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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장으로는 구분이 쉬운 편이다. 타치는 우선 칼집부터가 금속부품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2개의 패용장치(아시카나모노:足金物)를 통해 바로 구분할 수 있다. 칼집 끝과 입구를 보강하는 코지리(小尻)와 구치가네(口金)이 붙어있고, 칼집 중간에는 칼집 중간을 보강하는 금속 링인 세메가네가 있다. 일단 척 봐서 금속부품이 많은 것이 특징. 패용장치가 없고 카타나 칼집처럼 쿠리카타(栗形)가 붙어 있어도 타치 칼집 특유의 장식들은 그대로이며, 이런 경우 한다치(半太刀)의 칼집인 경우이다.
그에 비해 우치가타나의 칼집은 이러한 금속 장식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수수하게 단색으로 색칠을 한다. 물론 에도시대에 들어서 화려하게 색칠하고 꾸미지만, 금속 부품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적다는 것과, 패용 장치의 유무로 단숨에 구분이 된다. 코지리와 구치가네를 금속으로 쓰는 경우도 있으나 그 화려함이나 크기가 타치에 비해 훨씬 작고 수수한 것으로 구분 가능. 대부분은 물소뿔을 사용하여 칼집 입구와 끝을 보강하며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도 잘 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타치가 정규 무장의 과시성 강한 기병도였다면, 우치가타나는 도보병이 사용한 수수한 도검이었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칼자루에서도 큰 차이가 나는데, 타치의 경우 칼자루 끝에는 크고 화려한 가부토가네(胄金)를 사용하고, 쯔바(鍔)의 경우 코가이&코즈카를 통과시키는 구멍이 없으며[9]셋빠(切羽)[10]도 장식을 위해 여러 장씩 끼우는 경우도 많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반면에 우치카타나는 코가이&코즈카 구멍이 쯔바에 존재하고, 크고 화려한 가부토가네가 아니라 일종의 뚜껑처럼 칼자루 끝을 덮는 카시라(頭)를 사용한다. 셋빠도 앞뒤 한장씩만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 타치와 비교하면 그 수수함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칼집에 묶이는 끈은 사게오(下げ緒)라고 하며, 원래는 타치의 패용장치의 가죽과 연결되어 풀어서 허리띠처럼 묶는 방식으로 장착하던 일종의 소드벨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치가타나에는 패용 장치가 없어서 원래의 역할은 하지 못하나, 관례상 묶어놓고 있다. 이 사게오의 역할에 대해 국내에서는 칼을 차고 풀어 허리띠에 묶는다던가, 혹은 일본옷의 소매를 정리하기 위해 묶는 것 등을 이유로 들지만, 사실은 우치가타나에서는 그냥 다용도 끈에 지나지 않으며, 어디에 쓰던 자기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독특한 묶기법들이 존재하여 보기에 매우 멋이 있는데, 원래는 필요시 언제라도 쓰기 위해 빨리 풀기 위한 요령이었지만 점차 그 묶인 모양새에 신경을 쓰면서 실용성보다는 외관에 더욱 치중하게 된 경향이 있다.
[1] 일본의 독특한 전쟁이야기 기록. 소설과 역사서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들도 많지만 대부분 실제 역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이야기 형식의 역사 서술을 하는 논픽션 스토리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전쟁문화나 군사발달, 역사연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종류.
[2]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한 1568년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되는 1603년에 이르는 기간. 소규모의 영주가 난립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른바 천하인(天下人)이라 불리는 일본을 통치하는 권력자가 등장했으며,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군사적 잔재가 사라진 시대이기도 하다.
[3] 코시라에(存え)란 도검의 외장(外裝)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칼날을 제외한 칼집, 손잡이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디자인을 코시라에라고 한다. 혹은 도장구(刀裝具)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외장부품 그 자체를 지칭하는 의미.
[4] 물론 조금이라도 긴 것이 칼싸움에 유리하고, 큰 무기를 갖고 싶은 평민들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날길이 규정인 2척(60.6cm)에 아슬아슬하게 근접하는 1척 9촌 9분(59.9cm정도)의 날길이를 가진 것을 쓰기도 했다. 이런 걸 오오와키자시라고 부르며, 여행자, 상인, 야쿠자 등이 주로 소지했다고 한다.
[5] 칼의 무게가 귀찮은 무사들이 칼날을 빼버리고 가볍게 끼우고 다니려는 생각에서 등장한 것. 그러나 실제로는 가난한 무사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칼날을 팔아 생활비에 충당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에도시대에 무사들이 결투를 벌이면 양쪽 다 처벌하였으며, 해고나 할복 등 처벌이 무거웠고, 성내에서는 칼만 뽑아도 처벌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칼부림 같은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더불어 당시 무사들의 급료는 결코 많지 않았고, 고위 무사라도 가신단을 편성하는 것이 의무였기 때문에 유지비가 많이 들어 빠듯하기는 마찬가지였을 정도인지라 하위 무사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는 일상이었다.
[6] 죠슈번군은 영국식, 막부군은 프랑스식 보병조전을 개시하여 알려진 바와는 달리 양측 모두 최신예 유럽식 군비를 갖추고 있었다. 막부군의 경우 당연히 장교는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함께 패용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죠슈측의 저격수가 카타나와 문장이 새겨진 철모를 보고 족족 저격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막부 장교들은 카타나를 빼고 병사들처럼 와키자시만 패용하게 됐다. 그리고 카타나도 별로 쓸데도 없어서, 날길이가 비교적 짧은 돗페이(突兵) 코시라에가 이 시대에 제법 쓰였다.
[7] 그렇다고는 해도 날길이 69cm에 하바키를 더한 칼날부위의 전체길이는 72cm정도로 타치와 거의 비슷하다.
[8] 하몬의 종류, 칼날의 세부적인 디테일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어느정도의 구분이 가능하지만, 불가능한 경우도 없지는 않다.
[9] 코가이는 귀후비개와 스틱이 일체화된 것이고, 코즈카는 작은 칼날을 가진 것으로 커터칼 같은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일상도구로써, 카타나를 일상적으로 패용하는 에도시대 무사들이 끼우고 다니던 것이다. 둘다 칼집에 별도로 판 구멍에 수납되고, 쯔바의 두 구멍 사이로 머리가 빼꼼히 나온다. 즉 에도시대의 특징이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에 제조된 타치들은 이런 게 없다.
[10] 칼자루 앞쪽을 보강하는 후치와 쯔바 사이에 끼우는 일종의 와샤 같은 것. 칼자루의 밀어주는 힘을 셋빠를 통해 쯔바에 넓게 분산시켜 고정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현대의 공업에서 쓰이는 와샤(Washer)와 같은 역할을 한다.