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박두진 시인의 창작 세계와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마련된 ‘혜산 박두진 전국백일장’이 올해로 제25회를 맞았다. 이번 백일장은 응모작품이 작년보다 조금 저조하였지만 전국 각지에서 335편 작품이 응모되었다. <의자>, <달력>이라는 흔하고 일상적이면서도, 함의가 풍부한 시제가 제시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개성적인 목소리, 깊이 있는 성찰과 뛰어난 수사를 보여준 작품들이 많아 흡족했다. 특히 대학‧일반부 응모작들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소재를 깊이 있게 재해석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많았다. 고등부는 더러는 시와 산문의 경계가 모호한 지나치게 설명적인 작품들도 있었지만, 역시 주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언어의 감수성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들도 많았다. 특히 진정성 있는 작품이 많아 청소년의 정서와 세대적 고민을 듣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초, 중등부에서는 일상에 대한 순수한 시선과 상상력이 잘 드러나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일부 작품들의 경우 기교에 치중하거나 기성의 어른들의 문체를 흉내낸 작품들도 있어 다소 아쉬운 감도 들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시제에 충실한 시들이 대부분이었고, 달력이나 의자에 대해 예사롭지 않은 관찰력과 깊은 생각을 보여주고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노벨상 수상자를 낸 고무적인 분위기에 더해, 우리 문학의 미래에 대한 기대치 한층 더 커지는 고무적인 자리였다. 심사위원들은 초등부 저학년부와 초등부 고학년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일반부로 구분하여 응모된 작품들을 심사했으며, 그 결과 김단아(명지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빈 의자」를 전체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김단아의 시 「빈 의자」는 상징과 이미지의 세공이 탁월하며, 사유의 깊이 또한 단연 돋보이는 수작이다. 시적 주체는 ‘빈 의자’의 상징을 통해 성장기 소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허함과 불안, 상실의 정서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빈 의자’는 누군가의 부재, 혹은 자기 자신의 소중한 감정의 결핍과 결여를 동시에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또한 그 위에 앉은 위태로운 ‘나’와 그러한 ‘나’의 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켜주고, 죽음충동으로부터 삶충동 쪽으로 다시금 호명해 주고 이끌어주는 존재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공간이자, 매개체로도 쓰이고 있다. 단지 공허와 상실, 절망과 결핍에서 그치지 않고, “빈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가족의 손길과 관심을 시적 주체는 외면하지 않고 있다. 환상 또는 잠, 죽음충동으로의 수동적 도피에서 현실/삶으로의 능동적 소환과 극복이라는 다중적 의미를 부여하는 메타포로 ‘빈 의자’는 중요한 고도의 수사적 기표가 된다. 상실을 단순히 애도하거나 우울증적인 자아에서 머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시적 주체는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 회복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시의 도입부에서는 꿈과 현실, 생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자아의 내면을 탐색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꿈과 현실, 의자와 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새벽”이라는 표현들을 통해 시적 주체의 불안과 외로움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투명하다는 건 죄였고/ 나는 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등의 대목에서는 성장 과정의 불안과 자기 보호 심리가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자기 내면을 솔직하게 응시하고, 아픔과 상처조차도 용기 있게 언어화하려는 태도가 두드러지며, 진부함 없이,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언어로 개성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점, 마치 한 편의 짧은 서사처럼 시작과 끝을 자연스럽게 연결한 구성력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시는 청소년 특유의 예민함과 불안의 감수성을 깊게 파고들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상처와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는 데 나아가 극복의 지점들을 모색하고자 분투하는 시적 주체의 정동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더욱 자신만의 목소리와 서사로 독창적이면서도 완성도 있는 시적 세계를 확장해 나가길 기대하며, 대상 수상자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대학, 일반부 최우수상으로는 김병걸의 「고요한 의자」를 선정했다. 이 작품은 의자라는 일상의 사물을 삶과 존재의 상징으로 치환하는 시적 통찰이 돋보인다. 간결하고 서정적인 언어로 반복되는 장면들을 연결해 친숙하지만 낯선 정서를 환기한다. 낮과 밤, 노인과 아이 등 다양한 소재들에서 의자와 연결된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축적이 은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시적 주체의 묘사에 의해, 비어 있는 의자는 더 이상 비어 있는 의자가 아닌, 기억을 앉힌 충만한 사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빈 의자를 응시하던 독자에게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여운”과 생동감을 전해주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이 시는 한 자리에 머무는 의자를 통해 한 존재의 의미와 견딤의 가치를 섬세하게 성찰하여 보여준다. 망가지고 낡아가면서도 사람을, 세월을, 기억을 품고 있는 의자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따뜻함의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소재에 깊은 의미를 입혀내는 힘이 뛰어나다. 이에 최우수상으로 선정하였다.
