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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화 시집「속눈썹의 미학」해설 (2017. 등대지기)
치밀한 완성, 현실을 뛰어넘는 미적 태도
마경덕(시인)
시인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문장과 언어수단을 선택한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공감이라는 공통의 코드에 접촉했을 때 독자는 함께 문학을 이루는 한 주축이 된다. 독자와 작가 두 주체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다. 독자는 단순히 수동적인 수용자에서 문학작품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능동적 참여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창작은 모방이나 파생에 의한 것이 아닌 ‘독창성’과 ‘개성’을 중요시하므로 ‘허구적 상상력’으로 창조된 것일지라도 현실 이상의 ‘진실성’을 갖추었을 때, 즉 함축된 진실을 승화시켰을 때 허구로서의 가치가 발생한다.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는 ‘독창성’은 예술 분야를 비롯하여 인간의 ‘정신문화’ 창조에도 영향을 끼친다.
실용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철학자 ‘퍼스’의 기호실재론의 일부인 지표를 요약해보면 방향이나 목적, 기준 따위를 나타내는 지표(指標)에는 대상체 사이에 인과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IQ 수치는 지능의 지표이며 GNP가 국가의 경제적 힘을 나타내는 지표라면 카네이션은 어버이날을, 케이크는 누군가의 생일을 암시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천도화 시인하면 고혹적인 눈이 먼저 떠오르고 그 눈에 고인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우수(憂愁)에 젖은 짙은 속눈썹은 필자가 느끼는 개인적인 ‘지표’이며 연약한 여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그의 시편을 들여다보면 필자의 주관적인 감정에서 오류를 발견한다. 시 곳곳에 담긴 삶의 열정과 에너지로 어머니라는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이 시집의 모티프는 경쟁시대를 살아내는 치열한 ‘삶’이다. 한 개인의 역사이며 기록이기도한 하루하루의 일상(日常)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으로 다가온다. 흔히 서정적인 글은 자아와 대상 사이 대립이 없어 시인이 말하는 것과 시인 사이에 간격이 없다고 하지만 천도화 시인의 전통적 서정성을 띤 시편들은 ‘주관적 정서’나 ‘내면세계’를 서술하며 고정된 인식과 일상화된 ‘감각의 틀’을 벗어나려 노력한다. 각박한 현실과 대립하며 갈등하는 시인의 시편에서는 ‘삶의 유속’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옹골찬 ‘삶의 비의(悲意)’와 리얼리즘이 있다. 아래 예시「사각의 취향」에서 시인은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체험하고 타자 속에서 타자의 결핍과 만난다.
종이 한 장으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작은 종이 한 장에 살아온 이력이 다 적혀 있다
낯선 호칭들,
첫 대면에 습관처럼 주고받은 인사는
서랍 속에서 잊혀지거나
구겨진 채로 버려지거나
길바닥에서 팔랑거리는
사각형의 생각은 가볍다
움켜쥔 사각은
불시착한 밤거리에 뿌려지고 밟히며
낯선 곳으로 떨어져 나간 파장들
여전히 그 직함은 밟혀도 꼬리를 달고 있다
금박이로 기 싸움을 치장하는
침묵의 행간에
겹겹이 쌓인 이력이 무겁다
—「사각의 취향」전문
처음 만난 상대에게 가장 먼저 내미는 것이 ‘명함’이다. 종이쪽에 성명 전화번호 직업, 신분 따위를 적어 건네준다. ‘명함’을 받아 넣고 한참 후에 꺼내보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이름과 상호들, 습관적으로 내민 인사에 부록으로 따라온 ‘명함’들이 서랍에서 뒹군다. 친분 관계로 주고받은 ‘명함’마저도 시간이 흐르면 그만 잊히고 만다. 이미 전달력을 상실한 것이다. 평범한 ‘명함’은 성에 차지 않아 금박을 입힌 화려한 ‘명함’도 있고 특수재질의 ‘명함’도 있다. 모두 자신을 어필하는 방법이다. 짧은 시간에 자신을 알리는 방법 중에 이만한 전략도 없다. 하지만 작은 종이쪽 하나에 살아온 이력이 다 적혀있는 ‘사각의 무게’가 길바닥에서 팔랑거린다. 길바닥에 흩어져 밟히는 ‘광고용 명함’들, 광고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광고 주체는 소비자를 설득하고 공략하여야 한다. 이런 사회변화 속에서 자본주의는 생산에서부터 소비에 눈을 돌리고 광고는 이 현상에 편승하여 치밀한 전략을 세운다. 