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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설교를 통해 평생을 배우고 깨달아 각성하고 결심하고 자긍하는 가운데 생긴 심각한 기독교인들의 참담한 문제점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믿음이 환경에 따라 기분에 따라 감정에 따라 왜 쉽게 변질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과 종교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의 기준과 판단과 생각을 믿음의 중심에 두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고, 신앙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입맛대로, 자기 주장대로, 자기 원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준을 하나님의 뜻 인양 그리스도의 믿음인양 말씀 중심인양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육체의 욕구를 좇아난 습관을 좇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가진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더 좋은 것, 더 즐거운 것, 더 편한 것, 더 유익한 것, 더 만족스러운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이익과 욕구와 계획을 좇아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습관을 매우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자라게 됩니다. 이론 육체의 악한 본질을 토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오늘날 모든 종교와 기독교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 의욕과 명분만 존재되는 신앙일 뿐 실제로는 세속을 사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모든 인간과 같이 육체의 욕구를 따라 믿는 모든 종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역사할 수 없는 정욕과 죄만 쌓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과 육에 속한 믿음이기에 세상인 들처럼 하나같이 세상의 영과 미혹의 영이 역사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세상적 욕망과 육신적 삶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이 죄에서 해방되기 위한 아름다운 사랑의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반복되는 죄와 육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 양심을 따라 바른 기준을 좇기 보다는, 자기 이해관계와 자기 욕구를 따라 계산하고 판단하는 교활하고 간사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고, 자기에게 유익한 쪽으로 결정하고 싶고, 자기감정이 만족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싶은 것이 육체 지닌 인간의 욕구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육체의 욕구를 따라 자기 이익을 계산하려 하지만, 양심은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고, 정의와 긍휼을 따르도록 일깨웁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두마음이 존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에 따라난 욕구와 양심에 따라난 정의가 서로 부딪칩니다 양심을 따라 선을 이룰 것인가, 육신의 욕구를 따라 죄를 범할 것인가. 생각은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려 하고, 양심은 상대를 배례하고 이해하는 겸손함을 갖습니다 생각은 내 감정과 내 계획과 내 이익을 앞세우려 하고, 양심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이 둘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아니라 육체의 욕구를 좇아 사는 종교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정욕적이고 이기적인 생각과 감정적인 판단을 본질적으로 먼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당한 도덕과 윤리, 그럴듯한 철학과 주장, 과다한 의미부여와 변명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한 본질에서 비롯된 습관입니다. 이 악한 습관을 좇아난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같이 믿지 않는 세상인들 처럼 자기 죄와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합니다. 하지만 상대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며 함부로하며 꼬치꼬치 따라지고 그 책임을 묻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자기에게는 어릴 때부터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관대함을 갖지만 상대에게는 이해조차도 하지 않는 칼날 같은 기준을 들이댑니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반복되어 온 자기중심의 인간들의 악한 습관입니다.
오늘날 육신을 좇아난 기독교인들과 종교인들의 악한 습관은 자기의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 점점 무디고 점점 경이 여깁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가도, 같은 죄를 반복하는 습관 속에 점점 죄에 대해서 익숙해집니다 점점 반복되는 죄 앞에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기준이 점점 자연스러워져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파렴치한 믿음으로 변화 됩니다
이렇기에 모든 기독교인과 종교인들이 자기 판단이 절대화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항상 옳다고 여길 필요성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생각은 절대적이 됩니다. 자기 감정이 기준이 됩니다. 자기 주장이 진리가 됩니다
의견은 더 좋은 지혜와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서로의 견해를 모아서 더 합리적이고 더 온전한 길을 찾기 위한 것이 의견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내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자기주장을 내세웁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자기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상대를 미워하고, 자기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투고 화를 냅니다. 이것은 의견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자기중심의 주장입니다. 상대의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내 뜻을 따라오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상대를 적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극단적인 사고와 기독교인들과 모든 종교인들의 믿음의 형태입니다.
