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산악회/11차
1. 일 시 : 2018. 11. 24(일)
2. 시 간 : 무양청사 / 6시 출발
3. 장 소 : 서울 인왕산 / 북악산
4. 일 정
◇등산코스 : 사직공원-인왕산-창의문-북악산-청운대-숙정문-삼청공원 / 4시간30분
◇문화탐방 : 길상사 / 양평 두물머리
◇별미탐방 : ?
5. 산행길라잡이
◇조선왕조는 개국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서, 이성계는 스승인
무학대사의 자문을 받아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다.
무학대사는 8도를 물색끝에 하늘높이 정기가 솟구치고 있는 삼각산(현 북한산)기슭이 최적임지라고
정하고 한양땅으로 도읍지를 결정한다. 자고로 우리나라는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백년대계를 세웠었
다. 좌청룡,우백호. 북악산에서 남산타워를 보면서 머리속에 그림을 그려보자.
낙산(보문사뒷산 현 무허가 건물이 많은곳)은 좌청룡이요 인왕산은 우백호이다. 한양땅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은 동서남북에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남쪽에는 목멱산(현 남산)/ 북쪽에는 백악산(현 북악산)/ 동쪽에는 낙산(현 낙산)/ 서쪽에는 서산(현
인왕산)이 있다.
안쪽 도성에는 비~잉 성곽을 쌓고 대문과 소문을 만들었다.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과 남소문/ 북
쪽에는 숙정문(북대문)과 북소문(현 창의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과 동소문/ 서쪽에는 돈의문
(서대문)과 서소문이 있다.
이곳 궁터를 잡을때 신하들의 의견이 양분되었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자락이 좋다고 하였고, 정도
전등 신흥세력은 북악산자락이 좋다고 하였으나, 결국은 정도전의 의견이 채택되어 북악산으로 궁
터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무학대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조선왕조의 앞날에 커다란 환란이 올것이다 라고
예언한바 있어 그후 예언은 적중하여 병자호란,정묘호란,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경복궁도
불타 버리고 명성황후도 일본자객들에게 시해되는등 경복궁이 화를 입게 된다.
1968년 1월21일 북한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들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위기를 맞았었다.
자하문 고개마루에 서있는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최경무관은 68년 1월21일 종로 경찰서장으로 재직
할 당시 이곳에서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등 무장간첩 31명과 교전 하다가 전사한곳이다.
6. 사직공원/인왕산/북악산/삼청공원/길상사
◇사직공원의 사직단 :사적 제121호. 이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직단이라고 한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위치한다. 사단(社壇)은 동쪽, 직단(稷壇)을 서쪽에 설치한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호해주는 데 대한 보답의 의미
에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사직은 왕실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인왕산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38m. 산 전체에 화강암으로 된 암반이 노출되어 있으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곳곳에 솟아
있어 조선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왔다. 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중이 장삼을 입은 듯한 선바위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는 예로부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잘 이루어졌다고 하여 유명
하다.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무신당인 국사당을 선바위 옆으로 옮긴 뒤부터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
되었으며, 주위에 많은 무신당이 생겨 지금도 굿이 성행하고 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성
곽이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는 자하문·명륜동·동대문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사직동·홍제동까지
이어진다. 군사적인 이유로 한때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사직공원·청원 아파트·무악재길
등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다.
◇창의문 :창의문(彰義門)은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있는 4개의 소문 중 하나로 그중 서북쪽 문이다.
그 때에는 이 곳은 양주와 북한으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다. 이 곳은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
(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지어졌으며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학자 최양선
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길을 내면 지맥이 손상된다고 주장하여 닫혔다. 이곳에는
인조반정때 공신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으나 나중에 세워지게
된다. 창의문은 4소문 중 가장 원 모습을 잘 유지한 문이다.