모든 물건은 사용가치를 통해 가치를 획득하듯이 ‘가치’와 ‘사용가치’라는 두 요인이 결합되어 상품이 생산되고 광고는 상품에 대한 정보를 부각시켜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유발한다. 사용가치 보다는 상징가치가 광고에 앞서게 되고 과잉소비로 인한 부작용도 발생한다. 인간의 감성을 주조하는 또 하나의 권력은 ‘자본’이다. 경제생활과 직접 연결되는 ‘자본’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다.「사각의 취향」은 명함을 통해 상술에 능한 이 시대의 단면을 환유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직 할 일이 많기에
키를 낮출 순 없다
허공을 밀어올린 그 무게로 숨을 고른다
흔들리는 생각에 삐걱거리며
오가던 차가운 빌딩 숲
햇살이 깔린 노천카페에 잠시 앉았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려도
커피 한 잔의 여유로 여기까지 왔다
오후의 귀가를 늦추고
바람과의 미팅 아이패드 노트북 청약서 계약서
날선 언어들 저만큼 빙빙 떠돌다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
촉을 세운 날을 쓸어내린다
간간이 스쳐가는 출렁거림으로
방향 없이 실바람처럼 흔들리며
힐의 무게에 또 하루를 얹는다
—「킬힐의 시간들」전문
구두 뒤축은 한쪽으로 기울고
뒤틀리는 허리, 도사린 슬픔이
한 뼘 가슴에서 부글거려도
바람을 걷어차고 허공을 밟으며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서랍처럼 닫혀 있는 문
거대한 사무실 문 앞을 서성이며
그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서는 무력감
배추처럼 절여진 오후
발효된 하루가 저물고
제풀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내일을 위해
뒤꿈치를 세운다
—「뒤꿈치의 힘」부분
주로 '심리적 거리(psychic distance)로 사용되는 ‘미적 거리’는 미를 인식할 때 주관적인 감정에 빠지면 합리적이고 개별적인 특징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도 ‘미적 거리’는 필요하다. 대상과의 거리가 부족할 때 또는 대상과의 거리가 초과될 때 예술가의 작품은 사적으로 흐르거나 관념으로 치우친다고 한다. 하여 작품의 미적 완성도를 위해 대상과의 철저한 ‘거리유지’가 필요하다. 이쯤에서 천도화 시인의「킬힐의 시간들」로 들어가 보자. 불과 몇 년 전에 킬힐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어느 날 불어 닥친 킬힐 신드롬이 아가씨들의 키를 한 뼘이나 올려놓았다. 불편한 자세로 어기적거리며 걷는 미니스커트들을 보며 상술에 놀라기도 했다. 건강을 무시한 킬힐은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원리를 실현한 도구였다. 척추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킬힐의 높이, 신발가게 진열장을 대부분 킬힐이 차지하고 있었다. 불편함으로 인해 지금은 킬힐이 많이 사라졌지만 시인은 아직도 킬힐을 신는다. 미적 대상이 주어지면 대상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발생한다. 미적 속성은 비슷한 경향성이 있지만 미적 관점은 개인의 취향이므로 객관적 타당성을 위해 감상자는 대상과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아직 할 일이 많기에/키를 낮출 순 없다/허공을 밀어올린 그 무게로 숨을 고른다”에 주목해야 한다. 키를 낮춰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 시인이 짊어진 ‘짐’일 것이다. 수많은 고객과 만나는 직업, 날을 세운 편견들, 방향 없이 실바람처럼 흔들리며 힐의 무게에 또 하루를 얹어야 하는 고달픈 생업, 구매의욕이 없는 사람에게 구매를 권해야하는 마케팅 전략은 오후의 귀가를 늦추고 바람과 미팅을 하고 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때 햇살 좋은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로 마음을 다잡는다.「킬힐의 시간들」은 시인에게 위태로운 시간이다. 객관주의적 견해와 주관주의적 견해는 ‘우선성’이 먼저라는 ‘답’이 나온다. 몸의 고달픔보다 먼저인 ‘그 무엇’이 우리들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고 우선적인 선택으로 작용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보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공리주의, 공리(功利)가 가치의 표준이 되고 인생의 목적이 되기엔 현실은 너무 각박하다.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는 ‘킬힐’을 신고 걸어야하는 ‘쓰디쓴’ 시간이 있다.