왜 사람은 자기 의견과 맞지 않는 사람을 쉽게 적대시합니까? 그 안에 육체의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자기 중심의 자기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인간의 악한 본질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지키기 위해 상대를 낮추고, 자기 옳음을 세우기 위해 상대의 함부로 합니다
육체를 지닌 모든 인간은 본질은 참 이기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한 것만 기억하고 반대로 상대에 대해서는 못한 것만 기억 합니다. 상대가 잘한 아홉 가지는 보지 않고, 못한 것 한 가지를 전부인양 눈덩이처럼 크게 보며, 반대로 자신의 아홉 가지 잘못은 보지 않고, 자신이 잘한 한 가지가 전부인양 확대 해석하고 부풀려 기억하는 연고로 과거의 지난 추억을 서로 말하다 보면 말하는 사람에 따라 사실과 달리 재각각의 주장을 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해서는 잘한 것만 기억하고 상대에 대해서는 못하는 것만 기억하는 매우 이기적인 기억력이 자신을 합리화 거짓으로 포장합니다 이는 상대는 낮추고 자신의 옳다함을 합리화하여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절대화하기 위한 교만 된 생각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본질적 습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교만의 문제입니다.
양심보다 욕구를 따르고, 선보다 자기 이익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는 자신을 의지해서 각성하고 다짐하고 결심하는 습관을 키워주는 혈기와 의욕을 부풀리는 기독교의 모든 설교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또한 모든 종교들의 문제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악한 본질과 습관을 오히려 진리를 가르친다는 설교로 인하여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 자기 이익만 추구하려는 충동, 자기 감정을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습관이 인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이해관계 속에서도 항상 감정이 요동치며 자기 감정에 따라 기분에 따라 상대를 함부로 하고 그 책임을 반드시 묻는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 발상과 이기적 생각이 중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악한 인간의 생각을 좇아난 본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충동과 자기 감정 대로 판단하는 인간의 습관이 오늘날 혈기와 의욕만을 불태우는 설교로 인한 참담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목자와 배우는 성도들이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으로 길들여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이 이기적일 뿐 아니라 절대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신격화된 채 살아온 믿음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나같이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하면서도 뒤돌아 또 죄를 반복합니다.
후회한다고 하면서도 뒤돌아 또 자신의 이해관계만 챙기는 욕구만을 따라갑니다. 결심한다고 하면서도 오직 다시 자기 이익과 자기 기쁨과 자기 즐거움을 찾습니다.왜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날 수 없는지 왜 자신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믿음이 아닌지 이제는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할 때입니다
근본도 본질도 욕구도 습관도 달라질 수 없는 육체의 한계에서 혈기와 의욕만을 부축 이는 설교는 마치 누룩에 부풀려 잠시 부풀렸다가 꺼지고 마는 밀가루 반죽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히려 세상과 육에 속한 삶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좇아난 그리스도의 삶으로 인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정욕과 죄를 더욱 부축 이는 육신적 세상적 감정적 삶으로 인도하는 누룩과 같은 미혹의 설교들이 대부분입니다
죄만 반복할 수밖에 없는 세상과 육에 속한 도덕과 윤리로 적당히 썩어 과다한 의미부여로 자신의 삶과 행위를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목자와 성도들의 형태이기에 죄에서 해방되고 거듭날 수도 없는 인간의 악한 습관에 의해서 평생을 죄만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참담한 기독교와 로마교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이 결과는 다시 말하자면 로마교와 기독교는 겨자씨만한 믿음의 열매와 증거를 나타낼 수 없는 종교의 한계는 곧 인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신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들이 인본주의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욕심을 따라 자기 이익과 자기 기쁨과 자기 즐거움을 좇아난 신앙들이기에 자신의 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깊이 느끼기보다 오히려 이해관계만을 중시하는 습관은 자신의 죄 앞에서 당당하게 합리화하고 뻔뻔하기 까지 합니다 이는 모든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내 삶에서 왜 끊임없이 반복되는지 정욕이 내 믿음에서 왜 반복되고 있는지를 고민하고 그 근본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세상적 욕망과 정욕과 욕심을 종교적 의미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포장합니다.
