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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망우당 곽재우
곽재우(郭再祐, 1552년~1617년)는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여러 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 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김덕령 등의 의병장이 무고로 희생되는 것과 영창대군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여러 번 사퇴하였다. 본관은 현풍(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생애
경상도 의령(宜寧) 출신으로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후에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년) 과거를 보아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슬린 까닭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취소되어 낙방되고 만다.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40세가 넘도록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 임진왜란 이후
평생 은거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1592년음력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같은 달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1592년5월함안군을 함락,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하는 왜군을 추격,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된 옷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의 특별건의로 석방된 후,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음력 7월에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라는 무관직을 내렸고, 음력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음력 12월에는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모함하길 좋아하는 무뢰배들의 모함으로 인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당하기도 했으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곽재우와 절친한 사이인 의병장 김덕령은 끝내 이몽학의 난과 관련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 일로 곽재우는 사실상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그해 전란이 끝난 뒤에는 그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왜군이 물러간 뒤,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군사들을 고향에 돌려 보내고 생업과 농사일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왕이 거절하자 그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어부 생활을 하였다.
-종전 이후
그 뒤에도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광해군 때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었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탄핵이 있자,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 후로도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좌윤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다,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워지고, 통제사 이순신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김덕령이 죽은 일 등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당시,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의 고위 무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다 1616년 죽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곽재우전이라는 군담 소설이 있으나 작자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유품들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6. 백산 안희제
1885 경남 의령~1943. 독립운동가·민족기업가·교육자·언론인.
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 자강(自强)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육과 민족기업 육성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언론·종교운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백산(白山).
1891년(고종 28)부터 족형인 서강(西崗)에게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운 후 1905년 국권회복을 위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껴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교주(校主) 배척운동에 관련되어 중퇴하고 양정의숙으로 옮겨 24세 때 졸업했다. 1907년 민중 계몽과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지방순회강연을 했으며, 지방 유지들과 함께 동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이어 의령 중동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세웠으며, 다음해에는 고향 설뫼에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설립했다. 1909년 이시영(李始榮)과 교의를 맺고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는 한편, 신민회원인 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신백우(申伯雨)·고순흠(高順欽)·이원식(李元植)·서상일(徐相日) 등 120여 명을 규합,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한일합병 후인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모스크바·만주 등지를 돌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구국방책을 논의했으며, 최병찬(崔秉瓚)과 함께 〈독립순보 獨立旬報〉를 간행했다. 1914년 국내에서의 운동자금 조달과 연락을 위해 귀국했다.
민족기업·교육활동
1914년 9월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과 일제 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의 발전을 위해 이유석(李有石)·추한식(秋翰植) 등과 더불어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로 출발한 백산상회는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 원과 총주수 2만 주, 주주수 182명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대구·서울·원산·펑톈[奉天]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의 확장에 따라 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와 부산상업학교 이사를 역임했으며, 부산 유지들과 더불어 부산진과 영도에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남형우(南亨祐) 등과 국내외 연락을 담당했으며, 의령에서 독립선언서 수만 장을 제작하여 영남 각지에 배포하고 의령지방의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이해 11월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회사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전진한(錢鎭漢)·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 등 많은 장학생을 각국에 유학시켰다. 1920년 동아일보사 창립 때 최준(崔浚)·허걸(許傑)·이종화(李鍾和)·윤현태(尹顯泰) 등 백산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4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1년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 회장이자 친일파의 거두인 박춘금(朴春琴)의 도항증명서(渡航證明書) 강매 기도에 맞서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항의·진정 투쟁을 벌여 도항증명제를 폐지하게 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구성하고, 그 교통사무국을 만주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백산회사에 두게 했다. 그러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계속된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부채, 일제의 수색, 장부검열 및 회사간부의 감금·고문 등의 탄압은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
민족언론·협동조합운동
1926년 민족자주정신과 경제적 실력을 배양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전진한 등과 더불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고, 다음해 이시목(李時穆) 등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설립하여 〈자력 自力〉을 발간했다. 1929년 이우식(李祐植) 등과 함께 재정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중외일보〉는 민족언론의 입장에서 일제에 항거했으나 이로 인해 여러 번 발행정지 및 휴간을 당했고 결국 1930년 10월에 자진 휴간했다.
농장건설 및 대종교활동
1931년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33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투쟁의 근거지 마련과 재만주 조선 소작농들의 자력갱생을 위해 닝안 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조선농민 3백 호를 유치하고 농장 내에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34년 대종교 제3대 교주이자 총본사(總本司)의 도사(都司)인 윤세복을 동경성으로 맞이하여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기게 했다. 이후 대종교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를 역임했고, 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으로서 〈삼일신고 三一神誥〉·〈신단실기 神檀實記〉·〈홍범규제 弘範規制〉·〈종례초략 倧禮抄略〉·〈한얼노래〉 등을 간행하여 종교를 통한 민족자주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러던 중 그는 1942년 4월 신병 치료를 위해 귀향했다.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한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왜곡 번역하여 같은 해 11월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와 동시에 대종교 간부 25명을 체포하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을 일으켰다. 그도 이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5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때 같이 순국한 권상익(權相益) 등의 10명을 순교십현(殉敎十賢)으로 추존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7. 백산 안희제
(李克魯, 문화어 : 리극로, 1893년 - 1982년)는 일제강점기때 활동한 한글학자, 교육인, 독립 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고루'.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
생애
생애초기와 독립운동에 투신
1893년 8월 28일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서당 공부를 한 후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에 마산 창신학교에 졸업하고 1912년 중국 만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박은식,신채호 등과 같은 저명한 민족주의자들을 만나고, 후일 대종교의 교주가 된 민족주의자 윤세복을 만난다. 만주에서 지내면서 이극로는 이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후 동북지방 내도산의 독립군 부대에서 훈련도감으로 있다가 무송의 백산학교와 환인현의 동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15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서구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유학생활 및 독립운동 활동
이후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가 고려공산당 내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데에 이동휘와 동행하였다가, 독일 베를린종합대학에 유학하게 되고 여기에서 1921년~1927년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어 베를린종합대학에 동방어학부 조선어학과를 창설하고 베를린대 조선어학 강사로 재직하면서 주경야독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독일에서 귀국하기 전인 1927년 제1회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여 '조선 독립 실행을 일본 정부에 요구할 것','조선에 있어서 총독정치를 중지시킬 것','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 세 항목의 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서 당시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던 허헌을 만나 조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귀국하는 길에 미국에 들러 서재필과 이승만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고 한다.
