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The Salvation Army)은 1865년에
영국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 4. 10일 ~ 1912. 8. 20)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한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성직자를 사관, 신학교를 사관학교, 교인을 병사 혹은 군우(軍友)라고 부른다.
용어가 생소해 아직도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다.
복음 전파와 사회봉사를 함께 실천한다.
*자선냄비(Christmas Kettle, Red Kettle)
우리에게 친숙한 자선냄비 모금 운동은 .
1891년 구세군 사관 "죠셉 맥피"(Joseph McFee)에 의해 시작되었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시 빈민들과 갑자기 당한 재난으로 인하여 슬픈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그는 부두로 나가 길위에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다고 한다.
"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솥에는 불우한 이웃에게 따듯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기금이 모아졌다.
이렇게 시작된 자선 냄비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펴져 나가
성탄절이 다가오면 세계 100여개국의 거리에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1928년 12월 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던 "박준섭"(죠셉 바아) 사령관이
서울 명동에 처음으로 자선냄비를 내걸고 불우 이웃돕기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세군의 한국 선교는 1908년 "호가드" 대령부부가 파송되면서 시작되었다.
양화진에는 몇 명의 "구세군 선교사"들과 어린 자녀들이 묻혀 있는데
"위더슨" 부인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구세군 사령관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魏道善)은 1926년 11월 내한하였다.
한국 구세군 사령부에서 "중위"로 8년간 봉직하다가 1934년 2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총무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구세군 한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한하여 사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해군 장교 구락부에서
한국 기독교 연합회와 한국사령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업적으로는
첫째, 54명의 사관을 배출하고 13개소의 전장부를 신설하거나 재건하였다.
두째, 19개소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개수하고, 7개소의 사회사업소를 개설하였다.
셋째, 서울(아현, 마포, 돈암, 영등포 등), 부평, 춘천, 대구, 부산 등지에
급식소를 신설하여 월 평균 5천명에게 음식을 나눴다.
이밖에 245,673명에게 일반구제 사업을 펼쳤으며
영동병원을 통하여 입원 및 외래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사랑하는 부인과 한국에서 사별(死別)하고 1957년 8월 1일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돌아갔다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 1898,4.4~1956.5.10)
"마리 위더슨"은 1898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Glasgow)에서 출생하여
1912년 7월에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Capetown)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 영문 담임사관으로 일했다.
이때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을 만나 1926년 약혼하였다.
1927년 가을, 한국에 먼저 나간 약혼자 "크리스 위더슨"과 결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먼 길을 홀로 떠나 1927년 늦가을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여 결혼했다.
남편"크리스"(Chris)를 내조하며 선교사로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1934년까지 7년간 한국에 살았으며 이때 첫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서울 변두리의 고아원에 보금자리를 차리고
줄곧 고아들과 같이 생활하였는데, 이들의 첫아들도 물론 고아들과 친구로 같이 자랐다.
고아들과 어울려 자란 아들은 위생이 불결한 상황에서 항상 전염병 감염의 위협을 면할 수 없었다.
아들과 "마리"(Mary)는 "발진티푸스"로 앓아눕게 되어 며칠간을 심하게 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함에도 그녀는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성경 말씀속에서 아이들을 잘 보살폈다.
부부는 한국서 7년 봉사를 하고 1934년 2월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 "케냐"에서 7년간 고아들을 위해 봉직하였다.
어느날
"너희는 이제 전과 같이 젊지 않다. 만약 내가 다시 한국으로 가라하면 어찌하려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6.25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1953년 1월 19일 부부는 한국인을 위해 부산으로 돌아 왔다.
6∙25전쟁으로 폐허화된 상황 속에서 구세군을 다시 조직하고 부흥시켰다.(1953-1956)
남편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은 구세군 사령관으로,
"위더슨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Home league)총재로 봉직하였다
부부는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진정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헌신하였다.
"위더슨"(Mary Ann Widdowson)은 위암으로 투병하며 죽음이 임박했을때 사령관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됨을 무한한 기쁨으로 압니다.”
라고 유언 했다고 한다.
1956년 5월 10일 서울에서 사망하여 장례식 때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김태선 서울시장 등 주요인사 90여명의 조객이 참석하여
60여대의 차량행렬이 양화진에 늘어섰다고 한다.
묘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SERVANT OF GOD. WELL DONE REST FROM THY LOVED EMPLOY."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시여, 맡은 바 소임을 온전히 끝냈습니다."
남편은 양화진에 묻힌 부인 묘에 두 그루의 단풍나무를 심은 뒤 1957년 한국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