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조선민족대동단 단장 전협(全恊) 선생
아들아..아빠는 요즘 한 인물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
우연히 본 오마이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 '초월'을 보고 알았고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이지.
'초월'이란 만화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스님이면서 열렬한 독립운동가이었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 일생과 그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있단다.
그런데..아빠가 주인공인 백초월 스님보다 더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있어.
그 만화 속에서 나오는 전협(全協, 1878~1927)이란 사람이란다.
이 사람의 인생 흐름이랄까..그게 예사롭지 않아 관심을 끌더구나.
전협,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1846~1922), 최익환(崔益煥,1889~1959).
이들의 연결고리가 무엇이냐 하면은..대동단(大同團)이란 독립운동단체란다.
대동단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전협과 최익환 선생이 대한제국의 대신을 역임했던
동농 김가진 선생을 총재이자 고문으로 추대해서 조직을 정비하고 창립한 단체란다.
대동단. 정식명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비밀독립운동단체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지.
군자금 모집, 대동신보 발행 등 선언문과 포고문, 진정서 작성과 배포 등 선전활동을
했는데 참여자만 유림, 의병, 종교, 여성, 종교계등 11개 계층에 회원만 전국과
만주 안동현에 까지 지부를 두고 참여자만 수만에 이르는 영향력있는 단체였단다.
그런데 놀라운게..군자금 모집과 재정을 담당했던 단장 전협과 선전활동을 담당했던
최익환 선생은 일진회(一進會) 출신이었단다.
일진회란 대한제국 말엽부터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까지 친일행적을 일삼고,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 섰던, 악질 친일매국파들이 모인 단체였단다.
그런데 그 악질 친일매국파 일진회 출신 인사가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창립을 주도했다.
놀랍지 않느냐?
악질 친일매국파였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180도 돌변하여 항일독립투사가
되었던 것일까.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최후까지의 행적을 보면, 이분들은 일제에 의해 조종되는
이중간첩, 밀정이 아니라 확실히 독립투사로서 끝을 맺었단다.
이런걸 두고, 바로...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오마이뉴스의 만화 '초월'을 보면, 백초월 스님과 대동단 단장 전협 선생은 일제에
큰 타격을 주고, 우리 독립운동에 큰 힘을 불어넣을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현실화 된다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었지.
그런데 백초월 스님이 전협 선생의 어두웠던 과거를 다 알고 있었지.
그런데도 그를 신뢰하고 있었어.
배신자는 또 배신할 가능성이 많다는게 일반적인 시각인데 말이지.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전남 구례군)
그리고 대동단 단장 전협 선생의 어두운 과거를 보여주더구나.
그는 친일매국파들의 단체, 일진회 회원이면서 평의장까지 했고 부평군수까지 역임한
상당한 거물이었단다. 그런데 그는 공을 세워 일제에 잘보여 출세할 욕심에 눈이 멀어
당시 의병전쟁이 한창이던 지리산으로 갔어.
지리산에서 어릴적 친구를 만나 지리산 연곡사(燕谷寺)에 갔는데..보니까 연곡사는
지리산 의병들의 본거지였고, 친구는 의병장이었어. 친구와 헤어져 산을 내려간 그는
일제군경에 지리산 의병의 본거지 위치를 알리고 그때문에 연곡사는 불타고 의병들은
몰살을 했지. 그의 친구였던 의병장도 희생되었고..
친구였던 의병장과 그의 딸을 구명했던 사람이 백초월 스님이었는데 의병장은 스님을
살리고자 희생되었고, 그 의병장의 딸은 백초월 스님이 거두어 살려놓았는데..
이 딸이 커서 서울의 권번에서 이름있는 기녀가 되어 있고, 백초월 스님과 인연을
이어가며 그의 독립운동을 돕고 있었다.
1919년 이 시점에서의 전협 선생은 눈이 멀어 친구를 팔았던 그 과거를 후회하고
그의 딸을 보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백초월 스님과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지.
오마이뉴스 연재만화 초월의 내용은 지금까지 이렇게 진행되었다.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경내)
그런데 이 대목에서 아빠의 머릿속을 스쳐가며 떠오른 역사가 있었다.
바로 지리산 연곡사와 연곡사의 의병..아빠, 엄마는 여러번 갔지만 너도 한번 가본적
있었는데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깊은 골짜기를 수십, 수백 품은 영산인 지리산.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는 피아골이고 그 피아골에 연곡사란 절이 있단다.
이 연곡사는 7년 조일전쟁과 1907년 의병전쟁 때 일본에 의해 절이 소실되었으니
일본과 악연이 있다고 해야겠는데 7년 조일전쟁 때는 우리 의승병들의 근거지여서..
1907년 의병전쟁 때도 녹천 고광순 의병장이 이끄는 지리산 의병의 본거지여서
그런 비극을 당해야 했단다.
불원복 태극기 (고광순 의진)
고광순 의병장은 일제에 장기 대항할 본거지로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를 선택하고,
진중에 불원복 태극기를 세웠지. 고광순 의병장은 바로 7년 조일전쟁 때 금산전투에서
산화했던 제봉 고경명 선생의 직계 후손이란다.
그가 태극기에 새겨넣은 불원복(不遠復)이란 말은 국권을 머지않아 되찾아 올것이라는
결의였지.
아마 만화 '초월' 속의 지리산 연곡사의 의병에 얽힌 이야기가 왜군경의 기습을 받고
고광순 의병장을 비롯해 수십명의 의병이 산화했던 그 사건을 말함이 아닐까 싶다.
연령을 따져보면 고광순 의병장과 전협 선생은 나이차가 많아서, 출신지가 달라
친구는 될 수 없고, 이게 사실이라면 고광순 의진 휘하의 한 의병장과 인연이 있었겠지.