「킬힐의 시간들」은 개인의 사적 영역까지 드러낸 진솔함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뒤꿈치의 힘」에서도 구두에 발을 밀어 넣어야하는 세일즈의 고달픔보다 거절당하고 외면당한 ‘자신의 가치에 대한 상실감’이 더 힘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추락한 자존감을 ‘뒤꿈치의 힘’으로 끌어올려 다시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늘이 짙은
촉촉한 속눈썹을 갖고 싶어 거울 앞에 앉는다
눈썹달 살포시 내리깔며 꼿꼿하게 버티던 그 자리
사슴 눈망울 같은 자존심은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손발톱처럼 일생동안 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낭의 성장이 멈추면 그만인 속눈썹
짙고 또렷한 눈매를 위해
밋밋한 얼굴에 포인트를 주는 여자의 본능이
두 눈을 치켜뜬다
아름다운 속눈썹을 위해
순한 토끼는 두 눈을 우리에게 주었다
독한 화장품 원료를 바르며 죽어간 실험용 토끼의 희생으로
내 속눈썹은 짙고 풍성하다
몇 층으로 흔들리던 바람을 밀어내고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 올린다
허전함을 마스카라로 빽빽이 채운다
공공연한 비밀을 바르고 외출을 서두른다
—「속눈썹의 미학」전문
아름다움 혹은 이와 유사한 가치를 감각이나 내성을 통해 획득하는 전 과정이 ‘미적 경험’이다. 경험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에 의해 결정되듯이 ‘미의 기준’도 같을 수가 없다. 시대별로 미인의 기준이 다르고 그 나라의 문화에 따라 선호하는 ‘미의 기준’은 다르다. 미적 경험을 감정이입의 경험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문학에서 미적 경험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만을 따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미적 경험’은 역사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과 결부되어 다른 맥락에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외적인 아름다움과 내적인 아름다움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숭고한 아름다움도 있고 천박한 아름다움도 있으니 말이다. 앞서 시인의 속눈썹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필자가 보는 아름다움이란 시인이 가진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각은 각각 다를 수가 있다. 미적 속성은 추상적 사고를 통하여 얻어지는 ‘이성적 인식’이 아닌 ‘감성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속눈썹이 아름답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속눈썹을 위해/순한 토끼는 두 눈을 우리에게 주었다/독한 화장품 원료를 바르며 죽어간 실험용 토끼의 희생으로/내 속눈썹은 짙고 풍성하다” 시인은 왜 마스카라를 바르며 토끼를 생각했을까? 안전성검증을 위한 동물실험이 갈수록 늘고 있다. 2016년 실험된 동물 287만8천 마리 중 그 중 토끼가 3만7천 마리였다고 한다. 마스카라의 탄생에는 수많은 실험실 토끼의 죽음이 있었다. 토끼들은 독극물에 가까운 화장품 원료를 수백수천 번 눈가에 바르고 염증을 앓다가 폐기처분된다. 또렷한 눈매를 위해 여인들은 속눈썹에 토끼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바르는 셈이다. ‘공공연한 비밀’을 바르고 여인들은 거리를 활보한다. 토끼의 죽음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시집의 표제작인「속눈썹의 미학」은 아름다움이라는 ‘욕망’ 뒤에 가려진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조명한 작품이다.
어머니 몸을 열고나오니
문이 즐비하다
앞에 놓인 새로운 문들, 수많은 문을 들락거렸다
문안에서 잠들고
눈을 뜨면 화장실 문으로 들어가 근심을 내리며
냉장고 찬장문도 수없이 여닫으며
이방 저 방 창문을 검색하고
그때야 대문을 잠근다
자동차 페달을 밟으며 창문을 내리고
사무실 문으로 들어가 하루를 마치고 그 문을 나온다
때론 버스 문으로 올라가 지하철 문으로 나오며
서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
층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손에 들린 무게에 짓눌리어 그 문을 나온다
몸이 닫히면 모든 문이 닫히고
영원히 잠드는 것을
—「문」전문
어머니를 열고 세상으로 나온 첫 문을 시작으로 문은 시작되었다. 출입이 가능한 곳에 달아 놓고 여닫게 만든 문들은 거쳐야 할 관문이나 힘든 고비로 확장된다. 눈앞에 놓인 문은 이해하지 못하는 낯선 타자처럼 완고할 때가 있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마음들, 그리고 장벽들… 시인의 일정이 기록된「문」은 가정과 직장, 딸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다. 닫힌 문 앞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마저 안고 그 문을 돌아서는 쓸쓸함이 짙게 배어나온다. 프랑스 정신의학자 라캉은 ‘타자는 나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낯섬’이라고 하였다. 지식과 판단 능력이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한 프로이트도 다른 아이가 울 때 아이는 자신이 울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 기억으로 다른 아이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표정의 아이는 자신의 육체적 경험을 대응시키지 못하고 인지작용 속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물’이 된다고 한다. 타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인 동시에 여전히 낯선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층마다 마음의 문을 열고/손에 들린 무게에 짓눌리어 그 문을 나온다” 그렇다면 ‘나’는 또 ‘누구의’ 열리지 않는 문일까. 수많은 문의 무게에 짓눌려 살다가 어느 날 몸이 닫히면 이승의 모든 문은 닫히고 마는데 모두 세상을 열려고 아우성이다. 천도화 시인은 단순한「문」을 점층법을 사용해 확장시킨다. 인간의 허무하고 ‘헛된 일생’이 그 문에 다 들어있다.
