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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산책]『천수경』⑪ 십선계 지키며 다라니 정성껏 외워야 계율은 우리 삶과 수행의 뿌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는 계율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율은 우리의 욕망대로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세속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불교 수행에는 계율을 그 기초로서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계율에 대한 의식의 정도에는 차이가 없지 않다.
예컨대, 선불교 안에서도 계와 선을 함께 닦자는 흐름이 있는가 하면 오직 선을 통한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고, 정토신앙에서도 오직 염불만 전수(專修)하자는 흐름이 있는가 하면 염불수행과 더불어 계율을 지녀야 한다고 보는 흐름이 있다.
첫째, 십선계는 『화업경』 십지품에서 지계바라밀을 말할 때 이야기되는 계율이라는 점에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바로 대승보살의 계율이다.
둘째, 대승불교의 중요한 신앙운동에서는 공히 그 실천자들이 의지해야 할 계율로서 십선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음신앙을 말하고 있는 『천수경』에서만이 아니라 미륵신앙에서도, 지장신앙에서도 십선계가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 십선계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의식을 표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쉽게 행할 수 있을 만큼 보편성이 높은 덕목만으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건전한 상식인이라면 누구라도 부담스럽지 않게 지킬 수 있는 내용 뿐이다.
물론, 어떠한 계율이든지 고귀한 이상이 담겨져 있다. 모두 우리로서는 받아 지녀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수많은 경전 중 어떤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을지를 판단하는 교판(敎判)이 행해지는 것처럼 계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모색이 행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과연 어떤 계율을 수지하여 지켜갈 것인가? 재가자의 입장에 서있는 나로서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 입각하여 십선계를 의지해야 할 계율로 선택한다. “이제 이 십선계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실천해 보자”라고 생각해 오고 있다.
김호성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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