황당한 의미부여와 과다한 동기부여를 앞세워 자신의 죄를 더욱 합리화하고 더욱 키워가는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로마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평생을 이해관계 속에서 죄를 반복하면서도, 뒤돌아 하나마나한 후회와 반성 속에 결심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성과 결심은 언제나 자신의 이해관계 속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합니다
죄에서 해방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다는 핑계로 유대교인들처럼 종교인에 불과한 자신들이 마치 자신의 모든 이상과 목숨까지도 바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파렴치한 믿음으로 오직 자신만의 축복과 만사형통만을 바라는 기독교인과 로마교인들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가장 큰 원수와 대적 자는 창세에서부터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한 종교인들이다 과거 유대교인들처럼 로마교인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멸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정한 종교인들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도 않는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다
육신의 믿음은 육체의 욕구를 따라 자기 이익과 자기 욕심만을 위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은 참되게 변화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반성하고 각성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육체의 욕구를 따라 이해관계만 따지는 믿음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좇아난 아름다운 사랑의 믿음으로 거듭나고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평생 죄를 반복하면서 회개한다고 말한다면, 그 회개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반성하고 돌아서서 또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 반성이 진정 거듭나고 달라질 수 있습니까? 각성하고 뒤돌아 또 자기 욕구를 따라간다면, 죄만 반복한다면 그 각성과 눈물이 무슨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로마교 인들이 빛과 소금처럼 세상에 본과 귀감이 되기보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거나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기독교인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종교인들이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 신의 사랑을 좇아난 신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겉으로 거룩한 척할 수 있습니다. 인자한 척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척 할 수도 있습니다. 상냥한 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자신을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나타나는 변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교활한 처세술일 뿐입니다. 이중성과 위선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치 사회적 봉사와 구제로 여겨 버리는 기독교인들과 로마교인들의 선과 의에 형태는 세상 인들도 세상 기업인들도 누구나 다하는 사회적 봉사와 구제입니다 이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십자가의 사랑을 부인하고 감추어 자신들의 사회적 봉사와 구제로 합리화하기 위함 위선과 생색입니다 세상기업들도 자신들의 기업을 자랑하고 홍보하기 위함에 누구나 다하는 사회적 봉사와 구제를 악용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목숨까지도 바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인하는 기독교인과 로마인들입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과 자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욕망을 합리화하고 있는가? 나는 양심을 따라 판단하는가, 아니면 내 이익과 감정을 따라 판단하는가? 나는 회개한다고 말하면서도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신앙을 통해 변화되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더 교묘하게 나를 합리화하고 있는가? 여러분,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를 짓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죄를 반복하면서도 그것을 믿음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구를 따라 살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분별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하는 생각과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 판단이 절대화가 되어 있는 습관 속에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내 감정이 기준 하는 악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내 욕구를 믿음으로 포장하는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욕구를 따라가는 믿음은 아무리 종교적 언어와 명분으로 합리화해도 하나님께 속한 사랑의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욕심을 합리화하는 믿음은 아무리 거룩해 보여도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중심을 깨뜨립니다. 참된 하나님의 능력은 죽어가는 양심을 살립니다. 참된 하나님의 능력은 죄를 변명하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선과 의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욕구와 자기 이익을 따라 판단하는 습관 속에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세운 설교로는 절대로 이 인간의 악한 본질을 깨뜨려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중심의 기준과 판단을 깨뜨리고,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하며, 실제로 죄에서 벗어나 선과 의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과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체로서 삶에서 적용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사랑입니다

첫댓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내 기준과 내 감정을 앞세운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의욕으로 회개하려 하고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는 모습이 참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양심 앞에서 진실하게 나를 살피고 변화되어야 할 때라고 느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고, 회개한다 하면서 나도 모르게 죄를 짓는 하루 하루 속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었겠습니까.. 무얼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또 나의 믿음에 대해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고, 상기 시켜주시는 말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