도시의 여자는
아직도 간판을 내리지 못하고 늙어간다
그 산촌엔 아직도 춘자가 있고 별다방이 있다
읍내 허름한 사랑방
한때는 쎄시봉 7080 음악이 흐르는 자욱한 담배연기 속
빨간 립스틱의 마담이 찻물을 끓이던 곳
레지가 하얀 찻잔을 들고 나왔다
달걀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를
아가씨들과 마셨던 아버지
그 자리에서 딸이 쌍화차를 마신다
그땐 몰랐다
장날이면 다방에서 한나절을 머물던 아버지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어떤 별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제 마담은 늙어 별빛이 희미한데
아버지는 이곳에 없다
벚나무 아래 별다방 홀로 물들어간다
—「별다방」전문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야 뒤늦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춘자’ 와 ‘별다방’은 시인의 어머니와 그 딸인 시인에게 ‘상처’가 되는 존재이다. 장날이면 빨간 립스틱의 마담이 찻물을 끓이던 별다방에서 한나절을 머물던 아버지는 땀 흘려 지은 농사를 찻값으로 날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마담은 늙어 별빛이 희미하고 별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이곳에 없다. 딸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시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다. 이해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장치로 인용되는 해석학적 순환은 전체와 부분의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전체가 부분을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동시에 부분은 전체의 의미를 선취하는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에 의하면 우리는 과거를 오로지 현재로부터 이해할 수 있으며, 반대로 현재는 오로지 과거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흘러간 후에야 이해되는 것이고 과거를 거친 현재는 과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춘자’와 ‘별다방’은 흘러간 과거속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중인 ‘현실의 세계’는 벚나무 아래 별다방 홀로 물들어간다. 이 순환구조가 보여주는 것은 이해는 결코 끝을 향한 ‘순차적인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과거 속의 ‘나’를 또는 ‘당신’을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 흘러간 것들이 그리운 것은 이런 순환구조 때문이 아닐까. 아래 예시「토방구리」에는 또 다른 그리움이 살고 있다.
엄마의 골무에서 옥양목 냄새가 난다
화로엔 불돌과 인두와 부젓가락이 있었다
광목과 한지로 몇 겹을 배접하여 만든 작은 골무
명주실에 줄줄이 꿰어온 골무꽃 토방구리*는
이제 시간의 축으로 기울고 있다
처녀 때 비단에 명주실로 수를 놓은 흔적
빛바래고 삭아내려도
바늘귀에 찔린 고통을 손끝으로 감싸던 엄마
무명치마 두르고 엄마가 목단 수를 놓은 60년 묵은 저 횃댓보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꿰어
여러 겹 덧대어 투박하지만 다섯 자식 옷을 만들고
속울음 삼키던 매듭만큼
울퉁불퉁 손마디에 집을 지었다
마디마디 관절이 휘어진 거친 손
엄마의 토방구리엔
도자기 소가죽 함석 골무가 모여 앉아있다
—「토방구리」전문
‘반짇고리’의 방언인 ‘토방구리’에는 어머니가 쓰시던 골무가 모여 있다. 어머니의 젊음은 60년 구년묵이 횃댓보의 퇴색된 시간만큼 마디마디 휘어졌다. 날카로운 바늘 끝을 막아내는 골무처럼 어머니는 자식들의 골무였을 것이다. 바느질할 때 바늘을 눌러 밀거나 손끝이 찔리는 것을 막으려고 둘째손가락 끝에 끼우는 골무는 조선 후기 작품 ‘규중칠우쟁론기’에서 감투할미로 묘사될 만큼 침선의 필수품이었다. 바늘, 실, 골무, 가위, 자. 인두, 다리미 중 가장 총애를 받았던 것은 단연 골무였다. 혼기가 찬 처녀는 화려하고 다양한 문양을 새긴 골무를 백 개나 만들어 혼수품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당시 여성은 사회생활과는 격리된 제한된 공간에 갇혀 바느질과 자수로 ‘정신적인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손바느질이 줄어들면서 골무는 기능성보다는 화려한 공예품으로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중국에서는 약 4,500년 전부터 명주가 생산되어 바느질에 필요한 골무가 발명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분에서 발견된 은제(銀製)골무가 BC 1세기에 낙랑에서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골무의 역사’는 여인들의 내밀한 ‘규방 역사’가 아닌가. 바르트는 보들레르의 작품은 인간 보들레르의 실패이며, 고흐의 작품은 그의 광기이며, 차이콥스키의 작품은 그의 악덕이라고 예를 들기도 했다. 시에 있어 이미지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요소이듯이 고달픈 한 여인의 생을 ‘골무’의 이미지로 압축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토방구리’엔 옥양목 냄새가 밴 젊은 어머니와 늙은 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다. 시인의 기억 속에 잠재된 ‘그리움’이라는 이미지와 흔적들은 대부분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발견된다.
