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화엄경(華嚴經) ⑫
십종원행으로 화엄경 보살도 포섭
<사진설명>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권7>.
‘보현행원’ 은 40권 『화엄경』(795. 반야다라 역)의 제40권에서 설해지고 있다. 이 부분이 좁은 의미의 「보현행원품」이다. 이 보현보살의 십종대원은 60권이나 80권 『화엄경』에는 없는 내용으로서,「입법계품」에서 펼쳐지는 무진 해탈방편을 10대원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10종 원행으로도 「입법계품」내지는 『화엄경』의 전체 보살도를 포섭하고 있다.
첫째, 예경제불원은 온 법계의 모든 부처님을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눈앞에 대하듯 깊은 믿음을 내어서 청정한 신구의 삼업을 다하여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되, 낱낱 부처님 계신 곳마다 무진 몸을 나투어 한량없는 부처님께 두루 예배하고 공경하는 원이다. 예경의 모습은 우선 몸으로는 절을 하고, 입으로는 명호를 부르고, 마음으로는 부처님을 공경하는 청정한 신구의 3업으로서, 아만을 꺾고 신근으로 선업의 공덕을 닦는 일이다. 그 예경은 중생의 아픔을 없애고, 그 고통을 대신 받고자 하는 대비례(大悲禮)이며, 끝없는 무진례(無盡禮)이다.
둘째, 칭찬여래원은 온 법계 무수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청정한 신구의 삼업과 수승한 지견으로 찬탄하며, 미래세가 다하도록 계속하고 끊이지 아니하여 법계에 두루 한다는 원이다. 『화엄경』에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이 무수히 보인다. 첫 품인 「세주묘엄품」만 해도 보현보살을 위시한 수많은 보살과 집금강신을 비롯한 화엄성중들이 각기 자신이 해탈한 경계에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다.
화엄성중들의 해탈경계는 온전하고 모자라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봄 동산의 갖가지 꽃처럼 다양해서 다른 것이다. 그리고 보현보살은 중중 무진 해탈문을 증득해서 한없는 공덕 세계를 끝없이 찬탄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공덕미를 맛보아야 온전히 가능해질 것이니, 여래를 찬탄하는 말은 깨달아 나오는 탄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말이라 하겠다.
셋째, 광수공양원은 시방삼세 부처님께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깊고 깊은 믿음과 분명한 지견을 일으켜 여러 가지 으뜸가는 공양구로 항상 공양한다는 원이다. 모든 공양가운데는 법공양이 으뜸이 됨은 『금강경』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재공양도 공양구가 단지 재물이기만 하다면, 바꾸어 말해서 법공양의 경지에서 올리는 공양이 아니라면, 법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도록 항상 공양 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재물은 한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 올리는 향· 초· 차· 꽃· 쌀 과일·음식물 등도 육법공양이라 하여 법공양이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 법공양이란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 등이다.
넷째, 참회업장원은 과거 한량없는 겁 동안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악한 업이 한량없어서, 만약 이 악업이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끝없는 허공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리니, 내 이제 청정한 삼업으로 일체 불보살님 전에 두루 지송 참회하되, 다시는 악한 업을 짓지 않고 항상 청정한 계행의 일체 공덕에 머물러 있겠다는 원이다.
우리는 매일 쏟아내는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다면 얼마 안가서 쓰레기 때문에 발 디딜 틈조차 없을 것이다. 또 한동안 집을 비우고 나갔다가 되돌아오면 먼저 집 청소부터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지금까지 지은 나쁜 업이 형체가 있다면 역시 발 디딜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독성 있는 악취 때문에 견디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니 어찌 참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섯째, 수희공덕원은 부처님께서 발심·수행·성도 내지 반열반하시고 사리를 분포하실 때까지의 모든 선근을 내가 다 함께 기뻐하며, 일체 중생들이 짓는 공덕과 일체 성문·연각·보살들이 보리를 구하는 큰 공덕을 내가 모두 기뻐하는 원이다.
이렇게 부처님과 일체 모든 이들이 지은 공덕을 내가 따라 기뻐한다면 언제나 기쁨에 넘치는 나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 는 말이 있다. 땅은 사촌이 샀는데 배는 내 배가 아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공덕으로 내가 즐겁고, 이웃들이 얻은 이익으로 내가 기쁠 수 있다. 그 기쁨이야말로 크게 기쁜 대희(大喜)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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