고등부 최우수상으로 윤지호 학생(서울 서라벌고등학교 2학년)의 「목소리가 담긴 달력」을 뽑았다. 이 시는 달력과 메모지를 통해 엄마의 사랑과 희생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매일 아침밥과 함께 전달되는 따뜻한 메시지는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달력이 되고, 시적 주체는 이처럼 일상적 경험을 특별한 의미로 전환하는 데 뛰어난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다소 평이하고도 잔잔한 전개를 보여준 감도 없진 않지만, 간결한 언어와 일관된 이미지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과 엄마의 마음을 담백하게 전하고 있어 최우수상으로 선(選)했다. 사소한 일상이 쌓여 하나의 달력이 되어가는 과정이 진한 울림을 남긴다. 우수상으로 뽑힌 김예빈 학생(서천 여자정보고등학교 1학년)의 「틈」이라는 작품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 시는 의자의 네 개의 다리 중, “짧은 한 다리”를 통해 공중에 뜬 사이, “틈”을 응시하는 시선을 섬세하게 시화한다. 불완전함과 회복, 그리고 균형의 의미를 능숙하게 그려낸다. 작은 틈과 흔들림에 주목, 일상의 미세한 결핍을 간결하고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등, 통찰력과 묘사력이 둘 다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중등부 최우수상으로 이율희 학생(서울대원국제중학교 3학년)의 「의자」를 선정했다. 이 시는 의자를 통해 가족과의 추억, 이별, 그리고 사물의 소중함을 따뜻하게 담아낸다. 오래도록 곁을 지키던 의자가 낡아가며 느끼는 쓸쓸함을 감각적인 언어로 그려내, 세월의 흐름과 정서적 울림을 전한다. 의자에 가족의 삶을 투영시킨 발상과 일상적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마지막까지 제 역할을 다하는 의자에 대한 따뜻하고도 아련한 시선이 시 전체에 잘 배어 있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중학생다운 감수성과 성찰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초등부 고학년 최우수상으로는 정원혁 학생(대구 장동초등학교 6학년)의 「달력」이 선정되었다. 이 작품은 달력을 “작은 창”이라는 독특하고도 신선한 비유로 풀어내며, 시간의 흐름과 하루의 소중함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격자, 그림자, 창, 햇빛 등 이미지를 적절히 배치해 날카로운 관찰력과 시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나이에 비해 시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깊이가 돋보인다. 어휘 선택과 구성이 매우 자연스러워 전개가 매끄럽고, 여백의 미도 느껴진다. 초등학생 작품으로 보기에는 성숙하고 능숙한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는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이 학생이 보여줄 성장과 변화가 매우 기대되므로 심사위원들은 숙고를 거쳐 최우수상으로 선정하였다. 우수상과 장려상으로 선정된 작품들은 동심은 잘 표현되었지만, 행과 연만 나뉘었을 뿐, 다소 산문적인 문체와 진술 방식을 보여 다소 아쉬웠다. 그래도 수상권에 든 학생들뿐만 아니라, 응모한 모든 학생들에게 꾸준히 쓰고 읽으라는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
초등부 저학년 최우수상으로 홍해민 학생(양주 주원초등학교 3학년)의 「시 쓰는 의자」를 뽑았다. ‘의자’를 통한 시 쓰기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가족에 대한 깊은 사유와 내면의 상처를 내보이는 데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평범한 일상 속 사물에 특별한 (사건의) 의미를 부여하며,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외부 세상은 물론 시적 주체의 내면세계까지도 섬세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특히 초등부 저학년의 시답지 않게 의인화된 ‘의자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의자의 고마움’을 느끼는 따뜻한 마음, 타인을 향한 배려까지도 잘 담아내고 있다. 강아지풀과 개미, 오래된 기억, 그리고 투병 중인 엄마까지 다양한 대상을 아우르는 등, 시적 소재를 담아내는 감정의 폭이 신중하고도 감각적이면서도 넓다. 마지막에 “의자는/ 내 눈과 마음을 여는/ 열쇠”라는 표현으로 수렴되는 결미 부분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초등 저학년임을 잊게 할 만큼 성숙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어, 앞으로의 시적 성장이 더욱 기대되는 작품이다. 축하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제 25회 박두진 백일장에 당선한 모든 분들에게 축하를 드린다. 문학이 여러분 삶에 꿈과 희망, 행복으로 오래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장: 이영춘 시인
심사위원: 이형우 시인, 황정산 시인, 손현숙 시인, 윤의섭 시인, 김효은 시인
이영춘 프로필
1976년 <월간문학> 등단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원주여고 교장, 한림성심대학 강사 역임
시집 『시시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놓고』, 『네 살던 날의 흔적』, 『슬픈 도시락』, 『꽃 속에는 신의 속눈썹이 보인다』,
『시간의 옆구리』, 『봉평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
시선집 『들풀』, 『오줌발, 별꽃무늬』 외 다수
수상: 윤동주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인산문학상, 강원도문학상, 경희문학상, 동곡문화예술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시인들이 뽑은시인상, 한국여성문학상, 유심 작품상특별상 등 수상
이형우 프로필
1991년 『현대시』 신인상,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창세기부터』, 『착각』, 『체질시학』, 『체질과 언어』, 『체질과 욕망』 외
성결대 교수
황정산 프로필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발표. 시집으로 『거푸집의 국적』,
저서로는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소수자의 시 읽기』 등이 있다. 현재 계간 『상상인』 주간
한국미소문학 평론부문 심사위원
손현숙 프로필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일부의 사생활』.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마음 치유의 시』.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학박사. 현재 한서대, 고려대에 출강.
윤의섭 프로필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2009년 제7회 「애지문학상 (시부문)을 수상했다.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묵시록외
김효은 프로필
200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2010 《시에》 평론 등단. 저서로 『아리아드네의 비평』 『비익조의 시학』이 있음.
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강사.
현 계간 《시로 여는 세상》, 《시와 산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