◇북악산 :북악(北岳)·백악(白岳)·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높이 342m.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인왕산
·북한산·낙산·남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서울 북쪽 경복궁의 진산이다. 1395년(태조 5)
시축한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의 기점으로서 북악산에서 낙산·남산·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다. 정도
전이 성저(城底)를 측정한 뒤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97구로 나누고 북악산의 정상에서부터 각 구마
다 순서대로 번호를 동쪽으로 붙여 나가면서 97번째 글자인 조(弔)자에서 다시 북악산에 이르도록 했다.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어 일반인의 등산이 금지되었다. 서쪽 인왕산과의 안부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
며, 남동쪽 기슭에 삼청 터널과 삼청공원이 있다.
◇숙정문: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은 조선 시대에 건축한 서울 성곽의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대문' 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
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
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
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
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
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
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三淸洞)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다.
◇곡장 : 성벽을 기어 오르는 적군을 막아 내기 위한 방어 시설로 성벽중의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추어 돌
출시킨 부분으로 꿩의 머릴 닮았다고 해서 치(雉)라고도 하며 굽으러진 성이라는 의미에서 곡성이라고
부른다
◇길상사 :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안이 몰락하자
가난한 탓에 16살에 몸 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은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眞香''이 되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미모와 시와 글, 글씨,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였다.
스물 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 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
김영한 보다 네 살 더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 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날 밤 집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영한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에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가 떠난 후
그녀가 서울로 돌아간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된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 들여
자신의 연인 백석을 기리는 "백석문학상"을 재정하고
같은해에 대원각을 시주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편 다리를 건너면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吉祥寺의 역사는 매우 짧으면서도 그 설립 계기가 특이해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찰은 1960년대와 80년대 말까지 삼청각,청운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자리에 세워진 사찰이다
서울 성북동 三角山 깊숙한 산자락의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金英韓)여사가
7000여평의 대지와 건물 40여동 등 천억원대의 부동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97년에 지금의 吉祥寺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한다.
요정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金英韓) 할머니는 법정 스님께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싯가 천억원 대 재산을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받지 않겠다는 법정스님
결국,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하여 길상사가 되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108 염주를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그 후 길상화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 하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 눈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주세요. 유언하고
이튼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해 12월14일 흰눈이 많이 내리던 날,
그녀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쳔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 법회엔 김수한 추기경이 참석하였으며,
2000년엔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상과 유사한 형태의 관세음보살 석상을 조각하여 봉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길상사에선 수녀님과 천주교 신자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가‘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고 한다. 생전에 자야(김영한)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안았다고 한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 곧게 간직했던 여인 이였다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 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 이었다.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 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월간 창작과 비평에서 출고 한 자야의 회고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의 전문에서 이제 두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은"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길상사 한 쪽에 기념비로 남아서 길상화(吉祥華)처럼길(吉)하고 상서(祥瑞)로운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을 간직 하는데는 詩쓰는 일 밖에 없다고 김영한은 말 했다고 전 한다.
그녀는 국악계에도 공헌을 했으며 김진향으로 더 알려졌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만고풍상을 껵으며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사람에게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모든이에게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삶이 빛나듯이 두사람에 사랑과 인생 그리고 문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우찌하면 평생을 올곧게 사랑 할 수 있을까 백석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최근에 백석의 시가 수능시험에 출제한 것을 보아서는 월북 시인이라고 외면 했지만 아마 복원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金英韓여사의 일화 한가지..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그 녀를 子夜라 불렀는데
子夜가 죽기 열흘 전 기운없이 누워있는 노령의 김영한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천억원대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가 어리 둥절 ???
- 천억을 내 놨으니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 있어..
- 다시 태어 난다면 어디서.. 다시 한국에서?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文學 할꺼야..
-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 사람 詩 한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詩를 쓸거야..
김영한 할머니 젊은시절 사진 / 자야
백석의 노년의 모습
권번에서 기녀 수업을 받는모습
7. 산행지도
서울 성곽 전체 개념도
자야/김영한 보살님의 생전에 기거하던 처소
☞ : 반드시 신분증은 필참입니다 / 신분증없으면 산행이 불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