국내 독립운동 활동 및 한글연구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지역에 들러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선에서의 활동을 구상했던 이극로는 1929년 1월 귀국 했다. 이후 한글학자와 교육자로 많은 활동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글 연구단체인 한글학회의 전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사전편찬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 중추적인 핵심 역할을 맡았다. 조선어학회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활동을 했는데,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2] 그밖에 1930년 신간회 대표로 동포구제의 목적을 띠고 만주지방을 돌아보다가 귀국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투옥
1942년 7월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최현배,이윤재와 함께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당했다. 여기서 그는 징역 6년형 선고받았고, 같은 한글학자로 조선어학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최현배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역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던 이윤재는 수감 중 옥사했다.) 이후 함흥감옥에 갇혔다가 1945년 광복 이틀 후 8월 17일 출소했다.[3] 이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지내는 이근엽 교수가 당시 출옥당시를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이근엽 교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7일 내가 15살 때인데 조선어학회 회원인 모기윤 선생이 교회 청년 30여 명을 함흥형무소 앞으로 모이게 해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었다. 모기윤 선생이 조선인 검사에게 광복이 되었는데 왜 독립운동가들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해서 네 분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님인 것을 그 뒤 알게 되었다. 그 때 한 분(이극로 선생으로 보임)은 들것에 들려나오고 세 분은 부축해 나오는데 처참한 모습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틀이 지났지만 일제가 무서워 태극기를 들고 환영도 못했다.
광복이후 활동
해방정국 이극로는 다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그런데 1945년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붉어져,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의 위원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했다.[5]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내 동시에 한글연구와 교육활동에 주력했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자, 그는 좌우합작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입법기관(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서는 좌우합작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 초에는 조봉암과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재개 조짐이 보이자, 좌우합작위원회에 가담해 '시국대책협의회'에 참가한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되었다. 그 해 12월 20일, 김규식이 주도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48년 4월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협상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 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하지만 이극로는 그냥 북한에 남으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그가 북한에 남은 이유는 남한에 있었을때 이승만과 사이가 정말 나빴고, 남쪽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이에 싫증을 느꼈다고 한다.
북한 정권에서의 활동
1948년 9월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1953년 12월까지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無任所相)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등을 지냈으나, 이는 명예직에 가까운 직책이어서 딱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에서 이는 숙청 바람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한글보급 운동 및 한글연구에 몰두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1966년 이후 본격화된 북한 언어 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을 주도하였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그 동안 언어학 연구기관들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의 소장, 위원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에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이 있다.
1982년 사망했다.
사후
일제강점기때부터 시작해서 오랜 기간의 교수 및 연구활동을 통하여 한국어 발전과 과학적 해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살아생전 1973년 북한 정부로부터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의 원사(1973년)이며 박사학위(1970년)를 받았다. 사후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월북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 관심이 멀어졌었다. 그러나, 최근 이극로가 1920년대 외국(독일)에서 유학공부했을 시절에 세계 곳곳에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조명을 받아 주목받고 있다.
일화
대한민국의 안과의사인 공병우의 세벌식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이극로가 눈병으로 공병우가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병우는 한글학자 이극로에 대한 열정에 자극을 받아 공병우는 본격적으로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친일의혹설과 이에 대한 논박
조선일보를 비롯한 과거 친일파 후손들은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발간이 있었을 때, '이극로가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명단에 있었다'는 등 '일제시책을 지지하는 강연을 했다.'는등 근거로 그를 '좌익계열 친일파'라고 매도하면서 당시 대서특필로 보도해 다뤘다. 그러나 이극로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최현배와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된 인물이고, 실제로는 전향하지도 않고 가혹한 고문을 받은 채 1945년 8월 17일이 되서야 출옥했다. 따라서, 이극로의 이런 행보를 감안하면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측에서의 논리는 비논리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1945년 8월 17일 출옥 당시 처참한 모습으로 출옥한 것등 감안한다면 그가 전향해서 총독부에 협력했다는 것은 도저히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극로는 '좌익'계열 인물이 아닌 중도우파 성향의 노선을 견지했던 한글학자였다.
정치 노선
1948년 남북협상 때 그대로 북한에 남아 '월북 인사'로 분류되어 '사회주의자','좌익계열'로 오랫동안 낙인되어 왔으나, 오늘날 재조명되어 민족주의 우파쪽 성향 학자로 분류된다. 북한에 있으면서 그는 공직으로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의장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직등 역임해왔으나, 그 자리는 명예직에만 가까운직이었지 정치적인 직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이극로는 북한에 있으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고, 한글연구에 몰두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에서 이는 숙청 바람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가 1948년 남북협상 때 북한에 남은 이유가 당시 남한에서 이승만과 사이가 정말 나빴고, 남쪽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이에 싫증을 느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극로는 조봉암과도 같이 일할 정도로 좌파라고 배척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김구, 안재홍과 함께 사업을 추진하는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