르의 집에 동화 같은 상상이라니 너무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았으며 그걸 귀고르가 알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사실 그의 집이라는 것을 진즉 알았다면 그릴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순간 귀까지 달아오르는 듯했다. 어이없었다. 끼리끼리 편 가르기가 싫다던 나 아니었나? 심지어 귀고르는 우리에게 혼자 다가오느라 굉장한 용기를 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정쌤이 옆으로 다가와 내 그림을 전시회에 걸어도 좋겠다고 했다. 같은 현장에서 그린 그림끼리 모아서 전시할 예정인데 인당 세 작품 이상 걸어야 한다는, 그러니 앞으로도 꾸준히 나와서 그렸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쩐 일인지 이제 그런 말이 진저리 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한 점이라도 보탠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정쌤에게 전시회 행 승차권을 받겠다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정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열차는 전시회, 전시회 행입니다. 중간에 내리지 마시고 끝까지 여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옆에 있던 한 회원이 누구나 탈 수 있지요? 하고 물었고, 정쌤의 대답은 그럼요! 외계인도 가능합니다! 였다. 회원들은 그 대답에 왁자하게 웃었지만 나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정쌤이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던 생각은 외계인이라는 단어 앞에서 다시 나를 붙들었다.
모임이 끝나고 내 차가 있는 골목 쪽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왠지 무거웠다. 나의 귀고르에 대한 태도는 A 정당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 내가 외면당했던 날 친구들이 괜히 맥주와 안주로 눈길을 돌리며 나를 피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벽 너머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듯,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섣불리 선을 그었다. 내 상상과 달라 실망했으며 그의 이름을 마음대로 귀고르라 단정했다. 더군다나 러시아에서 왔다는 그의 대답에 눈을 피했다. 선량한 러시아인도 많을 텐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정쌤의 외계인도 올 수 있다는 말은 나의 편협함을 꾸짖고 있는 듯했다. 한숨이 나왔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귀고르의 집 앞이었다. 더는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이라 단정했던 내 마음이 떠올랐다. 불현듯 이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열어 ‘노란 수건 집의 주인도 만났다’라고 한 줄을 더 적었다. 여전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들어 귀고르의 집을 다시금 쳐다봤다.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을 열었다. 노란 포스트잇 메모지를 꺼내 조금 큰 글씨로 또박또박 전시회 장소와 날짜를 적었다. 조심스레 층계를 올라갔다. 내 마음이 온전히 전해질지, 마치 어려운 타인의 방에 노크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귀고르도 그랬겠지, 아니 어쩌면 더. 안쪽에서는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대문에 메모지를 붙이고 돌아섰다. 서둘러 층계를 내려오다가 멈췄다. 다시 올라가 메모지 하단에 우리 모임의 웹사이트 주소와 함께 글자를 더 적었다. 함께 그리고 싶으시면 언제든 나오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