호숫가 찻집에 들어서니
따뜻한 가슴 열어주는 그곳
물소리 졸졸 흐르는 정원엔 라일락 향기가 먼저 와 있다
손때 묻은 항아리들
오래 묵은 기억을 안고 곳곳에 소품으로 자리잡았다
봄을 밀고 나온 꽃들이 계절을 알려준다
도시를 떠나온 햇살이
상큼한 훈풍에 가슴을 말린다
휘날리는 벚꽃 그늘을 밟고 여기까지 왔다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날
풍경 넘치는 찻집 창가에 앉으니
물왕리 호수가 앞자리에 먼저 와 앉았다
헤이즐넛 향기로 빈 가슴을 채운다
노을이 머무는 물빛 그림자 호수엔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는 풍경
성급하게 피어난 꽃들은, 바람으로 돌아가고
꽃향기가 물에 취한 날
저물녘에 바람이 쓸쓸히 진다
이곳에서 돌아갈 저 도시를 바라본다
—「물왕리 저편」전문
모처럼 도시를 떠나 차 한 잔을 즐기는 시간은 시인에게 바쁜 일상에 ‘쉼표’ 같은 시간이다. 함께 따라온 햇살도 상큼한 훈풍에 가슴을 말린다. 잠시 카페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이 누구에게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쫓기듯 바쁘게 살아야 하는 시인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들고 온 해결해야할 난해한 문제까지도 내려놓은 짧은 여유가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니… 노을이 머무는 물빛 그림자 호수엔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고 있다. 여유자적 하는 그들의 모습에 부러움의 시선이 담겨있다. 사소한 것에서 발견한 조그만 기쁨은 헤이즐넛 향기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물녘에 바람이 쓸쓸히 지고 있다. 전쟁터 같은 도시로 곧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중이다.「재미학 콘서트」의 저자 손대현 교수는 “근면이 미래 이익이라면 게으름은 현재 이익이고 일이 인간의 것이라면 여유자적은 신이 내린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목표는 일이 아닌 여유”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작은 여유 한번 제대로 가지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인식 구조 안에 이미 길들여져 있다. 소수자집단은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가진 지배집단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다. 시인도 그 소수자집단의 일원이다. 소수자의 사회적 역할은 ‘진자운동’을 하는 추처럼 개인의 역할을 변화시키기 힘들다. 사람 하나하나를 모두 포괄하는 사회집단에서 개인은 고립된 소외에 노출되고 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추락하기도 한다.「물왕리 저편」은 이곳이 아닌 생존경쟁이 치열한 저편이다. 잠시 도시의 밖에서 바라본 풍경은 저물어 바람에 쓸쓸히 지고 있다. 사회 구성체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기에 통제하는 힘(이성)과 분출하려는 힘(감성) 사이에서 시인은 번민한다. 천도화 시인은 빼어난 감성으로 이 시대의 ‘보통사람들’의 아픔을 소묘하듯 그리고 있다. 리리시즘이 강한 천도화의 시편들은 ‘미적 경험’을 확장 또는 유지하는 ‘미적 태도’로 발전한다. 일상적 삶에서 다른 ‘미적 세계’로 몰입하고 현실을 다른 차원의 삶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시인에게 탈출구는 ‘시 쓰기’가 아닐까. 치열한 현대인의 ‘삶’을 치밀하게 조명한 시집「물왕리 저편」은, 결국 우리 모두의 ‘저편’인 것이다.
천도화 시인
강원도 삼척 출생
2008년 <한국작가> 신인상
시집 『2010 내안의 그리움』『여정』『속눈썹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