다시..대동단 단장 전협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와서..이야기를 풀어보자.
1919년 3월, 일제에 뺐긴 국권을 되찾고 독립을 이루고자 전 민족이 일어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인 3.1운동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었지.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우리 독립운동을 이끌 지도부와 확실한 노선이 없어서, 그리고 국제사회의 외면속에
3.1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단다.
하지만 3.1운동의 결과, 우리는 중국 상해에 우리의 망명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일제에 대한 투쟁과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렸어.
대동단은 제2의 3.1운동을 기획하는 한편..
아빠가 앞에서도 말한 경천동지할 대사건을 기획해.
그 사건이 뭐냐하면..의친왕 이강의 국외망명 기도였지.
역사 속에서는 일명, 대동단 사건이라고도 해.
의친왕 이강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이 어떤 인물이었을까.
의친왕 이강은 대한제국 초대황제인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이었단다.
대한제국 황실 인사 중 유일하게 항일독립의식을 가지고,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던
기백을 가지고, 대한제국 황족으로서 유일하게 그 위상에 걸맞는 모습을 보인 분이다.
아무리 국권을 잃고 망한 나라의 황족이라지만, 그는 중요한 인물이었지.
그의 행보에 따라 우리나라의 민심향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고, 또 그가 가지는
위상과 그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늘 일제의 감시대상이었단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주색에 빠진 무기력한 황족의 모습을 연출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에..말이다. 아들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런 중요한 황족인사가 국외로 망명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서 항일독립운동에 나서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일제가 말하는
대한제국 황실을 잘 대우하고 보호하며 그들의 지지를 받아 일제가 대한제국을
지배한다는 것이 거짓이라는게 온 천하에 폭로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다른 대한제국 황실과 귀족 등 지도부가 일제에 저항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일제가 이걸 생각한다면 아연실색(啞然失色)할걸.
국내외 우리 민족의 민심을 모으고, 우리 독립운동 노선의 중요한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의친왕 이강이었어.
그렇다. 아들아.
아빠가 말한 하늘이 떨고 땅이 흔들리는 경천동지할 사건이 바로 의친왕 이강의
국외망명이었고,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이 바로 대동단이었다.
대동단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황실과 대한제국의 지도급 인사들의
망명을 주도했어.
먼저 대한제국의 대신을 지냈고 일제가 대한제국 귀족을 회유하고자 남작의 직위를
내렸던 동농 김가진 선생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망명해서 대한제국 임시정부에
합류했지. 그리고 국내에 남아있던 대동단 단장 전협 선생이 은밀히 의친왕 이강과
접선했고, 국외망명 의사를 확인한 후 계획을 실행해. 이 과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이종욱 선생이 개입하고 있었단다.
의친왕 이강의 결의는 다음과 같았다.
"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기를 원한다."
그는 황족의 지위를 버리고,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일개 신민으로서 그 정부를 받아들여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
이게 바로 한 나라의 황자로서 보여줘야할 품격이다.
1919년 11월, 드디어 의친왕 이강의 국외망명 작전이 결행되었고, 국내를 벗어나
압록강 이북 중국땅 단둥에 도착한 것 까지는 성공했었지. 단둥에는 이륭양행이라는
조지 쇼라는 영국인이 운영하는 상사가 있는데 이곳이 우리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우리를 후원하던 곳이었어.
이 무슨 불운인지..그 이륭양행 안으로만 들어서면 성공이었는데, 이륭양행을 겨우
2km 남겨두고 일본인 한 경부가 변장한 의친왕 이강의 얼굴을 알아보고 체포되는
바람에 의친왕 이강의 망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단다.
그리고 이 사건을 주도한 대동단이 노출되며 주요 간부가 모두 체포되어 조직이
큰 위기에 몰렸지. 전협과 최익환 선생이 모두 이때 체포되었고, 전협 선생은
징역 8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7년을 살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는데, 석방 직후
고문의 영향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의친왕 이강은 국내로 다시 끌려가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대상이 되어 자유를
잃었지만 그는 일본으로 끌고 가려는 일본에 끝까지 저항했고, 창씨개명도
거부하며 마지막까지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는구나.
아들아, 아빠는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하여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일제에 나라를 가져다 바치려는 한심한 황실 사람들, 귀족 등 지도자 계층사람들의
모습에 정말 많은 실망을 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얼마 되지도 않아 배신하며 일제의 충견으로
전락한 그 인사들에겐 더많은 실망을 했지.
인간성이 정말 선한 것인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긴 한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로.
하지만 다 그러진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충실했던 그 일부의 인사들이 아니었다면, 현재를 살아가며
역사를 배우는 우리가 얼마나 비참했겠느냐. 이분들 덕분에 그나마 우리의 자존심이
조금은 사는 것 아니겠느냐.
대동단 단장 전협 선생은 아빠도 최근까지 잘 몰랐던 분이었다.
인간이 나약한 존재이기도 한 탓에 고난의 길을 버리고 안락한 삶을 위해 절의를
버리고 배신한 사례는 많아도, 반대로 보장된 안락한 삶을 버리고 정의를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한 사례는 몇 안된다는 것을 아빠는 잘 안다.
그 선택을 하는데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되고, 그 고통을 감내할 용기가 있어야
하는지, 그 정신적 경지가 얼마나 높아야 하는지도 잘 안다.
아빠는 그래서 대동단 단장 전협 선생이 한때 일진회 활동을 하며 나쁜 행적을
쌓았던 일보다 독립투사 전협 선생을 기억하고 싶고, 그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아들아, 아빠는 그래서 조선민족대동단 단장, 독립투사 전협 선생을 주목했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